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난과 사회혼란 극심
국민정부, 화폐개혁 실패
[국공내전㊲] 공산당, 하얼빈에서 노동대회···신장지구로 세력 확장
    2020년 05월 27일 10:48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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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원의 요충지인 상양을 잃은 뒤 국민당 정부 치하의 사회와 경제는 더욱 어지러워졌다. 1948년 7월 5일 새벽, 화북의 중심도시 베이핑에서 시위를 벌이던 학생들이 국군 소속 청년군의 총격으로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충돌로 학생 7명이 죽고 50여명이 총상을 입었다. 시위를 벌이던 학생들은 대부분 동북의 대학생 및 고등학생들이었다. 지린성과 랴오닝성 출신인 이들은 전란을 피해 베이핑으로 피난을 와 있었다. 피난 온 학생이 수천명에 이르자 베이핑의 군정 당국은 베이핑과 텐진에 임시학교를 개설하여 이들을 입학시키고자 하였다. 그러나 예산 부족 등으로 입학이 무산되자 학생들의 불만이 증폭되었다. 베이핑시 참의회에서 이들을 모두 군에 입대시키려 한다는 방침이 전해지자 학생들의 분노가 폭발했다. 학생들은 베이핑시 참의회 앞으로 가서 의장인 쉬후이둥(許惠東)에게 교섭을 요구하였다. 그때 화북 초비사령부 부사령관이자 베이핑시 위수사령인 천지청(陳繼承)이 헌병과 청년군 등을 동원하여 진압하려 하였다. 천지청은 장제스가 푸쭤이를 견제하기 위해 임명하여 보낸 직계 강경파였다. 천지청의 지시를 받은 청년군과 학생들 사이에 충돌이 일어나자 발포까지 하게 되었던 것이다.

베이핑에서 시위를 벌이는 학생들

본래 베이핑 행원 주임이던 이쫑런과 후임인 화북 초비사령관 푸쭤이는 학생들의 시위에 유화적으로 대처하였다. “학생들의 시위는 반대하지만 폭력 진압은 안된다.”는 방침이었다. 푸쭤이는 경비하는 군경에게 “학생들을 때리지 마라. 총을 휴대해서는 안된다.”고 지시하였다. 리쫑런이 부총통으로 베이핑에 있고 사령관인 푸쭤이가 반대하는데도 부사령관인 천지청은 강경진압을 지시하였다. 총격으로 학생들이 죽고 다치자 화북과 동북의 학생들이 베이핑에서 가두 시위를 벌였다. 학생 만여명은 베이징 대학교 ‘민주광장’에서 추모대회를 열었다. 이 사건뒤 리쫑런은 세 차례 학생대표를 면담하였다. 푸쭤이는 사건 발생 다음날 담화를 발표하여 “희생된 학생들에게 동정을 표한다. 동북 학생들의 취학 및 생활문제를 해결하겠다. 사건발생 주모자를 조사하여 처분할 것”이라고 입장을 밝혔다.

그 뒤 푸쭤이는 난징의 행정원에 의견을 전달하고 “자신은 사건에 책임을 지고 사퇴할 것”이라고 밝혔다. 푸쭤이의 행동은 사실상 장제스에게 천지청 및 베이핑에 주재하는 정보 책임자 및 특무 책임자를 소환하라고 요구한 것이었다. 장제스는 천지청을 해임하고 청년군을 베이핑에서 철수시켰다. 푸쭤이의 요구에 응한 것이다. 하지만 국민당은 금방 베이핑의 학생운동에 대한 탄압을 개시하여 시위 주동학생 250명을 체포, 특별 형사법정에서 재판을 받도록 하였다. 베이핑의 7월 학생시위에 대한 탄압은 전국의 학생들을 국민당 정권에서 더욱 이반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국민정부의 화폐개혁 실패

1948년 8월 19일, 국민정부는 ‘재정경제 긴급 처분령’을 공포했다. 이 명령의 핵심은 화폐개혁이었는데 금원권(金圓券)을 새로 발행하여 통용하던 법폐를 대체하였다. 발행 당시 금원권 1위안은 법폐 300만위안에 해당하였으며 4달러의 액면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국민정부가 금원권을 발행한 것은 물가앙등으로 인한 통화팽창을 감당하기 어려워서였다. 계속 확대되는 군비도 감당하기 어려웠다. 금원권 발행 이전에 사용하던 법폐는 폐지되었다. 폐지되기 직전 법폐는 통화량이 11배나 증가하였으며 액면가는 60배로 올랐다. 즉 기준년도의 백위안과 6,000위안이 같은 값어치라는 뜻이니 그로 인한 경제적 혼란과 위기는 말할 필요도 없었다. 그리고 동북에 유통하던 화폐는 30만위안당 1위안으로 교환하여 주었다. 지역마다 화폐단위와 교환가치가 다르니 화폐개혁의 취지가 반감되게 되었다.

8월 20일에는 ‘물가상한제’를 공포하였다. 즉 금원권 발행을 20억위안으로 제한하고 물가를 8월 19일 수준으로 동결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물가앙등 조건은 그대로 둔 채 시행하는 폭력적인 조치가 성공할 리가 없었다. 오히려 시작부터 전국의 상품 유통이 마비되었다. 국민정부가 전국 각지에서 현지 물품 가격대로 금원권을 환산해 주었기 때문이다. 물가상한제 때문에 거래는 암시장으로 몰렸고 사회는 더욱 혼란에 빠졌다.

1948년 10월 1일, 국민정부는 물가 상한 정책을 폐지하였다. 또 사람들이 소지한 금은에 대하여 금원권의 태환율을 높일 수 있도록 승인하였다. 그러자 물가가 다시 맹렬하게 폭등하기 시작했으며 금원권의 가치는 추락하였다. 10월 11일, 국민정부는 다시 ‘금원권 발행방법의 수정’을 공포하여 발행총액제한제도 폐지하였다. 1949년 6월에 이르면 금원권 발행 총액은 본래 제한했던 액수의 6만 5천배에 이르렀다. 액면가도 갈수록 높아져 처음에 가장 높은 액수의 화폐가 1백원이었던 것이 나중에는 50만 위안과 백만위안짜리까지 등장하게 되었다. 금원권이 유통된 지 일년도 되지 않아 폐지나 다름없게 되었던 것이다. 국민정부의 재정과 금융은 완전히 붕괴되었으며 사람들은 아예 금원권의 사용을 거부하게 되었다.

장징궈(漿莖國) 호랑이를 때려 잡으러 상하이로 가다

1948년 국민당 치하의 경제붕괴를 이야기하려면 장징궈를 빼놓을 수 없다. 장징궈는 장제스의 맏아들로 첫 번째 부인 소생이다. 장징궈는 1910년 저장성 펑화(奉化)에서 태어났다. 장징궈는 상하이에서 중학을 마치고 15세 때인 1925년 소련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는 소련 모스크바 중산대학에 입학했는데 그해 소련 공산당에 입당했다. 1927년 장제스가 4.12 정변을 일으켜 노동자들과 공산당원을 학살하자 17세이던 장징궈는 소련에서 푸대접을 받게 되었다. 공자 대접을 받다가 하루 아침에 시베리아 주둔 부대의 일등병이 된 것이다. 4.12 정변이 일어났을 때 장징궈는 “장제스가 혁명을 배반했으며 이를 성토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1928년 가을에 그는 모스크바로 돌아왔다. 그는 레닌그라드 홍군 군사학교에 입학했다. 1935년 장징궈는 소련의 광산 노동자인 파냐(Faina Ipatevna Vakhareva)와 결혼했다. 파냐는 나중에 장팡량(漿方良)으로 개명했는데 장징궈와 평생을 해로했다. 1936년 1월 장징궈는 소련에서 ‘진리보’라는 신문에 ‘장제스에게 보내는 공개편지’를 발표했다. 다음 해인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12년만에 귀국했다.

왼쪽부터 장제스 쑹메이링 장징궈

귀국한 뒤 장제스는 아들을 고향인 펑화현 시커우(溪口)로 보냈다. 거기서 ‘맹자’ ‘쩡궈판(1) 문집’ 등 고서를 읽게 했다. 소련에서 빨간 물이 든 두뇌를 씻으려 한 것이다. 장징궈는 또 쑨원과 후한민 등이 쓴 ‘총리전서’와 ‘십오년전의 장제스 선생’ 등도 읽었다. 처음에 장징궈는 난창에서 현장(2)등 낮은 직위에서 일했다. 1939년에는 삼민주의 청년단 장시성 지부 부단장등을 역임했으며 1944년에는 청년군 총정치부 주임에 올라 비로소 요직을 맡았다. 장징궈는 1945년 가을 쑹즈원이 소련에 가서 ‘중소 우호동맹조약’에 서명할 때 수행하였으며 소련군이 동북을 장악했을 때는 동북행영 외교 특파원으로 가기도 하였다. 그 뒤 그는 ‘삼민주의 청년단’ 등을 맡아 장제스의 국민당 지배에 힘을 더했다.

1948년 물가앙등에 따른 화폐개혁을 단행했을 때 장징궈는 경제 중심지인 상하이로 향했다. 그는 “경제질서를 바로잡지 않으면 국가의 근본이 무너진다.”는 경각심을 갖고 경제를 어지럽히는 자들을 일벌백계할 방침이었다. 중국에서는 장징궈가 상하이에서 벌인 행적을 “상하이에서 호랑이를 때려잡다.(上海打虎)” 혹은 “장징궈가 호랑이를 때려잡다.(漿莖國打虎)”라고 부른다. 장징궈의 상하이행은 국민정부의 화폐개혁과 물가동결 조치에 뒤이은 것이었다. 대도시에 경제감독원을 파견하여 금원권 발행과 경제질서 등을 감독하게 했는데 가장 중요한 상하이에 ‘황태자’를 보낸 것이다. 장징궈는 소장파 측근들을 대동하고 상하이로 갔다. 투기분자나 매점매석을 일삼는 경제사범이면 일벌백계할 방침이었다. 그는 “호랑이를 때려잡지 파리 따위는 건드리지 않겠다.”는 명언을 남겼다.

상하이에서 악덕상인 규탄캠페인을 벌이는 젊은이들

예나 지금이나 정부가 하는 일에 고분고분 따르는 것은 소시민들이다. 당시 서슬퍼런 정부의 방침에 소시민들이나 영세 상인들은 대체로 따르는 척했다. 감춰둔 금은이나 외화를 금원권으로 바꾸고 물가동결이나 매점매석 금지에 협조하는 척이라도 한 것이다. 상하이에서 장징궈의 행동은 질풍처럼 신속하고 칼날처럼 과단성이 있었다. 정부방침에 따르지 않는 자들이 가차없이 총살을 당하는 등 즉결처분되었다. 심지어 상하이 밤의 황제라는 두웨성(杜月笙)의 아들인 두웨이핑(杜维屏)까지 감옥에 처넣었던 것이다. 두웨성은 장제스를 도와 상하이 4.12 정변을 일으킨 주역이었다. 당시 암흑가의 두목인 두웨성이 자객과 폭력배를 동원하여 노동운동가와 공산당원들을 때려잡았던 것이다. 장징궈의 행동은 상하이의 민심을 적지않게 가라앉혔다.

그러나 물가앙등의 조건이 그대로인데 동결 등 강압적인 조치만으로 성공할 리는 없었다. 상인들은 물건을 쌓아놓고 내놓지 않았다. 시장의 거래는 거의 끊기고 사람들이 암시장으로 몰렸다. 장징궈의 호랑이 때려잡기도 실패로 끝났다. 장징궈가 조사하려던 주요 기업 중 하나가 쿵상시(孔祥熙)의 아들 쿵링칸(孔令侃)의 소유였던 것이다. 쿵링칸의 어머니가 쑹아이링이니 쑹메이링의 큰언니로 장제스의 처형이었다. 쑹메이링이 장제스에게 항의하고 이로 인해 석방압력이 들어오자 장징궈의 호랑이 때려잡기도 끝이 났다. 1948년 11월 1일, 물가동결조치는 전면 취소되었으며 이를 결정한 웡원하오(翁文灝) 내각도 총사퇴하고 물러났다.

공산당 하얼빈에서 노동대회를 열다

장제스가 물가앙등과 경제혼란으로 시련을 겪고 있는 가운데 공산당은 착실하게 세력을 넓혀가고 있었다. 집권세력이 아니었던 만큼 공산당이 받는 부담은 국민당과 비교할 수 없었다. 공산당은 1948년 8월 1일 하얼빈에서 제6차 노동대회를 소집하였다. 공산당이 기반을 농촌에 두고 있어도 노동운동은 여전히 중요한 지지기반이었다. 당시 중국에는 283만명의 조직 노동자가 있었다고 한다. 노동조합에 가입한 사람이 그만큼 되었으니 인구가 많은 중국이라고 하여도 결코 적은 숫자는 아니었다. 이 대회는 공산당 중앙이 “노동운동이 전국 해방전쟁을 지원하게 할 필요가 있다.”고 인식하여 소집하였다. 공산당계 신문은 이날 대회가 “날씨는 맑고 태양은 밝게 비치는 가운데 열렸다.”고 보도하였다. 주석단 위에는 마오쩌둥과 주더의 커다란 초상화가 걸려 있었으며 양쪽에 홍기를 게양하였다. 그 아래에는 “전국의 노동자계급은 단결하자.”고 쓴 플랑카드를 걸어 놓았다. 이날 대회에 전국의 해방구와 하얼빈 시 노동조합을 대표하여 518명이 참가하였다. 특히 국민당 통치지역의 대표가 삼엄한 봉쇄망을 뚫고 참석한 것은 “중요한 승리”라고 기록하고 있다.

대회에서 노동운동 출신의 리리싼이 개막사를 하였다. 리리싼은 과거 공산당의 영수였으나 모험주의 노선이라는 비판을 받고 물러났다. 실은 소련과 코민테른의 지시에 따른 것이었으나 무장봉기 실패에 대한 책임을 진 것이다. 그래도 류샤오치와 함께 공산당 안에서 여전히 노동부문을 대표할만한 인사였다. 천윈은 ‘중국 노동운동이 당면한 임무’라는 보고를 통해 “제국주의 및 그 주구들의 반동통치를 철저하게 뒤엎고 신민주주의에 입각한 민주공화국을 수립하자.”고 제안하였다. 그는 또 “해방구의 노동조합들은 생산을 발전시키고, 경제를 번영하게 하며 회사와 서로 도와야 한다. 그것이 노자 간에 유리하다.”는 총방침을 제시하였다. 천윈은 “전체 노동자가 단결하여 더 열심히 노동하고, 기율을 준수하여 노동자들의 일상적인 이익을 보호하자. 통일과 혁명의 최후 승리를 위해 분발하자.”고 호소하였다. 이날 대회는 ‘중화 노동조합 총동맹’의 규약을 통과시켰으며 ‘국민당 통치지역 노동운동의 보고와 결의’를 통과시켰다.

하얼빈 제 6차 노동대회 주석단의 모습

대회는 집행위원회를 열어 천윈을 ‘중화노동조합 총동맹’ 주석으로 선출했다. 리리싼과 류닝이, 저우쉐판은 부주석으로 선출되었다. 천윈은 당시 중공 동북국 부주석겸 동북 인민해방군 부정치위원을 맡고 있었다. 동북에 간 이래 줄곧 동북의 경제정책을 총괄하는 책임자로 활동하였다. 리리싼은 1930년 당서기에서 물러나 소련에 가 있었다. 코민테른에서 활동하던 그는 1946년 귀국하여 노동운동의 지도자로 활동하고 있었다. 어쨌든 중국 노동운동의 대표적 지위에 모두 공산당의 주요 지도부 인사들이 오른 것은 중국 노동운동의 앞날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1949년 신중국 성립 뒤 명예 주석으로 위촉한 류샤오치까지 포함하면 중국 노동운동은 노동자들의 자주적인 조직이라기보다 당의 부속기관이 되었다고 해도 지나친 표현이 아니었다. 이날 결의한 내용만 보더라도 전쟁 상황에서 경제적으로 가장 고통받는 노동자들이 “불만을 참고 생산에 힘쓰자는 것”이었다. 파업이나 태업, 시위나 경영진에 대한 항의등 노동조합의 기본적인 행동권를 자제하자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공산당 신장(新疆)(3)으로 세력을 확장하다

1948년 8월 1일, ‘신장보위 평화민주동맹’이 신장 서북부 도시 이리(伊寧)에서 설립되었다. 중국 공산당은 이 조직의 설립이 “해방전쟁 중 신장 정치무대에서 가장 큰 진보적 조직이 탄생한 것”이라고 표현하였다. 이 조직이 “신장의 각 민족을 연합시키고, 각 계층의 군중을 통일전선으로 결속시키며 정당의 기능을 갖출 것”으로 기대하였다.

신장평화민주동맹 주석 아흐마이티장

신장은 이미 ‘신장 3구 혁명’이라는 봉기를 겪은 바 있었다. 1944년 8월, 이리(伊犂), 타청(塔城), 아산(阿山) 등 세 곳에서 코민테른과 중국 공산당이 주도하여 봉기를 일으켰다. 이들은 임시정부를 구성하여 국민정부와 대립하였는데 공산당도 이 지역에 부단히 세력을 키워왔다. 결국 임시정부 안에서 민족주의 세력을 몰아낸 ‘평화민주동맹’ 등 공산당 지지세력이 위 세 지역에서 할거하며 국민정부와 계속 대립하였다. 이들은 1949년 신중국 성립에 참여하게 되었으며 무장단체도 인민해방군에 편입되었다. 하지만 중국의 신장 지배에 불만을 품은 세력이 1990년대 초부터 ‘동투르키스탄 망명정부’ ‘동투르키스탄 이슬람 운동’(4)등을 결성하여 테러등의 방식으로 분리 독립을 추구하고 있다. 신장에서의 국민정부 지배에 반항하는 운동과 공산당에 대한 협력에 대하여 마오쩌둥은 이런 말을 한 일이 있었다. 그는 1949년 8월 18일 신장대표로 정치협상회의에 참가한 아흐마이티장(5) 등에게 보낸 참가 요청 편지에서 “당신들이 오랫동안 분투한 것은 중국 인민민주혁명 운동의 일부이다. 서북 인민해방전쟁이 발전하면 신장의 해방도 멀지 않다.”

그러나 현대 중국은 신장 위구르 지역에서 한족과 위구르 사이에 격화되는 갈등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 과연 ‘신장 평화민주동맹’이 추구했던 각 부족 인민들의 자유와 평등은 실현되고 있는 것일까? 그들이 ‘평화민주동맹’을 설립하며 신장 지역의 인민들에게 호소한 “평화, 우애, 정의, 진리, 자유로운 사회”는 얼마나 실현되고 있는 것일까? 필자는 두차례 신장 위구르 지역을 여행하며 계엄령 치하보다 더한 살벌한 감시와 통제를 경험하였다. 특히 서유기에서 손오공이 활약하던 화염산 부근을 여행하며 겪은 네차례 검문은 신장 지역의 주민 통제가 얼마나 심한지를 느끼게 해주었다. 신장 위구르 지역은 청나라 시절부터 국민정부에 의한 지배, 소련과 코민테른의 개입과 중국 공산당의 조직건설, 봉건 민족주의 세력과 공산당 세력의 투쟁을 거쳐왔다.

중국 공산당은 ‘신장 보위 평화민주동맹’ 설립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1) 신장 세 지역의 최고 권력기구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2) 신장 세 지역에 광범위한 통일전선을 형성하였다. 3) 세지역 혁명의 정치적 목표를 분명히 하였다. 결국 세 지역 혁명이 중국 공산당이 지도하는 중국혁명에 편입된 것이다.

붉은표시 왼쪽부터 이리카자흐자치주, 타청지구, 아러타이지구(평화민주동맹 신장 3구 근거지)

<주석>

1.청궈판은 호남지역에서 상군이라는 의용군을 모집하여 태평천국의 난을 진압한 사람이다.

2. 우리의 군수쯤에 해당된다.

3.‘신장위구르자치주’ 지역을 말한다. 중국의 가장 서쪽지역으로 중국의 십분의 일에 이르는 광대한 면적을 차지하고 있다.

4.여기서 동투르키스탄이란 신장위구르 지역을 가리킨다.

5.아흐마이티장(阿合買提江 Ahimaitijiang : 신장보위 평화민주동맹 주석으로 1949년 정치협상회의에 참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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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해남 귀농. 전 철도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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