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필수유지업무제도와 다단계 하청
    [한국 항공산업의 구조적 문제④] 질 낮은 일자리들
        2020년 06월 12일 09:53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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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항공산업의 구조적 문제③] 낮은 수익성, 상존하는 유동성 위기

    ‘땅콩’: 콩과에 속한 한해살이풀, 또는 그것의 열매.

    2014년 12월 5일, 뉴욕발 인천행 대한항공 비행기에서 조현아 당시 대한항공 부사장이 땅콩(정확히는 ‘마카다미아’) 서빙을 꼬투리로 승무원들에게 폭언과 폭행을 가하고, 출발 단계의 비행기를 회항시켜 사무장을 내리게 했다. ‘땅콩 회항’으로 불린 이 사건은 nut-rage(땅콩 분노)라는 명칭으로 외신에도 널리 보도됐고, 땅콩은 갑질의 대명사가 됐다.

    각 잡힌 새하얀 모자, 깔끔한 유니폼, 유창한 외국어, 해외 여러 나라를 오가는 자유. 우리가 흔히 비행기나 공항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파일럿과 승무원에 대한 대표적인 이미지다. 그런데 이런 이미지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갑질 사건들이 항공노동자들의 현실을 다시 보게 했다.

    공익을 위한 권리 제한?

    땅콩회항 사건 이후 조현아 전 부사장뿐 아니라 대한항공 오너 일가의 온갖 갑질 행태가 드러났고, 대한항공이 ‘Korean Air’라는 명칭을 사용하지 못하게 해달라는 청와대 청원까지 진행됐다. (이들의 행태가 다른 갑질 사건들과 비교해도 그 정도가 지나친 건 사실이지만) 이는 그저 당사자들의 인성 문제만이 아니다. 대한항공 내부에는 오너 일가의 이런 폭주를 제어할 수단이 없기 때문이다.

    대한항공조종사노조는 2015년과 2016년 임금협상을 2018년에 들어서야 마무리할 수 있었다. 600일에 가까운 쟁의상태였으나 당시 대한항공의 비행에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 필수유지업무라는 이유로 사실상 쟁의권한이 무력화되었기 때문이다.

    필수유지업무제도 개정 촉구 2019년 기자회견(박스 안은 지상조업 모습)

    항공운송업에는 필수유지업무제도가 광범위하게 적용된다. 노조법은 ‘그 업무가 정지되거나 폐지되는 경우 공중의 생명·건강 또는 신체의 안전이나 공중의 일상생활을 현저히 위태롭게 하는 업무’를 필수유지업무라 하여 쟁의행위를 제한하고 있다. 항공운송업의 업무 대부분은 필수유지업무에 해당하고, 파업을 하더라도 그 업무를 정해진 비율(대부분 70~80% 수준)만큼 유지해야 한다. 결국 파업의 효과는 거의 없다. 오히려 회사는 노조의 파업을 핑계로 비수익노선 운항을 줄여 이득을 보기까지 한다. 대항권이 무력화되니 노조는 협상력을 갖지 못하고, 사용자를 제어할 수도 없다. 때문에 이런 권리 제한은 사주 일가의 폭주를 막지 못할뿐 아니라 항공산업 일자리 전반의 노동조건 악화를 가져왔다.

    다단계 하청

    1대의 항공기를 운행하기 위해서는 조종(파일럿)과 객실서비스(승무원) 외에도 수많은 노동이 필요하다. 그중 ‘항공기 지상조업’이 있는데, 비행기가 착륙해서 다시 이륙할 때까지 지상에서 행해지는 모든 작업을 의미한다.

    비행기가 활주로에 내리면 지상요원들의 수신호(항공기 유도)에 따라 계류장으로 이동해 탑승교를 연결(탑승교 운영)하고 승객이 내린다. 컨베이어 벨트를 통해 화물을 내려(하기) 터미널로 옮긴다.(수하물) 이후 비행기 이륙을 위한 작업이 진행된다. 내부를 청소(기내 청소)하고, 오물수거 트럭으로 화장실도 비운다.(오물처리) 기름을 넣고(급유), 수하물과 기내식, 음용수를 싣는다.(탑재, 캐터링, 급수) 승객들이 비행기에 탈 준비(발권수속, 탑승수속)도 이때 이뤄진다. 이륙 준비가 끝나면 게이트에서 승객들의 티켓을 확인해 탑승을 시작(탑승안내)한다. 승객의 탑승이 끝나면 토잉 트랙터가 비행기를 계류장에서 출발점까지 끌고 간다.(항공기 견인) 토잉 트랙터가 분리되면 비로소 이륙할 수 있는 상태가 된다.

    항공사와 공항운영사는 비용절감을 위해 이런 업무들을 광범위하게 외주화했다. 조업사들은 계약을 따내기 위해 바닥을 향해 경쟁했다. 그러면서 항공기 지상조업은 하청에 재하청으로, 최저임금 수준의 일자리로 채워졌다. 항공산업의 성장에 따라 인원을 늘리는 것이 아니라 작업량과 노동시간을 늘렸다. 지상조업 노동자들은 비행시간에 대응한 복잡한 교대근무 속에 식사도, 휴식도 제대로 챙길 수 없었다. 항공운송업은 근로기준법 제59조에 따라 사용자가 근로자대표와 합의만 하면 연장근로, 휴게시간 축소를 제멋대로 할 수 있기 때문이다.(다단계 하청이자 쟁의권도 제한되는 노동자들과의 형식적인 합의 말이다.) 2017년 12월 13일, 지상조업사인 한국공항(주)에서 일하던 노동자가 과로에 시달리다 출근 30분만에 현장에서 쓰러져 사망하기도 했다.

    “(공항에) 들어오기 전에는 환상 같은 게 있었다. 힘들어도 커리어 쌓인다 생각했지만, 엄청나게 잠도 못 자고공항 일자리를 추천하지 않는다.” – 20대 인천공항 특수경비노동자

    우리가 공항에서 직접 대면하는 노동자들 중에는 20, 30대 청년노동자들이 많다. 작년 8월, 공공운수노조가 인천공항 청년노동자들의 노동실태를 조사해 발표했는데, 응답자들의 36.4%가 저임금을, 21.2%가 장시간 노동을 이직사유로 꼽았다. 응답자의 12%는 회사가 최저임금을 지키지 않는다고 지적했고, 14%는 건강검진조차 받지 못한다고 답했다. 이들은 공항에서 일하는 것에 대한 환상이 있었지만, 이제는 다른 이들에게 추천할 일자리가 아니라고 말한다.

    항공기 승무원부터 다양한 지상조업과 세관, 통관, 검역 등 공항서비스까지 항공산업은 수많은 노동으로 이뤄진다. 땅콩 갑질, 물컵 갑질이 없어도 비행기는 뜨지만, 이런 노동들 하나하나가 없다면 비행기는 뜨고 내릴 수 없다. 항공산업의 성장 속에 기본적인 권리도 박탈당한 채 장시간, 저임금 노동에 시달리던 항공산업의 노동자들이 코로나19 위기로 가장 먼저 내쫓기고 있다. 기간산업 지원이라는 명목으로 재벌 항공사만 살릴 것이 아니라 항공산업 전반의 일자리를 바꾸는 계기를 만들어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필자소개
    공공운수노조 정책기획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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