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적록정치 성공 없이 혁신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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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년 01월 31일 08:46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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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돌이켜 보니, 4년 가까운 저의 당 정책위 활동은 참 불운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이용대 전 의장과는 당선 이전부터 황우석 사태를 지나면서 “과학과 생명윤리는 별개”라는 망언으로 부딪치더니, 1년이 안되서는 ‘북핵자위론’ 발언으로 항명 사태를 주도하게 되었으니까요.

    몸담고 있던 조직의 수장과 그렇게까지 날카롭게 맞부딪쳐야만 했던 제 부족함이 부끄럽기는 하지만, 종북주의자 수장이 진보정당의 원칙과 이상을 망가뜨리는 그 절망의 순간을 생각하면 지금도 부들거리면서 떨립니다.

       
      ▲민주노동당 내 ‘녹색정치’ 활동가들은 지난 대선 때 녹색정치사업단을 발족시켜 활동을 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틀 전에는 정책위의 첫 번째 수장이었던 주대환 전 의장의 실망스러운 글을 읽고야 말았습니다. 신당파의 “보다 적색으로, 보다 녹색으로”이라는 슬로건은 사기라는 글말입니다.

    저는 이에 결코 동의할 수 없고, 죄송스러운 말씀이지만 그런 생각이야 말로 진보운동을 질곡시켜온, 시대에 뒤떨어진 화석화된 사고일 뿐입니다. 솔직히 그와 같은 사고가 바로 혁신의 대상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용대 주대환식 사고 녹색정치의 장애물

    주대환 전 의장이 묘사하고 있는 것처럼 ‘녹색정치’는 수십 년 후에나 해결해도 되는 한가롭고 여유로운 과제가 아니라, 진보정당이 당장 뛰어들어야 할 최우선 과제 중 하나입니다.

    당장 기후온난화가 전세계적인 생태계 위기를 경고하고 있고 가까이는 삼성 기름유출 사고로 서해안 주민과 생태계가 죽어가고 있는데, 백여 년 전 서구 진보정당의 사례나 운운하면서 녹색정치를 차후의 과제로 미루다니요. 그게 무슨 진보정당입니까?

    주대환 전 의장 식의 진보정당이라면, 그것이 민주노동당이든 또다른 진보신당이든 이제는 사양하겠습니다. 노동계급에 기반한 진보정당 안에서 시도되는 녹색정치의 도전은 서구의 경험을 근거로 그 실패를 예단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오히려 현대화된 진보정당 운동이 적극 실험하고 개척해야 할 과제일 뿐입니다. “보다 적색으로, 보다 녹색으로”. 저는 신당파의 이 슬로건을 지지합니다.

    그러나 오해를 피하고자 말씀드리면, 저는 ‘아직’ 신당파가 아닙니다. 이 글도 신당파를 옹호하기 위해서 쓰는 것이 아닙니다. 당내 녹색파를 자처했던 입장에서, 당의 위기 상황에 대해서 뒤늦은 감이 있지만 발언해야 할 의무감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당의 혁신을 이야기하는 논의 속에서 녹색정치에 대한 언급과 강조가 많은 상황 때문이기도 합니다.

    우선 심상정 비대위나 신당파가 함께 제기하고 있는 핵심 혁신과제인 ‘종북주의와 패권주의 청산’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이것이 왜 문제였는지는 다른 동지들의 여러 글을 통해서 논의되었기 때문에 반복할 필요는 없을 듯 합니다. 다만 당내 녹색정치의 전진을 가로막고 있는 가장 큰 걸림돌도 이것이었다는 점을 확인하고자 합니다.

    당내에서 왜 ‘녹색정치’를 비롯한 소위 ‘소수 의제’―사실 이런 표현 자체가 패권적 발상의 소산이지만―가 주변화되고 장식품화 되었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물론 “실력이 부족했기 때문 아니냐”는 비아냥부터 할른지 모르겠지만, 당내 정치적 기회와 자원이 패권적 정파가 주력하는 의제에 의해 독점되고 ‘소수 의제’에는 극히 제약되어 왔다는 사실을 외면하면 안 됩니다. 예컨대 당의 대의기구에서 부문할당 비율의 배타성과 폭력성을 보십시오.

    종북주의와 녹색 가치 번번히 충돌

    그러나 무엇보다도 종북주의가 녹색의 가치와 번번히 충돌하고 있다는 점이 더욱 중요합니다. 혁신 대상의 핵심으로 떠오른 이용대 전 의장의 ‘북핵자위론’과 녹색의 핵심적인 가치인 ‘반핵’과 ‘반군사주의’의 원칙과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입니다. 북한 정권의 생존을 위해 진행한 위험천만한 핵실험을 미제국주의의 핵위협에 대한 방어를 명분삼아 옹호하는 것은 녹색의 가치에서 용납할 수 없는 것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황우석 사태 때에 위험한 실체를 적나라하게 드러낸, 한국사회의 애국주의와 기술민족주의에 당내 자주파들이 어떻게 동조, 동요하였는지 기억해야 합니다. 이에 따라 파시즘적 광기에 가까운 이 흐름에 저항해야 할 진보정당이 얼마나 무력해졌습니까?

    또한 현대 과학기술이 사회적 약자와 무관하게 이윤만을 위해서 움직이는지를 깨닫고 이를 폭로했어야 할, 진보정당의 예민한 감각이 얼마나 무뎌졌었는지도 깨달아야 합니다. 이 모두가 종북주의자에 의해서 조장되고 비호된 비성찰적인 민족주의에 의해 질식된 때문입니다.

    (아, 이번 기회에 당시 권영길 비대위 대표가 제게 주었다는―지도부의 기회주의적 실패를 덮기 위한―값싼 ‘영웅’ 칭호가 얼마나 저를 치욕스럽게 했는지 꼭 말해두어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심상정 비대위나 신당진영 모두, ‘종복주의/패권주의 청산’이라는 시대에 뒤떨어지고―비록 진보정당운동에는 절박한 당장의 문제이지만―네거티브한 의제에만 지나치게 붙들여 있는 것만 같아서 안타깝습니다.

    심상정 비대위이든 신당파든 지난 시기 동안, 진보정당이 왜 부활해야 하는지, 또 그 비전이 무엇인지에 대한 대국민 메시지를 충분히 던지지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심상정 비대위와 신당진영이 내세우고 있는 녹색 변화의 포지티브하고 미래지향적인 메시지가 더욱 선명히 드러나기를 바랍니다.

    비대위-신당파, 네거티브 벗어나 미래지향적으로

    그러나 심상정 비대위든 신당진영이 제시하고 있는 녹색에 대해서 우려와 회의가 만만치 않은 것도 사실입니다. 단순하게 말하기 좋아하는 언론들의 표현대로라면, 비대위든 신당파든 소위 ‘평등파’들이 주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평등파의 일부가 가지고 있는 화석화되고 교조적인 태도도 답답할 노릇이어서, 신당파가 전면에 내건 “보다 녹색으로”를 지지하면서도 전적으로 신뢰를 보내야 하는지 주저됩니다. 이는 심상정 비대위가 생태를 포함하여 진보적 가치를 다양하겠다는 선언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는 소위 평등파들이 협소한 노동계급주의 그리고 생산력주의와 같은 질곡을 과연 넘어설 준비가 되어 있는지에 대한 회의와 우려 때문일 것입니다.

    혹시나 진보정당에서 녹색을 강화한다는 것이, 평등파들이 공유하는 (폭넓은 의미에서의) 사회주의적 인식과 노선의 변화없이 녹색의 새로운 요소를 단순히 받아들이는 것으로 사고한다면 그것은 큰 오산입니다. 녹색진영이 적색을 수용하면서 비정치적이고 무정파적인 경향과 중산층적 이해관계 등을 녹색에서 밀어내야 하듯이, 적색도 스스로의 큰 단절과 변화를 각오해야 하는 것입니다.

    누군가의 표현대로 주사위는 던져졌고, 아무도 자기 자리에 머물러 있을 수는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원했건 그렇지 않았건 나설 수밖에 없는 이 길에서 ‘적록정치’의 실험이 제대로 이루어지길 희망해봅니다. 그리고 진보정당운동이 혁신하였는지 성공 여부를 가리는 중요한 척도가 여기라는 것을 잊지 말았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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