• 국민투표? 진보정치가 도박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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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년 09월 22일 07:33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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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미FTA를 둘러싼 다양한 논의들이 이루어지고 있지만, 그것을 추진하고자 하는 세력과 반대하는 세력 사이의 팽팽한 긴장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을 비롯한 집권세력 등 찬성론자들은 세계화가 대세인 상황에서 한미FTA는 회피할 수 없는 길이기 때문에 그것을 반대하는 것은 무의미하며 그것을 ‘효과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는 것이 관건임을 반복하여 역설하고 있다.

    정치적 영향력을 지니고 있는 전직대통령 DJ도 여기에 가세하여 힘을 실어주고 있다. DJ의 발언이라면 쌍심지를 세우는 극우보수세력도 FTA와 관련된 것에 관해서는 아무런 이의제기를 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들 모두는 추진타당성을 뒷받침하는 나름의 이런저런 이유를 댄 뒤에 “우리 국민들의 성숙한 역량을 믿는다.”라는 말을 빼 놓지 않는다.

    DJ도 나서서 힘 실어준 한미FTA 협상

    이것이 시사하는 것은 무엇일까. 한미FTA라는 사안만큼 ‘진보와 보수’의 경계를 분명히 보여주는 것도 드물다. 물론 집권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 사이에 작은 정책적 차이가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존재를 규정하는 핵심문제들에 대해서만큼은 사실상의 ‘대연정’을 하며 한 치의 물러섬도 없다.

    뜬금없는 소리 같지만, 이것이 ‘사회주의 선동’에 대해서는 엄한 처벌을 내리면서도 태국의 쿠데타 소식을 접한 이 땅 극우세력들의 ‘쿠데타 선동 발언과 행태들’에 대해서는 왜 그렇게 관용을 보이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의미 있는 답이 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안과 밖이 없는 글로벌 신자유주의체제’를 거부하고 그에 대한 대안을 이야기하는 것은 그 내용이 무엇인지 도무지 종잡을 수 없기에 그들은 항상 불안한 것이다. 불안하니 잡아가둘 수밖에. 이런 맥락에서 그들이 ‘국민의 역량을 믿는다’라고 하는 것은 아마도 그들의 ‘반복되는 일상의 삶을 믿는다’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불평과 비판은 하되 설정해 놓은 경계는 넘지 말라는 것이다. 물론 그 경계의 핵심에는 자본과 시장의 지배라는 견고한 벽이 놓여져 있다. 이 지점에 이르면 일상의 다른 한 면에서 여전히 희미하게 존재하는,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너무도 능멸을 받아 이제는 지쳐버린 듯한 ‘사회주의’, ‘꼬뮨주의’, ‘민주주의’를 위한 모색과 실천은 생명력을 잃고 창백해진다.

    한미FTA ‘대연정’한 보수 정당

    그렇다면 글로벌 신자유주의, 한미FTA 문제 등에 관해서만큼은 ‘대연정’을 구사해온 보수정치세력들에 대해 진보정치세력은 지금 무엇을 보여주고 있는가. 진보정치세력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의미 있는 활동을 펼치고 있다.

    진보정치세력은 한미FTA저지범국민운동본부(범국본)를 중심으로 FTA의 문제점을 대중적으로 공론화시켜 왔으며 이 과정에서 ‘새로운 연대운동’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그 결과 항상 애매모호한 태도를 보이던 일부 주요 시민운동세력들조차 ‘반대’의 대열에 동참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또한 한미FTA의 문제점에 대한 대중들의 비판적 관심과 인식 또한 그 어느 때보다 고조되고 있다. 물론 그 ‘반대’의 내용과 수준에서는 여전히 양적, 질적인 차이와 긴장이 존재하지만 말이다.

    하지만 대중이 무언가 자신들이 처해 있는 사회관계들을 뒤돌아보며 발언하기 시작하는 이 때 기이한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반FTA 홍보, 교육, 토론해야 할 때 국민투표라니

       
      ▲ 민주노동당 FTA 국민투표서명운동 발대식

    가능한 한 지역공대위를 꾸려 각 지역의 대중들에게 한미FTA가 가져올 실상을 알리고 그것이 다양한 영역의 사회관계들을 어떻게 파편화시키고 분절시키는지, 이른바 ‘거대담론’으로 치부되는 이 사안이 지역 대중의 일상의 삶, 그 ‘미시적 공간’과 얼마나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는지, 그것이 ‘풀뿌리 민주주의’를 얼마나 위태롭게 하는지에 대해 더욱 체계적, 조직적으로 홍보, 교육, 토론하며 알려야 할 시기에 FTA 문제를 국민투표에 붙이자는 발상이 솔솔 피어오르더니 일부에서 공론화시키기 시작한 것이다.

    제도 내 진보정당인 민주노동당은 아예 국민투표서명운동발대식까지 마치고 내년 3월까지 500만 명을 목표로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국민투표라? 역시 이들도 또 다른 의미에서 ‘국민의 역량’을 믿고 있기 때문인가.

    그런데 이 와중에 이런저런 우려의 반응도 한마디씩 들린다. 만일 국민투표에서 이기지 못하면 어떻게 되는 거지. 그래도 국민투표를 통해 서로 승복하는 아름다운 모습을 만들었으니 이후 민주주의 발전을 위해 의미 있는 학습경험을 마련했다고 자위하면서 그냥 그 흐름에 쫒아 가면 되나.

    어!? 이건 어디서 많이 듣던 너무 낯익은 소린데, 그래 87년 이후 민주화이행과정에서 신물 나게 들어온 소리네, 그런데도 왜 이 사회의 민주주의는 여전히 이 모양, 이 꼴이지. 그건 그렇고 국민투표 결과에 정말 모두 승복할까. 혹시 누군가 승복하지 않으면 또 어떻게 하지. 승복을 해도 그 긴장과 모순이 과연 해소될 수 있을까. 아마도 찬성으로 통과되면 사회적 약자들의 고통은 배가되고 회피할 수없을 텐데.

    아~, 그들에게 선거민주주의, 합법성을 내세우며 또 얼마나 고통스러운 탄압이 가해질까. 왜 갑자기 합법적으로 투쟁한 대우부평자동차 노동자들에 대해 ‘국민의 정부’가 행사한 무차별적인 국가폭력이 주마등처럼 떠오르며 지나가지, 포항에서 건설노동자와 시민들에게 가해진 ‘참여정부’의 폭력행사는 어떻고.

    새로운 것을 이야기하고 실험하는 것에 익숙한 지식인들이야 그 속성상 그렇다손 치더라도, ‘책임 있는 진보정당’인 민주노동당은 그렇게 될 때, 과연 어떤 성격과 위상을 지닌 채 존립할 수 있을까.

    국민투표는 진보세력에 어울리지 않는 정치적 선택  

    그렇다면 이처럼 여러 변수가 맞물려 있는 국민투표를 그것도 진보와 민주주의를 모토로 삼는 정치세력이 앞장서서 요구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한미FTA에 대한 현 정권의 주관적 낙관주의가 얼마나 답답했으면 아예 국민투표로 승부를 내자는 제안을 했을까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 제안자가 진보정당이라는 점에서 그냥 넘겨버리기에는 무언가 찜찜하다.

    이미 조직적으로 그것을 결정하고 실천하는 단계에 이른 만큼 이 질문이 봉창 두드리는 격이 될 수도 있지만, 그래도 그것이 어떻게 결정되었는지 알지 못한다는 것을 핑계 삼아 다시 한 번 의문을 던지는 것이 뭐 그리 큰 문제가 될까. 최소한 ‘복습 효과’는 될 터이니 말이다.

    우선 기우에서 말 하건데, 국민투표 그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모든 가능성은 열려 있다.’ 하지만 지금 국민투표를 주장하는 것은 비대칭적이고 억압적인 사회관계들의 해소, 극복을 목표로 하는 진보정치세력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정치적 행보이다.

    무엇보다 선거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고 그것을 통해 민주주의를 진전시킬 수 있다고 믿는 발상은 항상 조심스럽게 검토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민주주의는 그 자체가 타자를 설정하고 그것을 배제, 억압함으로써 끊임없이 자신을 구성하는 ‘역사적 산물’이기 때문이다.

    87년 6월항쟁 이후 제도화된 선거가 수차례 작동되고 그에 따라 ‘합법정부와 의회’가 구성되어 민주주의로의 이행, 공고화가 이루어졌다고 평가됨에도 불구하고 지금 여전히 ‘민주주의의 빈곤’이 운위되고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심지어 정통민주세력을 자임하는 집권 자유주의 정체세력의 입에서조차 ‘평화, 민주주의의 위기’라는 말이 공공연히 나오고 있는 현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그리고 지금 민주노동당이, 급진 진보정치세력이 제도 안에서, 혹은 거리에서 투쟁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 그것이 바로 ‘그 어떤 민주주의’ 때문은 아닌가.

    다수결 이름으로 사회적 약자 배제하는 거 아닌가

    그렇다면 지금 진보정치세력이 해야 할 것은 어떤 제도적 기제를 통해 합의를 끌어내는 것에 역량을 집중하는 것이 아니다. 무엇보다 지금 요구되는 것은 한국사회를 지배하는 ‘그 어떤 민주주의’가 누구를, 무엇을 억압, 배제하고 있으며 그 관계들을 고정화시키기 위해 어떤 경계를 세워놓고 있는가를 예각적으로 논의하고 그것을 넘기 위해 실천하는 것이다.

    이 지점에 주목할 때만이 민주주의는 기존 법, 제도, 사회관계들로부터 배제, 억압된 이들을 위한 기제로서 그 고유의 존재 의미를 확보, 갱신하게 된다. 진보정당인 민주노동당이 한미FTA반대운동을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무엇 때문에 대중은 거리에서, 땀과 피를 흘리면서 서로 어깨를 걸고 저토록 저항하며 반대를 외치는가. 그것은 자본과 시장이 지배하는 글로벌 신자유주의 시대에 기존의 법, 제도의 소통구조 속에서 배제된 채 억압받는 비정규직노동자, 농민, 사회적인 약자들의 현재, 미래의 삶을 방어하기 위한, 더욱 더 분절되고 파편화된 사회관계로 치닫는 이 모진 상황을 저지하기 위한 몸부림이 아니던가.

    만일 이것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라면, 어떻게 이 문제를 국민투표를 통해 정리하자는 발상이, 그것도 진보정당의 당면한 실천방침이 될 수 있는가. 진정 자본과 노동의 ‘윈윈-게임’을 하기 위한 것인가. 이것이 과연 ‘직접민주주의의 실천’인지 여부를 둘러싼 ‘아카데믹한 논의’는 접어두더라도, 그 요구가 국민이라는 이름 아래 다수결의 힘으로 이들 사회적 약자들을 배제하는 또 하나의 ‘그 어떤 민주적 합의’에 동의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에 다름 아니라는 사실을 뼈를 깎는 자세로 숙고해 보았는가.

    민주노총 뺀 노사정합의와 다를 바 없어

    그렇다면 이것이 최근 이루어진 민주노총을 뺀 ‘노사정합의’와 본질적으로 무엇이 다른가. 이러한 정치적 행보는 고통 받고 억압당하는 비정규직 노동자, 농민, 사회적 약자의 삶을 담보로 하는 정치게임이라는 점에서 너무도 심각한 문제점을 안고 있는 것이다.

    자본과 시장을 통제해 공공성을 강화시켜야 할 기제로 작동해야 할 정치가, 일부 진보적인 인사들에 의해서조차 ‘정치시장’으로 불리는 이 아이러니한 시대에 살고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진보정치가 최소한 약자의 삶을 판돈으로 하는 도박판을 벌리라고 먼저 요구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이 지점에 이르면 또 너무나 익숙한 소리들이 들려온다. 그러면 맨 날 비판만 하지 말고 대안을 말해 보라고. 물론 그 대안이 구체적인 정책을 요구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적절하지 않은 질문이다. 그것은 이른바 국민의 세금, 특히 비정규직 노동자들, 농민들, 사회적 소수자들의 세금만큼은 한 치의 오차 없이 거두고 그것을 댓가로 국민의 안녕과 번영을 지키는 것이 자신의 핵심역할이라고 누누이, 그것도 귀가 따갑도록 강변해온 국가권력이 대답해야 할 문제이기 때이다.

    그것은 이 사회에 상존하는 상이한 비판의 목소리를 수렴, 조정해 구체적 청사진으로 제시해야 할 의무가 있는 ‘대~~한~민국이라는 국민국가’가 해야 할 일이지 비판적 지식인, 대중이 우선해야 할 몫은 아니다. 그런데 지금 그 국가권력은 이를 방기하고 투쟁의 한쪽 당사자가 되어 글로벌 자본, ‘제국’과 호흡을 맞추면서 저 반대편에 고압적으로 서 있다.

    민주노동당 독자적 노력 의미 없었던 것으로 될 수도

       
     

    이런 맥락에서 보면 지금 이 사회의 깨어 있는 대중, 지식인들은 국가재정에 가장 기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의미 있는 비판과 요구를 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누구보다도 양식 있는 사회구성원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다.

    오히려 이런 전제 위에서 반대로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러면 국민투표 요구가 진보정당의 ‘대안’인가. 진보정당이 내세우는 당면의 핵심 요구라면, 최소한 그것이 대중들에게 진보정당과 보수정당 사이의 차이를 드러내주는 준거는 되어야 할 터인데, 과연 국민투표 요구는 어떤 민주적이고 진보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가. 그것이 민주노동당과 그들 보수정치세력과의 사이에 어떤 정치적 차별성을 부각시켜주고 있는가.

    안타깝게도 지금 그 요구는 "노무현 대통령, 이른바 국민의 대통령으로서 이 제안을 받아들여서 통 큰 사람 한번 되어보시오"라고 간청 내지 압력을 행사하는 것 이상의 그 무엇도 드러내 주지 않는다. 그 간청, 압력이 무엇인가 하고 있다는 자족감을 줄지는 몰라도 오히려 그것이 그 동안 민주노동당이 독자적으로 전개한 활동, 혹은 범국본에 참여하며 수행해온 연대활동의 의미를 무화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왜 모르는가.

    지금 대중들은 고통스럽지만, FTA반대투쟁을 통해 다양한 영역에서 민주주의를 실천하고 있다. 그들은 거리에서, 강연장에서, 인터넷에서, 해외에서 자신들이 직면하고 있거나 직면하게 될 고통을 호소하고, 자신들의 운명은 스스로 결정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기존 법, 제도가 봉쇄하여 말할 수 없는 그들이 자신의 목소리(voice)를 내고 연대(solidarity)의 깃발을 흔들고 있는 것이다. 이것만큼 민주주의에 부합되는 것이 어디에 있는가. 그렇다면 진보정치세력들이, 아니 민주노동당이 지금 해야 할 핵심적인 역할은 그들이 더욱 쉽게, 다양한 수단으로, 다양한 영역에서 자신들의 이야기를 말 할 수 있도록 지원, 지지하고 연대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이와는 반대의 방향으로 가면서, 그것을 알지 못하니 참으로 안타깝다. 당내에서 사회주의, 꼬뮨주의, 민주주의를 논의하면 무엇을 하는가.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이 투쟁이 그것들에 더 근접할 수 있는지 여부를 결정하는 하나의 중요한 실천적 계기라는 점을 자기문제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으니 말이다.

    정체성 허물어지는 것 모르고

    이처럼 자기 스스로의 정체성이 허물어지고 있는 것도 모르면서, 당 안에 우익이 더 필요하다고 역설하니 참으로 난망할 뿐이다. 과연 그 오른쪽을 향한 여행의 끝은 어디인가. 어디 이 문제뿐인가. 제도를 매개로 한 문제의 해결방식은 진보정치세력들이 우선적으로 취해야 할 방안이 아니다. 그것은 보수정치세력들의 즐겨하는 정치방식이다. 그것도 진보 정치세력의 대중적 영향력이 강하여 그들을 압박하게 될 때, 그것을 카드로 뽑아들지 여부를 고민하는 합법의 최종 카드인 것이다.

    그런데 왜? 그것도 범국본에 의해 한미FTA반대를 위한 투쟁과 서명이 대중적 동력을 받아 진행되고 있는 상황에서 제도 내 진지를 구축하고 있는 진보정당이 이런 정치적 행태를 서둘러 내보이는 것인가. 오히려 지금은 지역위원회를 중심으로 가능한 한 대중들과의 접촉면을 넓히면서 범국본의 취약 부분을 보완, 지지하여 이 투쟁을 한 단계 더 끌어올리는데 기여하는 것이 민주노동당이 해야 할, 혹은 민주노동당에 요구되고 있는 역할이 아닌가.

    그것이 한미FTA반대투쟁의 과정에서 민주노동당의 진보성, 민주성을 내용적으로 담보하고 고양시키는 지름길이 아닌가. 이러한 행보가 그 동안 진보정치세력 안에서 정치사업부재를 드러낸 민주노동당에 새로운 정치적 기운을 불어 넣는 계가가 되는 것은 아닌가. 지금 ‘국민투표라는 이벤트성 사업’에 당의 명운을 거는 것이 과연 올바른 판단이며 실천인가. 그래도 정 그렇게 하고 싶다면, 그 카드는 나중에 꺼내도 늦지 않다. 아직은 때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미FTA반대를 국민투표에 부치자고 요구한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모든 정치세력들이 운위하듯 그것이 ‘전 국민과 관련된 중대한 사안’이기 때문인가. 그 긴장과 갈등이 지속되면 ‘국가적 손실’이 더욱 커지기 때문인가.

    아니면 그러한 상황을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어떻게든 결판이 나길 바라는, 혹은 의제의 선점효과를 통해 정치적 이득을 취하고자 하는 소시민적인 주관적 판단의 발로 때문은 아닌가.

    적대의 전선 선명하게 드러내는 게 진보정치의 출발

    하지만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 있다. 어느 사람들에게는 그것의 관철여부가 자신의 삶에 직접적이지 않은 반면, 그래서 그것과 무관하게 여유로운 사람들이 있는 반면, 어느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곧 자신의 삶인 경우가 있다. 그렇기에 뒤로 물러설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그들 모두는 다 이 나라의 ‘국민’이다. 그렇다면 이 긴장과 갈등이 그 ‘국민’의 내용적 실체를 좀 더 분명하게 드러내 보일 때까지 참고 투쟁하는 인내심을 발휘하는 것이 진보정치세력의 덕목 아닌가. 그 차이와 적대의 지점을 쉬쉬하며 덮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 선명히 드러내 보이는 것이 진보정치의 출발 아니던가.

    진정 ‘국민의 역량’을 믿기에, 그래서 잘될 것이라고 낙관하기에 그 요구를 주장하는가. 그것이 관철되면 지금도 권력과 부를 주체할 수 없어 비명을 지르는 어떤 부류들은 그 기쁨을 감추기 위한 표정관리에 오히려 힘들어하겠지만, 어느 사람들은 죽음과도 같은 삶의 나락으로 추락한다.

    그 고통을 누가 짊어 질 것인가. 진정 ‘역량 있는 국민’이 골고루 나누어질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그리고 그런 주관적 판단에 근거해 ‘국민투표’를 요구할 것인가. 그 역량을 믿고 판을 한번 벌려 볼 것인가. 그것이 보수정치세력들이 말하는 ‘국민의 역량’과 무엇이 다른가.

    지금 당신들의 그 어떤 정치적 욕망이 충족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고통 받는 대중이 말하고 외치도록 하여 그들을 살려야 하지 않는가. 그래서 진보정치가 무엇인지 그 전형을 보여주고 미래를 위한 숨통을 그들 속에 연결시켜 놓아야 하지 않는가. 바로 이 모든 것들이 당신들이 그렇게 애타게 바라는 국민투표를 위한 더 유리한 정치적 지형을 조성하기 위해서라도 절대적으로 요구되는 진보정치의 덕목 아닌가. 그런데 왜 이리도 조급하고 얕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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