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평등 심화의 원인,
    지배동맹의 합법적 사기와 강탈
    [원효-맑스의 대화⑤]신자유주의 체제 모순과 불평등
        2020년 06월 02일 10:02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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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효-맑스의 대화④]세계혁명과 진속불이(眞俗不二)

    인류 최악의 불평등의 실상

    <기생충>이 왜 숱한 수상을 하고 토마 피케티가 록스타급 학자가 되었는가. 불평등과 기후위기는 지금 여기의 인류에게 닥친 가장 큰 문제다. 그래도 촛불항쟁이 있었기에 많은 이들이 한국에서만큼은 불평등이 완화될 줄 알았지만 실상은 거꾸로 가고 있다. 국정농단이 도화선이 되었지만, 촛불은 든 주체인 시민과 노동자의 분노의 토대를 형성한 것은 불평등이었다.

    촛불항쟁으로 박근혜 정권이 무너지고 문재인 정권이 들어섰다. 하지만, 불평등은 오히려 심화하고 있다. 2018년 현재 상위 10%가 전체 소득의 48.86%를 차지하고 있다. 이는 2009년의 44.38%에서부터 꾸준히 증가한 것으로 박근혜 정권 말기인 2016년의 47.76%,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한 2017년에 48.79%, 2018년에 48.86%로 가파르게 상승하고 있다.(<월간 노동리뷰> 2020년 2월호, 88쪽.) 상위 10%의 배당소득과 이자소득은 각각 93.9%와 90.8%를 차지한다.(<한국세정신문>, 2019년 10월 4일) 실업률은 4.2%에 달한다.(<월간 노동리뷰>, 2020년 5월호, 93쪽.) 지금 대략 1,100만 명의 노동자가 같은 일을 하고도 절반의 월급을 받는 비정규직이며 그 중 상당수가 정리해고의 공포에 시달리고 있다. 부동산과 물가를 포함한 사회적 불평등은 더욱 악화하였다.

    왜 민주화 정권에서 오히려 악화하고 있는가? 문재인 정권이 경제개혁, 조세개혁, 보편적 복지와 같은 근본적인 불평등 개선책을 취하지 않은 채 대증적(對症的)인 조처만 취하였고 비정규직 정규직화도 시늉에만 그쳤기 때문이다.

    세계로 눈을 돌려도 마찬가지다. 슈퍼 갑부 8인의 재산이 세계 절반인 36억 명과 동등하고,(<경향신문>, 2017년 1월 16일) 2019년 기준으로 전 세계 억만장자 2,153명이 46억 명보다 많은 부를 소유하고 있다.(<옥스팜 보고서> 2020년 1월, 2쪽.) 세계불평등데이터베이스(World Inequality Database)의 2020년 5월 31일 현재 통계를 보면, 통계측정 연도가 다르지만, 세계 주요 국가의 상위 10%는 전체 소득의 40% 가량을 차지하고 있다.(한국 43.3%, 일본 41.6%, 중국 41.4%, 미국 46.8%, 러시아 45.5%, 영국 35.5%, 프랑스 33.3%, 독일 36.8%, 스페인 34.9%) 상위 1%는 전체 소득의 1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한국 12.2%, 일본 10.4%, 중국 13.9%, 미국 20.5%, 러시아 20.2%, 영국 12.6%, 프랑스 11.2%, 독일 12.5%, 스페인 11.9%) 스웨덴 정도가 각각 29.8%, 9.0%로 양호한 편이다.

    한 도시 안에서 상위 10% 소득이 하위 10% 소득의 수백 배에 이르고(2018년 서울의 경우 상위 10%의 종합소득 평균은 2억 2천 600만 9천 397원으로 하위 10%의 평균 116만 4천 957원의 194배에 달하였다. <한국세정신문>, 2020년 1월 28일), 한국의 200대 기업의 최고경영인(CEO)급 임원 1인당 평균 보수는 6억 8783만원으로 최저 연봉(2094만원)과 비교하면 32.8배에 달한다.(<일간 투데이> 2020년 5월 7일) CEO만으로 통계를 내면 수백 백에 이를 것이다. 2018년 기준 CEO와 일반 노동자들의 평균 임금의 차이는 미국 265배, 인도 229배, 영국 201배, 독일 136배, 중국 127배에 달한다.(www.statista.com)

    주지하듯 플라톤은 불평등한 계층사회를 이상국가로 설정하였음에도 능력과 노력에 따라 어느 정도 불평등해야 하지만, 가난한 자와 부자 사이의 격차가 4배 이상 벌어지면 공동체의 갈등이 심화하고 내란이 일어난다면서 4배가 넘은 재산은 국가나 신전에 헌납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수백 배의 불평등을 겪고 있는 것이다.

    불평등은 비단 빈부격차로 인한 부자와 빈자의 갈등과 대립, 투쟁으로 그치지 않는다. 불평등은 개인의 몸과 마음을 파괴하고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해치고 사회불안을 증대한다. “불평등이 심할수록 사람들은 협력하여 문제를 해결하는 전략 대신 경쟁과 힘에 의해 해결하는 전략을 선호하게 된다.”(리처드 윌킨슨, <평등해야 건강하다>, 321쪽.) “불평등이 심해지면, 타인에 대한 신뢰도가 낮아지고 사회통합이 줄어들며 사회적 관계의 질은 내려가고, 범죄와 폭력은 증가하고, 스트레스가 증가하여 건강은 나빠지고 평균 기대수명이 떨어지며, 사람들 사이의 신뢰수준은 내려간다.”(같은 책, 315쪽.) “소득 불평등이 높을수록, 적대감, 인종적 편견이 심하고 여성의 지위도 낮다.”(같은 책, 68쪽.)

    특히, 불평등이 심한 곳에서는 성공한 개혁조차 껍데기로 전락한다. 불평등이 심할수록 사람들이 협력전략보다 지배전략을 선택하고 반개혁적 성향과 행동을 표출하기 때문이다. 불평등이 심하면, 기득권은 자신과 자식들의 자본과 권력을 유지할 수 있는 ‘유리창’을 강화하기 위하여 모든 권력과 자본, 정보를 동원하여 제도와 법을 바꾸고 편법을 구사하며, 서민 또한 탐욕을 키우고 살아남기 위하여 치열하게 경쟁한다. 불평등이 심화한 사회에서는 기득권층은 누구나 ‘나경원’과 ‘조국’이 될 수 있고, 하층은 누구나 ‘송파 세 모녀’가 될 수 있다.

    원인은 지배동맹의 합법적 사기와 강탈 때문

    그럼, 무엇이 이렇게 불평등을 심화했는가. 피케티가 잘 통찰한 대로, “근본적으로 자본의 수익률이 경제성장률보다 늘 크기 때문에(r>g), 소득 수준별로 누진적인 글로벌 자본세를 획기적으로 증대하여 부과하는 등 이를 상쇄할 공공정책이나 제도를 집행하지 않는 한 불평등은 심화한다.”(피케티, <21세기자본>, 39-40쪽.) 쉽게 말하여, 노동을 해서 돈을 버는 속도(경제성장률)보다 돈이 돈을 버는 속도(자본수익률)가 더 빠르기에, 노동자가 버는 것보다 자본이 착취하는 것이 늘 더 많기에 자본이 큰 사람이 더 많은 돈을 벌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피케티의 분석만으로 부족하다. 이를 바탕으로 1970년대 이후 자본의 수익률을 경제성장보다 큰 폭으로 늘린 주범을 찾아야 한다. 그 주범은 바로 신자유주의 체제의 자본과 국가를 중심으로 한 지배동맹이다. 국가와 자본을 중심으로 한 지배동맹은 불평등을 완화하는 정책을 실시하는 것이 아니라 합법적으로 사기를 치면서 서민과 노동자의 부를 강탈하였다. 필자가 4대강 사업 반대운동과 쌍용자동차 해고자 복직 투쟁의 집회나 기자회견에서 자주 발언하고 책이나 칼럼에도 썼던 말을 옮긴다.

    A: MB가 환율조작만으로 서민 돈을 빼앗아서 재벌을 준 것이 얼마인 줄 아는가. “MB 정부 3년간 고환율 정책으로 무려 174조 원의 돈이 서민의 주머니에서 빠져나갔다. 그 결과 국민의 97%인 임금노동자와 자영업자의 실질소득은 무려 15.3% 이상 감소했다.”(송기균, <고환율의 음모>, 175쪽.) “이명박 정권은 출범 당시 947원이었던 환율을 1년여 만에 1276원으로 35%를 끌어올렸으며, 이는 대부분 수출 대기업의 이익으로 들어갔으며, 대기업들이 투자를 늘리지도 고용을 증가시키지도 않았으므로 서민에게 이익이 된 것은 하나도 없다.”(같은 책, 178쪽.) 단순화해서 설명하면, 하루 100달러 어치의 석유를 사용하는 국민은 9만 4천여 원만 지불하면 될 것을 12만 7천 원이나 지불한 것이고, 대신 100달러짜리 스마트폰을 파는 삼성은 그 반대로 9만 4천여 원만 벌 것인데 12만 7천여 원을 벌어들인 셈이 된다. 174조 원을 현재 남한 인구 5천 184만 2천 명으로 나누면 1인당 335만 6천 원에 달한다. 길거리에서 단 돈 몇 만원만 빼앗겨도 멱살잡이할 우리가 왜 수백 만 원을 강탈당했음에도 분노하지 않는가.

    B: “4대강 사업은 실제로는 대운하를 만들고 토건카르텔이 장기 집권을 달성하기 위한 사업이다. … 경실련에 따르면, 정부가 지금까지 발주한 41건의 4대강 관련 사업 중 턴키발주가 17건(4조 4,000억 원), 가격경쟁방식은 24건(1조 2000억 원)에 이른다. … 턴키 발주의 경우 평균 낙찰률은 93.4%, 낙찰금액은 4조 1,000억 원이다. 반면 가격경쟁방식 16건의 평균 낙찰률은 62.4%, 낙찰금액은 0.7조원이었다. … 1조 4,000억 원에 가까운 혈세가 과다지출된 것이다.”(<참세상>, 2011년 7월 15일)

    B가 토건국가의 전형적인 수탈방식이라면, A는 신자유주의 체제의 전형적인 수탈 방식이다. 신자유주의 체제는 자본주의 체제의 야만을 제한하던 거의 모든 제도들을 규제혁파라는 이름으로 제거하였다. 가난한 서민과 노동자들의 탄압과 환경파괴를 막던 법과 규정들이 풀리자 이들은 자본의 야만에 무방비 상태가 되었다. 정부와 국회가 나서서 산업자본과 금융자본이 법망을 피하거나 자유롭게 사기를 치고 수탈을 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고, 부자 감세와 국방비 증액, 금리 및 환율 정책, 토건사업 활성화 등으로 1%들에게 엄청난 특혜를 안기고, 국가의 재정 적자를 키우고 이를 다시 99%들의 세금으로 메우는 악순환이 계속된다. 이 악순환을 시정하기는커녕 정부와 국회는 더욱 악랄한 집행자를 자처한다. 정부와 국회는 투자를 활성화한다며 금리를 인하하여 1%들이 싼 이자로 부동산과 금융에 투자하여 엄청난 이익을 챙기도록 도와주고, 1%들의 사기로 위기에 놓인 것인데 금융을 살린다면서 은행에 막대한 지원을 하여 임원들의 상여금을 높여준다.

    이 체제는 노동의 유연성이라는 이름으로 다양한 비정규직을 양산하였다. 이로 거의 절반의 노동자가 비정규직으로 전락하고, 이들은 같은 노동을 하면서도 거의 절반의 임금을 받고 있다. 이 체제는 공동체 유지를 위하여 공공영역으로 유지하던 수도, 전기, 교통, 교육, 의료 등을 해제하여 민영화/사유화하였다. 가난한 서민과 노동자들은 공공의 혜택에서마저 소외되고 더 높은 비용으로 이를 이용하면서 생존위기에 놓이게 되었다.

    기존의 자본주의와 다른 특성은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금융자본과 산업자본의 비중이 8;2로 역전되면서 금융부분에서 합법적 사기와 수탈이 벌어진다는 점이다. 신자유주의 체제 이후 금융자본은 다양한 방법으로 막대한 이득을 얻었다. 이들은 국가의 대내외 정책을 이윤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조절하고, 유리한 조건으로 채권을 인수한다. 이에서 더 나아가 다양한 금융상품을 만들고 수치를 조작하여 사기술이나 이에 가까운 방식으로 천문학적인 소득을 올렸다.

    맑스의 분석대로, 산업자본가든, 대부자본가든 그들의 이윤은 노동자가 생산한 잉여가치를 빼앗은 것이다. 하지만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착취는 생산 부문에 그치지 않는다. 자본가의 소비대출은 자본가 소득, 다시 말해 잉여가치 중 재생산에 투여되고 남은 소득이므로 잉여가치에서 보전되지만, 노동자의 소비대출은 노동자 임금에서 이자가 보전된다. 대출금으로 일반적인 상품 구매가 아닌 주식이나 펀드 같은 자산 시장에 참여하는 경우에도 투자 수익이나 손실과 무관하게 대출이자의 원천은 임금이다. 이처럼 이자의 원천이 잉여가치의 일부일 뿐만 아니라 노동자 임금의 일부이기도 하다는 것은 이자를 통한 ‘수탈’이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때문에 “이자는 자본의 확대재생산 과정에서 발생한 이윤(잉여가치)의 일부를 분배받는 기능을 넘어 미래 노동 소득(임금)에 대한 수탈 구조로 확장될 수 있다.”(홍석만, 「소비신용과 이자 그리고 신자유주의 축적체제」) 자본은 정규직 노동자를 비정규직으로 대체하는 것만으로 두 배의 잉여가치를 착취하면서 이윤율을 올리고, 이자의 형식으로 다시 수탈하여 자본소득을 획기적으로 증대한다.

    2008년의 금융위기를 만든 핵심 세력은 정부나 시장이 아니라 헤지펀드와 이들과 공모한 투자은행이다. 이는 정부의 실정이나 시장의 불안정성에 의해서 구조적으로 촉발된 것만이 아니다. 일부 헤지펀드와 매니저가 투자은행과 짜고 가치가 붕괴할 수밖에 없는 금융상품을 만들고 거의 사기에 가까운 방식으로 외부 투자자들을 끌어 모아 거품을 키울 수 있는 대로 키운 후 자신의 이익을 최대한으로 챙긴 후에 터뜨린 데서 금융위기가 발생했다. “헤지펀드들은 자본을 투자한 기업의 건전성 여부에는 아무 관심이 없다. 그들의 관심사는 그저 이용할 만한 작은 장점이라도 있는지 알아본 다음, 최대한 많은 이익을 챙겨서 재빨리 발을 빼는 것이다.”(레오폴드, <싹쓸이 경제학>, 58쪽.) 자신은 거액을 챙기고 투자자를 망하게 한 후에 그들은 이 책임을 월가가 아닌 정부에 돌리며 정부에 ‘구제금융’ 혹은 ‘공적자금’을 요청했다. 결국 국민의 혈세가 이들의 수중으로 들어간다. 금융자본 및 헤지펀드와 카르텔을 형성하고 있는 정부는 국민의 혈세를 혁신금융상품의 매개를 통해 헤지펀드나 금융자본가에게 바치는 전달자 구실을 한다. 이런 방식을 통해 “애팔루사 헤지펀드의 대표 데이비드 테퍼(David Tepper)는 2009년에 40억 달러를 벌었고,”(같은 책, 41쪽.) “헤지펀드 매니저인 존 폴슨(John Paulson)이 투자 서비스를 제공하는 대가로 시간당 버는 돈은 230만 달러가 넘는다.”(같은 책, 28쪽)

    ‘국가-자본-보수언론-종교권력층-사법부-전문가 및 어용지식인 집단’의 지배동맹은 어느 때보다 공고하다. 국가가 나서서 일방적으로 자본의 편에서 노동자에게 폭력을 가하고, 사법부는 거의 자본의 손을 들어준다. 조세개혁은 불평등 완화와 정반대 방향으로 간다.(예를 들어, 이명박 정권 집권 5년간 감면된 법인세는 모두 25조 2,641억 원에 달하며, 10대 그룹 상장계열사들이 사내유보금의 형식으로 곳간에 쌓아둔 돈은 2015년에 500조 원을 돌파했다.) 국가-자본의 연합과 노동자들이 적대국면을 형성하면, 보수언론은 허위 수치까지 들이대고 모든 논리를 동원하여 노동자들의 당연한 절규를 매도하고 비판하는 보도를 하고, 시민사회 또한 극소수가 이에 연대할 뿐, 대다수가 이에 동조하거나 침묵한다. 지배동맹이 나서서 구조적 폭력, 곧 노동배제와 정리해고를 합리화하는 법과 제도를 제정하고, 육체노동을 천시하고 정리해고를 당연시하며 정당한 파업을 ‘빨갱이’나 ‘경제혼란’ ‘과격행위’로 매도하는 문화적 폭력과 이데올로기 공작을 단행한다. 복지를 행하기는 하지만, 자본의 수익을 어느 정도 보장하고 사회해체를 막고 국가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선에 늘 머문다.

    서양과 맑스의 대안

    그럼, 대안은 무엇인가. 스티글리츠는 이에 대하여 잘 요약했다. “금융 부분의 규제를 강화하고 독점금지법, 파산법 등 1%에 유리한 법과 제도를 개혁하고 집행 효율성을 강화하며, 기업지배구조를 개선하고 기업 지원금을 폐지하고, 조세 회피 통로를 차단하고 조세개혁을 단행하며, 교육, 의료, 금융, 주택 분야에서 공공성을 확대하고 중하위층에 대한 지원을 늘리며, 노동자와 시민의 집단행동을 지원하고 선거자금을 개혁하고 투표율을 높일 수 있는 획기적인 정책을 추진하면서 중하위층의 기회를 확대한다면, 중하위층이 자신만의 이익만이 아니라 다른 모든 사람의 이익과 공공복지에 관심을 기울이는 ‘개인적 이익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한다면, 1%들도 99%들과 운명을 함께한다는 인식을 한다면, 모두가 운명 공동체라는 인식을 하여 기회와 공평성에 대한 사회적 약속이 유지되는 사회, ‘만인을 위한 자유와 정의’란 말이 진정한 의미를 발휘하는 사회, 공민권뿐 아니라 경제적 권리도 중요하고, 재산권뿐 아니라 서민의 경제적 권리도 중요하다고 강조하는 세계인권선언문이 진지하게 받아들여지는 사회는 가능한 미래로 다가올 것이다.”(조지프 스티글리츠, <불평등의 대가 ― 분열된 사회는 왜 위험한가>, 431-462쪽 요약.)

    피케티가 말한 대로, 소득 수준별로 누진적인 글로벌 자본세를 획기적으로 증대하고 조세개혁을 하여 소득의 불평등을 해소하고 보편적 복지를 강화하여야 한다. 우리나라로 한정하면, 부자감세 20조 원을 환원하고, 사회복지목적특별세로 20조 원을 책정하며, 상속세를 정상화하여 현재 4조 원에서 30조 원으로 증대한다. 모든 불로소득(자산/토지/주식)을 세수를 통해 사회적으로 환수한다. 소득세의 최고세율을 군사독재정권 때처럼 70∼90%로 환원한다. 상속세의 세율을 90% 이상으로 하여 부의 세습을 막는다. 유럽에서 정착하고 있는 ‘살찐 고양이법’을 만들어 한 기업 안에서 최고 연봉과 최저 연봉의 격차가 10배를 넘지 않도록 법으로 강제한다.

    반신자유주의를 추구하는 담론 투쟁을 전개한다. 비정규직과 정리해고의 철폐 주장이 좌파적 발상이거나 비현실적인 것이 아니다. “30대 대기업의 경우 매년 기업이 벌어들이는 당기순이익의 단지 1.5%만 투자하면 모든 비정규직 노동자를 정규직으로 전환할 수 있다.”(<시사저널>, 2012년 10월 31일.) 낙수효과(trickle down effect)는 허구에 불과하며 분수효과(fountain effect)가 타당하다. 성장과 복지는 대립적인 것이 아니라 보완적이다. 신자유주의의 첨병인 IMF조차 낙수효과를 부정하는 보고서인 『소득 불평등의 원인과 결과: 세계적 전망』을 2015년에 발표했다. “이에 따르면, 상위 20%의 소득이 1% 증가하면 5년 동안 GDP는 0.08%포인트 감소했지만, 하위 20%의 소득이 1% 증가하면 GDP는 같은 기간에 0.38%포인트 증가했다.(<IMF Strategy, Policy, and Review Department>, p. 7.) 낙수효과보다는 “부유층의 세금 강화와 저소득층에 대한 복지 및 지원 증가 → 저소득층의 교육에 의한 생산성 증가 → 소득 증대에 따른 소비 증가 → 총수요 증가에 따른 생산 증가 → 경기부양”을 야기하는 분수효과가 더 현실적이다.

    하지만 이는 모두 개량적 대안들이다. 중국의 좌파 자유주의자나 한국의 자본주의 4.0이나 윤리적 자본주의의 지지자들은 시장의 균형과 공정성 확보를 통해 건전한 자본주의를 추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는 시장에 대한 환상의 소산이다. “거대 이윤의 원천은 시장이 아니라 시장의 작동을 억제하는 독점이다.”(이매뉴얼 월러스틴, <사회과학으로부터의 탈피: 19세기 패러다임의 한계>, 264-283쪽.) 왕휘(汪暉)의 말대로 “자본주의 체제에서 공정한 시장이란 불가능한 유토피아이다.”

    “노동계급을 해방시키기 위한 조건은 모든 계급의 폐지이다. 노동계급은 그 발전 과정에서 낡은 부르조아적 사회를, 계급 및 계급대립을 배제한 연합체로 바꾸어 놓을 것이고 이제 고유한 의미에서의 정치권력은 존재하지 않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정치권력이란 정확하게는 부르조아적 사회 내에 있는 계급 대립의 공식적 표현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프롤레타리아트와 부르조아지 간의 대립은 계급에 대한 계급의 투쟁이며 그것의 최고의 표현은 총체적 혁명이다. 실제로 계급 대립에 토대를 둔 사회가 무자비한 모순으로까지 치닫고 그 마지막 해결책인 인간에 대한 인간의 충돌로 치닫는 것이 놀라운 일이겠는가? 사회운동이 정치운동을 배제한다고 이야기하지 말라. 모든 정치운동은 동시에 사회운동이기도 하다. 계급과 계급 대립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사물의 질서 속에서만, 사회적 진화는 정치적 혁명이 되기를 중단할 것이다. 그때까지 사회의 모든 전반적인 전환의 전야에 사회과학의 마지막 말은 다음과 같을 것이다. ‘투쟁이냐 죽음이냐: 피로 얼룩진 투쟁이냐, 사멸이냐, 이것이야말로 냉혹하게 던져진 문제로다’.”(카를 마르크스, <철학의 빈곤>, 173쪽)

    https://money.com/occupy-wall-street-anniversary-effects/

    마르크스가 볼 때, 노동자와 자본가의 대립은 평화적으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자본가들은 국가와 연합하여 노동자들의 평화적 저항을 물리적인 폭력으로 탄압하고 제어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노동자들이 연대하여 이에 대항하는 조직을 결성하고 부르주아들의 물리적 폭력에 맞서서 죽느냐, 혁명이냐의 결단을 하고 무장투쟁을 전개하여 낡은 사회체제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사회구성체를 수립하는 혁명만이 이 대립을 해소하는 길이다.

    혁명이 성공할 때까지, 혁명의 과정에서 노동자는 여러 가지 투쟁을 전개해야 한다. 경제투쟁으로 비정규직과 정리해고 철폐, 임금 인상, 노동시간 단축, 노동조건의 개선을 주장하며 파업과 태업을 한다. 정치 투쟁으로 현장 투쟁과 정당운동을 결합하여 선거 투쟁에 참여하며, 비정규직과 정리해고 관련법의 개정 투쟁을 하고, 진보정당원으로 의회에 진출하기도 한다. 이데올로기 투쟁으로 신자유주의 논리를 비판하고 부정하는 이데올로기 및 담론 투쟁을 전개한다.

    원효와 다산의 대안: 눈부처 공동체

    진제(眞諦)와 속제(俗諦)는 둘이 아닌 동시에 하나를 지키지 않는다. 둘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은 곧 일심이요, 하나를 지키는 것도 아니기에 체를 들어 둘로 삼는 것이니 이것을 일러 일심이문(一心二門)이라 한다. 이상이 그 대의이다.(원효, <금강삼매경론>)

    “각 사람의 하루 노동량을 여장의 장부에 기록한다. 가을이 되면 무릇 오곡(五穀)의 수확물을 모두 여장의 집(여 안의 都堂)으로 보내어 그 양곡(糧穀)을 분배하되, 먼저 국가에 바치는 공세(公稅)를 제하고, 다음으로 여장의 녹봉(祿俸)을 제하며, 그 나머지를 하루 노동량을 기록한 장부에 따라 분배한다. …… 사람들이 노력을 다하면 땅 또한 이득을 내는 데 진력한다. 땅이 이득을 내면 백성의 자산이 부유해지고, 백성의 자산이 부유해지면 풍속이 도타워지고 백성이 효제(孝悌)를 행하게 된다. 그러므로 이것(여전제)은 토지를 다스리는 가장 좋은 방책이다.”(정약용, <전론(田論)>)

    원효는 일심이문의 회통을 통해 부처와 중생, 깨달음과 깨닫지 못함을 아우르려 한다. 이를 사회에 응용하면, 협력과 연대, 정의가 일심이고 진제, 진여문이며, 자유와 경쟁(competition)이 이문이고 속제, 생멸문이다. 일심과 이문의 화쟁을 통하여 다산의 여전제, 맑스의 ‘자유로운 개인의 연합으로서 꼬뮨’을 결합한 것이 눈부처공동체다.

    눈부처-공동체는 구성원 각자가 눈부처-주체로서 실존하고 실천한다. 개인은 자기 앞의 세계를 올바로 인식하고 자율적으로 해석하며 타자와 자연과 연기관계를 파악하며 이기적 욕망을 자발적으로 절제하며 온생명과 타자의 고통에 공감하고 연대하면서 더 나은 미래 세계를 만드는 눈부처-주체로 거듭난다. 눈부처주체들이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으로서 공동으로 생산하고 공동으로 분배하며, 필요한 것은 호혜적으로 보답하는 방식으로 교환한다. 개인의 자유와 행복이 타인의 자유와 행복을 위한 조건이 되고, 개인의 권리와 존엄이 동등하게 인정되고 작용하면서, 모든 이들의 합의에 의하여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범위에서 상호성의 정의와 평등을 구현한다.

    눈부처-공동체는 공동으로 생산하고 분배하되, 나와 타인, 공동체의 필요에 따라 생산한다. 모든 생산수단과 도구는 공동의 소유다. 이 공동체 생산의 50% 정도는 필요에 따른 공동생산과 공동분배를 한다. 나머지 가운데 30%는 재투자를 하며, 10%는 개인의 능력별로 인센티브를 주어 개인의 창의력을 발현할 동기를 부여하며, 10%는 장애인, 이주노동자 등 더 가난한 자에게 베풀어 타자를 자유롭게 하여 내가 자유로운 대자적 자유(freedom for)를 구체화한다.

    능력이 아니라 필요에 따른 노동, 소외와 장애를 극복하는 자기실현으로서 노동, 철저히 자연과 공존하는 생태 노동을 한다. 그것이 불가능한 도시의 공동체는 유기농 농사를 짓는 농촌공동체와 연합 관계를 형성한다. 단기적으로는 친환경 무상 급식을 로컬푸드와 연결시키고 민중을 자각시키고 조직하여 신자유주의를 내파하는 진지로 만들고, 장기적으로는 자본주의 체제 곳곳에 꼬뮨을 만들어 이를 대체하는 사회구성체로 구성한다.

    노동이 자본을 통제하며, 노사관계는 진속불이(眞俗不二)의 관계가 되도록 한다. 경영자와 노동자는 하나가 아닌 동시에 둘도 아니다. 노동자들이 총회에서 자신들 가운데 이사를 선출하고 이들이 노동자들과 유기적으로 소통하고 협력하는 가운데 일정 기간 동안 경영과 중요한 결정을 한다. 일정 기간이 지나가면 노동자로 돌아간다.

    ‘민중의 집’과 협동조합을 결합한 형식의 연합체 및 의사결정기관을 두되, 구성원 간 노동의 목적과 방법에서부터 분할 비율에 이르기까지 전체 과정을 모든 구성원이 동등한 권력을 갖고 참여하는 거버넌스 시스템으로 운영한다. 모든 사람의 가치와 권력은 사회적 지위, 젠더, 나이, 재력에 관계없이 1대1로 동등하다. 중요한 안건은 모든 구성원이 참여하는 민회에서 결정하며, 모든 구성원이 1인 1표의 동등한 가치를 갖는다. 가족 단위의 사생활은 보장하고 간섭도 하지 않되, 이를 벗어난 공동체의 정책과 실현, 규약의 제정과 집행, 재정의 운영 등의 문제는 모든 이가 동등한 권력을 갖고 참여하여 회의를 통해 민주적으로 결정한다. 자연, 자원, 의식주, 재화, 도구 등에 대해 공유물과 사유물을 정한다. 공유물에 대해서는 자원의 양과 사용 시간, 사용 도구, 사용 방법을 규칙으로 정한다. 재물, 지혜, 평화는 서로 나눈다.

    시장과 자본제의 외부에서 물화를 극복할 수 있는 방편으로 따로 마을 화폐를 만들어 사용한다. 단 마을 화폐는 7일마다 10%의 가치가 감소되고 7주 후에는 0원의 가치를 갖게 하여, 가치척도, 유통수단, 축적수단, 지불수단, 세계화폐 등 화폐의 다섯 가지 기능 가운데 가치척도와 유통의 기능만을 수행한다.

    외적으로는 불일불이(不一不二)의 패러다임을 따라 공동체와 다른 집단을 네트워킹하고, 내적으로는 진속불이(眞俗不二)의 원리에 따라 구성원 간 상호 주체성과 상보성을 높인다. 다른 마을이나 집단과 교류를 위하여 소규모 마을 은행을 둔다. 이 은행에서는 마을 화폐와 국가 화폐의 교환, 마을의 각 가정의 범위를 넘어선 투자 및 재정을 담당한다. 이 은행은 협동조합 형식으로 운영한다.

    구성원은 욕망의 자발적 절제를 통한 소욕지족(少欲知足)의 삶으로 전환하며, 이를 수행하기 위한 청규(淸規)를 둔다. 이렇게 운영하되, 확고하게 정의관을 확립하고 깨달음에 이른 자라도 언제든 무지와 탐욕, 성냄에 물들고, 이기심과 욕망에 기울어질 수 있기에 깨달음이 곧 집착이라는 명제 아래 매일 일정한 시간에 수행하고 참회한다.

    그럼에도 갈등과 범죄가 생길 것이다. 갈등이 생길 경우 화쟁의 원리에 따라 서로 눈부처의 자세로 대화하고 성찰한다. 그러고도 범죄가 생기면, 응보적 정의(punitive Justice)가 아니라 모든 이들이 참여하여 화해와 치유를 도모하는 회복적 정의(restorative justice)에 입각하여 문제를 해결한다.

    프롤로그에서 말한 대로, 수렵사회는 물론, 농경사회도 8,000년 동안 평등한 공동체였다. 인류 역사 700만 년 가운데 불평등한 사회는 0.00057%인 4,000여 년에 지나지 않는다. 돈이 신이 되고 소외를 심화하고 자본이 노동자가 생산한 잉여가치를 착취하는 자본주의 체제는 0.000057%인 400년에 불과하다. 특히, 기원 전 9,400년 경부터 수백 년 동안 농경을 하고 도시문명을 건설한 터키의 차탈회유크(Çatalhöyük)유적을 보면, 집과 곳간의 크기가 같았고 소유물도 똑같았다. 평등한 공동체를 추구하는 것은 빨갱이식 발상도, 과격한 주장도, 현실성이 없는 꿈도 아니다. 그것이 인류의 본래 모습이며, 불평등한 사회가 찰나의 일탈이다. 코로나 이후의 대안도 근본적으로 이런 전환이 없으면 다른 모든 것은 미봉책에 지나지 않는다. 이제 인류사회는 자연과 공존하며 모든 구성원들이 평등한 공동체로 돌아가야 한다.

    ※ 이 글은 <인류의 위기에 대한 원효와 마르크스의 대화>(자음과 모음, 2015)를 쉽고 짧게 풀어서 쓴 것으로 매달 첫 월요일나 화요일에 연재하고 있습니다. 쪽수까지 명기한 상세한 각주와 구체적 논증은 이 책을 참고하기 바랍니다.

    필자소개
    한양대 교수. 민교협 전 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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