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오쩌둥과 중공 중앙,
    시바이포에 자리를 잡다
    [국공내전㊱] 해방군, 중원의 카이펑과 상양에서 연승하다
        2020년 05월 20일 10:40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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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8년 3월 중순, 마오쩌둥은 섬북을 떠나 시바이포로 이동했다. 시바이포는 허베이성 핑산현(平山縣)에 있는 작은 마을로 지금은 스자좡시에 속해 있다. 시바이포는 스자좡시 중심에서 90킬로미터 떨어져 있으며 삼면이 산으로 둘러 싸이고 앞에는 시내가 흐르는 작은 산촌 마을이다. 작은 마을이기는 하지만 마오쩌둥은 이곳에서 국공내전의 향방을 가르는 세 개의 전투를 지휘하게 된다. 국공내전의 3대 전투는 랴오선(遼瀋) 전투, 화이하이(淮海) 전투, 핑진(平津) 전투를 가리킨다. 따라서 16,440 평방 미터의 작은 마을이 중국혁명의 성지로 되었다.

    표시한 부분이 시바이포. 붉은 원은 주변의 주요 지역. 아래는 시바이포의 기념 동상

    마오쩌둥이 시바이포로 갈 때는 전황이 상당히 호전되었다. 마오쩌둥은 더 이상 섬북을 전전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이제는 안정적인 장소에서 좀 더 체계적으로 전쟁지도를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일년 전 옌안을 떠날 때는 국민당이 공산당을 일방적으로 밀어 붙이던 시기였다. 후쫑난 휘하 국군 부대에 쫓기면서 마오쩌둥은 중대규모의 경호부대에 호위를 받았다. 위험 속에서 마오쩌둥은 의연하고 침착하게 전투를 지도하고 당 전체의 나아갈 길에 대한 방침을 집필했다.

    마오쩌둥은 “절대로 황허를 건너지 않겠다.”는 결의를 보였다. 공산당원들과 해방군 전사들의 결의를 높이기 위해서였다. 마오는 지도부를 둘로 나누어 위험에 대비하면서 황허 건너 대부대가 있는 지역으로 가라는 권유를 거듭 뿌리쳤다. 오히려 류샤오치, 주더 등 제 2 지도부가 화북에 있는 네룽전 휘하의 부대로 이전해 갔으며 자신은 저우언라이, 런비스와 함께 일년 내내 섬북을 전전하였다. 양상쿤, 리커농, 예젠잉을 중심으로 하는 중앙 후방공작위원회는 5,000여명의 요원과 함께 섬북 린현(臨縣)에서 후방업무를 보고 있었다. 이제는 섬북의 전황도 교착상태에서 공세로 돌아서고 있었다. 1948년 3월이면 펑더화이 휘하의 서북 야전군이 옌안을 탈환하기 한걸음 전이었다.

    3월 23일, 마오쩌둥, 저우언라이, 런비스는 마침내 황허를 건너 동쪽에 도착했다. 진수 해방구(산시성과 내몽골 일부를 관할)를 거쳐 4월 13일에는 진찰기(산시, 차하얼, 허베이성 일부 관할) 군구 소재지인 푸핑현(阜平縣) 청난좡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이른바 ‘청난좡 회의’를 열어 정치공세 방향과 군사방침, 그리고 부대개편 등을 단행하였다. 5월 23일 마침내 마오쩌둥이 시바이포에 도착하여 중공 중앙기관의 주둔지 이전이 완료되었다. 다음은 마오쩌둥의 기밀비서로 있던 예즈룽(葉子龍)과 마우이(馬武義)의 회고이다.

    예즈룽은 1935년 5월부터 마오쩌둥 곁에서 일상생활은 물론 기밀문건 등을 관리했다. 그는 1962년까지 27년간 마오쩌둥의 비서로 있었으며 2003년 세상을 떠났다. 이 인터뷰는 세상을 떠나기 한 달 전 86세에 했던 것이라 한다. 마우이는 1948년 5월부터 1956년 11월까지 8년간 마오쩌둥의 경호원으로 있었다. 그는 마오쩌둥과 농담을 주고받을 수 있었던 몇 명 중 하나였다.

    예즈룽의 회고 “전국이 해방되면 너는 삼일 밤낮을 자도 된다.”

    1948년 5월부터 마오 주석은 시바이포에서 중국혁명사에서 찬란했던 10개월을 보냈다. 전쟁시절 주석의 일은 당과 군대의 생명선과 같았다. 중앙의 서기처 중 판공실이 설립되고 나는 부실장을 맡았다. 요원은 모두 십 몇 명이었는데 각 전장과 첩보를 주고받았다. 첩보는 24시간 쉬지 않고 전달되었다. 시바이포 시절이 전보 왕래가 가장 많았으며 중앙의 기밀사업도 가장 많았다. 주석은 밤새 일하는 게 습관이라 많은 전보를 밤중에 작성하였다. 대부분이 급전이어서 작성 즉시 발송되었다. 하지만 각 전장에서 오는 전보는 대부분 낮에 수령했다. 이러다 보니 기밀 요원들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을 했다. 나는 제대로 잠을 잘 수가 없어 계속 담배를 피워야 했다. 하루는 내가 책상에 엎드려 자고 있는데 갑자기 “예즈룽”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주석이 온 것이었다. 주석은 판공실 소파 위에 앉아 말했다. 주석은 “좋아, 너는 자면서도 바로 깨니 장제스가 잠을 못 이루겠구나.” 하고 웃었다. 그리고 “전국이 해방되면 삼일 밤낮을 자도 된다. 하지만 지금은 이겨내야지. ”하고 격려했다. 주석이 전보를 한 통 가져 왔길래 나는 곧바로 업무에 착수했다.

    마우이의 회고 1. “주석은 억지로 나를 재웠다.”

    1948년 5월부터 나는 리인차오(李银橋)와 함께 주석 바로 곁에서 경호원으로 있었다. 경호원이 둘밖에 없어 우리는 휴식시간이 거의 없었다. 잠깐씩 틈을 내어 잠을 자야 했다. 7월초 시바이포의 날씨는 매우 더웠다. 저녁 시간에 주석은 주로 밖에서 일을 하였다. 당시 주석이 일하던 후원은 안에서 문을 거쳐 나가야 했다. 통로에는 좁다란 벽돌이 깔려 있었으며 길 옆에 커다란 홰나무가 한그루 있었다. 그 나무에 전등을 달아 놓았는데 그 아래에 대나무 의자 몇 개와 대나무 책상 한 개가 놓여 있었다. 그 곳이 주석이 일하는 자리였다.

    어느 날 주석은 후원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새벽 1시가 좀 넘었을 때 나는 당직실에서 주석이 쓸 연필을 깎고 있었다. 그때 주석이 담배를 붙여 물고 오더니 나에게 주전자에 물을 떠오라고 시켰다. 내가 물을 떠오자 주석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가서 자라, 이제 더 시킬 일이 없다.” 그러더니 나를 침대로 끌고 가 눕히고 내 신발을 벗기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다고 잘 수는 없었다. 한참동안 나는 자는 척을 했다. 인기척이 들려 가만히 머리를 들고 주석 쪽을 바라 보았다. 주석이 발소리를 죽여 당직실로 오고 있는 참이었다. 나는 얼른 침대에 누워 자는 척 했다. 주석은 나를 내려 보더니 조용히 되돌아서 일하러 갔다.

    2. 주석은 나에게 교양을 쌓으라고 했다.

    1947년 2월 나는 주석을 지키는 중앙 경호대원이 되었다. 나는 기병 중대장이었는데 집에 편지 한 통을 보내고 싶었다. 하지만 당시 나는 글자를 하나도 몰랐다. 그래서 글씨 대신 그림을 그렸다. 기병이 되었다는 뜻으로 말 한 마리를 그렸다. 양말과 신발이 필요하다는 뜻으로 양말과 신발을 그렸다. 주석이 그것을 보더니 한참 웃었다. 그러더니 우리에게 이야기했다. “너희들은 모두 가난한 집안 출신이다. 글자 몇 개도 모르는 것이 무리가 아니다. 전쟁할 때는 그런 게 별 문제가 안된다. 하지만 평화가 와서 건설할 때도 그러면 안 되지. 너희들 시간이 나는 대로 교양을 쌓아야 한다. 교양이나 지식이 없으면 일할 수 있는 바탕이 없는 거다. 문화적 소양을 쌓아야 어떤 일이라도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때는 연필도 없고 종이도 없었다. 선생은 더더욱 없었고 사람들은 모두 바쁘게 일했다. 나는 빈틈을 이용해서 온갖 방법으로 공부했다. 행군할 때 배낭 위에 글씨가 있는 종이를 붙여놓고 익혔으며 나뭇가지로 땅바닥에 글씨를 쓰기도 하였다. 1948년 시바이포에 있을 때 나는 그럭저럭 글자를 알게 되었다. 그래서 벽보 담당 위원이 되기도 하였다. 그때 주석이 나를 보고 이야기했다. “지금도 글자 대신 그림을 그리나?” 나는 자랑스러워서 큰소리로 “지금은 아닙니다. 벽보 담당 위원이 되었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주석은 그말을 듣더니 흐뭇하게 웃었다.

    3. 기병이 지프차를 배웅하다.

    주석이 시바이포로 온 뒤 01부대로 칭하던 중앙 경호연대는 모두 주변 마을에 주둔하게 되었다. 연대의 기병중대는 부근 후이서춘(回舍村)에 주둔하였다. 내가 속한 분대는 신화사 방송국의 경비 임무를 맡았다. 1948년 7월부터 나는 주석이나 중앙 요인들이 바깥 활동할 때 현장 경비를 맡게 되었다. 구체적인 임무는 시바이포에서 동바이포까지의 길과 협곡을 일이었다. 우리가 맡은 시간은 점심후부터 심야까지였다.

    어느 날, 우리는 수양버들 밑에서 마구를 정리하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주석이 시냇가로 나간다고 하였다. 우리는 급히 말을 재촉하여 시바이포로 달려갔다. 마을에 도착해 보니 주석의 지프가 벌써 달려오고 있었다. 우리는 말머리를 돌린 다음 삼렬로 지프 앞에서 나아갔다. 지프와 백미터 거리에서 앞길을 가는데 울퉁불퉁한 흙길이어서 차량의 진행이 느렸다. 시내 모래톱에 도착하여 우리가 경비태세에 들어갔을 때 지프가 도착했다. 주석이 차에서 내린 뒤 우리에게 다가왔다. 주석은 우리와 악수를 하며 말했다. “ 너희들 기마술이 참 좋구나. 날아가는 것처럼 보여. 자동차가 따르지 못하니 돌아갈 때는 너무 빨리 가지 마라. 말에서 떨어질까 겁난다.” 주석은 일을 할 때 밤낮을 가리지 않아 신변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힘들어 했다. 바깥이 깜깜해져야 주석은 문건과 연필을 내려놓았다. 일을 마치면 주석은 물을 한 모금 마시고 허리를 쭉 폈다. 그리고 다리운동을 하며 이렇게 농담했다. “왕모 할머니가 등을 꺼버렸네. 뭘 볼 수가 있어야지. 인제 돌아가자.” 우리는 함께 관사로 돌아갔다.

    해방군 중원에서 연전연승하다.

    1948년 초여름, 국공 간의 주요 전장은 중원이었다. 두 정치집단은 허난성과 산둥성 서북부 지역을 놓고 치열하게 각축했다. 중원 지역에 배치된 국군은 11개 정편사단 휘하 30개 여단 병력이었다. 주장(九江)에서 주장 지휘소 주임으로 있는 바이충시와 쉬저우에서 휘하 병력을 지휘하는 류즈가 최고 지휘관들이었다. 여기에 맞서는 해방군은 쑤위가 지휘하는 화동 야전군과 류보청, 덩샤오핑이 지휘하는 중원 야전군이었다. 물론 전략적 선택은 장제스와 마오쩌둥을 수뇌로 한 국군 통수부와 중공 중앙 군사위원회의 몫이었다. 그래도 현장에서 직접 전투를 지휘하는 현지 지휘관들의 역량과 태도가 가장 중요했다.

    뤄양에서 맞붙었던 국공의 다음 전장은 카이펑을 비롯한 허난성 동부지역이었다. 주력 일부를 황허 남쪽으로 보내려는 해방군과 막으려는 국군 사이에 대규모 전투 발발은 시간문제였다. 중공 중앙 군사위원회는 화동 야전군 사령이던 쑤위에게 주력 일부를 황허 건너 산둥성으로 진격시키라고 지시했다. 이에 따라 해방군 3개 종대가 허난성 푸양에서 황허를 도하하여 산둥성 딩타오(定陶), 청우(成武) 지역으로 진출했다. 국군 통수부는 해방군의 황허 도하 소식에 크게 놀라 치우칭첸이 지휘하는 국군 5군을 남하시켜 이를 차단하게 하였다. 그러자 해방군은 공격방향을 다시 허난성 카이펑으로 돌렸다. 카이펑은 송나라 때 도읍지로 당시 허난성 성도가 자리잡고 있었다. 해방군은 카이펑을 쳐서 구원 오는 5군을 도중에 섬멸할 계획이었다.

    갑자기 기습을 당한 카이펑은 쉽게 허물어졌다. 카이펑의 수비군은 각지에서 출발한 지원병이 오기를 기다렸지만 모두 해방군의 저지에 막혔다. 카이펑 성 국군 수비군은 4일간 처절한 공방전을 벌이며 저항했지만 결국 함락되었다. 장제스로서는 뤄양 함락 뒤 두 번째 맞는 비보였다. 장제스는 치우칭쳰의 5군과 어우수녠이 지휘하는 7병단에게 카이펑을 탈환하라고 지시했다. 치우칭첸은 장제스의 애장으로 국군 5대 주력 중 하나인 5군을 지휘하고 있었다. 그는 별명이 ‘미친 놈’으로 그만큼 전투에서 과감했으며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면 상관의 명령도 잘 듣지 않았다. 치우칭첸은 항일전에서도 많은 공을 세워 중국에서 항일명장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만큼 공산당에게는 강적이었다.

    해방군은 카이펑성에서 철수하며 치우칭첸(邱清泉)을 공성계로 꾀었다. 과연 성격이 과감한 치우칭첸은 곧바로 진격하여 카이펑성을 점령했다. 성격이 조심스럽고 신중한 어우수녠은 카이펑 서쪽으로 우회하여 전진이 느렸다. 해방군 지휘관 쑤위는 곧바로 목표를 치우칭첸의 5군에서 어우수녠의 7병단으로 바꿨다. 7병단이 이동 중에 있으며 전력이 5군보다 약했기 때문이다.

    7병단 휘하 5개 여단은 6월 30일 허난성 룽왕디엔(龍王店)에서 매복하고 있던 해방군에게 분할 포위되었다. 75사단장 선청녠(沈澄年)이 어우수녠에게 적이 공격태세를 굳히기 전에 탈출하라고 권하였다. 그러나 그는 신변에 만여명의 정예병력이 있으므로 고수하면 승산이 있다고 생각하였다. 7월 6일, 진지가 돌파되고 어우가 포위망을 돌파하던 중 탱크가 고장이 났다. 부득이 그는 포로가 되었다. 운이 없었던지 그는 호송병에게 얻어맞았다. 호송하던 해방군 전사에게 “쑤위를 만나게 해주게.”하고 말했다가 호송병이 “네가 뭔데 감히 사령을….”하며 비웃더니 한참을 두들겨 팼다.

    곡절 끝에 쑤위를 만났는데 쑤위는 적장에게 예의를 갖춰 대화를 해 주었다. 쑤위가 어우수녠에게 물었다. “전황을 어떻게 보시오?” 그는 쑤위에게 “좋을 때 물러나는 게 좋소. 욕심을 내지 마시오.”하였다. 쑤위는 웃으며 고개를 가로젓더니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러다 쑤위는 쓴맛을 보게 된다. 어우수녠은 전범으로 투옥되었다. 그는 1950년 석방되어 51년에 고향인 광저우로 되돌아 갔다. 어우수녠은 민혁 화남위원회 위원으로 임명되었다가 1954년 광저우시 정협 상임위원에 임명되었다. 그의 장손이 90년대 중국 축구계의 명사인 어우추량(區楚良)이다.

    카이펑을 점령한 해방군

    맹장 황바이타오, 전황을 역전시키다

    황바이타오는 잡패군 출신의 국군 맹장이다. 그는 일찍이 산둥성의 공산당 근거지를 공격할 때 장링푸의 74사단과 함께 이멍산 근거지를 함락하여 장제스의 신임을 샀다. 또한 산둥성 자오둥 전투 때 쉬스유가 지휘하는 해방군을 반도 끝까지 몰아 붙였다. 장제스가 중원에 병력을 증강하려고 회군시키지 않았다면 해방군 산둥성 동부병단은 전멸의 위험에 처했을 것이다. 자오둥 반도 끝까지 밀려 달아날 곳이 없었던 것이다. 황바이타오는 국군 지휘관들이 즐기는 댄스파티에 한 번도 참석하지 않았다고 한다. “나라에 우환이 있는데 댄스파티가 될 말이냐?”하고 개탄하였다. 뿐만 아니라 국민당과 군부에 뿌리 깊은 부패를 아주 싫어했다고 한다. 중국에서도 황바이타오는 ‘항일명장’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군인 중의 군인으로 항일전에서 많은 공을 세웠으나 자신의 신념 때문에 내전의 희생물이 되었다.”고 안타까워할 정도이다.

    황바이타오. 그는 국군 지휘관 중 가장 손꼽히는 맹장이었다.

    해방군이 어우수녠의 7병단을 포위했을 무렵 국군 통수부는 산둥성 옌저우에 있는 25사단을 이동시키고 다른 두 개 종대를 합하여 황바이타오에게 인솔하라고 명령했다. 황바이타오 병단이 편성된 것이다. 황바이타오 병단이 산둥성에서 허난성 경계를 넘어설 무렵 쑤위는 목표를 황의 병단으로 선택했다. 황바이타오 병단이 먼 길을 와서 피로한데다 잡패군 출신으로 장비와 전력이 약했기 때문이다. 황의 병단이 허난성 동쪽 경계인 디구디엔(帝邱店)에 이르렀을 때 각 지역에서 출격한 해방군 부대에게 막혔다. 황의 부대는 위기에 처했다. 멀리 원정을 와서 지칠 대로 지친데다 연일 격전을 치렀던 것이다. 그러나 황바이타오는 병단 사령관인데도 직접 부대를 인솔하여 해방군 진지에 역습을 가했다. 전투가 격렬해지자 전멸위기에 있던 7병단 잔여 부대가 황바이타오 병단의 공격으로 열린 포위망밖으로 탈출했다. 황바이타오 부대와 쑤위의 해방군이 치열한 격전을 벌이고 있을 때 국군의 지원부대가 도착했다. 카이펑 성에서 출격한 치우칭첸의 부대가 황바이타오와 전투하는 해방군의 측면을 맹공했다. 장제스가 치우칭첸에게 “우군이 공격을 당하고 있는데도 성안에서 보고만 있느냐? 당장 읍참마속할 것이로되 공을 세워 속죄하라.”고 독려했던 것이다.

    해방군이 앞뒤로 공격을 당하게 되자 쑤위는 부득이 부대를 후퇴시켰다. 황바이타오가 전세를 뒤집은 것이다. 병단 사령원임에도 직접 부대를 이끌고 돌격한 것은 국군에서 그가 유일하다고 한다. 이 전투로 황바이타오는 9월에 장제스로부터 직접 청천백일 훈장을 받았다. 장제스는 위둥전투를 ‘황판취 대첩(黄汎區大捷)’으로 부르며 황을 크게 칭찬했다. 그리고 황을 7병단 사령원으로 발탁하였다. 그러나 이 파격적인 승진은 치우칭첸 등 동료들의 불만을 샀다. 황바이타오는 여전히 잡패군 출신 대접을 받았던 것이다. 치우칭첸은 군단장 지위를 박탈당하였다. 그는 집안의 상사를 핑계 삼아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러자 구쭈통 이하 황푸 군관학교 동기, 선후배들이 모두 장제스에게 치우칭첸을 선처할 것을 탄원하자 얼마 후 직위를 회복하였다. 치우칭첸은 5군을 확대재편한 2병단 사령에 임명되었다. 치우칭첸은 부임 명령을 받은 뒤 즉시 전장으로 돌아갔다. 그는 심기일전하여 결의를 밝혔다고 한다. “내 공비들하고 제대로 결판을 내고야 말겠다.”

    위둥전투(허난성 동부전투)에서 해방군은 국군 9만명을 섬멸하였다. 국군 쪽에서 이 전투를 ‘황판취’(1) 대첩이라고 부르며 서로 승리했다고 주장하였다. 해방군 쪽 사상자가 4만명인 것을 보면 아무래도 해방군이 우세한 전투였음을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밀리기만 하던 장제스로서는 불굴의 기세로 맞서 싸웠던 황바이타오를 국군의 표상으로 세워야 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캉쩌(康澤)와 상양(襄陽), 판청(樊城)의 전투

    상양과 판청은 삼국지의 주요 무대이다. 상양은 삼국지에 등장하는 양양이며 판청은 관우가 공격하다 죽음을 맞는 번성이다. 강을 사이에 두고 두 성이 마주하고 있으며 지금은 상양시 판청구로 되어 있다. 초한지에 이어 삼국지의 주요 무대로 등장할 만큼 예부터 병가에서 반드시 빼앗아야 하는 곳으로 꼽혀 왔다.

    아래 줄 친 지역이 상양. 위의 원 부분이 카이펑과 정저우

    1948년 1월, 장제스는 내전의 요지인 상양, 판청 지역에 심복인 캉쩌를 샹판을 관할하는 15수정구 사령장관으로 임명했다. 캉쩌는 황푸 3기 졸업생으로 장제스의 심복 중 심복이다. 그는 일찍이 장제스의 특무기관인 ‘부흥사’ 설립을 주도하였다. 그리고 장제스의 친위조직인 ‘삼민주의 청년단’을 설립한 세 명 중 한 명이 되었다. 부흥사나 삼민주의 청년단 이름을 지은 이도 바로 캉쩌라고 한다. 그는 다이리와 더불어 장제스의 2대 특무로 꼽혔다. 즉 비밀공작이나 암살, 테러 등에 20년을 종사한 것이다. 캉쩌의 손에 수많은 당원이 잡혀 죽었으니 공산당으로서는 불구대천의 원수라 아니할 수 없었다. 그는 군문에 들어서 정치공작을 주로 맡았으며 전투를 한 적이 별로 없었다. 실전경험과 군사지식이 결여되어 있는데도 장제스는 캉쩌에게 중임을 맡겼다.

    1948년 6월 18일, 화동 야전군이 카이펑 공격을 시작되었다. 해방군은 6월 22일 허난성 성도인 카이펑을 함락하고 수비군 3만명을 섬멸하였다. 그후 곧바로 화동 야전군은 허난성 동부전투 즉 위둥전투를 시작하였다. “산에 비가 오려하고 누각에 바람이 가득하네.” (山雨欲来風满樓)(2) 곧 대전투가 벌어질 조짐이었다. 캉쩌는 해방군의 다음 작전목표가 샹판이라고 생각하였다. 캉쩌는 불안하여 얼굴에 수심이 가득하였다. 부하가 캉쩌의 긴장을 풀어 주려고 44회 생일을 앞당겨 치르자고 하였다. 캉쩌가 보니 어우수녠 병단이 섬멸된 마당에 생일잔치를 할 형편은 아니었다. 그래도 주위에서 캉저의 생일날 상양 남문밖 원림의 정자에서 조촐하게 생일상을 차렸다. 주위의 몇몇 심복만 불러 잔치를 했는데 막상 그날 저녁 지역 유지들이 사령부 뒤편 큰 홀에서 크게 주연을 벌였다. 술잔이 오가고 판청 극단의 여배우가 그를 위해 만수를 비는 사(詞)(3)를 불렀다. 캉쩌가 한창 흥겨워할 때 보고가 들어왔다. 해방군이 인근 라오허커우(老河口)를 공격하여 전투가 격렬하다는 것이었다. “공산군 소부대가 아닙니다. 전황이 심각합니다.”

    잔치 분위기가 분위기가 한순간에 식었다. 그는 애써 태연하게 잔치 자리에서 벗어나 부사령관인 궈쉰치를 찾았다. 그리고 수정구의 작전, 정보처장과 함께 대책을 의논하였다. 부참모장 이첸(易謙)과 제3처장 후쉐시(胡學熙)는 그의 심복이었다. 그들은 캉쩌가 큰 전투를 치른 경험이 없는 것을 알고 부드럽게 건의했다. 전투 지휘소를 조직하여 부사령관인 궈쉰치가 지휘하게 하자는 것이었다. 사령관은 기회를 보아 포위망을 벗어나자는 것이었다. 캉쩌는 그들의 건의를 듣지 않았다. 그는 “나는 총통의 명령만 듣겠다. 결코 직무를 이탈할 수 없다.”하고 결의를 보였다. 상양성을 지키기 위해 성외의 사계를 청소하기로 하였다. 그는 미제 소이탄을 쏘아 성곽밖 민가를 모두 불태우라고 명령했다. 백성들로서는 난데없는 날벼락이었다.

    1948년 7월 2일, 위둥전투가 시작되어 어우수녠 병단이 섬멸될 무렵이었다. 류보청, 덩샤오핑, 천이는 중원 야전군 6종대 사령원 왕진산에게 샹판작전을 명령하였다. 샹판성은 상양, 판청을 총칭하는 말이다. 상양성은 북쪽으로 한수(漢水)에 의지하고 있는데 판청과 강을 사이에 두고 있었다. 성 남쪽과 서남쪽은 펑황산, 비파산, 후투산(虎頭山) 등 해발 160미터에서 460미터의 산들이 둘러싸고 있었다. 상양성을 병풍처럼 둘렀으며 성벽은 높고 두터웠다. 성벽 바깥으로는 넓은 해자가 있으며 수비는 쉽고 공격은 어려운 성이었다. 성 주위의 산에는 요새공사를 하여 예로부터 “철통같은 상양성”이라고 불러왔다. 해방군은 먼저 상양성 주위를 포위하기로 하였다.

    전투가 시작되자 상양성 수비군은 유리한 지형과 진지를 이용하여 완강하게 저항하였다. 또 매운 연기를 내보내어 해방군은 전진하지 못하였다. 며칠 동안 해방군은 성 남쪽 산악지구를 공격했으나 사상자만 증가하였다. 해방군은 산 공격을 포기하고 성을 공격하기로 하였다. 산악지역 국군이 쏘는 화포가 미치지 못하는 서문을 주로 공격하기로 하였다.

    그때 화중 초비 총사령관 바이충시가 전화로 캉쩌에게 지시했다. “적이 많고 아군이 적다. 상판 수비병력이 부족하니 판청을 포기하고 몰래 상양으로 이동시켜 집중하라. 구원병이 가니 상양을 고수하라. 이미 정편 7사단과 9사단이 길을 나누어 구원에 나섰다. 병력을 이동하는데 시일이 걸리니 7월 22일까지 버텨야 한다.” 그날 오후 판청의 수비군은 항공기의 엄호를 받으며 성을 나왔다. 한수를 건너 상양으로 집결한 것이다.

    상양성 서문 전투를 그린 만화

    7월 11일부터 해방군은 총공격을 시작했다. 서쪽을 맡은 6종대는 교통호를 파고 서쪽 관문으로 파고 들었다. 치열한 전투 끝에 해방군은 7월 13일 서관을 점령했다. 서문이 급박하게 돌아가자 캉쩌는 구원병을 기다리지 못하고 난징의 장제스에게 구원을 청했다. 장제스는 전문으로 캉쩌를 독려했다. “공산군은 멀리 원정을 와서 화포와 중화기가 없다. 산을 버리고 성을 고수하라. 구원병이 갈 것이다.” 바이충시는 그 소식을 듣고 탄식했다. “성의 감제고지를 버리다니, 그래서는 하루도 버티기 힘들 것이다. 구원군이 오면 공산군을 역으로 포위할 수 있는데…” 그러나 총통의 지시를 어찌할 수 없었다. 14일 오후 바이충시는 항공기를 보내 성 남쪽 산악지역의 국군이 성안으로 철수하도록 엄호하게 했다.

    캉쩌는 해방군의 공격을 막을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장제스에게 전문으로 결심을 밝혔다. “성과 존망을 함께 하겠습니다.” 캉쩌는 애써 태연자약한 모습을 보였다. 그는 여전히 매일 깃발을 올리고 저녁에는 내리게 하였다. 매일 부하들에게 훈화를 하며 사기를 유지하려 하였다. 마침내 그는 난징에 마지막 전문을 보냈다. “소직은 최후까지 사수하며 원군을 기다리겠습니다.”

    7월 15일 20시 30분, 붉은 색 신호탄이 허공을 갈랐다. 상양성에 대한 해방군의 총공격이 시작되었다. 대포가 서문의 방어진지를 숨쉴틈 없이 두들겼다. 폭파조는 포화를 뚫고 잇따라 폭파를 시도하여 성벽에 커다란 구멍이 뚫렸다. 6종대가 먼저 서문을 돌파하자 이어 다른 부대들도 잇따라 동남쪽과 동북쪽에서 성안으로 돌격했다. 해방군과 국군은 성안에서 격렬한 시가전을 벌였다. 16일 새벽, 저항하던 국군 병력이 캉쩌의 사령부가 있는 양가 사당과 누각 일대의 좁은 지역으로 몰렸다. 캉쩌는 완강하게 저항하며 구원병이 오기를 기다렸으나 이미 해방군에 저지당했다는 사실을 몰랐다.

    캉쩌의 사령부 주위에는 소총, 기관총, 수류탄의 폭음이 뒤섞여 울렸다. 사면팔방에 모두 해방군의 함성소리뿐이었다. “총을 버리면 살려준다. 투항하라.” 그때 참모장 후쉐시가 사병복 한 벌을 구해서 캉쩌에게 입으라고 권했다. 사병으로 변장해서 탈출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캉쩌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짓을 할 캉쩌가 아니다.” 보루와 참호 사수를 지휘하던 부관이 캉쩌에게 돌아왔다. 그러나 사령부를 아무리 찾아도 캉쩌의 그림자도 볼 수 없었다. 간신히 오른쪽 교통호에서 캉저가 머리에 헬멧을 쓰고 가부좌를 튼 채 노승처럼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부관이 경호병과 캉저를 부축하여 보루 바닥으로 데리고 가 앉혔다. 부참모장 이첸과 후쉐시는 일찌감치 사령관을 버리고 달아난 뒤였다.

    그때 궈쉰치는 중앙 보루에서 독전하고 있었다. 그의 지휘에 따라 특무부대와 헌병 수백명이결사적으로 저항하고 있었다. 오후 16시, 왕진산이 지휘하는 부대가 최후 공격을 시작했다. 대포 터지는 소리, 소총소리, 공병이 폭파하는 소리속에 양가사당의 담벼락은 산산히 무너졌다. 진지도 모두 무너졌는데 폭약 몇 발이 보루 밑에서 터졌다. 보루안의 수비군은 모두 죽거나 다쳤다. 해방군 병사들이 기관단총을 쏘며 보루 안으로 돌격할 때 캉쩌가 땅바닥에 쓰러져 있는 것을 보았다. 캉쩌는 몸 오른쪽에 화약에 의한 화상을 입었는데 머리에 헬멧을 써 생명에는 지장이 없어 보였다. 이로써 격전이 끝이 났다. 상양성을 수비하던 국군은 2만 1천명이 모두 섬멸되었다. 사령관인 캉쩌, 부사령관 궈쉰치등 고급 장교들은 모두 포로가 되었다.

    캉쩌는 장제스가 가장 총애하던 심복이었다. 장제스는 캉쩌가 전사한 줄로 알았다. 1948년 7월 22일, 국민정부 국방부는 캉쩌의 죽음을 선포했다. “제15수정구 사령관 캉쩌 장군은 상양 작전 중 순국하였다.” 다음날 대공보는 커다란 글자로 제목을 뽑았다. “상양 전투 중 캉쩌 순국, 국방부가 기자들에게 선포함” 그리고 캉쩌가 장렬하게 살신성인한 흔적을 썼다. 그러나 중공의 신화사 방송국은 캉쩌가 잡힌 다음 날, 즉 1948년 7월 17일 저녁 대외에 선포했다. “캉쩌는 상양 전투에서 포로가 되었다.” 1948년 7월 하순 ‘신문천지(新聞天地)’는 캉저가 순국한 것이 아니고 포로가 되었음을 보도하였다.

    부상을 입고 포로가 된 캉저

    캉쩌가 죽지 않고 포로가 되었다는 소식에 국민당 진영은 깜짝 놀랐다. 장제스는 사람을 보내 캉저의 처와 아들을 타이완으로 보냈다. 공산당과 인민해방군은 20년간 특무로 공산당을 괴롭혀온 캉저에게 관대한 처분을 하였다. 캉쩌를 잘 치료해 주었으며 류보청이 그를 접견하였다. 류보청은 캉쩌와 쓰촨말로 대화하며 성의를 보였다고 한다. 1961년 캉쩌는 감옥 밖에서 치료를 받았다. 1963년 4월 캉쩌는 특사로 풀려났다. 그는 전국 정치협상회의 문사 전문위원(4)을 지냈다. 캉쩌는 ‘부흥사의 기원’ ‘삼민주의 청년단 성립의 경과’ ‘2차 국공합작 담판중의 나’ 등 회고록성 저작들을 썼다. 캉쩌는 1967년 베이징에서 병으로 사망했다. 향년 63세.

    국군 15수정구 부사령관 궈쉰치의 경우

    1948년 특무 출신 캉쩌가 15수정구 사령이 되었는데 휘하 3개 여단이 모두 훈련병 출신이었다. 그는 유능한 지휘관을 부장으로 두려고 생각하였다. 황푸 선배들에게 상의하니 추천하는 적임자가 궈쉰치(郭勳祺)였다. 궈쉰치는 그 소식을 듣고 크게 화를 냈다. “내가 차라리 청두의 기방에 가면 갔지, 그 자의 작은 마누라가 될쏘냐?” 육군대학 교장 양제(楊杰)가 그에게 권했다. “캉쩌에게 가지 않아도 너를 놓아줄 리 없다. 가서 네가 부대를 장악하는 게 낫지 않은가?” 그래서 그는 승낙하게 되었다.

    상판(상양과 판청) 전투가 시작되었다. 왕진산(王近山)이 산을 버리고 성을 공격하였다. 장제스는 캉쩌에게 전보로 지시했다. “공산군이 멀리 와서 대포 같은 중화기가 없을 것이다. 너는 산을 버리고 성을 지켜도 된다. 원병이 올 때까지 고수하라. 공군으로 힘껏 지원하겠다.” 궈쉰치는 의아해서 “총통이 이렇게 하니 어찌 공산군의 계략에 빠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하고 한탄했다. 캉쩌도 의아했지만 더 좋은 수성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장제스의 명령을 집행해야 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바이충시가 “우물에 빠진 자에게 돌을 던진다”고 욕하다가 총통의 어리석음을 원망하기도 하였다. 또 자기가 운이 없음을 한탄하기도 하였다.

    캉쩌는 성의 방어지도를 보며 “나는 양가 사당을 사령부로 하고 네 관을 거점으로 나누어 방어하려고 하오.” 하고 말했다. 궈쉰치는 방어도를 보더니 신중하게 말했다. “사령, 거점방어는 좋소. 하지만 지금 병력으로는 공산군이 쉽게 돌파할 거요. 막을 여력이 없어요. 지금 공산군 주력은 서문 아래에 있소. 동관을 공격하는 것은 지방부대들이오. 따라서 공산군이 힘을 쓸 곳은 주로 남문과 서문이오 그러니 우리는 남문과 서문을 중점 방어해야 합니다.” 캉쩌가 동의하여 궈의 제안대로 병력을 배치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하니 궈쉰치가 공산당과 내통할지도 몰랐다. 그래서 궈의 말을 모두 믿지 못하고 적의 주공 방향이 남문이라고 생각하여 남문 방어에 6,000여명을 배치했다. 궈쉰치가 서문이 위험하다고 했지만 잘못된 판단이라고 듣지 않았다. 서문이 가장 튼튼하고 밀집된 방어공사를 하여 난공불락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서문에는 깊고 넓은 해자에 철조망, 촘촘한 녹각과 지뢰가 매설되어 있었다. 주력이 서문을 지키면 병력도 부족했다. 하지만 캉쩌의 판단은 틀렸다. 궈쉰치와 캉쩌는 함께 포로가 되었다.

    류보청이 소식을 듣고 전보를 보내어 궈쉰치를 허난의 중원군구 정치부로 호송하게 하였다. 궈쉰치가 감사의 뜻을 전하는 전보를 보내 왔다. 전보를 담당하는 통신원이 류보청에게 와서 “전보 앞면에 받는 이 이름이 있고, 또 다른 데 중홍(仲弘) 형이라고 쓰여 있는데 누구인지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옆에 있던 천이가 크게 웃었다. “중홍이라구? 천이야 천이, 내 자가 중홍이라구. 전보 이리 줘 보게.” 하였다.

    궈쉰치가 와서 보니 류보청, 천이와 중원 야전군 부정치위원 장지춘, 보위부장 류빙린(劉秉琳) 등 야전군 고위인사들이 모여 있었다. 천이가 먼저 말을 꺼냈다. “바로 당신이구먼. 대포의 눈이 삐었지. 어떻게 살아서 상양에 간 건가?” 궈쉰치는 천이의 손을 잡더니 “중홍, 중홍형”하고 감개에 차서 불렀다. 이어서 곁에 있는 류보청에게 한 서린 투로 “전장에서 서로 맞서다니 참혹하오.”하고 말했다. 류보청이 웃으며 말했다. “당신이 무슨 말을 해도 좋소. 개의치 말고 이야기하시오.” 그들은 대혁명 시기와 홍군이 장정하던 일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항전 시기를 이야기하고 궈가 군단장에서 해임 당하던 이야기를 하였다. 천이가 유감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때는 당신도 참 빨갰는데 우리가 어떻게 당신을 보호할 수 없었소.” 궈가 성을 불끈 내더니 말했다. “그때 나는 아주 성이 났지요. 부대를 당신들에게 넘기려고 했는데, 그래서 샹잉 부사령에게 사람을 보내 연락했는데 거절을 당했소. 나는 지금도 유감이 있소.” 천이는 “그때 그게 가능했겠소? 국공합작으로 함께 항전하고 있는데 깨뜨릴 수 없었소. 그때 우리가 받아 들였으면 정치적으로 오류를 범하는 거요. 장제스가 우리에게 항일은 하지 않고 전복할 생각만 한다고 했을 거요.”하고 달랬다. 천이는 다시 궈에게 “궈형, 당신이 사정을 알았으니 화는 그만 내시오.”하였다.

    귀쉰치. 포로가 되었으나 곧바로 중용되었다.

    보름 뒤 천이는 밥을 먹으며 궈에게 이야기했다. “2년이면 전국이 해방될 거요. 지금 무엇을 하고 싶소?” 궈는 “그동안 곰곰이 생각했습니다. 나는 역시 쓰촨으로 돌아가 모반활동을 해야겠어요. 위험이 따르겠지만 아는 벗들도 많고 관계하는 이도 많지요. 나가서 말하는 것도 별문제가 되지 않을 것 같고, 나도 해방하는 데 공헌을 하고 싶습니다.” 하였다. 토론 결과 궈의 요구를 받아들이기로 하였다. 적군 공작부와 보위부가 함께 구체적인 방법을 연구하기로 하였다.

    궈쉰치는 쓰촨으로 돌아가던 도중 13수정구 왕링윈(王淩云) 부대에 체포되었다. 궈는 바이충시에게 보내졌다가 난징의 중앙의원에 연금되었다. 장제스가 하야한 뒤 육군대학 동창인 리쫑런에 의해 연금에서 해제되었다. 1949년초 궈는 난징에서 청두로 돌아가 모반공작을 펼쳤다. 그는 공개적으로 자신의 신분을 밝혔다. 즉 자신이 중원 야전군 적군 공작부에서 보낸 것을 밝힌 것이다. 그의 동창, 전우들에게 공산당의 정책을 선전하며 전향 공작을 열심히 하였다. 궈의 대상이 된 이는 난징 공군 연습기 사령인 유무췬(劉牧群), 총통부 전선 시찰관 진전싱(金振聲), 화중 초비사령부 참모 양수윈(楊續云) 등 요인들로 여러 사람들을 전향시켰다. 쓰촨 인민 보위군 총사령부가 설립된 뒤에는 사령원으로 임명되었으며 공산군의 쓰촨 점령에 기여하였다. 신중국 설립 후 그는 쓰촨 교통 부청장, 쓰촨성 수리 부청장등을 역임했다.

    <주석>

    1. 황판취(黄汎區)는 허난성 성도인 정저우의 화위안구(化苑區) 인근의 제방을 터뜨려 생긴 황토 저습지대를 말한다. 1938년 6월 9일 중국군이 일본군의 진격을 막으려고 황허의 제방을 터뜨려 허난, 장쑤, 안후이성 일대에 드넓은 저습지가 형성되었다.

    2. 당나라때 시인 허혼(許渾)의 시구절이다.

    3. 중국 고전 문학 중의 운문의 일종. 5언시나 7언시·민간 가요에서 발전한 것으로, 당대(唐代)에 처음 만들어 전해 왔다.

    4. 1959년 전국 정치협상회의 3차 회의에서 설립한 문사자료 연구위원회를 줄인 말이다.

    필자소개
    해남 귀농. 전 철도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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