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포의장군 쉬샹첸(徐向前),
    산시성 사실상 장악하다
    [국공내전㊳] 쉬샹첸의 삶과 사랑
        2020년 06월 03일 10:02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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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쉬샹첸은 산시성 우타이현(五臺縣) 사람이다. 수호전에 나오는 노지심의 우타이산이 있는 고장이다. 그는 본래 이름이 ‘인춘(銀存)’으로 은을 많이 가지고 있으라는 뜻이다. 그의 할머니가 이름을 지었다고 하는데 평생 부자로 살라는 희망이 담겨 있다. 그의 부친은 한학을 공부한 수재였는데 족보에 상첸(象謙)이라고 바꿔 올렸다. ‘겸’자가 주역에 있는 64괘 중 하나로 “매우 길하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한다. 그러나 쉬샹첸은 혁명이 실패한 뒤 이름을 ‘샹첸(向前)’으로 바꿨다. 샹첸은 계속 나아간다는 뜻이다. 즉 팔로군 행진곡에 나오는 “앞으로(向前), 앞으로, 앞으로….와 같은 의미로 혁명을 향해 계속 분투하겠다는 의지를 담은 것이다. 그는 황푸군관학교 1기 졸업생으로 1927년 3월 공산당에 입당하였다. 그후 그의 목에 마오쩌둥, 주더와 같은 액수의 현상금이 걸려 있었으니 그만큼 홍군 지휘관으로 눈부신 활약을 거듭하였다.

    쉬샹첸

    그는 장정 때 홍군 4방면군 총지휘를 맡아 장궈타오와 함께 쓰촨성 쪽으로 향했다. 마오쩌둥과 주더의 1방면군과 합류한 뒤 쉬샹첸은 장궈타오와 마오쩌둥의 주도권 다툼에 휘말렸다. 병력이 압도적으로 많은 장궈타오가 공산당의 영수가 되려는 야심을 품었던 것이다. 그때 마오쩌둥은 충돌을 피해 쓰촨을 벗어나 북상하고자 하였다. 1방면군이 몰래 병력을 빼내어 북상길에 오르자 분개한 장궈타오는 마오쩌둥과 주더, 저우언라이 등 주요 지도부를 제명하고 새로운 공산당 중앙을 선언하였다.

    그때 쉬샹첸은 1방면군을 공격하라는 천창하오의 요구에 “홍군이 어떻게 홍군을 공격하느냐? 나는 절대 그럴 수 없다.”며 단호하게 거부하였다. 천창하오는 홍군 4방면군의 정치위원이었다. 군보다 당이 우선인 홍군에서는 천창하오의 요구가 우선이었던 것이다. 본래 쉬샹첸은 장궈타오와 관계가 그리 좋지 못하여 그는 여러 번 홍군 4방면군 총지휘를 사임할 의사를 내비쳤다. “중앙에 사람이 많다. 류보청 등이 총지휘를 맡았으면 좋겠다.”고 하였으나 야심 많은 장궈타오가 받아들일 수 있는 요구가 아니었다. 마오쩌둥도 쉬샹첸에게 “당신은 4방면군을 이끄는 암탉이 되어야 한다.”고 만류했다고 한다. 나중에 쉬샹첸은 쓰촨에서 주력을 잃은 뒤 4방면군 잔여대오를 이끌고 옌안에 합류하였다. 마오쩌둥의 당부를 끝내 지킨 것이다.

    쉬샹첸은 천성이 소탈하고 겸손할 뿐만 아니라 검소하였다. 그는 손재주가 뛰어나고 예술적 재능이 있어 취미도 다양했다고 한다. 그는 탄금이나 얼후 같은 악기를 잘 다루고 사진도 잘 찍었을 뿐 아니라 글씨도 잘 썼다. 산시성 희곡을 좋아했으며 산시성 음식을 먹어 천상 산시 사람이었다. 재봉질을 잘해 스스로 옷을 지어 입기도 하였다. 그는 조금도 관료의 티를 내지 않고 서민의 풍모를 가지고 있어 사람들은 그를 ‘포의장군’이라고 불렀다. 내전이 폭발하자 그는 진기로예 군구 부사령원을 맡았다가 화북군구 부사령원을 맡게 되었다. 주로 산시성에서 옌시산군을 상대하는 역할을 맡은 것이다. 그는 린펀과 진중에서 옌시산군과 크게 싸우게 된다.

    옌시산, 산시성을 모두 빼앗기고 타이위안에 고립되다

    펑더화이가 이촨, 와쯔제에서 류칸 휘하의 국군을 섬멸할 무렵 산시성에서는 쉬샹첸 휘하의 해방군이 요지 린펀(臨汾)을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린펀은 시안에서 타이위안으로 가는 중간쯤에 자리잡고 있다. 타이위안의 길목에 자리잡고 있어 이곳을 잃게 되자 타이위안이 곧바로 위협을 받게 되었다. 린펀을 빼앗긴 뒤 옌시산 휘하의 국군은 성도인 타이위안 주변으로 세력이 위축되었다. 한때 장제스와 중원을 놓고 다투었던 대군벌 옌시산은 이제 휘하에 13만 병력을 거느리고 있을 뿐이었다. 옌시산은 산하 5개군의 14개 사단 병력을 통푸(同蒲) 철도(따퉁大同-펑링두風陵渡)를 중심으로 철도연선의 도시와 소읍에 배치하였다. 옌시산은 진중(晉中)(1) 주위의 산에 촘촘한 보루망을 건설하여 수비망을 강화하였다. 그리고 13개 연대로 ‘전격병단’을 구성하여 기동작전을 하게 하였다. 옌시산은 쉬샹첸 휘하의 해방군과 결전을 벌여 빼앗긴 산시성 중남부를 회복하려 하였다.

    린펀 전투에서 쉬고 있는 쉬샹첸. 차림이 소박하다

    진중 전투에서 진격하고 있는 해방군

    때는 6월이어서 밀이 익어가는 계절이었다. 산시성 중부 지역의 밭에서 익어가는 밀은 국공 양쪽에 중요한 군량이었다. 옌시산이 기동병단을 편성한 것도 해방군이 옌시산군을 공격하려는 것도 산시성의 주도권 다툼도 있었지만 밀 수확도 중요한 목표였다. 쉬샹첸은 밀을 지키는 것은 물론 성도 타이위안을 탈취하기 발판을 만들기 위해 중앙군사위에 전투계획을 보고했다. 중앙군사위가 승인하자 쉬샹첸은 화북군구를 비롯한 4개 군구 6만명을 통일 지휘하게 되었다. 이에 맞서는 국군은 총병력 10만명으로 병력수에서는 국군이 유리했다. 그러나 기동작전을 펼치면 운동전과 매복을 장기로 하는 해방군이 유리했다.

    6월 11일 해방군은 일부 부대로 샤오이(孝義), 펀양(汾陽) 사이로 양동했다. 쉬샹첸은 일부러 민간의 도선을 징발하여 모아 들였다. 그리고 황허의 도하점인 가오양진(高陽鎭)에 대장기를 세워 주력이 황허를 건널 것처럼 위장했다. 펑더화이의 서북 야전군을 지원하러 가는 모습을 연출한 것이다. 산시성의 국군 공격부대는 가오양진의 해방군 주력이 빠졌을 것으로 판단하여 공격에 나섰다. 초전에서 해방군은 국군의 맹공에 많은 사상자를 내는 등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가오양진에 있는 해방군은 미끼였다. 쉬샹첸은 다른 부대를 우회시켜 공격하는 국군 부대를 겹겹으로 포위했다. 가오양진 공격부대는 포위 분할되어 철저하게 섬멸되었다.

    해방군 일부 부대는 또 링스(靈石)를 점령하여 옌시산군 기동병단을 끌어내었다. 옌시산군은 해방군의 교란과 저지, 매복과 퇴로차단 등 운동전의 전술에 휘말려 번번이 분할 격파되었다. 21일 펀허(汾河) 동안에서 5,000명이 포위 섬멸당한 것을 비롯하여 23일에는 핑야오(平遙)에서 2개 사단이 분할 섬멸당했다. 해방군은 7월 3일까지 철도를 파괴하며 국군의 이동을 막는 한편 도로의 거점을 점령하여 옌시산군의 퇴로를 끊었다. 7월 6일, 옌시산군 주력이 동서 10킬로, 남북 5킬로 되는 좁은 지역에서 완전히 포위되었다. 국군은 16일 새벽까지 결사적으로 포위망을 뚫으려 돌격했으나 해방군은 한번 잡은 고기를 놓아주려 하지 않았다.

    총공격을 시작한 해방군은 옌시산군 지휘관인 자오청수(趙承綏)를 포로로 잡은 것을 비롯하여 3만명을 섬멸하였다. 그후 해방군은 타이위안 남쪽지역 각지에서 후퇴하는 국군을 맹추격하여 타이위안으로 탈출한 3만명을 제외한 총 10만명을 섬멸하는 대승을 거두었다. 그중 포로로 잡힌 사람이 8만여명, 사살이나 부상자가 2만명이었다. 산시성의 국군은 성도인 타이위안으로 몰렸으며 그밖의 지역은 모두 해방군에 내주게 되었다. 해방군은 타이위안 성을 겹겹이 포위하여 고립시켰다. 이제 ‘산시왕’이으로 군림하던 옌시산의 운명은 바람 앞의 촛불처럼 가물거리게 되었다. 쉬샹첸은 6만명의 병력으로 10만명의 국군을 대파하여 마오쩌둥의 찬사를 들었다. 마오쩌둥은 훗날 쉬샹첸에게 “6만 병력으로 한 달 만에 10만명을 섬멸했으니 당신은 도대체 어떻게 싸운 것이오? 한번 설명을 해보시오.”하고 감탄했던 것이다.

    이로써 해방군은 서북과 화북의 작전에도 매우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게 되었다. 옌시산의 산시군이 건재하다면 언제든지 서북의 후쫑난 부대와 협력하여 펑더화이의 서북 야전군을 협격할 수 있었다. 그리고 베이핑에 있는 푸쭤이의 화북 국군과 협력하여 네룽전의 화북 야전군을 협격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타이위안을 제외한 산시성 전역을 해방군이 차지하여 공산당은 서북과 화북, 나아가 중원의 작전에도 유리한 조건을 만들어 내었다.

    표시한 지역이 왼쪽부터 린펀, 진중, 타이위안, 스자좡

    파란만장했던 쉬샹첸의 가정과 생활

    주샹찬(朱香蟬), 쉬샹첸의 부모가 맺어준 신부

    1920년 쉬샹첸이 국민사범학교 2학년일 때 부모가 그를 약혼시키려고 하였다. 쉬샹첸의 나이 19세인데 그대로 두면 다른 이들의 웃음거리가 되기 때문이다. 그만큼 당시의 중국에서는 조혼이 성행하였다. 중매가 오고간 끝에 일자무식 농부의 딸인 주샹찬이 부모의 마음에 들었다. 그러나 혼인 시기를 두고 양가에 이론이 생겼다. 쉬샹첸의 집에 지참금을 줄 몫돈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처가 쪽에서 처녀 나이 이십이 넘으면 체면이 말이 아니라고 고집하여 부득이 혼인을 하게 되었다. 1922년 쉬샹첸의 집에 초롱을 달고 오색천으로 장식하여 떠들썩한 혼례식을 치렀다. 쉬샹첸은 5.4운동의 세례를 받았음에도 자유연애나 부모의 뜻에 항거할만한 생각은 하지 못하였다. 일자무식인 주샹찬은 더욱 더 운명을 부모의 뜻에 맡기는 수밖에 없었다.

    혼인한 뒤 그녀는 부모를 공경하고 손아래 시누이에게 존대하여 집안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 그때 쉬샹첸은 다른 마을에서 교사가 되어 일주일에 한번 집에 올 뿐이었다. 새신랑 쉬샹첸은 집에 갈 날을 손꼽아 기다리곤 하였다. 그는 소학교에서 6학년들을 가르쳤는데 매월 받는 월급이 20바이양(白洋)(2)으로 생활하는데 어려움이 없었다. 부부 사이의 금슬도 좋아 혼인 다음 해에 딸도 얻었다. 그들은 부모가 맺어준 중국의 다른 부부들처럼 부창부수했으며 가정도 화목하였다. 그러나 학교가 감원을 하여 쉬샹첸은 실직을 하고 말았다. 그는 머나먼 광저우로 가서 황푸군관학교에 들어갔다. 그후 주샹찬은 누구도 알지 못할 병에 걸렸다. 쉬샹첸은 그 사실을 알고 노심초사했지만 엄격한 기율 때문에 집에 가지 못하고 편지로 격려할 뿐이었다. 애타게 남편을 그리던 주샹찬은 병이 날로 위중해졌다. 마침내 불쌍한 첫 부인은 시부모에게 쉬샹첸의 귀가 편지를 부탁하며 임종하고 말았다.

    환난을 함께 했으나 적에게 살해되다.

    쉬샹첸은 1929년 6월, 당 중앙의 안배에 따라 상하이에서 후베이성 동북부 근거지로 갔다. 홍군 31사단 부사단장이 된 것이다. 처음 온 고장에서 그는 사람도 땅도 낯설었다. 더구나 사단장이던 우광하오(吳光浩)는 전투에서 이미 희생된 상태였다. 쉬샹첸은 부사단장이지만 실제로는 부대를 이끌어야 했다.

    쉬샹첸은 지휘관이었지만 매사에 솔선수범하였다. 일상생활은 물론 병사들이나 민간인을 대할 때도 직접 몸으로 때웠다. 싸울 때는 전사들의 앞에 섰으며 아무리 위험한 곳일지라도 항상 그가 나타났다. 싸움에서 이겨도 공을 내세우지 않고 책임은 자기가 졌다. 부대원들은 모두 쉬샹첸을 믿고 따랐다. 쉬샹첸이 후베이 해방구에 온 뒤 여러 차례 국민당군의 포위토벌을 겪었다. 거듭되는 싸움 속에서 그는 단련되어 갔다. 1929년 6월에서 11월까지 그는 세 차례 포위토벌 전투를 치러야 했다. 세 번째 포위토벌 전투에서 그는 다리에 부상을 입었다. 절벽에서 뛰어내리다 삐었던 것이다. 참모장 차오쉐카이(曺學楷)(3) 등이 쉬샹첸이 다리 부상은 물론 건강도 좋지 않은 것을 보고 혼인시켜야 하겠다고 의논하였다. 지휘관을 돌볼 사람이 필요하였기 때문이다.

    청쉰쉬안(程訓宣)은 후베이성 홍안(紅安)의 가난한 농가 출신이다. 그의 집에는 5남매가 있었는데 요절한 언니를 빼고 나머지 형제가 모두 혁명에 투신하였다. 1928년 홍군이 들어오자 그녀는 공산당에 참가하여 여성활동을 펼쳤다. 청쉰쉬안은 지휘관인 쉬샹첸을 흠모하였고 쉬도 명랑하고 잘 웃는 처녀를 좋아하게 되었다. 사람들이 다리를 놓아 그들은 전광석화처럼 빠르게 혼례식을 치르고 부부가 되었다. 쉬샹첸의 나이 28세, 청쉰쉬안의 나이 18세때의 일이었다. 결혼 뒤 쉬샹첸은 금방 건강을 회복하여 전선으로 갔다. 아내는 후방에서 계속 여성활동을 이어갔다. 그들은 부부였지만 서로 보기도 어려울 뿐 아니라 소식조차 듣기 힘든 형편이었다.

    쉬샹첸과 부인 청쉰쉬안

    1932년 4차 포위토벌 때 홍군 4방면군 총지휘가 된 쉬샹첸은 치리핑(七里坪)(4) 지역에서 전투를 치르게 되었다. 신부의 고향 부근이어서 쉬샹첸은 어린 처가 무척 보고 싶었다. 하지만 지휘관이 되어 갈 수는 없고 경호병을 시켜 구멍난 양말을 보내게 되었다. 소식도 전할 겸 그녀가 좀 기워 달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웬걸, 경호병이 허겁지겁 달려와 소식을 전했다. “부인이 잡혀 갔습니다. 잡아간 사람 말로는 그녀가 ‘개조파’(5)라고 합니다.” 쉬샹첸에게는 청천벽력같은 소식이었다. 그는 화가 끓어올라 미칠 것 같았다.

    당시 후베이 해방구는 장궈타오가 주동하는 ‘대숙청’의 시기였다. 3개월 동안 숙청을 당한 중대급 이상의 지휘관이 2,500여명에 이르렀다. 연대간부 70퍼센트 이상이 체포되거나 학살되었다. 아내가 잡혀갔지만 영문을 물을 수도 없고 묻기도 어려웠다. 장궈타오는 쉬샹첸을 지휘관으로 기용은 하지만 믿지는 않았던 것이다. 스스로의 운명도 아침저녁을 장담하기 어려웠다. 대적이 앞에 있는데 어찌 이럴 수가 있다는 말인가? 그는 비통한 심정을 억누르며 포위토벌에 맞서 싸웠다. 그뒤 부대가 악예환 근거지(6)에서 철수한 뒤 쉬샹첸은 늘 부인의 생사를 걱정하였다. 도처에서 소식을 들으려고 하였으나 바람결조차 그를 스쳐 지나갈 뿐이었다. 1937년 옌안에 도착한 뒤 그는 비로소 부인의 소식을 들었다. 보위국에서 그녀를 잡아 가두고 갖가지로 고문하며 심문했지만 그녀는 결코 자신의 혐의를 인정하지 않았다. 끝까지 반혁명을 인정하지 않고 피살되었다는 것이었다. 청쉰쉬안의 나이 21세 때 일이었다.

    쉬샹첸은 옌안에서 만난 악예환 소비에트 보위국장이던 저우춘취안(周纯全)(7)에게 따져 물었다. “왜 내 아내를 잡아 죽였소? 도대체 무슨 죄가 있다는 말이오?” 저우가 실토했다. “그녀는 죄가 없소. 당신을 옭아맬 자료를 찾기 위해서였소.” 쉬샹첸은 비통했지만 입을 다물었다. 사랑하는 처자를 보호하기는커녕 자신으로 인해 피해를 입었으니 비통하고 부끄러울 뿐이었다. 십년이 지날 때까지 그는 결코 재혼을 하려하지 않았다.

    군사학교 제자를 만나 세 번째로 혼인하다.

    1927년 혁명에 참가한 뒤 쉬샹첸은 일선에서 계속 전투를 치렀다. 여러 차례 부상을 입으며 건강이 계속 악화되었다. 1945년 4월, 쉬샹첸은 피로가 누적되어 늑막염을 앓게 되었다. 그는 옌안의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으나 몸은 여전히 쇠약했다. 그때 그는 우한의 군사학교 교관 시절 여성 생도였던 황제(黄杰)를 만났다. 황제는 당연히 쉬샹첸을 잘 알았으나 그는 그녀를 알아보지 못하였다. 황제는 후베이성 장링(江陵) 태생으로 1928년 공산당에 입당하였다. 그녀는 송쯔(松滋)(8)의 지우링강(九嶺岡) 폭동을 이끌었을 뿐 아니라 상하이의 중공 지도부에서 장기간 활동한 정예 당원이었다. 둘이 만나던 1946년 5월, 황제는 옌안 제2 보육원 원장으로 재직하고 있었다. 이때 쉬샹첸과 송쯔는 둘다 불혹의 나이에 접어들고 있었다. 황제가 보니 쉬샹첸의 젊은 시절 모습은 간 곳이 없고 병색이 완연할 따름이었다. 불쌍한 생각과 에정이 함께 생겼다.

    1946년 5.4 청년절에 섬감녕 진수(산시성과 쑤이위안성 관할) 방어 부사령 겸 참모장 쉬샹첸과 황제는 혼례식을 치르고 부부가 되었다. 그들은 슬하에 일남 일녀를 두었다. 신중국 성립 뒤 황제는 국무원 방직공업부 인사책임자로 일했다. 그들의 가정은 화목하고 단란하였다.

    그러나 1968년 10월 쉬샹첸은 이른바 ‘2월 역류사건’에 휘말렸다. 2월 역류사건이란 예젠잉, 쉬샹첸, 탄전린, 천이와 리센녠, 네룽전 등 군부 원로들이 린비아오, 장칭 등 문화대혁명 주동자들을 비판한 것이었다. 즉 1967년 문화대혁명이 한창이던 시절 1월에서 2월 사이 군부 원로들은 린비아오, 캉성, 천보다, 장칭 등을 비판하며 따져 물었다. 그때 쉬샹첸은 회의에 참석한 캉성, 천보다 등에게 “군대는 무산계급 독재의 지주요. 당신들이 하는 게 무슨 지주가 하는 일이란 말이오?”하고 따져 물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사인방과 문화대혁명을 옹호한 마오쩌둥에 의해 ‘2월 역류’사건으로 규정되었다. 회의에 참석했던 군부 원로들은 홍위병들에게 모욕과 비판을 당하게 되었다. 마오쩌둥은 2월 역류가 군 원로들이 린비아오에 대하여 불만을 품었기 때문에 일어났다고 이야기했다. 그 사건으로 인해 군부 원로들은 잇따라 문화대혁명의 표적이 되어 불행을 당하였다.

    1968년 10월, 중공 8차 12회 중앙위원 전체회의때 황제는 갑자기 ‘반도’로 몰렸다. 반도란 반역자란 뜻이니 큰일이 난 것이다. 황제의 이름은 회보에도 기재되었으니 앞날이 뻔하였다. 이때 쉬샹첸은 화를 참지 못하고 황제에게 따져 물었다. “우리가 결혼한 지 몇 년이오? 그들이 당신에게 반도라 하는데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이오?” 황제는 “나는 절대 반도가 아닙니다. 당신도 그렇게 생각한다면 우리 이혼합시다. 서로 연루되면 안되지요.”

    아들이 그 말을 듣고 눈물을 흘렸고 쉬샹첸도 눈물을 흘렸다. 결혼하고 아들이 태어났을 때 자신은 아내가 몸조리하는 것도 돕지 못하고 진기로예 군구로 부임해야 했다. 자신이 아플 때 아내가 돌보지 않았더라면 제대로 싸울 수가 있었겠는가. 아내는 방직공업부에 근무할 때도 버스만 타고 출근을 하였다. 그런 사람이 어찌 혁명을 배신할 수 있으랴. 그런데 어찌 아내가 반역자라고 헤어질 수 있다는 말인가? 쉬샹첸은 마음을 굳게 먹고 사태가 진정되기를 기다렸다.

    쉬샹첸은 근무처 당지부에 자신과 황제를 비판해 달라는 보고서를 썼다. 저우언라이가 보더니 말했다. “너무 과하게 쓰지는 마시오.” 그리고 보고서를 마오쩌둥에게 전달하였다. 1969년 마오쩌둥이 친필로 지시하였다. ‘2월 역류’에 관련된 모든 원로 동지와 가족들을 비판하지 말라. 그들하고 좋은 관계를 유지하라.” 마오쩌둥이 보호할 뜻을 보이자 린비아오도 “주석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쉬샹첸 동지는 건강에 유의하고 새로운 일을 벌이지 마시기 바랍니다.”하고 동의했다.

    1969년 10월 쉬샹첸은 동지들과 ‘분리’를 당하여 허난성 카이펑에서 연금 상태에 들어갔다. 황제는 방직공업부에서 심문을 받았다. 부부는 몇 년 동안 볼 수도 없었으며 자녀들도 연루당해 고난을 겪었다. 딸은 대학에서 반혁명분자로 낙인이 찍혀 재교육기관으로 보내졌다. 작은 딸은 내몽골의 ‘건설병단’으로 가야 했다. 쉬샹첸도 아는 이 하나 없는 곳에서 어떤 즐거움도 없이 세월을 보냈다. 1971년 문화대혁명의 주범 중 한 명인 천보다가 비판을 받으며 군 원로들이 베이징으로 돌아왔다. 쉬샹첸도 원로 중 마지막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1990년 쉬샹첸은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하고 세상을 떠났다. 쉬샹첸과 황제는 환난과 기쁨을 끝까지 함께한 혁명가 부부였다.

    <주석>

    1. 진중은 산시성 중부에 있는 도시 이름이다. 그리고 산시성 중부를 가리키기도 한다. 이 전투의 이름은 ‘전중전역’인데 산시성 중부의 전투를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전투의 마지막은 진중시에서 끝이 났다.
    2. 민국 시기의 화폐단위이다.
    3. 초기 공산주의 지도자이다. 후베이성 해방구 개척을 주도했으나 1931년 홍군 숙청 때 죽었다. 1945년 복권되었다.
    4. 후베이성 홍안현에 속한 진(鎭)이다. 진은 우리의 면에 해당한다.
    5. 여기서 ‘개조파’란 우파를 뜻하는 것으로 국민당 첩자나 동조하는 이를 가리킨다. 1930년 홍군 대숙청 때 개조파로 몰려 죽은 이가 7만여명에 이른다고 한다. 국민당의 첩보활동에 영향을 받은 코민테른과 왕밍 등 교조주의자들에 의해 홍군내 숙청이 가속화되었다.
    6. 악예환 근거지는 후베이성, 허난성, 안후이성 일대를 포괄하였다.
    7. 홍군 4방면군 정치부 주임 등을 역임했다. 신중국 성립 후 개국 상장(중장과 대장 사이의 계급)이 되었다.
    8. 후베이성 서남부에 있는 현이다.
    필자소개
    해남 귀농. 전 철도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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