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통권 환수, 남의 대북교전권 규제 푸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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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년 09월 18일 12:46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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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한국군의 전시작전통제권 환수를 둘러싼 논란이 이렇게 오래 진행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더 당혹스러운 부분은 중요한 것을 빼 놓은 채 이 논쟁이 진행되고 있을 뿐 아니라, 뭔가 빠져있다는 것 자체가 인지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1.
    지금 한국사회에서 작통권 논란, 나아가 한반도의 군비통제와 평화질서에 관한 논점을 지배하는 ‘코드’는 이른바 ‘자주 대 동맹’이라는 대당이다. 그러나 이는 분명 ‘오류코드’이다. 미국 정부가 직접 한국정부의 ‘자주노선’의 손을 들어주고, 그동안 ‘숭미파’라 질타 받던 사람들이 그에 반기를 드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그것을 말해준다.

    ‘자주 대 동맹’ 구도 비유는 잘못된 것

    사회적 논쟁이 ‘자주냐 동맹이냐’며 허깨비를 쫓는 동안 ‘대한민국의 전시 작통권 환수’라는 사건이 위치하는 더 큰 맥락, 작통권의 환수 자체 보다 더 중요할 수 있는 몇몇 문제들은 망각을 강요당한다.

    일단 당장 작통권 협상과정에 수면 위로 떠 오른 방위비 분담 문제도 그렇고, 이미 노무현 정부가 ‘협력적 자주국방’이라는 말을 꺼냈을 때부터 예정된 군비지출 증가 역시 문제이다.

    나아가 미국정부가 전향적으로 작통권을 반환하겠다고 나서는 배경이, 미국정부의 재외군사력의 재편계획에 따른 주한미군의 전략기동군화와 연관되어 있음도 큰 문제이다.

    하지만, 소위 ‘자주냐 동맹이냐’는 ‘오류코드’가 지배하는 보수 강·온파들의 논란을 넘어 한국사회, 그리고 한국의 진보세력들이 지금부터 생각해야 하는 중요한 문제 또 하나는 ‘냉전적 평화’를 넘어서는, 탈냉전의 한반도를 위한 새로운 평화질서를 이뤄가야 한다는 것이 아닐까 싶다.

    2.
    과거 적잖은 사람들에게 한국군의 작통권이 한미연합사에 귀속되어 있는 것을 군사적 대미종속의 상징적 사례로 받아들여져 왔다. 때문에 작통권 논란에 대한 ‘진보적 입장’들은 종종 노무현 정부/온건 보수세력의 ‘자주외교’ 입장을 일정부분 옹호하며, 그 불철저함이나 허구성을 비판하는 것으로 귀결된다.

    ‘협력적 자주국방’은 미국 군사력의 ‘현지화’

    그러나 많은 진보적 논자들이 이미 지적했듯, 작통권 환수논란으로 다시금 사회적 논쟁거리를 낳고 있는 노무현 정권의 이른바 ‘협력적 자주국방’이라는 것은, 근본적으로 미국의 재외군사력 재편, 군사동맹 재편과정과 결부된 일종의 ‘현지화’에 가깝다.

    이는 근본적으로 일본 우익세력의 재무장/개헌 주장이 미국의 후원 하에 힘을 얻는 것과 동일한 운동의 결과에 해당한다. 애초 냉전형 군사동맹체제를 재편하고자 하는 의지의 진원지는 서울이 아니라 워싱턴인 것이다. ‘참여정부식 언어’로 말하자면 이는 군사패권주의의 ‘분권화’라 할 수 있다.

    (나는 동북아의 한미일 삼각 군사동맹질서가 대중국 봉쇄의 형태로 진행되는 것이 단지 미국의 의지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반중노선’은 미국정부가 동북아에서 냉전형 군사동맹을 재편, 재외군사력의 슬림화, 기동군화를 달성하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비용분담 파트너인 일본 우익의 일관된 입장이기도 하다. 이는 ‘동북공정’을 비롯해 중국과 일정한 마찰요인을 지니고 있는 대한민국의 입장에서 매우 유의해야 할 부분이다.)

    3.
    그러나 작통권 문제에 대해 우리가 생각해두어야 할 논점은 하나 더 있다. 그리고 그것은 한반도 평화질서와 직결되는 문제이다. 바로 ‘정전협정’의 문제이다.

    물론 ’90년대 중반 이후 북조선(북한)은 시시틈틈 ‘정전협정’의 무효화를 선언하고는 했다. 이는 물론 이른바 ‘북-미(조-미) 평화협정’을 위한 포석이라고 말 할 수도 있겠지만, 한반도 상황에 대한 국제정치적, 군사적 주도권이 북한에게 있다고 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그 상대자들이 별 반응을 하지 않는 이상 ‘선언’이상의 의미를 지닌 적은 없었다.

    남한 정전협상 당사자 아닌 이유는 이승만 정권의 거부 때문

    어쨌거나, 북조선이 항상 분명한 교전상대국이었던 한국을 배제하고 ‘북(조)-미 평화협정’만을 주장해온 이유는 대한민국 정부가 정전협정의 당사자가 아니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북조선은 그것을 ‘이남은 자주권이 없는 미제의 식민지이기 때문’이라며 이데올로기적으로 윤색해왔지만, 그것은 사실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그야말로 정치적 선동에 해당한다. 대한민국이 정전협정의 협정당사자가 아닌 이유는 딱 하나, 이승만 정부가 정전협상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자, 그럼 정전협정문서에 도장도 안 찍은 대한민국 정부의 대북 교전행위를 규제하는 것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그것이 바로 ‘작통권’이었다. 서해교전을 통해 논쟁거리가 되었던 서해상의 북방한계선 NLL과 마찬가지로, 한미군사동맹과 교환된 한국군 작전통제권의 UN사(이후 한미연합사)귀속은 모두 그 출발에서 이승만 정부의 독단적인 대북군사행동을 막기 위한 조치로 강구된 것이다.

    따라서 작통권 환수가 의미하는 것은, 한국정부가 군사주권을 회복한다는 표면적 의미를 넘어, 한국군과 정전협정을 연결하는 고리가 벗겨진다는 의미 역시 지닌 것일 수 있다. 그것도 북조선이 했던 것과 같은 선언적 행동이 아니라, 국제법적으로 적잖은 함의가 있을 수 있는 방식으로,

    4.
    물론 그것이 당장 ‘2009년'(혹은 ‘2011년’)에 무슨 큰 일이 난다거나 하는 의미는 아닐 지 모른다.

    유사시 한-미 동맹군 북한 진입 우려하는 중국

    그러나, 현재의 동북아 상황에서 한국군의 ‘협력적 자주화’가 지닌 의미는 그저 ‘대미의존이냐 자주냐’는 표피적 논쟁만으로는 모두 이해될 수 없다.

    특히 대한민국과 북조선이 공히 상대국가의 영토가 언젠가는 자국 정부의 통치 아래 수복/통일되어야 할 자국의 일부임을 공식적 교의로 삼고 있는 상황에서 말이다. 이를테면 ‘최악의 경우’로서 만일 북조선 지역에 ‘돌발사태’가 발생하는 경우를 가정해 보라.

    게다가 당연히 미국정부가, 그리고 한국정부가 밝히듯, 지금의 상황에서 작통권이 한국군에 반환된다고 해도 한미군사동맹은 재편될 뿐이지, 결코 해소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동북공정에 대한 논란 속에 이미 이야기되고 있듯이, 만약 중국이 북조선에 ‘돌발사태’가 발생했을 때 그 지역에 ‘한국군 = 미국의 동맹국 군대’가 진입하게 되는 상황을 우려하고 있다면, 그것은 거꾸로 더욱 더 북조선 지역에 대한 개입의 포석을 놓는 것에 박차를 가하는 것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물론 ‘북조선의 붕괴, 한국군 북진…’과 같은 최악의 가상 시나리오는 그저 가상 시나리오로만 남을 확률이 더 높을 지 모른다. 하지만 미국의 군사패권주의와 동북아 각국의 국수주의적 흐름이 얽혀 갈등을 증폭시키는 현재의 동북아 상황 속에서는 단지 ‘함의’만으로도 일정한 위험성을 지닐 수 있다. 때문에 나는 현재 진행중인 노무현 정부의 ‘협력적 자주’가 역설적으로 미, 일과 중국의 패권충돌의 ‘인계철선’이 될 지 모른다는 일말의 우려를 지울 수 없다.

    5.
    물론 한국군의 작통권 환수문제 하나 만을 가지고 이렇게 까지 말하는 것은 과도한 주장이고, 기우일지 모른다.

    신기한 세월, 지난 50년의 ‘냉전적 평화기’

    그러나, 현재의 상태만을 놓고 말한다면, 어쨌든 ‘국제법’ 상으로 한국군과 대한민국 정부는 조인하지 않은 ‘정전협정’을 이어주는 고리가 풀어지는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한국군이 이처럼 정전협정과의 연관에서 벗어나게 되는 한반도의 조건 역시 그리 만만치 않은 것이다.

    한국전쟁의 교전당사국인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사이에는 지금까지도 평화유지에 대한 어떤 국제법적, 국내법적 지위를 지닌 협정이나 조약도 없다.

    심지어 적어도 자국 내에서는 (공식적으로는) 두 국가는 여전히 서로의 주권과 영토에 대해 인정하지도 않는다. 법적 논리만으로 따진다면, 한국군에게 북조선에 대한 교전행위는 거의 완전히 자의적 판단의 영역이 된다는 것이다. 대한민국 헌법 상 ‘침략전쟁’은 위헌이지만, 지금의 대한민국 헌법에 의하면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의 영토도 대한민국 영토의 일부이다.

    생각해 본다면, 지난 50여 년 간 한반도에 아주 큰 일은 없었다는 것이 도리어 신기한 일에 속할지 모른다.
    그 50여 년이 국가 간 평화유지의 기본 중에 기본인 상호 주권과 영토에 대한 존중조차 없이, 교전상대국 일방인 대한민국 정부는 조인하지도 않은 정전협정 하나로 버틴 시간이니 말이다.

    우리는 그 신기한 세월을 이를테면 ‘냉전적 평화’라고 부를 수 있을지 모른다. 단어 그 자체만으로도 모순덩어리인 이 말은, 그러나 적어도 냉전구도가 지속되는 상황에서 한반도 두 국가 사이에 지속된 평화 같지 않은 평화의 실체를 말해준다. 그것은 냉전의 핵우산에 편승해 스스로 아무런 평화노력도 하지 않고, 도리어 대결의 지속을 국내정치의 핵심자산으로 삼았던 질서를 의미한다.

    ‘탈냉전’이 평화를 보장해주는 것 아니다

    그러나 이미 그 시기는 끝을 알리고 있다. 냉전 이후의 세계에 대한 그동안의 경험처럼, 한반도에서도 탈냉전의 시대가 냉전시대 보다 평화로울 것이라는 보장은 성립되지 않는다. 이는 미국의 일방적인 군사패권주의에 기인하는 것만큼이나, 한반도 두 국가가 여전히 서로의 실체조차 인정하지 않는 배제적, 패권적 구도를 유지한 채로 냉전구도의 구속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것에도 기인한다.

    때문에 나는 지금 작통권 환수문제를 통해 한 가지 더 생각해야 하는 것은, 이른바 ‘자주-동맹’의 허구적 대당을 넘어, 탈냉전 한반도에서의 새로운 평화질서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작통권이 환수되면 어쨌든 국제법상 대한민국과 그 군대는 정전협정과 무관한 존재가 된다. 그 동안 북조선은 (그리고 한국 진보진영 일각에서조차) ‘북-미 평화협정’만을 일면적으로 강조해왔다. 하지만 이제는 한반도의 두 국가,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사이의 평화협정 역시 시급해진 것이다.

    물론 그것이 실효성을 지니려면 적어도 국제법상으로, 그리고 양국의 국내법상으로 그 지위가 보장되는 협정이어야 한다. 그런데 여기에는 한가지 문제가 있다. 지구상의 어느 국가도 ‘무장한 국가변란세력’과는 잠정적 휴전 이상을 맺지 않는다.

    정식 협정이나 조약은 서로의 주권과 영토, 그 합법적 지위를 인정하는 국가 간에 맺어지는 것이다. 즉 합법적인 효력을 지닌 협정 혹은 조약이 성립되려면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 서로의 주권과 영토에 대한 합법적 지위를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6.
    단지 전쟁을 계속할 수 없다는 것에 안주하며, 서로의 실체조차 인정하지 않는 상호 배제와 패권적 대립을 내면화하던 ‘냉전적 평화’의 역설을 넘어야 한다. 탈냉전의 한반도는 스스로의 ‘평화능력’으로 지탱되는 새롭고도 진정한 평화질서가 요구한다.

    통일보다 두개 나라 평화공존이 보통사람들에게 더 나을 수도 

    그리고 그 대전제는 한반도의 두 국가에게 평화와 공존은 결코 과도적 조치나 수단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수단의 문제로 왜소화된 평화는 일방이 자신의 우세를 확신할 때 위험에 처한다. 언젠가는 일방이 소멸할 것을 기대하는 잠정적 공존은 사회 내부에 뿌리내리지 못하는 유약한 존재이다.

    단지 ‘북위 38도선’이 ‘정전협정선’으로 바뀌기 위해 300만 이상이 희생되어야 했음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 스스로 노력해야만 평화와 공존이 지탱될 수 있다면, 평화와 공존은 그 자체로 목적으로 추구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제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사실 처음부터 어떤 사회가 평화에 대한 능력을 지니기 위해서는 그것이 조국이든 민족이든, 어떤 ‘허명의 존재’의 영광보다, 동시대를 사는 사람들 하나 하나의 삶이 더 소중하다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한 것이니까 말이다.

    잿더미가 된, 혹은 일방이 ‘내부식민지’가 된 ‘하나의 조국’보다 평화적으로 공존하는 두개의 나라가 한반도의 평범한 민중들에게는 더 나을 수 있음을 진지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의 고통은 ‘1953년 정전협정선’이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의 실효적 국경이어서가 아니라, 그것이 여권을 보여주고 통과할 수 있는 평범한 국경이 아니어서였을 수 있다.

    국가와 국가를 ‘변신합체’시키는 것은 목숨을 건 모험이 될 수도 있다. 그것도 어느 일방도 스스로의 권력을 자발적으로 포기할 의사가 없는 이상. 하지만, 한반도 전역이 자국영토라고 주장하며 대립하는 대신, 서로의 주권과 영토를 존중하며 공존하는데는 ‘생각만’ 바꾸면 된다.

    어쨌든 ‘특수적 관계’를 되뇌이며, 이산가족을 무슨 죄인인양 ‘면회소’에서 만나게 하는 것보다는 그들의 손에 ‘비자’라도 들려주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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