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당, 옌안을 다시 점령
[국공내전 ㉟] 국공, 삼국지의 무대 중원의 난양에서 크게 싸우다
    2020년 05월 13일 10:37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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펑더화이가 지휘하는 서북 야전군이 이촨, 와쯔지에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뒤 후쫑난 휘하의 국군 부대들은 더욱 위축되었다. 불과 일년 전 후쫑난이 30만 대군으로 호호탕탕하게 옌안을 점령한 뒤 국군은 서북에서 패전을 거듭했다. 옌안 점령 후 불과 9개월 동안 국군은 10만명을 잃었다. 후쫑난 휘하 부대들은 공격할 여력을 상실했다. 기세가 오른 서북 해방군은 고삐를 멈추지 않고 파상공세를 펼쳤다. 1948년 3월부터 4월까지 해방군은 5개 현성을 점령했다.

펑더화이는 서북지역의 요충지 바오지(寶鷄)를 공격했다. 바오지는 시안 서쪽에 있는 도시로 예전부터 군사상 요지로 꼽혀 왔다. 이곳에는 강태공이 낚시를 드리웠다는 조어대가 있으며 이웃한 텐수이(千水), 난안(南安), 지산(岐山) 등과 함께 삼국 연의의 주요무대이기도 하다. 바오지는 옌안보다 더 시안에 가깝고 왼쪽에 자리잡아 이곳을 잃으면 시안과 칭하이성 회족 부대 사이의 연결이 끊기게 된다. 후쫑난으로서는 반드시 사수해야 하는 곳이었다. 후쫑난은 주력부대 일부를 바오지를 구원하라고 보냈다. 그러자 이번에는 옌안에 주둔하여 방어하던 17사단이 해방군의 포위망에 갇힐 위험에 처했다.

17사단장 허원딩은 옌안을 포기해야 한다고 판단하여 후쫑난에게 보고했다. 후쫑난도 옌안 철수에는 동의했지만 난징의 사정이 철수를 허락하지 않았다. 난징에서 ’헌법실행 국민대회‘가 열리고 있었으며 4월 20일이 총통 선거일이었다. 허원딩은 하루가 급했지만 4월 20일까지는 버텨야 했다. 마침내 장제스가 총통에 당선되자 후쫑난의 철수명령이 하달되었다. 허원딩이 부대를 이끌고 황급하게 옌안을 철수하니 4월 21일 새벽의 일이었다. 다음날인 4월 22일, 옌안이 해방군의 수중에 떨어졌다. 일년 전 국군이 옌안을 점령할 때도 빈 성이었다. 해방군이 옌안을 다시 점령할 때도 빈 성이었으니 공산당의 수도가 전화를 면한 셈이었다. 이에 따라 옌안은 홍색수도 시절의 모습을 지금까지 잘 유지하고 있다. 공산당에게 옌안 수복은 경축할만한 일이었다. 마오쩌둥은 서북 야전군에 축하전보를 보내어 옌안 점령을 격려하며 기뻐하였다.

옌안 점령을 축하하는 마오쩌둥의 전보 기초

옌안에 입성하는 서북 해방군

1948년 4월 22일, 신화사는 “인민해방군이 민주성지 옌안을 광복한 것은 난징의 반혁명 진영을 크게 놀라게 한 것”이라고 보도했다. 미국 연합통신사(AP통신)는 “국민대회 대표들은 국군이 옌안에서 철수한 소식을 듣고 놀라 마지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정부의 실패에 대하여 실망을 표시했다.”고 보도하였다. AP통신은 또 “국민당의 서북 형세가 매우 심각하다. 공산당이 그들의 성지를 회복하여 서북 근거지가 더 확대될 것”이라고 보도했다. UPI 통신도 “옌안을 잃은 것은 국민당군의 사기면에서 대실패”라고 보도했다. UPI는 또 “옌안 수비군이 철수한 것은 서북 인민해방군의 강력한 공격을 앞두고 전멸을 두려워한 것”이라고 보도했다. 또 국민당 인사의 말을 빌어 “국민당 2개 사단이 옌안 동남쪽 50리 거리에 있는 이촨에서 격멸당한 뒤 옌안을 수비하기는 어려웠다.”고 보도하였다.

옌안 수비군 사령관 국군 17사단장 허원딩의 인생역정

다음은 옌안을 수비하던 국군 17사단장 허원딩에 대한 기록이다. 그의 파란만장한 인생역정은 내전에서 일선 지휘관들의 고뇌와 무력함을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시안의 후쫑난은 뤄촨과 옌안의 수비군을 관중으로 철수하게 하였다. 두 곳의 수비군이 며칠 전부터 계속 철수할 것을 요청하고 있어 후쫑난도 이미 유지하기 어렵다고 생각하였다. 수비군 1개 사단과 1개 여단을 관중으로 철수시켜 방어력을 증강할 계획이었다.

제17사단장 허원딩

후쫑난은 그와 같은 생각을 난징의 장제스에게 보고하여 허락을 받았다. 그는 4월 18일 옌안과 뤄촨의 수비군에게 철수 명령을 내렸다. “두 곳의 수비군은 4월 21일까지 철수하여 관중 야오현(燿縣)에서 대기하라.” 그때 국군은 옌안에서 시안까지 공로에 경계부대 하나도 없는 처지에 몰려 있었다. 옌안과 뤄촨의 보급도 장담하기 어려운 실정이었다. 이촨, 와쯔지 패배 뒤 시안 북쪽의 국군은 고립되어 있었다. 1947년 4월 7일, 중공 옌안 유격대가 옌안 칭량산(清凉山)을 양공(1)하였다. 그러자 옌안 바오타산(寶塔山)을 거점으로 방어하던 17사단은 보루를 불태우고 방어선을 축소시켰다. 그런데 보루 속에 있던 탄약이 폭발하여 옌안에 화광이 충천하고 폭음이 진동하였다. 옌안의 수비군은 더욱 불안한 심정이 되어 사기가 땅에 떨어졌다. 옌안을 수비하던 17사단장 허원딩(何文鼎)은 “옌안에서 공로를 따라 남하하면 도로 때문에 기동하기 어렵고 습격을 받게 됩니다. 중화기를 시안에 공수하고 나머지는 파괴해야 합니다. 부대는 경무장으로 옌안에서 북쪽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안사이, 정볜, 딩볜을 거쳐 닝샤(寧夏), 간쑤로 하여 관중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손실없이 철수할 수 있습니다.”하고 보고했다. 허원딩의 주장은 해방군이 없는 곳으로 철수해야 한다는 것으로 전투에 대한 두려움을 드러낸 것이었다.

그러나 후쫑난은 한동안 옌안 철수 요청에 대하여 응답하지 않았다. 국민당과 장제스가 허락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1948년 3월 29일, 난징의 헌법실행 국민대회가 열려 장제스가 총통선거에 나서고 있을 때였다. 장제스는 국민대회 시정보고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국군은 여전히 힘이 있다. 공산당의 정치적 중심지인 옌안을 이미 점령했다. 공산당의 경제 중심인 옌타이도 점령하려면 능히 할 수 있다.” (2)

그런 상황에서 후쫑난이 옌안을 쉽게 포기하기는 어려웠다. “1948년 4월 20일이 되자 후쫑난은 비로소 옌안을 포기하기로 하였다. 4월 19일 총통선거에서 장제스가 이미 당선되었기 때문이다. 4월 20일, 후쫑난은 시안 수정공서 참모처장 페이스위(裴世禺) 등을 비행기로 옌안에 보내어 철군 명령을 전하게 하였다. 후쫑난은 허원딩이 요청한 철군 노선에 반대하고 위린공로를 따라 철수하라고 명령했다. 4월 21일, 미명에 옌안 수비군은 권속과 당정기관원을 이끌고 창황히 남쪽으로 철수했다. 식량과 군수물자 등은 모조리 소각했다. 도중에 4월 27일 쉬광다가 지휘하는 서북 해방군 부대를 만나 치열한 전투를 치른 뒤 추격을 피해 황급하게 뤄허(洛河)(3)를 건넜다. 탱크, 자동차, 중포 및 다른 보급물자를 모두 뤄허 북안에 버려둔 채 도하하여 모두 해방군이 차지했다. 철수 도중에 국군은 전사 370명, 부상 500명, 도망병 및 포로로 잡힌 사람이 3,000명에 이르렀다. 중포 2문, 산포 13문, 야포 8문, 전차 8량, 군용차량 48량, 지프 7량, 그리고 탄약과 피복은 훨씬 많았다.”(4)

허원딩은 뤄허를 도하한 뒤 후쫑난에게 전화로 보고했다. 중화기를 북안에 버려둔 것에 대하여 항공기를 보내어 파괴해 달라고 요청했다. 후쫑난은 허에게 다음날 부대를 이끌고 북안에 돌아가 버려둔 물자를 되찾으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허원딩은 북안으로 돌아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군심도 이미 흐트러져 다시 건너가기가 힘들었다. 후쫑난은 화가 치밀어 허원딩을 꾸짖었다. “옌안에서 철수하며 버린 중화기는 모두 네가 책임져라.” 훗날 장제스도 옌안에 와서 이 사실을 알고 허를 꾸짖었다. “죽는 게 그렇게 두려운가? 부끄럽지도 않은가?”

후쫑난은 허의 직무를 박탈했다. 후쫑난이 1947년 3월 13일 옌안을 공격하여 1948년 4월 21일 철수할 때까지 13개월 동안 서북 해방군에게 정예 병력 10만명 이상을 잃었다. 정편 여단외 다른 부대들도 비슷한 피해를 입었다. 점령했던 섬북 지역은 모두 상실했다. 상하이의 저명한 잡지 ‘관찰’은 1948년 3월 27일 ‘현단계의 전황을 총괄 검토한다.’는 글에서 이렇게 썼다.

“작년 3월 19일 국군 후쫑난 부대의 류칸 등 2개 병단이 옌안을 공격했으나 빈 성을 차지하는 데 그쳤다. 공산군 주력은 찾아볼 수 없었다. 후쫑난은 신비에 싸인 독신 장군이었으나 옌안을 점령한 공으로 결혼을 하였다. 그러나 중공 중앙은 결코 섬북을 떠나지 않았다. 신화사는 아직도 그곳에서 전파를 내보내고 있다. 후쫑난은 서북에서 몇 년간 “방공의 장성을 쌓는다.”고 했지만 옌안을 치던 기세는 이미 사라졌다. 산시 남부를 잃었으며 허난 서부도 잃었다. 이촨등 두 곳의 패배는 비참했으며 허베이, 스자좡에서 섬멸당한 부대도 모두 그의 휘하였다.(5) 후쫑난이 당한 패배 중 서북에서 당한 것이 가장 컸다.” ’관찰‘은 이렇게 결론을 맺고 있다. “후쫑난은 남쪽으로 돌아간다(6). 북쪽을 평정할 수 없었다. 그는 위망을 잃었으며 ’방공장성‘은 무너졌다.”

국민정부 군사 당국자는 뒷날 이렇게 한탄했다. “아군 주력은 시종 섬북에서 견제를 당했다. 결국 아무것도 한 게 없으니 애석하기 짝이 없다.”(7) 국민당 군사평론가 왕위팅(王禹廷)도 ’반란평정 형세 대략‘에서 이렇게 평가했다. “후쫑난 부대는 대병을 동원하고도 공성인 옌안을 차지하는 데 그쳤다. 적 주력을 포착하여 섬멸하는 데 계속 실패했다. 섬북에 깊이 들어가 비적을 추적하던 국군은 늘 함정에 빠져 부대를 잃었다. 잇따라 상처를 입고 전력이 크게 약화되었다. 정부와 현지 사령관이 생각하던 것과는 크게 달랐다. 후쫑난의 섬북 공략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한숨을 자아낸다.”(8)

허원딩이 옌안 철수 때 병력을 잃은 것과 중화기를 버려둔 것에 대하여 장제스는 대노했다. 결국 후쫑난은 5월 상순 허의 직무를 박탈했다. 그후 그는 친링(秦岭)(9) 중부 수비사령관으로 기용되었다. 허가 현성에 부임해 보니 병사들이 모두 신병이었다. 허의 부대는 계속 공산당 유격대의 습격을 받았다. 1949년 5월 중순 해방군이 관중을 들이쳤다. 허가 구축한 웨이허(渭河) 방어선이 무너지자 그는 다시 직무를 박탈당했다. 하지만 그는 남은 부대를 이끌고 쓰촨성 광위안으로 후퇴했다. 그해 10월 그는 육군 17병단 부사령관에 임명되어 쓰촨성 원장(温江)지역 방어를 맡았다. 그해 11월 장제스가 그를 불러 원장 지역의 방어와 유명무실해진 시안 수정공서를 맡겼다. 시안은 후쫑난이 사령관으로 있던 요지 중의 요지였다. 진퇴양난에 빠진 허원딩은 같은 해 12월 25일 상급자인 병단 사령원 페이창후이와 전화로 모의하여 신5군을 이끌고 투항했다.

1950년 10월, 옌안 점령 시 허원딩의 죄상이 밝혀져 베이징의 전범 감옥에 수감되었다. 허는 1961년 특사로 풀려나 1964년 시안의 가위 공장에 배치받아 4년간 근무했다. 1968년 허는 시안에서 한많은 일생을 마쳤다. 일설에 따르면 그는 시안 석탄공장에서 가스에 질식되어 숨졌다고 한다. 그러나 죽었다고 하여 불행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1985년 최고인민법원은 기의 참가 명단을 재심사한 뒤 1961년의 그에 대한 특사를 취소했다. 1989년 외국에 있던 자녀와 가족들이 귀국하여 그의 묘에 비석을 세웠다. 호우징루(矦鏡如), 정동궈등 옛 국군 전우들이 비문을 썼다. 그는 ’친링산맥에서 팔로군 359여단을 차단한 경험‘ ’정편 17사단의 옌안 봉쇄 경과‘ ’옌안에서 푸청으로 탈주하다.‘등을 썼다.

천겅, 난양 동쪽에서 장쩐(張軫)을 놓치다.

중국에서 중원 지역이라 하면 뤄양, 카이펑 일대를 중심으로 한 황허 유역을 말한다. 내전 시기에는 허난성을 중심으로 장쑤성, 산둥성 서쪽을 중원으로 일컬었다. 1948년 5월, 중원의 국군은 기세가 눈에 띄게 위축되어 있었다. 중원지역을 방어하는 국군은 13개 사단 휘하 30개 여단 병력이었다. 그중 절반이 넘는 16개 여단이 허난성 서부인 황허 유역에 배치되어 있었다. 정저우를 중심으로 카이펑, 상추(商丘), 허쩌(荷澤), 벙부에 집중배치되어 해방군의 황허 도하 저지 및 중원 도시 수비를 맡고 있었다. 장제스는 중원 지역 국군으로 해방군 중원 야전군이나 화동 야전군 서부병단과의 결전에 대비하고 있었다.

해방군은 허난성 푸양(濮陽)에서 휴식하며 대기 중인 화동 야전군 1병단을 황허 남쪽으로 도하시키려 하고 있었다. 황허 남쪽에서 국군의 부대 배치를 교란하며 장차 벌어질 중원의 전투에 대비하려는 것이었다. 이 시기 마오쩌둥과 주더 등 중공 중앙군사위원회의 중원 전략은 4개월에서 8개월 정도의 기간 안에 국군 10여개 여단, 10만여명을 섬멸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중원 야전군과 화동 야전군 서부 병단이 유기적으로 협력하여 작전을 펼치게 할 예정이었다.

1948년 5월초, 중공 중앙군사위원회는 중원 야전군을 지휘하던 류보청, 덩샤오핑에게 난양 서쪽을 수비하는 국군을 포위하여 섬멸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핑한철로(베이핑-한커우간) 동쪽의 국민정부군을 서쪽으로 밀어내고 푸양(濮陽)에서 황허를 남쪽으로 도하하려는 화동 야전군 1병단의 작전에 협력하라는 지시였다. 허난성 지도를 보면 푸양은 정저우 북쪽에 있고 난양은 남쪽에 위치한다. 난양을 공격하면 부근 부대들이 지원을 하게 되므로 푸양쪽 작전에 도움이 되는 것이다. 특히 국군의 최정예 부대 중 하나인 18군을 묶어두어 푸양쪽 작전에 개입하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가 강했다. 그리고 국군에서 기동병단을 지휘하며 해방군을 괴롭혀온 국군 지휘관 장쩐의 병단과 치우칭쳰의 5군을 섬멸할 목표를 세웠다.

난양은 허난성 서남부에 있는 현재 인구 천만명의 대도시이다. 옛날에는 완(宛)이라 불렀는데 허난성과 후베이성, 산시성(陝西省)의 경계에 있어 교통의 분기점이며 고금의 전략적 요지이다. 난양은 후한을 창건한 광무제 류슈(劉秀)가 군사를 일으킨 곳이며 난양의 와룡강은 제갈량이 밭을 갈던 곳이다. 유비가 삼고초려한 무대가 와룡강이니 유서 깊은 도시라 아니할 수 없다. 나중에 원술이 이곳에서 황제를 칭하다가 패망하기도 하였다. 내전에서 난양을 둘러싸고 국공이 두 차례 격전을 치렀으니 ’완서전투‘ ’완동전투‘가 그것이다.

표시된 곳이 뤄촨. 주변의 주요 지역은 빨간 원으로 표시

완동전투 해방군 무명병사의 묘비

화동 야전군에서 난양 공격을 맡은 사람은 화동 야전군 4종대 사령원 천겅이었다. 내전 발발후 천겅의 활약은 자못 눈부신 바 있었다. 천겅은 서북과 중원을 넘나들며 기동병단으로 국군의 부대 배치를 교란하였다. 마오쩌둥에게 천겅은 조커와 같아서 공격과 교란, 철도 파괴 등에 두루 사용했다. 천겅은 1948년 초부터 허난성의 중심도시 중 하나인 뤄양을 점령하며 전공을 쌓았다. 류보청과 덩샤오핑은 천겅에게 중원 야전군 일부와 화동 야전군 일부를 통일 지휘하게 하여 난양 서쪽의 국군 수비군을 포위하고 구원 오는 지원병력을 도중에 격멸할 계획을 세웠다. 나머지 부대들은 천겅의 움직임에 맞춰 국군을 견제하거나 요격하도록 할 예정이었다.

과연 천겅은 류덩의 기대에 부응했다. 천겅은 휘하 부대를 독려, 원거리를 단숨에 주파하여 전핑(鎭平), 네이샹(內鄕), 덩현(鄧縣)을 점령하였다. 그후 주변 여러 지역에 흩어져 있는 국군 수비군을 차례로 섬멸했다. 천겅은 승세를 타고 부대를 남쪽으로 돌려 후베이성 광화현성(光化縣城), 라오허커우진(老河口鎭)을 휩쓸었다. 천겅의 휘하 부대는 잠시 철수했던 허난성 쉬창을 다시 점령하며 기세를 올렸다. 5월 중순까지 해방군이 난양 서부를 시작으로 각지에서 격파하여 섬멸한 국군 병력은 총 2만 1천명에 이르렀다. 그러나 천겅은 이어진 난양 동부 전투(완동전투)에서 만만치 않은 적수를 만나게 된다.

장쩐, 바이충시의 계략으로 덫을 탈출하다.

난양 동부전투에서 해방군의 작전 의도는 “국군 18군을 견제하고, 기동병단인 장쩐 병단과 치우칭쳰의 5군을 유인하여 섬멸하는 것”이었다. 국군 18군은 장제스 휘하 부대 중 5대 정예부대로 꼽을 만큼 강력한 전투력을 가지고 있었다. 장비도 우수할 뿐만 아니라 지휘관 후롄은 국군에서 이름이 높은 지장이었다.

그는 침착할 뿐만 아니라 성격도 치밀하여 좀처럼 해방군의 전술에 말려들지 않았다. 후롄은 한번 전투에 임하면 물러서지 않고 끝을 보는 백절불굴의 투지를 여러 차례 보여 주었다. 후롄은 1943년, 휘하 사단을 이끌고 후베이성 스파이(石牌) 요새에서 일본군과 이틀 밤낮 혈전을 벌여 끝내 사수하였다. 스파이 요새는 쓰촨과 중국 서남부를 방어하는 중요 요새여서 후롄은 이곳을 방어한 공으로 청천백일 훈장을 받았다. 그는 1946년 산둥성 딩타오 전투에서 병력상 절대 열세인 상태에서 해방군과 7일 밤낮을 싸웠다. 1947년 7월의 산둥성 난마전투, 9월의 자오현 전투에서 그는 해방군과 혈전을 치러 승부를 보지 못했다. 절대 열세인 조건에서 공격하던 해방군이 철수하였으므로 국군 입장에서는 승전했다고 말할 수도 있었다. 이런 경력 때문에 류보청, 덩샤오핑도 그가 지휘하는 18군을 가장 경계하였다.

1948년 5월 26일, 류보청과 덩샤오핑은 휘하 중원야전군 부대에게 주마덴(駐馬店)과 췌산(確山)에 있는 28사단을 포위 공격하게 하였다. 18군을 남하시켜 구원하게 하려는 유인책이었다. 이 전투에서 류보청에 맞서 국군 병력을 총괄 지휘한 이는 ’작은 제갈량‘으로 이름높던 전 국방부장 바이충시였다. 화중 초비사령관 부임해 있던 바이충시는 18군을 보내지 않고 난양에 있던 장쩐 병단으로 췌산의 28사단을 구원하게 하였다. 장쩐은 리쫑런을 수장으로 하는 광시계 지휘관으로 상관인 바이충시와 함께 광시 군벌의 중추적 인물이었다. 장쩐은 일찍이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였으며 황푸 군관학교에서 전술 총교관을 맡을만큼 능력을 인정받았다. 장쩐 부대가 출격했다는 정보를 접한 류보청은 췌산 공격부대에게 계속 양공을 하라고 지시하였다. 다른 부대에게는 장쩐 병단을 맞아 섬멸할 준비를 하게 하였다. 류보청, 덩샤오핑은 주력부대를 췌산 서쪽으로 총 집결하여 압도적인 우세로 장쩐 부대를 포위 섬멸할 계획이었다. 그리고 나머지 병력으로 지원하러 오는 18군과 5군을 저지, 요격하게 하였다.

국군 5군단장 장쩐

과연 난양에서 출격한 장쩐 병단이 췌산 방향으로 전진해 왔다. 장쩐이 인솔한 구원군 총병력은 5만명이었다. 5월 29일, 난양분지에 도착한 장쩐의 5군은 정면에서 저지하는 천겅의 4종대와 충돌했다. 이때 치우칭쳰 휘하의 5군은 화이양(淮陽)에 접근하고 있었으며 후롄의 18군도 쉬창을 거쳐 쾌속으로 남하하고 있었다. 중원의 국공 양쪽 주력이 크게 충돌할 국면이었다. 류보청은 중공 중앙군사위원회에 전보를 보냈다. “우리는 이미 장쩐 부대를 포착하였다. 얻기 어려운 기회이니 천스지, 탕량에게 18군을 철저히 막게 해달라. 5군을 공격하는 것도 좋지만 우선 장쩐 부대부터 섬멸하는 게 좋겠다.” 마오쩌둥도 즉시 회신을 보냈다. “장쩐 부대부터 먼저 해치우라. 천스지, 탕량 부대는 18군을 막는데 주력하고 장쩐 부대 섬멸에 참가하지 마라.” 그만큼 류보청, 덩샤오핑이나 마오쩌둥도 18군을 경계하였다.

중앙군사위의 지시에 따라 정면의 천겅부대는 물론 중원 야전군 부대와 쑤위가 지휘하는 화동야전군 부대 일부가 장쩐 부대를 섬멸하기 위해 췌산 서쪽을 중심으로 주위에 포진하고 있었다. 이때 화동 야전군을 지휘하던 사령원 천이가 중원국에 임무를 맡아 떠나고 쑤위가 사령원 대리를 맡고 있었다.

5월 29일, 바이허(白河) 북쪽 지역에서 천겅은 장쩐 부대 앞뒤에 포진한 해방군 부대에 공격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그날 저녁, 천겅은 장쩐 부대가 갑자기 전진을 멈춘 것을 확인했다. 그리고 적정을 관찰하니 적병이 훨씬 더 많았다. 천겅은 즉시 공격중지 명령을 휘하 부대에 하달했다. 장쩐은 해방군이 갑자기 공격을 멈추자 의아하여 무전기로 신양의 국군 지휘소에 정황 파악을 요청하였다. 이때 췌산의 국군 수비군도 해방군의 양공에 의심을 품게 되었다. 국군 부대를 지휘하던 바이충시는 장쩐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무전기로 명령했다. “지금 췌산의 상황이 위급하다. 당신은 부대를 쾌속으로 진격시켜 췌산을 구원하라.” 장쩐은 “사령관 명령을 견결하게 집행하겠습니다.”하고 대답했다. 그후 바이충시는 일본어로 “지금 췌산의 적이 서쪽으로 향하고 있다. 난양의 적도 당신들 쪽으로 이동하고 있다. 당신 부대를 협격할 것이 분명하다. 즉시 부대를 돌려 난양으로 회군하라.” 이런 간단한 기만책을 해방군은 까맣게 몰랐다. 무전기를 감청한 요원들 누구도 일본어를 몰랐기 때문이다. 장쩐은 일본에서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였기 때문에 일본어에 능통하였다.

장쩐은 다음날 일부 부대를 췌산 방향인 동쪽으로 보내어 양공을 하게 하였다. 췌산쪽으로 진격할 의도를 보여주기 위해서였는데 주력은 여전히 현지에서 대기하게 하였다. 천겅은 국군이 동쪽 방향으로 진격하는 것을 막기 위해 주력을 동쪽으로 급히 이동하라고 명령했다. 그는 류보청으로부터 “적이 동쪽 산악지역을 차지하지 못하게 하라.”는 지시를 받고 있었으므로 더욱 마음이 급하였다. 이때 장쩐 부대의 퇴로를 끊던 쑹스룬(宋時輪) 병단도 동쪽으로 이동하여 서쪽이 텅비게 되었다. 31일 새벽 5시, 장쩐은 갑자기 부대를 뒤로 돌려 포위망이 뚫린 서쪽으로 철수했다. 그리고 6월 1일, 이미 난양성으로 후퇴하여 성안에 포진한 채 바이허 부근의 해방군을 협격할 태세를 갖추었다. 그동안 천겅이 지휘하던 부대 일부가 장쩐부대 12,000여명을 추격하여 섬멸하였으나 몸통은 놓치고 꼬리를 자른 셈이 되었다. 노련한 장쩐이 성동격서의 전법으로 해방군의 포위망을 뚫고 탈출한 것이다.

이 전투는 인민해방군 2개 야전군 휘하 대병력이 동원된 데 비해 전과는 미미하였다. 본래 국군 3개 사단을 포착, 섬멸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으나 실패한 것이다. 류보청은 이 작전 실패의 원인을 “병단 간 소통과 협력이 원활하지 않았으며, 작전지역이 너무 넓어 작전 의도가 적에게 간파되었기 때문”이라고 평가하였다. 하지만 바이충시와 장쩐의 노련한 경험이 한몫 하였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래도 해방군은 난양을 둘러싼 전투에서 중원 지역의 주도권을 확보하였다. 앞으로 중원을 둘러싼 각축전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령한 것이다.

<각주>

1. 군사용어로 공격하는 체하는 것을 말한다.

2. 타이완 국방연구회 ’장총통집‘ 타이완 출판사

3. 산시성(陝西省) 북부에 흐르는 황허의 지류이다.

4. 허원딩, 후쫑난 부대의 옌안 침범과 탈주과정’- 산시 문화역사 자료선집 제 4집

5. 허베이와 스자좡에서 섬멸당한 부대는 쑨롄중 휘하의 부대로 ‘관찰’의 오기이다.

6. 후쫑난의 이름자 종남(宗南)이 “남쪽으로 돌아간다.”는 뜻이니 이름으로 풀이한 것이다.

7. 타이완 국방부 사정국(史政局) ‘반란평정 약사’ 타이베이 출판사 132쪽

8. 타이베이 ‘전기문학(傳記文学)’ 32권 중

9. 중국의 중부를 가로지르는 큰 산맥으로 서로는 깐쑤의 동부에서 시작하여 샨시(陕西)를 거쳐 동으로는 허난(河南)의 서부에 이르는 중국 남북 간의 지리 경계선임

<국공내전> 연재칼럼 링크 

필자소개
해남 귀농. 전 철도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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