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길 끝으로 가면
    그대 활짝 웃으며 나를 맞아주겠지
    [한시산책] 백호 임제의 기개·감성
        2020년 05월 21일 10:50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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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야

    이육사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디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하던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千古)의 뒤에
    백마(白馬) 타고 오는 초인(超人)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 놓아 부르게 하리라

    사진 : 연해주 발해고성에서 바라본 풍경. 말을 달려 끝까지 가보고 싶습니다.

    익숙한가요? 네. 고등학교 교과서에 나오는 시(詩)입니다. 교과서 하면 시험과 연관되어 긴장부터 되지만, 여기서는 그럴 필요 없습니다. 저도 고등학교 때 배운 것하고 전혀 관계없는 얘기로 시작하려고 합니다.

    뜻이 크거나 높으면 동시대 사람들하고 어울리기 힘듭니다. 좋은 평가를 받기도 힘들고요. 그래서 그런 분들은 세상과 ‘불화(不和)’하기 십상이지요. 지금은 시인으로도, 독립운동가로도, 혁명가로도 추앙받는 이육사 선생이지만, 당대에는 어땠을까요. 이 시만 보더라도 혼자 있는 느낌이죠.

    『논어(論語)』에 보면 ‘三軍可奪帥也(삼군가탈수야) 匹夫不可奪志也(필부불가탈지야)’라는 대목이 있습니다. ‘삼군이나 되는 대군이 있어도 그 통솔하는 장수를 빼앗을 수는 있지만, 한 사나이의 의지는 빼앗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거꾸로 하면 ‘전체 군(軍)을 통솔하는 총사령관은 전체를 살리기 위해 항복을 할 수 있지만, 전체를 책임질 필요 없는 한 사나이는 자신의 뜻이 확고하면 어떤 일이 있어도 꺾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바로 ‘의지(意志)’라는 것입니다.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하던 못하였으리라

    이 대목을 보면서 저는 위의 『논어』 구절을 떠올렸습니다. 식민지 광풍을 타고 외세가 화산처럼 덮치고, 내부 기득권 세력이 그에 합세하여 국권(國權)을 유린하였을지라도 한 사나이의 굳은 뜻은 범할 수 없었음을, 그런 기개(氣槪)를 가진 이들이 있음을, ‘차마 이곳(志)을 범하지 못하’도록 지켰던 이들이 있음을 시인은 선언하고 있는 게 아닐까요.

    이육사 선생의 시 「광야」를 떠올린 것은 오늘 소개하려는 시인과 그리고 그의 시와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소개하려는 시인(詩人)은 조선의 문제적(?) 남아 백호(白湖) 임제(林悌, 1549년(명종 4)~1587년(선조 20)) 선생입니다. 왜 ‘문제적’이라고 썼는지 아래 시조를 보면 금새 아실 겁니다.

    청초(靑草) 우거진 골에 자난다 누웠난다
    홍안(紅顔)은 어디 두고 백골(白骨)만 남았나니
    잔 잡아 권할 이 없으니 그를 설워 하노라

    임제 선생이 35세 때 관찰사 바로 아래인 종5품 평안도(平安道) 도사(都事)가 되어 평양으로 부임하러 가는 도중 개성을 지나갑니다. 길목에는 유명한 기생 황진이의 무덤이 있습니다. 임제 선생은 닭 한 마리와 술 한 병을 들고 위의 시조를 지어 황진이 무덤에 제사를 지냅니다. 나중에 결국 이 일 때문에 사단이 납니다. 그만큼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사건이었습니다.

    당시는 신분제 사회였습니다. 황진이가 아무리 시문(詩文)에 뛰어난 명기라고 하지만, 기생이라는 하층 신분입니다. 관리가 부임하는 길에 기생의 무덤에 제사를 재냈다는 것은 파격을 넘어 시대의 금기에 도전하는 일이었습니다. 결국 그 일은 2년 뒤 예조(禮曹) 정랑(正郎) 겸 지제교(知製敎)라는 출세가 보장된 자리에서 탄핵당하는 이유가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는 그에 구애받지 않은 것 같습니다.

    사진 : 임제 선생 무덤 후경. 멀리 보이는 강이 영산강이고, 오른쪽 야산 넘어 영산강변에 선생의 고향마을 회진이 있습니다. 선생의 호 백호(白湖)는 흰 모래밭과 잔잔한 강물에서 따온 것이라고 합니다.

    허균(許筠)과 허난설헌(許蘭雪軒)의 시(詩) 스승이며 조선시대 중기 삼당시인(三唐詩人) 중 한 명으로 유명한 손곡(蓀谷) 이달(李達)은 임제 선생의 시를 품평하다가 ‘능수(能手)’라고 평가했다고 합니다. 능수능란(能手能爛)하다는 뜻이지요. 물론 시를 잘 짓기도 했지만 품격과 기상이 높다고 평가됩니다. 그의 시를 볼까요.

    高唐道中(고당도중)

    大風大雪高唐路(대풍대설고당로)
    一劍一琴千里人(일검일금천리인)
    僮寒馬病却無賴(동한마병각무뢰)
    嘯志歌懷如有神(소지가회여유신)
    鴉啼喬樹暮煙冷(아제교수모연냉)
    犬吠孤村民戶貧(견폐고촌민호빈)
    悠悠忽起故園思(유유홀기고원사)
    錦水梅花南國春(금수매화남국춘)

    고당을 지나며

    고당 지나는 길 눈보라 거센데
    검과 거문고 멘 천리길 나그네
    동자 떨고 말 지쳐 의지할 곳 없지만
    신들린 듯 휘파람 불고 노래 부르네
    까마귀 우는 교목엔 저녁연기 차갑고
    개 짖는 쓸쓸한 마을 백성들 가난하네
    아련한 고향생각 문득 일어나누나
    금강에 매화 피니 남녘은 봄빛이겠지

    이 시를 보고 속리산에 은거하던 당대의 대학자 대곡(大谷) 성운(成運, 1497년(연산군 3)~1579년(선조 12)) 선생은 임제 선생을 꼭 만나고 싶어 했다고 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지금 시각으로 잘 찾기 힘들지만, 동시대인들에겐 큰 울림을 주었던, 이 시의 숨은 의미를 찾아볼까요.

    임제 선생이 성운 선생을 찾아뵙고 가르침을 받은 때가 스무 살이었으니 이 시는 그 전에 지은 것이겠죠. 고당(高唐)은 지금도 같은 이름으로 쓰이는 충북 영동의 금강 가 마을 이름입니다. 임제가 나주를 떠나 서울로 가는 길에 고당에서 눈보라를 만났나봅니다. 평생 지니고 다녔다는 검과 거문고를 말에 싣고 꿈을 찾아 서울로 향합니다. 자기를 도와줄 종(동자)은 추워하고, 말은 지쳤습니다. 그래도 힘을 내봅니다. 휘파람 불고 노래 부릅니다. 때 지나 다 식어버린 저녁연기가 서려 있는 커다란 나무 위에선 문득 까마귀가 웁니다. 돌아보니 개 짖는 마을 백성들은 가난하기 짝이 없습니다.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삼국지에 나오는 조조의 유명한 시 「단가행(短歌行)」에 보이듯이 까마귀는 인재를 가리키기도 합니다. 교목(喬木, 커다란 나무)은 인재를 거둘 지도자나 나라에 해당하고요. 그런데 지도자나 나라는 찬 저녁연기 서린 교목처럼 생기를 잃어 믿음직스럽지 못합니다. 돌아보니 백성들도 헐벗고 있습니다. 이런 세상을 만든 정치는 희망이 있는 것일까요. 이런 때에 한양으로 출세의 길을 가야할까요, 말아야 할까요. 그때 문득 고향생각이 납니다. 눈보라 속에서도 금강 가에는 매화가 피었으니, 남쪽에 있는 고향에는 봄빛이 완연하겠지요. 그 봄빛은 시간의 줄을 타고 이곳으로 올라올까요. 세상은 오는 봄을 따라 따뜻해질까요.

    임제 선생의 높은 기개는 사육신을 다룬 소설 「원생몽유록(元生夢遊錄)」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선조수정실록』 10권, 1576년(선조 9) 6월 1일 임술 2번째 기사에는 아래와 같이 적혀 있습니다.

    상이 경연에 나아갔다. 판서 박계현(朴啓賢)이 입시하였다. 이어 아뢰기를,

    “성삼문(成三問)은 참으로 충신입니다. 『육신전(六臣傳)』은 곧 남효온(南孝溫)이 지은 것이니 상께서 가져다가 보시면 그 상세한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즉시 『육신전』을 가져오게 하여 보고는 크게 놀라 하교하기를,

    “엉터리같은 말을 많이 써서 선조(先祖)를 모욕하였으니, 나는 앞으로 모두 찾아내어 불태우겠다. 그리고 그 책에 대해 말하는 자의 죄도 다스리겠다.”

    이런 소식을 듣고 임제 선생은 바로 단종(端宗)과 사육신(死六臣)을 옹호하는 「원생몽유록(元生夢遊錄)」을 씁니다. 정의를 위해 벌을 받는 것도 불사하겠다는 태도였습니다. 당시 임제 선생은 28세로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에 나가기 1년 전이었습니다.

    사진 : 임제 선생이 공부했던 영모정입니다. 영산강이 마주보이는 언덕 위에 있어서 조망이 시원합니다. 선생은 아마도 이곳에서 호연지기를 기르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임제 선생의 틀에 매임 없이 호쾌하고 거리낌 없는 성품은 연암 박지원의 문집 『연암집(燕巖集)』에도 나와 있습니다.

    백호 임제가 말을 타려고 하자 종이 나서며 말하기를,

    “나으리께서 취하셨군요. 한쪽에는 가죽신을 신고, 다른 한쪽에는 짚신을 신으셨으니.”

    하니, 백호가 혀를 차며

    “길 오른쪽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은 나를 보고 가죽신을 신었다 할 것이고, 길 왼쪽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은 나를 보고 짚신을 신었다 할 것이니, 내가 뭘 걱정하겠느냐.”

    임제 선생이 벼슬을 할 때는 사림(士林)이 동서(東西)로 분당되어 당파싸움이 막 시작될 때였습니다. 황제국도 선언하지 못하는 주제에 알량한 권력다툼을 벌이는 게 눈에 들어왔을까요. 임제 선생은 당파와는 일체 거리를 둡니다. 그러나 지금도 그렇듯 패거리가 판치는 세상에서 패거리에 끼지 못하면 제대로 행세하기 어렵지요. 심지어 특별한 잘못이 없어도 세상에서 밀려나기 십상입니다.

    사진 : 물곡사비(勿哭辭碑) : 해석하면 이렇습니다. “주변 오랑캐 나라들이 다 황제라 칭했는데도, 유독 우리 조선은 중국을 섬기는 나라이다. 내가 산들 어떻고 죽은들 어떻겠느냐. 곡을 하지 마라.” 선생은 죽을 때 자손들에게 울지 마라며 이렇게 유언했다고 합니다.

    임제 선생이 병이 들어 죽음이 임박했을 때 함경도 경성판관(鏡城判官)으로 발령받은 후배 황찬(黃璨)이 찾아와

    “그대는 북도(北道)에 대해 진실로 정이 없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에 내가 이번에 부임하면서 반드시 그대의 시를 얻어 아름다운 기생으로 하여금 노래하게 하고자 했었는데, 지금 그대의 병이 심하니 어찌 한단 말입니까.”

    라고 하였습니다. 임제 선생은 즉시 부축을 받고 일어나서 붓을 잡고 시 한 수를 써서 주었는데, 그 시는 다음과 같습니다.

    送黃景潤爲鏡城判官(송황경윤위경성판관)

    元帥臺前海接天(원수대저해접천)
    曾將書劍醉戎氊(증장서검취융전)
    陰山八月恒飛雪(음산팔월항비설)
    時逐長風落舞筵(시축장풍락무연)

    경성판관 황경윤을 전송하며

    원수대 앞엔 바다가 하늘과 맞닿았는데
    일찍이 책과 검에 오랑캐 방석 깔고 취했었지
    음산에는 팔월에도 항상 눈이 날리니
    때로 긴 바람 따라 춤추는 자리에 떨어졌었지

    그리고는 얼마 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답니다. 죽음에 임박하여 지은 작품인데도 이처럼 힘차고 호방하였으니, 평소의 기상을 알 수 있습니다.

    임제 선생은 호방한 시만 쓴 것은 아닙니다. 감성이 빛나는 시들도 많이 썼습니다. 따뜻한 시선을 갖지 못한 강한 의지는 사람들을 살리는 이념이 아니라 해치는 이념이 되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에 대한 따뜻한 시선은 정의로운 세상을 만드는 모든 이념의 필수적 전제라고 할 것입니다.

    浿江歌(패강가) 六(6)

    浿江兒女踏春陽(패강아녀답춘양)
    江上垂楊政斷腸(강상수양정단장)
    無限煙絲若可織(무한연사약가직)
    爲君裁作舞衣裳(위군재작무의상)

    패강의 노래 제6

    대동강 가 소녀 봄볕 밟고 거니는데
    강가 드리운 버들 햇빛을 가르는구나
    끝없는 저 햇살로 비단 짤 수 있다면
    재단하여 임에게 춤옷 만들어 주련마는

    평안도 도사로 있는 시절에 쓴 시로 보입니다. 10수의 연작시인데, 위 작품은 그중 제6수입니다. 봄볕이 능수버들 푸른 가지 사이로 실처럼 투과됩니다. 그 따뜻한 햇살을 한 올 한 올 모아다 비단을 짤 수 있다면, 그래서 춤 잘 추는 임에게 춤옷으로 만들어 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임제 선생은 키도 큰 데다 미남이었다고 합니다. 시(詩)와 문장(文章)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늘 옥퉁소와 거문고를 가지고 다닐 만큼 악기도 잘 다뤘다고 합니다. 더욱이 무예도 뛰어나 일본 칼을 늘 차고 다녔답니다. 그야말로 팔방미인입니다. 더욱이 틀에 구애받지 않는 호방한 성격으로 승려나 뛰어난 기생들과도 잘 어울렸다고 합니다. 기생들과의 많은 일화 중에 평양의 명기 한우(寒雨)와의 사랑 이야기는 빼놓을 수가 없습니다. 둘이 나눈 사랑시가 우리나라 대표적 시조집 『청구영언(靑丘永言)』에 실려 있기 때문입니다. 먼저 임제 선생이 유혹하고, 한우가 화답합니다.

    한우가(寒雨歌)

    북천(北天)이 맑다커늘 우장(雨裝) 업시 길흘 나니
    산(山)에는 눈이 오고 들에는 찬비온다
    오늘은 찬비 마즈니 얼어 잘가 하노라

    어이 얼어 잔고 므삼 일 얼어 잔고
    원앙침(鴛鴦枕) 비취금(翡翠衾)을 어듸 두고 어러 잔고
    오늘은 찬비 마즈니 더옥 덥게 자리라

    은근한 구애와 노골적인 화답이 이후 이 둘의 관계를 짐작하고 남음이 있겠지요. 임제 선생은 호방하면서도 자유로운 영혼을 소유한 팔방미인이었습니다. 그러나 미인박명(美人薄命)이라고 했던가요. 서른아홉 살 되던 해에 그만 세상을 떠납니다. 죽으면서 마치 고승들 열반송(涅槃頌) 같은 절명시(絶命詩)를 남깁니다.

    自挽(자만)

    江漢風流四十年(강한풍류사십년)
    淸名嬴得動時人(청명영득동시인)
    如今鶴駕超塵網(여금학가초진망)
    海上蟠桃子又新(해상반도자우신)

    강호에서 풍류로 사십 년 보내고
    깨끗한 이름 얻어 사람들 감동시켰지
    이제 학을 타고 속세를 벗어나니
    선도복숭아 있는 바닷가에 새로 태어나리

    이번 한시산책은 임제 선생 한 분에게 초점을 맞췄습니다. 전세계적인 코로나 사태를 겪으면서 우리나라가 최선진국이라는 자부심이 넘쳐나지만, 저는 답답함을 함께 느낍니다. 최근 갑질 피해를 당한 아파트 경비노동자의 죽음. 40명 가까운 사망자를 낸 이천 화재사건.여전히 대한민국을 지배하는 것 같은 삼성재벌 그리고 관련된 사건들. 장터처럼 희극처럼 진행됐던 4.15 총선 등등은 저를 답답하게 하는 근거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가슴을 틔어줄 누군가가 필요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분이 임제 선생이고요. 끝으로 나의 동지이며 벗인 이성우 시인의 시 한편을 보면서 이번 한시산책을 마치겠습니다. 이 시는 간절한 사랑으로 읽어도 좋고, 간절한 소망으로 읽어도 좋을 겁니다. 간절한 사랑도 소망이긴 마찬가지인가요. 부디 선한 이들의 소망이 성취되기를 기원합니다.

    사진 : 낡은 간이역처럼 피폐한 현실이지만, 그래도 언젠가 봄처럼 기차가 오고 희망을 향해 달리기를 소망해봅니다.

    기차

    이성우

    기차를 타면
    그대 더욱더 보고 싶다.

    레일 저 끝에서
    그대 금세 달려올 것만 같다.

    도중에 만나지 못해도
    이 길의 끝으로 가면
    그대 활짝 웃으며
    나를 맞이할 것만 같다.

    어디로 향하는 기차이거나
    기차에 오르는 순간
    나는 그대에게 가는 것이다.

    (『삶이 시가 되게 하라』, 레디앙)

    필자소개
    민주노총 전국민주버스노동조합과 전국운수산업노동조합에서 일했고, 한국고전번역원에서 공부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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