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물거품처럼 사라진 당과 동지들
    [아빠의 현대사 41-1] 새 세상의 꿈, 민주노동당 창당①
        2012년 04월 30일 09:14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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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 세상을 꿈꾸는 자만이 새 세상의 주인이 된다 / 자유로운 민중의 나라 노동자 해방을 위해 / 오늘의 절망을 넘어 희망의 역사를 열어라 / 아 민주노동당이여, 이제는 전진이다 / 인간이 인간답게 사회가 평등하게 / 노동이 아름답게 민중이 주인되게 / 평등과 통일의 길에 어떠한 시련도 마다 않겠다 / 아 민주노동당이여 이제는 전진이다 (민주노동당가 ‘평등, 통일의 새 세상을 향하여’- 김문영 글 박향미 곡)

    나는 지금도 이 노래를 들으면 전율을 느낀다. 비록 지금은 아니지만 이후 진보정당이 제대로 서는 그 날이 오면 이 노래를 당가로 했으면 하는 바람도 가지고 있다. 관악구 어딘가에서 ‘술꾼’이라는 술집을 했을 때 마지막 본, 노랫말을 지은 김문영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오랜만에 다시 글을 쓴다. 그 사이에 은지, 너는 대학생이 되었구나. 아빠가 네 나이 때 그랬던 것처럼 너도 많은 고민과 갈등을 하겠구나. 누군가 질풍노도의 시대라고 젊음을 표현했었다. 네가 무얼 하든 ‘공동체의 꿈’을 꾸는 그런 생활이길 바란다. 마음은 그때와 같은 데 벌써 내 나이 오십을 넘겼구나. 젊은 날의 고민은 억만금을 주고도 못사는 것이니 하루하루 잘 지내길 바란다. 노동운동 한다는 핑계로 주말에 가끔 얼굴만 스치는구나.

    민주노동당 창당대회

    권영길 위원장이 보내온 문자

    다시 글을 시작하면서 아빠는 너무 가슴이 아프다. 2000년 민주노동당을 함께 만들었던 사람들은 이제 다 나뉘어졌다. “근원아! 어디메서 한 잔 걸치고 있냐? 너 생각나서, 옆에 있으면 불러내서 한 잔 하고 싶은 생각에 ‘근원아’하고 불러봤다. <오늘 민주노동당이 법적으로 해산됐다.> p.s. (최)철호 번호 좀 찍어주라. 그 놈 보고 싶어서.” 작년 12월 5일 권영길 위원장에게 온 문자다.

    최철호는 전교조 대외협력실장으로 당에 파견 나와서 함께 일했던 민주노동당 당원번호 1번인 친구다. 그 역시 탈당했다. 그렇게 민주노동당은 10여 년 만에 역사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백년이 가는 당을 만들어 너희에게 넘겨주고 싶었는데 결국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누구는 민주노동당에 남아 있고, 또 누구는 진보신당으로 나뉘더니 이제는 통합진보당이라는 당도 만들어졌었다. 그 과정에서 나처럼 당을 탈당하고, 현재 아무런 진보정당에도 가입하지 않은 사람들도 많다.

    판단에 따라 서로 다른 길을 가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날카로운 상처를 서로에게 주고 있는 게 더 큰 아픔이었다. 얼마 전 총선 결과로 사회당과 합쳐졌던 진보신당은 법적으로 해산되었고, 5월 13일 통합진보당이 진보당으로 당명을 개정했다. 네가 만나게 될 진보정당의 역사다.

    누구를 탓할 것도 없다. 순진했던 것도 죄라면 죄다. 누구는 ‘죽 쒀서 개 줬다’라고 하지만 그조차도 무능의 다른 표현일 수도 있겠다. 천주교인은 아니지만 ‘내 탓’이 크다. 오늘의 이 아픔들이 이후 진보정치의 좋은 거름이 될 수 있을까?

    네 번에 걸친 투표로 결정된 민주노동당

    전에 말했던 것처럼 우리는 여의도 국회 앞 아스팔트 위에서 새로운 천년을 맞이했다. 돌아보면 그만큼 험난한 길이 우리 앞을 기다리고 있었음을 상징하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2000년대는 결코 희망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90년대는 전노협으로 상징되는 노동운동의 시대였다면 2000년대는 1월 30일 민주노동당이 창당됨으로써 진보정당 운동이 본격화되었음을 알리게 된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피와 땀과 눈물이 뒤에 있었는지는 이미 말했었다. 민주노동당은 전국 40여 개의 지부와 1만3천 명의 당원으로 창당되었다.

    그 과정은 매우 힘든 것이었다. 당시 제출된 당명만도 35개에 이르렀다. 결국 4차에 걸친 표결 끝에 통일민주진보당을 제치고 ‘민주노동당’으로 확정됐다. 의견이 분분했다기보다 그만큼 사람들이 새로 만들어지는 진보정당에 자기의 정열을 쏟았다는 사실의 반증이기도 했다. 그 당명들을 적어본다.

    “사회민주당, 민주사회당, (한국)민주노동당, 통일민주진보당, 진보(정)당, 한국노동당, 진보노동당, 노동(자)당, 민주진보연대(진보민주연대), 진보민주당, 민주진보당, 혁명준비당, 빛나는 길, 노동자 새세상, 노동해방당, 공산당, 노동해방당, 민주승리당, 국민과함께하는 당, 전진당, 경제민주당, 민족민주당, 진보연합당, 진보민중당, 신진민주당, 한국복지당, 민주복지당, 통일복지당. 일민(一民)당, 인간과 사회 연합, 민족회의, 참정치회복 국민연대(약칭 참정련), 정치회복 국민연대(약칭 국민연대), 진보연합당, 진보민중당”

    “진보정당이 계급정당으로 갈 것인지, 국민정당으로 갈 것인지, 대회준비위원회가 입장을 밝혀 달라.” 민주노동당 창당 전에 열린 회의(99년 4월 18일)에서 개진된 의견이다. 1시간 가까이 계속된 토론은 표결 끝에 ‘노동자가 앞장서는 민중 중심’으로 결론이 났다. 추진위원 2백35명 가운데 찬성은 1백25명이었다.

    수십 년 동안의 논쟁

    그러나 그 논쟁은 지금도 진행형이다. 민주노동당과 국민참여당의 합당 논쟁이 그것이었다. “온 국민을 위한 정치를 위해 정권을 잡겠다면서 왜 국민참여당과 통합은 반대하는가?”라는 논리였고, 결국 민주노동당은 합당을 해서 통합진보당으로 되었다. 그 과정에서 노무현 정부의 정책 기조를 가진 정당과 합당하는 것이 맞는가에 대한 비판과 노동정치의 실종에 대한 우려가 있었다.

    “새로운 진보정당의 당명은 1999년의 창당준비위원회에서 1700명의 참석자 전원이 참가하는 투표에서 민주노동당으로 결정되었다. ‘당의 중심이 노동자이며 노동자 대중의 참여와 주도성을 제고해야 한다’는 주장이 ‘노동자당으로 할 경우 지지 기반을 확대하기 어렵다’는 주장보다 더 많은 지지를 받은 결과였다. 그러나 당명의 결정에도 불구하고 이 쟁점은 당 내부의 지속적인 관심사가 되고 있다.”라고 99년 8월 29일 진보정당 창당발기인대회를 다녀 온 한 참가자는 기록하고 있다. 당 이름을 둘러 싼 논쟁이 10여 년 뒤 민주노동당의 분당과 방향을 예고하는 것이었던 셈이다.

    또 다른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민주노동당이라는 명칭은 노동운동의 사회적 시민권 획득이라는 과정이 없었다면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쉽게 말하면 노동자들이 없었다면 민주노동당이라는 당명이 생기지도 못했을 것이라는 말이다.

    왜 진보정당인가?

    기존에 많은 정당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왜 새로운 정당을 만들려고 했을까? 나는 민중당, 한국사회주의 노동당, 한국노동당을 거쳐 네 번째 당을 경험한 셈이다. 앞서도 말했지만 노동운동이 본격화된 1987년 이후 우리는 두 가지 목표를 세웠다.

    하나는 기업별로 조직된 노동조합을 넘어선 산업별 노동조합의 건설이다. 같은 일을 하는 노동자이면서도 ‘너와 나’로 구분되는 경계를 넘어야 한다. 지금은 같은 공장에서 같은 볼트를 조이면서 한사람은 정규직으로, 다른 한사람은 비정규직으로 구분돼 차별받고 있다. 이걸 넘지 않는 한 결코 노동자는 하나가 될 수 없다. 동일한 노동을 하면 동일한 임금을 받아야 하는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

    다른 하나는 ‘노동자 정치세력화’라고 불렀다. 임금인상과 같은 경제적 이해를 넘어서 정치체제 전체를 바꾸지 않는 한 노동자의 처지는 항상 그대로일 뿐이다. 오히려 국회 등을 통해 노동자의 권리를 제한하는 다양한 제도가 만들어진다. 이를 넘어서 자본의 세상이 아닌 노동자의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

    이 길은 결국 정치권력을 잡는 것이고, 따라서 정치운동이 필연적으로 필요하다는 목표를 가졌다. 기존의 보수 여당과 야당이 그것을 못한다는 것을 역사 속에서 충분히 배웠기 때문에 우리는 ‘노동자가 중심에 선 진보정당운동’을 시작하게 된다.

    서로 다른 생각 모으기

    울산에서 1992년 대통령 선거를 할 당시 나는 백기완 민중후보 선거운동을 했었다고 전에 말했었다. 그 당시 김대중을 ‘비판적으로 지지’했던 사람들이 2000년 민주노동당에 결합했다. 노동자 민중의 독자적인 정치세력화를 추진했던 사람과 보수정당에 대한 지지를 통해 정치권력을 잡아야 한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하나의 정당으로 모인 셈이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반복되고 있지만 민주노동당이 어떤 전략을 가질 것인지에 대한 생각의 차이가 비교적 뚜렷한 사람들도 모인 셈이다. 그리고 그것이 당 안에서 조정되지 못하고 결국 네가 지금 보는 것처럼 통합진보당과 진보신당으로 나뉘었던 것이다. 그 얘기는 다음에 하자.

    다른 사람들은 잘 모르겠지만 나는 민주노동당을 만드는 데 함께 하면서 브라질 노동자당(PT)을 많이 참고했다. 브라질에 가서 룰라를 만나고, 다른 사람들을 만나면서 무장투쟁을 하던 사람들과 가톨릭 신자, 동성애자, 그리고 공산주의자들이 하나의 당에 함께 하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었다.

    “PT안에는 여러 가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모두 모여 있다. 이데올로기 면에서 보면 정말 다양하다. PT에서 중요한 것은 여러 가지 생각들을 하나로 모으는 것이었다.” 나중에 브라질 대통령이 된 룰라의 말이었다. 결국 우리는 여러 가지 생각들을 하나로 모으는 데 실패했고, 지금도 그렇다.

    필자소개
    대학 입학과 동시에 전두환을 만나 인생이 바뀜. 원래는 학교 선생이 소망이었음. 학생운동 이후 용접공으로 안산 반월공단, 서울, 부천, 울산 등에서 노동운동을 함. 당운동으로는 민중당 및 한국사회주의노동당을 경험함. 울산을 마지막으로 운동을 정리할 뻔 하다가 다행히 노동조합운동과 접목. 현재의 공공운수노조(준)의 전신 중의 하나인 전문노련 활동을 통해 공식적인 노동운동에 결합히게 됨. 민주노총 준비위 및 1999년 단병호 위원장 시절 조직실장, 국민승리 21 및 2002년 대통령 선거시 민주노동당 조직위원장 등 거침. 드물게 노동운동과 당운동을 경험하는 행운을 가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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