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쑤위, 마오쩌둥에게
    작전계획 변경, 간언하다
    [국공내전㉞) 미국, 국민정부에 군수물자 지원을 재개하다.
        2020년 05월 06일 08:00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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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민정부가 헌법에 따라 총통을 선출하는 등 미국의 요구에 부응하자 군수물자 지원이 재개되었다. 미국은 부총통 선거에서 리쫑런을 은밀히 지원하였다. 리쫑런이 예상을 뒤엎고 장제스쪽 후보인 쑨커에게 승리한 것은 미국의 영향 때문이었다. 리쫑런이 항일전쟁에서 쌓은 명성과 군부 내의 영향력이 컸고 광시와 후베이 등 정계의 기반도 있었지만 스튜어트 대사 등 미국의 지원이 없었더라면 부총통에 당선되지 못하였을 것이다. 미국이 리쫑런을 지원한 것은 장제스를 견제하려는 이유에서였다. 장제스는 연립정부 수립을 바라는 미국의 희망을 깨뜨리고 내전을 일으켰을 뿐 아니라 휴전도 먼저 깨뜨렸다. 장제스는 2차 대전 기간에도 호락호락하게 미국의 요구에 굴종하지 않았다. 2차 대전 중 중국 전구의 미군 사령관인 스틸웰은 장제스와 부딪치다 못해 장을 ‘땅콩’이라 부르며 공공연하게 반감을 드러내었다.

    어쨌든 총통 선거 실시와 천청이 동북에서 부패척결 등 가시적인 노력을 한 것은 미국 정계 내 친중파의 입장을 강화시켰다. 미국은 1948년 5월 26일, 중국에 대한 무기 금수조치를 철회하였다. 이로써 1946년 7월 29일 중단된 무기수출이 거의 2년만에 재개되었다. 미국의 무기 지원은 전황이 공산당쪽으로 조금씩 기울어갈 즈음에 재개되어 늦은 감이 있지만 장제스로서는 불행 중 다행이었다.

    국공내전에서 국민당이 패배한 원인에는 여러 주장이 있다. 어떤 이는 미국의 지원 중단을 국민정부 패배의 결정적인 원인으로 본다. 특히 한국에서 중국내전을 다룬 일부 필자들이 이런 견해를 가지고 있다. 반론을 펴는 이들은 미국의 무기금수는 부차적인 요인이라고 주장한다. 국민정부의 패배는 무기의 양이나 질보다 내부 부패나 파벌 다툼, 오랜 전쟁으로 인한 민심이반 등이 더 큰 원인이라는 것이다. 전쟁초기 국군은 압도적인 병력과 장비의 우세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전국 각지에서 국군이 공산군을 일방적으로 밀어붙인 것을 감안하면 후자가 더 설득력이 있게 들린다.

    본래 미국은 국민정부에 대하여 이중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2차 대전 중 미국은 일본에 대항하는 게 급선무여서 국공이 협력하여 전쟁에 나서기를 희망하였다. 이에 따라 1944년 미국의 군사 시찰단이 옌안에 와서 조사를 하고 공산당에 우호적인 보고를 낸 일도 있었다. 2차 대전이 끝난 후에는 소련에 대항하기 위해 중국에 연립정부 수립을 원하였다. 그래서 계속 중재하며 국공 양당의 화해를 주선하기도 하였으나 물과 기름을 섞어 놓으려는 부질없는 노력이었다. 국공 양당 모두 시간벌기와 명분쌓기를 위해 대화에 나섰을 뿐 끊임없이 싸우며 세력을 키우려 하였던 것이다. 정치협상을 깨뜨린 것도, 휴전협정을 먼저 깨뜨린 것도 모두 국민당이었다. 장제스와 국민당은 “3개월이면 공산당을 쓸어버릴 수 있다.”는 자신감에 차 있었기 때문에 미국의 중재가 귀찮고 성가시기만 할 뿐이었다. 그러자 미국이 무기수출 중단으로 맞서며 국민정부를 골탕먹이기에 이른 것이다. 하지만 미국은 궁극적으로 장제스와 국민정부의 편이 될 수밖에 없었다.

    미국의 계획대로라면 중국은 훨씬 많은 군수물자와 차관, 그리고 공군 건설에 대한 대대적인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1946년 6월 14일, 국공 간 내전이 일어나기 직전에 미국 국무장관 제임스 번즈(James Byrnes)는 의회에 ‘중국 군사원조 법안’을 제출하였다. 같은 날 미국과 중국은 ‘장기 물자 조차 협정’에 서명하였다. 이로써 국민정부는 5억 1천 7백만불의 장비와 물자를 원조받게 되었다. 6월 27일, 미국 의회는 국민정부에 공군 8과 3분의 1대대를 설립하고 그에 필요한 장비 및 물자를 제공할 계획을 승인하였다. 이 계획은 미국이 1,071대의 항공기를 염가로 국민정부에 제공하는 것이었다. 이 항공기로 국민정부 공군은 1개 중폭력기 대대, 1개 중형 폭격기 대대, 4개 전투비행대대, 2개 수송기 대대, 1개 촬영 및 정찰기 대대를 편성할 계획이었다. 또한 공군에 필요한 장비 및 5,137명의 조종사와 폭격수, 관제사와 정비사 등 공군 요원을 양성 훈련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국민정부가 내전을 일으키자 미국은 1946년 7월 29일에 중국에 대한 무기 금수조치를 선언하였다. 6월 14일에 의회에 제출한 법안과 공군 증강계획도 모두 중지되었다. 미국과 함께 영국도 국민정부에 대한 무기 금수조치를 단행하였다. 국민정부는 미영 정부에 대포알과 소총탄, 함포, 항공기 판매를 요청했지만 모두 거절당했다. 영국 외교부는 “영국 정부의 정책은 중국의 내전을 고무 격려할 수 없다.”고 언명하였다. 그래도 미국 내 친중파들은 중국에 대한 지원을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편법으로라도 중국에 대한 지원을 계속해야 하였다. 1946년 8월 31일, 미국은 전후 잉여물자를 중국에 1억 7천 5백만불에 넘겨 주었다. 중공이 이에 항의하자 미국은 차량, 선박 및 식품, 피복 등 민수용 물자라고 해명하였다. 1947년 4월 9일, 미국 해군은 해병대를 미국에서 철수시키며 6,500톤의 군수물자를 제공하였다.

    1948년 5월 26일, 미국은 국무장관 마샬이 주도하여 중국에 대한 무기 금수조치를 철회하였다. 6월 27일, 미국은 국민정부에 1억 3천만불 어치의 탄약을 염가로 제공하였다. 그 이전 1948년 4월 2일, 미 의회는 ‘1948년 외국 원조법’을 의결하고 ‘중국 원조법’도 통과시켰다. 이 법안 통과로 미국은 중국에 대하여 총액 4억불, 이 중 1억 2천 5백만불을 1년간의 군사원조로 쓸 수 있게 되었다. 그해 9월, 1억 2천 5백만불의 원조가 도착하지 않자 장제스는 미국 대사 스튜어트(John Leighton Stuart)에게 불만을 표시하고 동북에 군수물자가 없다고 토로하였다. 같은 해 10월 29일 트루먼은 의회의 압력에 응하여 일본에 있던 700-800톤에 이르는 군수물자를 중국으로 인도하였다.

    그해 7월 하순에 트루먼 정부는 의회에 북대서양 조약기구 가맹국가 및 그리스, 터키, 이란, 한국과 필리핀 등에 군사원조를 하는 ‘공동방어 원조법’을 부의한 바 있었다. 그러나 중국에 대한 원조가 없는 것에 불만을 품은 의원들에 의해 부결되었다. 정부는 다시 타협하여 중국에 7천 5백만불의 군사원조 계획을 제출하였다. 하지만 트루먼 대통령의 생각은 달랐다. 49년 2월 트루먼은 애치슨에게 “중국에 대한 군사원조를 중단하지 마라. 하지만 비공식적으로 운송을 지연시키라.”고 지시했다. 1950년 4월 14일 국무장관 애치슨은 국방부에 “군사원조 1억 2천 5백만불 중 현재 교부중인 물자를 제공하고 더 이상 군수창고에서 꺼내어 타이완에 보내지 말라.”고 답신했다. 이렇게 되어 48년 가결한 군사원조가 50년이 되어도 모두 지급되지 않게 되었다. 49년 7월 의회에서 통과된 7천 5백만불의 군사원조가 국민정부 손에 도달하지 않은 것이다.

    그런 것을 보면 개인의 감정이 전체 국면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알 수 있다. 트루먼은 본래 장제스에 대하여 불신이 깊었으며 자신과 미국의 조언이나 압력에 굴하지 않는 국민정부에 대한 불만이 매우 컸다. 지원을 결정했지만 집행을 고의적으로 지연시켜 국민정부와 장제스를 골탕먹이는 방향으로 나아간 것이다.

    어쨌든 국민정부는 ‘중국 원조법’에 따라 1948년 7월 3일 난징에서 ‘중미 경제원조에 관한 협정’에 서명하였다. 8월 5일에는 ‘중미 농업협정’에 서명하였다. 그에 따라 미국 정부는 중국에 대하여 1년 동안 4억 6천 3백만불을 제공하기로 하였다. 그중 3억 3천 8백만불이 경제원조이고 1억 2천 5백만불이 군사관련 특별 보조금이었다. 그중 실제로 제공된 경제 원조금은 2억 7천 5백만불이었다. 1949년 4월14일, 미국 정부는 중국에 대한 원조 기한을 1950년 2월 15일까지 연장하여 남은 금액을 지불하였다. 1946년 6월에서 50년 초까지 미국이 국민정부에 제공한 군수물자는 47년의 6,500톤과 1억 3천만불 어치의 탄약등이었다. 48년에는 일본에 있던 700-800톤의 군수물자가 제공되었고 1억 2천 5백만불의 군수물자중 일부만 제공되었다. 내전이 결정적인 힘겨루기 국면에 들어갔을 때 미국이 보인 태도는 장제스로서는 무척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그 뒤 진행된 일을 조금 더 덧붙이기는 조심스럽다. 국공내전을 연대나 날짜의 흐름순으로 정리해야 일목요연해지겠지만 같은 주제로는 더 혼란스러울 수 있기 때문에 끝까지 소개하도록 한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더 자세히 기술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애치슨. 트루먼과 함께 중국지원에 소극적이었다.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공화당 후보의 당선을 바랐던 장제스로서는 트루먼의 재선이 커다란 재앙이었다. 1949년 1월 19일 트루먼이 대통령에 재선한 다음날, 애치슨이 미국 국무장관에 선임되었다. 애치슨의 전임인 마샬장관의 이름이 높았기 때문에 애치슨이 받는 부담이 컸다. 재임기간 그는 트루먼 정권이 추진하는 냉전정책을 적극 관철해 나갔다. 1949년 7월 애치슨은 중미관계 백서인 ’미국과 중국 특히 1945-1949년의 관계‘에 서명했다. 그가 국무장관으로 재직하며 결정한 중요한 문제중 하나였다. 1949년 중국의 상황이 중요한 전기를 맞이하였을 때, 애치슨은 중국 국민당 정권이 붕괴 지경에 이르렀음을 깨달았다. 그는 “미국은 장래 중국의 정권을 다시 지지해서는 안된다.”고 인식하였다. 그는 그런 생각을 바탕으로 ’최근 5년을 중심으로 한 미국과 중국 관계의 상세보고‘를 썼으며 그 내용을 극력 주장하였다. 애치슨은 이 문서를 장제스 정권이 붕괴하게 되었을 때 발표하여 트루먼 대통령의 긍정적인 반응을 얻었다.

    중미관계 백서 중 애치슨의 논술과 언명은 다음과 같다. “불행하지만 피할 수 없는 현실은 중국 내전의 불길한 결과이다. 이 결과는 미국 정부로서는 통제불능이다. 미국은 이 결과를 바꿀 수 없다. 중국의 국면은 이미 정해졌다. 우리는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된다.” 나아가 그는 미국이 국민정부를 더 이상 지원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였다. 그런 간섭이 “중국 민중의 분개를 살 것이며 미국 민중의 질책을 받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애치슨의 판단은 객관적이고 분명한 것이었지만 미국정부 입장에서는 국민정부를 계속 지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국민정부로의 입장에서는 말뿐인 지원이었다. 지원이 곧바로 이루어진 것도 아니고 수많은 논란 끝에 겨우 정해진 것이었다.

    장제스 정부를 개편하고 군사책임자를 교체하다.

    국민정부 초대 총통으로 취임한 장제스는 즉시 정부 조각에 착수했다. 행정원장으로 내전기간 재임하며 자신을 보필해온 장췬을 배제하고 부원장을 맡아온 지질학자 웡원하오(翁文灝)를 선임했다. 국방부장은 세력 안배 차원에서 기용했던 바이충시 대신 허잉친을 기용하였다. 천청의 사임으로 공석이 된 참모총장은 천청 못지않게 신임하던 육군 총사령관 구쭈통을 임명하였다. 본래 장제스는 장췬을 계속 행정원장으로 기용하고 싶어했다고 한다. 장췬은 신해혁명 후부터 국민당에 투신해온 원로로 장제스의 비서장을 역임한 바 있었다. 장제스의 측근 중 한 사람이었는데 그해 입법원장(한국의 국회의장에 해당) 선거에서 낙선하는 바람에 부득이 웡원하오를 임명하였다. 내전 기간이었으므로 국방부를 제외한 나머지 부서들은 대부분 학자들로 평이 무난한 사람들을 기용하였다. 그러나 국방부장에서 밀려난 바이충시가 ’화중 초비사령부‘ 사령 취임을 고사하여 파란이 일었다. 이쫑런이 부총통이 된 상황에서 장제스로서는 더 이상 정부안에 광시계 군벌의 확장을 두고 볼 수 없었다. 그래서 광시계 군벌의 핵심인물인 바이충시를 ’총통부 전략고문위원회 주임 겸 화중 초비사령부‘ 사령으로 기용하려고 한 것이다.

    총통부 전략고문위원회 주임’ 자리는 말뿐인 한직이었다. 국방부장으로 실권은 없지만 인선 등에 관여하거나 거부권을 행사해 온 바이충시는 하루아침에 지역 사령관으로 밀려났다. 그는 완강하게 고사했지만 리쫑런과 황샤오홍(黄紹竑) 등 광시계 인물들이 바이충시를 설득했다고 한다. 그들은 “국방부장 자리에 있어봐야 허울뿐이다. 창장변에서 수십만 대군을 거느리는 것이야말로 호랑이가 산중에서 힘을 기르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장제스가 측근을 보내 설득하기도 하자 마침내 바이충시는 마음을 바꿔 먹었다. 장제스를 독대한 자리에서 바이충시는 “국방부장이나 다른 사람의 간섭을 받기 싫다. 총통에게 직접 건의하고 작전 지시를 받을 수 있게 해 달라. 창장을 방어하는데 20만 병력은 너무 부족하다. 30만명으로 휘하 병력을 늘려달라.”고 요청하였다. 장제스는 대범하게 이 요구를 모두 받아들였다. 바이충시는 취임하자마자 한커우에서 연설을 통해 이렇게 주장했다. “민심을 안정시켜야 한다. 민생주의를 실행하여 땅을 고르게 분배해야 한다. 자본가는 절제해야 하며 민심을 얻어야 한다. 그래야 총력전을 펼 수 있다.” 국민정부 안에서 이런 주장을 공공연히 펼 수 있는 사람은 매우 적었다. 장제스의 직계도 아닌 바이충시가 그런 것을 보면 범상한 사람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장제스, 다시 한번 최측근을 군부 요직에 기용하다.

    내전 시기였으므로 군사부문의 인선이 가장 중요한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국방부장에 임명된 허잉친은 장제스의 오랜 동료이자 부하였다. 그는 1890년생으로 장제스보다 세 살 아래였다. 일찍이 일본 육군사관학교에서 공부하다 신해혁명에 투신하는 등 장제스와 비슷한 경로를 걸었다. 그는 장제스가 교장으로 있던 황푸군관학교에서 총교관 겸 교도연대 1연대장을 역임하였다. 황푸 내 영향력이 장제스 다음 허잉친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국방부장으로 권토중래한 허잉친

    그는 한때 장제스의 불신을 산 일도 있었다. 1927년 난징에 있던 장제스가 우한의 왕징웨이와 서로 국민정부를 세워 대립할 때 그는 사실상 장제스에게 등을 돌렸다. 장제스가 리쫑런, 펑위샹, 옌시산 등 주요 군벌들과 대립하자 장이 불리할 것으로 판단하고 장제스를 옹호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때 장제스는 불가피하게 하야를 선언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장제스는 실망한 나머지 한동안 공식 석상에서 허잉친을 보아도 인사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허잉친은 곧 장제스의 신임을 회복하여 줄곧 군사부문 2인자의 자리를 유지했다. 허잉친이 부친상을 당했는데도 귀향하지 않고 여전히 전투를 지휘했던 것이다. 허잉친은 장제스가 육해공군 총사령일 때 참모장을 역임했으며 장제스가 국민정부 주석일 때에는 군정부장직에 올랐다. 그는 1945년 일제가 패망할 때 중국 주둔 일본군 사령관으로부터 항복을 받아 인생에서 최고의 순간을 맞이하였다. 그러나 1946년에 한참 후배인 천청 등에게 밀려나 충칭 행영 주임 등 한직으로 좌천되었다. 그러다 장제스가 UN 안전보장이사회 군사참모단 중국 대표로 파견하여 줄곧 미국에 있었다. 장제스가 가장 신임하던 천청이 신병으로 물러나자 허잉친이 국방부장으로 권토중래한 것이다.

    친위군 사령관 출신 구쭈통 참모총장이 되다.

    천청이 실각한 뒤 참모총장에 임명된 사람은 육군 총사령관 구쭈통이었다. 구쭈통의 경력을 보면 마오쩌둥과 중국 공산당이 이를 부드득 갈 수밖에 없다. 1931년 구쭈통은 국민정부 경호부대 사령관 겸 제1사단장이었다. 장제스의 근위군으로 대우는 물론 장비도 가장 좋았다. 그는 1931년 7월 장제스에 대항하여 거병한 스유싼(石友三) 부대 6만명을 섬멸하여 장제스의 신임을 굳혔다.

    1934년 4월 구쭈통은 장제스의 명령을 받고 장시성 루이진의 공산당 소비에트 정부 소재지를 공격하였다. 당시 그는 북로군 사령관으로 11개 사단을 지휘, 광창(廣昌) 등에서 펑더화이의 홍군 3군단과 일진일퇴의 혈전을 벌였다. 그는 병력과 장비의 압도적인 우세를 믿고 차근차근 밀고 들어 갔지만 펑더화이는 복병, 습격, 성동격서 등의 전술로 구쭈통 부대를 철저히 괴롭혔다. 그러나 당시 공산당의 군정을 장악한 왕밍과 리더 등이 진지전을 고집하는 등 판단착오로 홍군은 수도인 루이진을 내주고 2만 5천리 장정을 떠나게 되었던 것이다.

    그때 장제스는 한편으로 홍군을 추격하며 섬멸에 나서고, 한편으로 장시성과 푸젠성을 숙청하게 했는데 청소 임무를 맡았던 인물이 바로 구쭈통이었다. 장제스는 구쭈통 등 국군 지휘관들에게 “뿌리까지 캐내어 영원히 후환을 제거하라.”고 명령하였는데 구쭈통은 충실하게 장의 명령을 집행하였다. 그는 숙청계획을 세워 성실하게 실행하였는데 그 결과 장시성과 푸젠성 서쪽 지역에서 80만명이 학살을 당했다. 이른바 수정구(반란 평정지역) 내에는 “불타지 않은 집이 없고, 벌목하지 않은 나무가 없으며 닭이나 개 한 마리 살아남지 못하는 지경”이 되었다. 특히 젊은 남자는 모두 학살을 당했으며 “밥짓는 연기를 볼 수 없고 들판에는 귀곡성만 가득한 지경”에 이르렀다. 그 공로로 구쭈통은 2급 상장(중장에 비견함)으로 진급하였다. 그해 11월 구쭈통은 쓰촨의 행영 주임으로 임명되었다. 장정 중인 홍군을 토벌하는 서남쪽 최고 지휘관이 된 것이다. 각지에서 출발한 홍군 병력이 10분의 1로 줄어든 채 섬북에 이르게 된 데에는 구쭈통이 활약이 컸다.

    구쭈통은 다시 한번 장제스의 눈에 들 기회를 잡게 되는데 ‘시안사변’이 바로 그것이다. 시안사변 때 구쭈통은 장쉐량과 양후청 등 ‘병간’을 실행한 지휘관들을 토벌하는 ‘토역군 서로군 총사령’이 되었다. 동로군 총사령은 ‘류즈’로 훗날 긴다리 장군이나 돼지 장군으로 부르게 된 지휘관이었다. 군정부장인 허잉친이 시안을 공격하라고 명령했지만 구쭈통은 듣지 않았다. 장제스의 부인 쑹메이링이 장제스의 신변 위험을 염려하여 시안 공격을 극력 반대했던 것이다. 구쭈통은 쑹메이링의 요청을 받고 난징에서 온갖 핑계를 대며 움직이지 않았다. 류즈는 허잉친의 명령대로 시안으로 급히 출격했지만 그는 쿵상시, 쑹즈원 등과 함께 평화적 해결을 모색했다. 그후 구쭈통은 쑹메이링의 절대적인 신임까지 얻어 앞날에 탄탄대로가 열렸다. 직후 그는 시안 행영 주임으로 장쉐량의 동북군과 양후청의 서북군을 감시하는 역할을 맡았다.

    구쭈통의 모습

    구쭈통은 다시 한번 공산당이 치를 떨 일을 벌였으니 ‘완난사변(皖南事變)(안후이성의 양쯔강 이남지역에서 국민당군이 신사군을 공격한 사건을 말한다)의 주역이었다. 당시 구쭈통은 제3전구 사령관이었는데 신사군이 3전구에 속하여 형식상 구쭈통의 지휘를 받도록 되어 있었다. ’완난사변‘은 우연한 사건이 아니고 장제스가 구쭈통에게 밀명을 하여 만든 사건이라고 한다. 1941년 12월 9일, 장제스는 구쭈통에게 “신사군을 일망타진하고 예팅, 샹잉을 생포하라.”고 밀명을 내렸다. 10일 장제스는 다시 구쭈통에게 비밀 급전으로 “즉시 해치우고 관용을 베풀어서는 안된다.”고 명령했다. 구쭈통은 12월 하순 회의를 열어 지휘관들에게 “위원장의 명령이다. 신사군이 이동해도 공격하고 거부해도 공격하라.”고 지시했다. 또 “신사군을 압박하여 이동하게 하고, 실제로는 이동을 막으라.”고 지시했다. 신사군이 이동명령을 어겼으므로 공격했다는 명분을 만들려고 한 것이다. 1941년 1월 4일, 마침내 매복망에 걸린 신사군은 섬멸적 타격을 입었고 부사령 샹잉은 전사하고 사령인 예팅은 포로가 되었다. 이 공로로 구쭈통은 유공자가 되어 포상을 받았으며 작전에 참가한 휘하 부대들은 5만위안의 포상금을 받았다.

    본래 구쭈통과 신사군 사령인 예팅은 바오딩 군관학교 동기동창이었다. 둘이 상당히 친밀한 사이여서 구쭈통은 구금 중인 예팅에게 전향할 것을 권하였는데 예팅은 분연히 거절하였다. 결국 예팅은 충칭에 압송되어 수감되었다가 국공간 평화회담이 열린 뒤 1946년 3월 석방되었다. 그러나 옌안으로 귀환 중 비행기 추락사고로 사망했으니 운명의 장난이라 아니할 수 없다.

    1946년 5월 국민정부가 난징으로 귀환한 뒤 구쭈통은 국방부 육군 총사령관에 임명되었다. 다음 달인 6월 국민당군이 공산당 중원 해방구를 공격하여 내전이 폭발하자 그는 육군 총사령관 겸 정저우 수정공서 주임으로 중원 공격을 지휘하였다. 그러나 정보를 미리 입수한 해방군이 대부분 탈출하여 목적을 이루지는 못하였다. 1947년 3월에 구쭈통은 요충지인 쉬저우에서 24개 사단 산하 60개 여단 45만 병력을 지휘하였다. 구쭈통은 병력을 3개 병단으로 나누어 공산당 산둥성 해방구 수도인 린이를 공격하였다. 그러나 천이와 쑤위의 교묘한 작전에 휘말려 라이우, 멍량구 등에서 패배하여 세력이 위축되었다. 이제 구쭈통이 참모총장에 임명되었으니 굳이 해방군에 비견하면 총사령인 주더와 맞수라고 할 수 있었다. 공산당으로서는 더욱 전의를 불태우며 전투에 임할 최고 지휘관이 기용된 것이다.

    쑤위, 마오쩌둥에게 작전계획 변경을 간언하다.

    1948년 3월 하순 마오쩌둥, 저우언라이, 런비스 등은 중공 중앙기관을 이끌고 섬북을 떠났다. 일년간 추격군을 피해 전전하던 피난생활에서 벗어난 것이다. 그들은 진수(산시성과 내몽골을 관할) 해방구를 경유하여 진찰기(산시, 내몽골 일부, 허베이성을 관할) 해방구로 갔다. 허베이성 푸핑(阜平)현 청난좡(城南庄)진에 있는 청난좡 건물에서 중앙 전선위원회와 중앙공위(중앙 국가기관 공작위원회)가 비로소 만났다. 옌안 함락 뒤 나누었던 두 지도부가 일년만에 상봉한 것이다. 주더는 마오쩌둥에게 “주마오가 드디어 만났으니 우리의 앞날이 밝다.”고 감개무량해 하였다. 이곳에서 마오쩌둥이 당 내에 잠복했던 국민당 첩자의 암약으로 폭격을 당했던 사실은 이미 소개한 일이 있다.

    청난좡 구거. 마오쩌둥 등 지도부가 일시 머물렀다.

    표시한 부분이 청난좡

    4월 30일에서 5일까지, 마오쩌둥과 중공 중앙은 청난좡에서 1차 서기처 확대회의를 개최했다. 이 회의를 ’청난좡 회의‘라고 부르는데 중국 공산당은 내전에 관건적인 역할을 한 중요한 회의로 기록하고 있다. 이 회의에 마오쩌둥, 류샤오치, 주더, 저우언라이, 런비스 등 주요 당 지도부와 네룽전, 보이보(薄一波), 천이, 쑤위, 리센녠, 장지춘(張際春) 등 전선 지휘관들이 참석했다. 그중 천이와 쑤위는 마오쩌둥이 참석할 것을 지시하여 전선에서 달려왔다. 쑤위가 마오쩌둥과 중앙 군사위원회의 작전 지시에 이의를 제기했기 때문이었다.

    이 회의에서 참가자들은 인민 해방군의 전략적 공격 전환 이후 경험을 총괄하고 현재의 전략적 형세를 분석하였다. 또 전국적 승리를 거두기 위해 전략적 부대 배치와 방침 및 정책 등을 연구하였다. 회의는 다음 세 가지 전략적 의제를 토론하였다.

    1) 전쟁을 국민당 통치지역으로 끌고 나갈 것 2) 생산을 발전시키고 인민의 부담을 줄일 것 3) 기율 및 기강이 무정부 상태로 흐르는 것을 반대할 것

    마오쩌둥은 회의에서 3가지 방침을 제기했다. 1.군대는 계속 전진해야 한다. 2.생산을 더 해야 한다. 3.기율을 강화해야 한다. 마오의 언명은 그 뒤 “군대가 전진하고, 생산을 좀 더 하고, 기율을 강화하지 않으면 혁명승리는 없다.”고 요약하게 되었다. 뭐든 요약하여 전 당과 군에 전파하는 것이 중국 공산당의 특징이다. 지휘관부터 전사에 이르기까지 쉽게 이해하고 서로 강조해야 하기 때문이다. 회의는 5월 1일의 노동절 경축을 위해 중앙의 구호를 토론하여 통과시켰다. 또 신속하게 정치협상회의를 소집하여 민주연합 정부를 설립하기 위한 제안을 하기로 결정하였다. 중공은 이같은 내용으로 5월 5일 중국 국민당 혁명위원회, 중국 민주동맹, 중국 민주촉진회, 중국 농공민주당, 중국 인민 구국회, 삼민주의 동지회 등 국민당을 제외한 제 정파에 발송하였다. 런민일보(人民日報)는 “그해 8월부터 여러 부문의 대표들이 해방구에 속속 모여 공산당 대표와 신정치협상 주비공작을 하였다.”고 기록하였다. 그밖에 서기처 회의는 전략적 공격의 발전 방향과 화북과 중원 해방구의 통일지도를 위해 조직개편 및 인선을 결정하였다.

    전략적 부대배치와 인선을 새로 하다

    1948년 5월 9일, 중공 중앙과 중앙군사위는 서기처 회의의 결정에 따라 ‘화북과 중원 해방구의 조직관할지 및 인선 개편의 통지’를 발송했다. 진기로예와 진찰기 두 중앙국을 합병하여 화북 중앙국으로 하고 류샤오치가 화북국 제1서기를 겸하게 하였다. 보이보는 제2서기, 네룽전은 제3서기가 되었다. 진기로예와 진찰기 두 해방구를 합병하여 화북 해방구로 하고 두 군구를 합병하여 화북군구로 하였다. 네룽전이 사령원이 되고 보이보가 정치위원을 맡았다. 화중 해방구 및 룽하이루 남쪽과 창장 북쪽, 나아가 쓰촨 섬서 해방구를 중원 해방구에 귀속시켰으며 중원국을 강화하였다. 중원국은 덩샤오핑이 제1서기, 천이가 제2서기, 등즈후이(鄧子恢)가 제3서기를 맡았다. 중원 군구와 중원 야전군을 설립하여 류보청이 군구 및 야전군 사령원이 되고 덩샤오핑이 정치위원, 천이가 제1부사령원을 맡았다. 리센녠은 제2부사령원을 맡았다.

    이와 같은 조직개편과 인선은 두 해방구가 하나로 이어졌기 때문이었다. 즉 산시성, 차하얼성(내몽골), 허베이성, 허난성에 나누어져 있던 두 해방구가 그동안의 전투 승리로 하나로 합쳐진 것이다. 한편으로는 마오쩌둥과 공산당 지도부의 자신감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해방구와 군구를 확대 개편하여 대규모의 작전을 효율적으로 펼치려는 의도가 담겨 있었다. 이전에는 각 지역 부대들이 합동작전을 펼쳤는데 아무래도 지휘나 통제를 일사불란하게 하는데 어려움이 많았을 것이다. 민주 연합정부 구성 등 정치공세를 공산당 안에서 확립하고 공식화한데도 의미가 있었다. 하지만 그와 같은 결정에는 별다른 이견이 없었다. 정작 중요한 이견은 마오쩌둥과 중앙군사위원회에 정면으로 이의를 제기한 쑤위의 간언에서 비롯되었다.

    쑤위, 두 번째로 마오쩌둥의 방침에 이의를 제기하다

    쑤위는 이전에도 마오쩌둥의 전쟁 지도에 이의를 제기한 일이 있었다. 내전 초기인 1946년 6월, 장제스의 대규모 공격에 맞서 마오쩌둥도 철도선 파괴 등 대규모 반격전략을 구상한 일이 있었다. 하지만 장쑤성을 중심으로 중원 지역을 담당했던 쑤위는 ‘내선작전’을 주장했다. “근거지 안으로 국군을 끌어들여 치고 빠지는 소모전을 펼쳐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마오쩌둥은 크게 괘씸해 하였지만 작전 계획 보고서를 본 뒤 생각을 바꿨다. 마침내 마오와 중앙의 승인을 얻은 쑤위는 이른바 중원에서 ‘쑤위의 7전 7첩’이라는 승리를 거둬 해방군의 사기를 크게 진작시켰다. 마오와 중공 중앙은 그후 방침을 바꿔 “땅에 연연하지 말고 적을 소모시키라.”는 유연한 전술로 돌아섰다. 병력과 장비에서 압도적 열세인 현실을 인정한 것이다. 그런데 고심 끝에 결정한 군사작전에 쑤위가 또다시 이의를 제기한 것이다. 그 전말은 다음과 같다.

    마오쩌둥과 쑤위

    1948년 1월 하순, 화동야전군 부사령원 쑤위는 갑자기 중앙 군사위원회의 명령을 받았다. “쑤위는 화동 야전군 휘하 3개 종대로 병단을 편성하라. 병단을 지휘하여 창장을 건너 남하하여 적진 깊숙이 들어가라. 적지에서 대규모 기동작전을 벌여 따베산과 중원 지역의 군사적 압력을 감소시키라.”

    마오쩌둥이 이같은 대담한 결정을 한 배경에는 따베산 진격작전의 경험에서 비롯하였다. 일년전 전황이 매우 불리하던 때 류보청과 덩샤오핑 등 중원 부근 부대에게 따베산 진격을 명령하여 국면을 일거에 호전시켰던 것이다. 이제 전황이 교착되어 있을 때 다시 한번 적진을 제대로 휘저으면 승기를 더욱 가져오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담겨 있었다. 마오쩌둥은 먼저 천이에게 이와 같은 결심을 밝혔다. “동북은 린비아오가 잘하고 있다. 화북도 중앙과 네룽전이 전황을 호전시켰다. 서북에서도 펑더화이가 이촨에서 이긴 뒤로 적이 눈에 띄게 위축되었다. 천겅과 세푸즈도 산시를 잘 휘젓고 있다. 그런데 류덩이 있는 따베산이 문제다. 장제스도 나도 결국 중원에서 결판이 날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따베산에 대한 압력도 줄이고 적군 병력을 강남으로 이삼십개 여단쯤 끌고 가야 한다. 그러면 중원에서 우리가 우세를 차지할 수 있다. 이런 일은 쑤위가 맡는게 제격이다.” 천이는 두말없이 찬성했다. “주석, 쑤위라면 충분히 해낼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쑤위가 보기에 이 작전은 위험천만한 것이었다. 따베산은 산악지역이어서 그나마 발을 뻗어 디딜 곳이 있지만 강남 지역은 피할 데도 마땅치 않았다. 촘촘한 수로망에다 저습지가 많아 잘못 포위되면 부대가 전멸당하기 십상이었다. 중앙의 명령은 추상같았다. “모든 준비를 마치고 도강명령을 기다려라.” 쑤위는 감연히 자신의 생각을 전보에 담아 중앙 군사위원회에 발송했다. “강남은 후방이 없고, 인민의 지원이 없으며 수로가 많아 작전을 펼치기에 어렵다. 내선에서 몇 번 싸워 승리한 뒤 강남으로 가고 싶다.”

    내전을 다룬 드라마를 보면 마오쩌둥은 전보를 받고 노발대발한다. “쑤위, 이 자가 참으로 담이 크구나. 중앙의 결정에 이렇게 정면으로 문제를 제기하다니.” 주더가 “쑤위가 전에도 이의를 제기한 적이 있지 않소?” 하며 쑤위가 일곱 번 승리한 것을 상기시켰다. 주더는 쑤위의 문제 제기가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때 저우언라이가 “주석, 천이와 쑤위를 불러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 봅시다.”하고 권하자 마오쩌둥은 “좋소. 당장 천이와 쑤위를 이곳으로 오라 하시오.”하고 받아들였다.

    다음날, 천이와 쑤위는 전선을 떠나 마오가 있는 시바이포로 들어오라는 명령을 받았다. 천이는 “쑤 사령, 주석이 말할 때 너무 강하게 이의 제기를 해서는 안되네. 주석의 이야기를 충분히 들어보게.”하고 걱정했지만 쑤위는 태연자약하게 미소 지을 뿐이었다. 마오쩌둥, 저우언라이, 주더, 런비스, 류샤오치 등 중공 중앙의 핵심 지도부가 모두 모여 쑤위의 보고를 들었다. 쑤위는 창장을 건너 도하하는 게 시기상조라고 이야기한 다음 아직은 중원에서 싸우는 게 유리하다는 견해를 소상히 밝혔다. “적에 비해 중과부적이다. 보급을 받을 수도 없다. 강과 수로가 많아 기동하기에 불리하다.” 그러자 마오쩌둥이 반문했다. “류보청, 덩샤오핑이 따베산으로 진격할 때는 보급이 좋았는가? 후방도 없이 싸우지 않았나? 숱한 강과 산을 건너 적진 한복판으로 들어갔다. 그 사실을 잊지는 않았겠지?” 주더도 옆에서 “류덩 부대가 끝내 따베산에 뿌리를 내리고 오히려 근거지를 대거 확대했다.”고 거들었다. 그러자 쑤위는 “중원에서 몇 달 동안 기반을 다졌습니다. 중원에서 몇 번 더 싸워 전황을 호전시킨 뒤 강남으로 가고 싶습니다.”하고 간청했다. 어쨌든 지금 당장 강남에 가는 것은 곤란하다는 것이었다. 천이는 옆에서 안절부절하며 마오와 쑤위의 문답을 지켜볼 뿐이었다.

    마오쩌둥이 다시 물었다. “당신, 중원에서 잘 싸우겠다 하는데 얼마나 잘 싸울 수 있나?” 쑤위는 “적을 10만명이나 20만명 쯤 섬멸하겠습니다. 그보다 더할 수도 있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마오쩌둥이 “더할 수도 있어?” 하고 묻더니 “당신, 장제스가 가진 450만명을 전부 창장 이북에서 섬멸할 수 있어?” 하고 물었다. 쑤위는 “그건 아닙니다.”하고 대답하더니 “저는 그렇게 많이 생각한 적은 없습니다. 하지만 장제스의 정예병력 50만이나 60만명을 섬멸할 구상은 한 적이 있습니다.”하였다. 그러자 마오쩌둥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끄덕 하였다. 마오는 “그러자면 시간이 걸리겠지. 그동안 류덩 부대가 따베산에서 고생을 하네.” 하고 걱정했다.

    저우언라이는 “우리는 당신이 병단을 이끌고 강남으로 가면 반드시 적의 주력이 따라붙을 것이라 생각했소. 그럼 류덩 부대의 포위가 풀리겠지. 강남에서 싸우는 것은 확실히 불리한 게 많지요. 당신이 중원에서 승리할 수 있다 하면 꼭 가야 하는 것은 아니오.”하고 거들었다. 저우언라이는 마오쩌둥의 복심이라 할 만큼 마오의 심리변화를 잘 알았다. 그리고 마오도 저우언라이의 판단을 존중해 왔다. 저우언라이는 쑤위의 보고를 듣고 마오쩌둥이 생각을 바꿀 것이라는 판단을 했던 것이다.

    쑤위는 “지금 우리는 중원에서 크게 이길 조건을 가지고 있습니다. 강북에서 적 주력을 대거 섬멸하면 전국의 승리에도 시간을 단축시킬 수 있습니다.”하고 자신 있게 말했다. 마오는 주위를 한번 둘러 보더니 “다른 생각 가진 동지 없소?” 하고 물었다. 그러더니 쑤위에게 “어떤가? 아직도 강남에는 가고 싶지 않은가?” 하고 물었다. 쑤위는 감연히 “네, 저는 강북에서 적을 한번 크게 섬멸하고 싶습니다.”하고 대답했다. 드디어 마오쩌둥이 단안을 내렸다. “좋다. 여러분, 나는 쑤위 동지 의견에 따르겠소.” 확실히 신중국 성립 이전의 마오쩌둥은 판단이 빠르고 정확하였다. 부하들의 의견을 경청하였으며 자신의 잘못을 바로 수정할 줄 알았다.

    그 뒤 마오쩌둥은 쑤위를 불러 함께 저녁을 먹었다. 마오쩌둥은 쑤위에게 “천이는 중원국에서 사업하기로 하였소. 화동 야전군은 자네가 맡아야 하네.” 하고 사령원으로 임명하겠다는 생각을 밝혔다. 쑤위는 급히 “주석, 감당하기 힘듭니다. 우리는 천사령하고 떨어지면 안됩니다.”하고 사양했다. 마오는 “이미 정해진 일일세. 중앙의 결정이 조변석개할 수는 없네.”하고 대답하였다. 쑤위가 다시 한번 “사령원은 불감당이올시다.”하고 사양하니 마오는 “그럼, 사령원 대리로 하게. 정치위원도 자네가 대리하네.”하고 매듭지었다. 쑤위는 내전에서 누구보다 큰 공을 세웠지만 매우 겸손했다고 한다. 나중에 10대 원수를 정할 때에도 끝까지 사양하여 대장으로 만족하였다. “공을 세웠으면 그만이지 원수 칭호가 중요하지 않다.”고 하여 마오쩌둥이 감탄했다고 한다. 마오는 “쑤위는 대장 중 으뜸이다. 원수에 결코 부족하지 않다.”고 칭찬하였다.

    회의 뒤 류샤오치, 주더, 저우언라이, 런비스 등은 차례로 시바이포로 돌아갔다. 마오쩌둥과 당 중앙이 청난좡을 떠난 것은 1948년 5월 26일이었다. 마오쩌둥은 청난좡에서 40일간 머물렀다.

    <국공내전> 칼럼 연재 링크

    필자소개
    해남 귀농. 전 철도 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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