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금과 노조 늘려야 시민사회 발전한다
        2006년 09월 20일 09:00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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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나라 민주주의 발전은 아주 빠르다. 형식과 절차에서는 유럽 나라 수백 년의 민주주의를 20여 년 만에 이루었고, 독재시대의 기억이 없는 젊은 세대에서는 생활 문화에까지 민주주의가 깊이 퍼져가고 있다.

    그런데 민주주의의 장이며 미래인 시민사회가 잘 조성돼 있다거나 활발히 움직이고 있다는 평가는 들어본 적 없다. 그래서 한국의 민주주의는 위에 머리는 컸으되 몸뚱이는 부실한 민주주의고, 껍데기는 갖추었으되 알맹이가 영글지 않은 민주주의다.

    시민단체들의 워크샵이나 여러 매체에 오르는 글에는 시민사회를 성숙시키기 위한 온갖 묘안들이 제안된다. 활동가 능력 배양, 자원활동 활성화, 정부와 지자체에의 참여, 지원기금 조성, 각종 위원회나 옴부즈맨 제도 등…….

    나는 여기에 세금을 올리는 것과 노조를 늘리는 것을 덧붙인다. 우리가 배울만한 외국에서 시민사회와 민주주의의 성숙이 세금과 노조가 늘어나는 것과 동시에 진행된 것을 볼 때, 세금과 노조야 말로 시민사회 발전의 절대조건이지 싶다.

    선진국이라 일컬어지는 나라의 사회의제와 정치이슈는 언제나 세금과 복지인데, 한국에서는 아직 그렇지 못하다. 그동안 자유권적 시민권이 주요 관심거리였기 때문이기도 하고, 세금과 복지가 시민 삶에 미치는 영향이 적기 때문이기도 하다.

    지난 몇 년 동안 세금이 많이 올라 일본의 담세율을 넘어섰다고 하지만, 조세 수입의 절반(일본의 두 배)을 간접세가 차지하다 보니, 실제 부가가치세를 부담하는 빈곤층과 중간소득계층은 ‘세금을 안 낸다’는 잘못된 믿음을 가지고 있다. 근로소득자와 사업소득자의 절반이 면세점 이하이기 때문에 직접세를 안 내는 사람이 너무 많고, 세수가 적으니 사회복지를 비롯한 공공지출도 OECD 꼴찌일 수밖에 없다.

    결국 한국의 시민과 국가 사이에는 세금과 복지라는 거래 관계가 성립돼 있지 않은 것이다. 예전처럼 잡혀갈 걱정도 없고, 나라에 내는 것도 받는 것도 없는 사람들이 사회적 개입(참여)의 동기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무관심한 우중(愚衆)으로 안주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당장은 반발을 사겠지만, “세금 올리고 복지 늘리자”는 주장을 과감히 제기해나가야 한다.

    한국에서는 동창회나 향우회 같은 전자본주의적 조직(Gemeinschaft)이 이상하리만큼 융성하고 있는데, 이는 노동조합이나 협동조합을 통한 권리 구제와 확보가 부족한 것을 상호 부조를 통해 보완하기 위해서이다. 하지만 전자본주의적 관계 속에서 자본주의적이거나 탈자본주의적인 시민의식이 성장하기를 기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시민단체니 민중단체니 하는 사회단체들이 많이 만들어지고 회원도 늘고는 있지만, 사회단체의 외연 확대를 통해 시민사회가 성숙하기를 바라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왜냐하면 사회단체의 성원이 된다는 것은 자각과 선의를 전제하는 것인데, 지배적 다중에게 그런 것을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어쩌면 시민운동은 21세기형 볼셰비즘이다.

    세상 어느 나라에서나, 노동조합이나 이익단체가 진보적 사회단체보다 천 배나 만 배쯤의 구성원을 가지는 것은 접촉경로․참가동기․활동방식이 훨씬 대중적이기 때문이다. 노조나 이익단체는 자각과 선의를 통과의례로 요구하지 않는다.

    “노동조합은 민주주의 학교다”라고 말하는 것은 그 활동을 통해 권리의식․자구조직․집합행동을 배우기 때문이다. 즉, 경제적 동기로 조직된 보통 사람들이 비판적 시민으로 성장하는 장으로 기능하기 때문이다.

    유럽과 한국의 시민사회 사이에 가장 큰 차이점을 찾자면, 10%(한국) 30%(유럽 내륙) 80%(스칸디나비아)의 노동조합 조직률 차이다. 문화적 해방구로서의 80년대 대학이 낳은 ‘386’을 계승하거나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은 생활적 욕구의 조직자인 노동조합 뿐이다.

    따라서 후진적이라거나 인기가 없다는 이유로 노조를 백안시하거나 거리두기 하는 민중단체와 시민단체의 관행은 결국 민주주의의 적이다. 거리에서 피케팅을 하거나 전경을 두들겨 패는 것만이 진보적 사회운동의 직접행동은 아니다. 스스로 노동조합원이 되고, 노조 없는 곳에 노조를 만들고, 고립무원의 노조를 극구 옹호하는 것보다 더 근본적인 시민 직접행동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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