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간성의 상실과 소외의 심화
    [원효-맑스의 대화④]세계혁명과 진속불이(眞俗不二)
        2020년 05월 06일 07:40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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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류의 위기와 원효-맑스의 대화 ③] 폭력·테러·학살·전쟁은 왜

    인간성의 상실과 소외의 심화: 주변에 ‘인간’이 있는가?

    정도의 차이일 뿐, 인간은 누구나 외롭고 불안하다. 죽음으로 인하여 언제인가 세상과 작별할 것이라는 유한성을 자각하고 어떻게 살 것인가 질문하며 실존을 모색하지만, 죽음이 아무런 준비 없이 언제 어떤 모습으로 닥칠지 모르기에 늘 불안하다. 이상과 완성을 추구하지만, 누구도 이에 다다르지 못한 채 현실과 괴리로 늘 괴로워한다. 행복을 소망하지만 누리는 듯하면 너무도 쉽게 불행은 찾아온다. 욕망은 신기루인지라 이르렀다고 생각하는 순간 멀리 달아난다. 남들은 물론, 사랑하는 연인과 가족, 친구, 동지조차 타인의 모습을 섬뜩 보여준다. 세상이 구조적 모순으로 얽혀 있는 탓에 선한 자들이 더 고통을 받는다. 세계는 알려고 할수록 알 수 없고 늘 부조리하다. 온몸을 던져서 노력해도 안 될 때는 신을 찾아 기도를 하지만, 신은 늘 응답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 불안과 고독 속에서 이 세계에 던져진 단독자로서 이에 맞서서 의미를 해석하고 그에 따라서 결단하고 실천해야 하는 존재가 바로 인간이다.

    고독과 불안이 인간의 숙명이자 본질이지만, 자본주의 체제는 이에 소외를 더한다. 카프카의 <변신>이란 작품이 있다. 성실하게 일만 한 샐러리맨 그레고르 잠자는 어느 날 갑자기 벌레로 변한다. 모습만 벌레일 뿐 목소리와 영혼과 기억은 그대로인데, 그가 가장 사랑했고 그를 사랑했던 가족은 그를 징그러워하고 혐오하고 배제하고 폭력마저 행한다. 그는 끝없는 소외와 고독 속에서 죽어간다. 마침내 그가 죽자 가족들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소풍을 떠난다.

    사람이 벌레로 변하는 일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 입장에서 보면 이는 현실성이 없는 소설이다. 그러나 이 소설만큼 현실적인 소설도 없다. 우리 사회가 인간을 소외시키고 있는 양상에 대해 소름이 돋도록 극명하게 보여준다. 우리 모두는 벌레가 아닌가? 타인들로부터 벌레 같은 존재로 간주되면서도 존엄한 인간이라고, 모두에게 사랑받고 인정받는 존재라고 착각하는 것은 아닌가? 잠자가 죽었을 때 오히려 가족들이 소풍을 떠난 것처럼 내가 죽었을 때도 내 주변의 사람들은 그리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자신들의 삶을 살지 않겠는가. 살아 있을 때에도 나는 다른 이들에게 아무 의미도 갖지 못하는 벌레 같은 존재인 것은 아닌가. 아니, 현실은 『변신』보다 더 비극적이다. 우리는 자신을 가장 잘 이해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돈 몇 푼 때문에 죽이거나 배신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왜 현대인은 물질적 풍요를 누리면서도 소외를 겪어야 하는가.

    널리 보면 따돌림, 왕따도 소외의 일종이다. 어느 시대, 어느 집단이든 따돌림은 있었다. 그러나 소외는 자본주의 체제라는 맥락에서만 생기는 현상이다. 군중 속에 있어도 고독한 것, 타인들로부터 박수와 갈채를 받는 그 순간에도 마음이 불안하고 씁쓸한 것, 사랑하는 이들도 너무도 먼 타인처럼 느껴지는 것, 따돌림을 당하는 몇몇이 아니라 현대인 모두를 불안과 고독과 낯섦에 몸부림치게 하는 것, 일이 몹시도 싫은데 먹고살려고 억지로 출근하게 하는 것, 문득 자신을 사람이 아니라 기계로 느껴지게 하는 것, 돈, 스타, 독재자를 열광적으로 섬기게 하는 것, 인간의 본성을 상실하고 타인을 괴롭히고, 착취하고, 폭력과 살해를 행하게 하는 것, 타인은 물론 자신조차 낯설게 하는 것, 죽음보다 더 고통스러워 자살로 이끄는 것, – 바로 그것이 소외다.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누구나 자신의 본성을 상실하고 소외를 겪는다. 나는 주변 사람들에게 얼마나 인간적인 사람인가? 내 주변에 인간적 품성을 갖춘 사람이 얼마나 있는가?

    인간의 본성은 선한가, 악한가: 인간은 유전적 키메라다

    인간의 본성은 선한가, 악한가. 맹자의 성선설과 순자의 성악설은 과학적 근거 없이 이루어진 성인의 은유놀이거나 직관적 추론일 뿐이다. 인간은 이기와 이타, 선과 악이 뒤섞여 있는 유전적 키메라(genetic chimera)다.

    리차드 도킨스에 따르면, 인간 또한 ‘이기적 유전자가 조종하는 생존기계’에 지나지 않으며 이기적 유전자의 목적은 유전자 풀 속에 그 수를 늘리는 것이다.(<이기적 유전자>) 그의 지적처럼 사자를 비롯하여 대부분의 동물들은 싸움에 이긴 수컷이 암컷을 독점하며 암컷들은 가장 강한 수컷에게 교미를 허용한다. 인간 또한 자신과 자신의 유전자를 더 많이 남기기 위하여 대다수 남성은 더 많은 유전자를 퍼트리려는 본능을 갖고 있고 여성은 양육을 잘할 수 있는 남성을 원한다. 인간은 타인과 다른 집단의 것을 약탈하여 자신이나 자식, 자신의 유전자가 비슷한 집단의 것으로 삼는다. 나와 내 가족의 집과 밥그릇을 키우고 자식의 미래를 위하여 타인과 치열한 경쟁을 마다하지 않는다.

    하지만, 리차드 도킨스는 인간의 사회성을 등한시하였다. 인간은 사회적 협력을 도모하였다. 한 달에 홀로 사슴 3마리를 잡던 원시인이 10명이 짝을 지어서 사냥을 해서 40마리를 잡은 후에는 이타적 협력을 할 것이다. 인간은 최소한 142만 년 전부터 불을 사용하고 20만 년 전부터 FoxP2 유전자의 돌연변이로 정교한 언어소통을 하면서 사회적 협력을 더욱 체계적으로 도모하였다. 인간은 사회를 형성하고 농경을 시작하면서 혈연 이타성(kin altruism)만이 아니라 호혜적 이타성(reciprocal altruism), 집단 이타성(group altruism)을 추구하기 시작했고, 고도의 이성을 바탕으로 맹목적 진화에 도전하여 공평무사한 관점을 증진시키며 윤리적 이타성(ethical altruism) 또한 추구했다.(피터 싱어, <사회생물학과 윤리>)

    이타성은 도덕적 의지만이 아니라 타인의 아픔에 대한 공감에서 비롯된다. 이것이 자신의 유전자를 더 많이 남기는 데 유리하기에 몸의 진화에도 영향을 미쳐서, 인간은 두뇌 속에 거울신경세포 체제(mirror neuron system)를 형성하였다. 우리가 불행에 처한 사람들을 보았을 때 마음이 아픈 것은 뇌 속에서 거울신경세포체제가 작동하기 때문이다. 거울신경체계는 타인에게 자신의 표현을 더 쉽고 안정적으로 전달하려는 것을 선호하는 데서 기인한 ‘자연선택의 결과’다.(P. F. Ferrari 외, <Mirror neurons development through the lens of epigenetics>) 타인의 아픔에 대한 공감은 인간이 사회를 형성하면서 몸에 새겨진 진화의 결과물이다. 예수님의 사랑, 부처님의 자비, 공자의 인(仁)은 모두 공감을 바탕으로 한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인간성의 상실과 소외

    자본주의 체제는 어떻게 인간성을 망치는가. 자본주의 체제는 선과 악이 공존하는 인간에게 선은 숨기고 서로 악마성을 드러내도록 조장하는 사회다. 자본은 노동자가 생산한 잉여가치를 착취하여 이를 이윤으로 삼아 자본을 축적한다. 끊임없이 확대재생산을 해야만 이 체제가 유지되고 더 많은 자본을 축적할 수 있기에, 이 체제 안의 구성원은 모두가 탐욕을 증대한다. 필요가 아니라 탐욕에 따라 생산하고 소비하며, 능력에 따라 보상하며 경쟁을 부추긴다. 절대 다수가 인간의 가치보다 돈과 물질을 더 숭배한다. 만족할 줄 모르는 탐욕, 야만적인 경쟁, 물신주의가 자본주의 체제 속의 인간군상의 모습이다.

    자본주의가 인간성을 상실하게 하는 핵심은 소외다. 인간은 노동을 통해 진정한 자기실현을 하고 자기의 본성을 구현한다. 그럼, 노동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먼저 칼 맑스의 목소리를 들어보자.

    “노동은 우선 무엇보다도 인간과 자연이 참여하는 한 과정, 다시 말하면 인간이 자기 자신의 행위를 통해서 인간과 자연 사이의 물질대사를 시작하고 규제하며 통제하는 한 과정이다. 인간은 하나의 자연력으로서 자연과 대립한다. 그는 자연소재를 자신의 생활에 유용한 형태로 만들기 위하여 자신의 타고난 신체적 힘인 팔 · 다리 · 머리 · 손 등을 움직인다. 그는 이러한 움직임을 통해서 자기 외부의 자연에 작용하여 이를 변화시키며 또한 이를 통해서 자신의 본성까지도 변화시킨다. … 아무리 서툰 건축가라도 가장 우수한 꿀벌보다 애초부터 앞서 있는 점은 건축가가 밀랍으로 집을 짓기 전에 미리 그것을 자신의 머릿속에서 짓는다는 데 있다. … 그는 단지 자연물의 형태를 변화시키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그 자연물을 통해 자신의 목적도 실현한다.”(<CapitalⅠ>)

    어렸을 때 흙집을 짓는 일을 도운 적이 있다. 행상을 하는 부부가 급히 겨울을 나야 하는데 마침 우리 동네에 빈방이나 빈집이 없어서 우리 집 텃밭에 흙집을 지었고, 필자는 그 일을 도왔다. 이것으로 맑스의 노동 개념을 설명하면, 노동은 목적에 따른 자연의 변형생성 행위이다. 개미나 꿀벌은 본능에 의해 집을 짓지만, 이와 달리 선친은 행상 부부가 겨울을 춥지 않게 지내게 한다는 목적으로 자연의 흙을 퍼 와서 흙벽돌로 변환시켜서 흙집을 지었다. 이처럼 노동은 목적을 가지고 인간의 육체와 정신을 투여하여 도구를 매개로 자연을 변화시키는 행위이다.

    노동은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실천이다. 흙을 퍼서 고르고 지푸라기를 섞어 반죽을 하여 벽돌을 만들었다. 원래 알갱이 상태로 형상을 갖던 흙이 흙벽돌로 변하자 비와 바람, 찬 기운을 차단하고 습기를 조절하며 집의 꼴을 이루는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였다.

    맑스 이전에는 노동을 하지 않는 상태가 자유였지만, 맑스는 이를 비판적으로 극복한다. 그것은 소극적 자유(freedom from)이다. 맑스에게 노동은 적극적 자유(freedom to), 곧 진정한 자기실현으로서 자유, 곧 인간의 본성을 구현하는 실천이다. 선친이 흙집을 짓지 않고 방관자에 머물렀다면 그는 게으르고 이타성이 없는 냉정한 인간으로 남았을 것이다. 하지만, 흙을 흙벽돌로 만들면서 자연을 변형시키는 주체가 되었으며, 흙집을 지어서 행상부부가 겨울을 춥지 않게 보내게 하여 부지런하고 이타성이 있는 존재가 되었다.

    노동은 대자적 자유(freedom for)를 실현하며 인간을 유적 존재로서 거듭나게 하는 행위이다. 흙집짓기를 마치자 아버지는 당시 초등학생인 필자에게도 막걸리 한 잔을 권하였다. 평생을 통해 가장 맛있었던 술이었다. 아버지로부터 한 일원으로 인정받았다는 기쁨 때문이었을 것이다. 행상부부는 사는 내내 고마워하며 필자를 볼 때마다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부침개 등을 부쳐주고는 했다. 이처럼 노동은 인간이 집단의 구성원으로서 거듭나게 하고 타자를 자유롭게 하여 자신도 자유로워지는 대자적 실천행위이다.

    노동은 세계 속으로 시간을 끌어들여 구체화하는 행위이다. 누구에게나 똑같이 하루 24시간이 주어지지만, 노동을 하지 않을 때 시간은 인간과 구체적인 관련을 맺지 않은 채 의미없이 흘러갈 뿐이다. 흙이 자연의 상태에서 흙으로서 본래의 가치를 갖고 있던 것이 과거라면, 흙을 퍼 와서 거르고 반죽을 하여 흙벽돌로 만들어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그 순간이 현재이며, 이로 흙집을 지어 행상부부가 겨울을 따뜻하게 나는 목적을 구현하는 것이 미래이다.

    하지만,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노동 자체가 소외의 한 양식이 된다. 노동은 진정한 자기실현이 아니라 돈 버는 수단, 착취당하는 과정으로 전락한다. 인간이 주체가 되지 못한 채 기계의 부품으로 전락하고, 노동자가 주체가 되어 생산한 생산물이 자본가의 것이 되고, 이를 통해서 자본가는 노동과정과 노동자를 지배한다. 시간 또한 자본가가 전유한다. 더 이상 살아 있는 노동에 의하여 가치가 만들어지지도 않으며, 노동자는 퇴근하는 그 시간까지 자본가가 요구하는 상품생산 목표에 이르는 강제된 노동을 유지할 뿐이다. 유적 존재로서도 소외되어 사람들은 그저 경쟁자이거나 이용하고 이용당하는 대상이거나 상품화폐를 더 섬기는 타인일 뿐이다.

    무엇보다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물화(物化, reification)가 진행되어 소외를 심화한다. 여기 펜 한 자루가 있다. 이로 독재정권 때 “독재 타도”를 외치는 전단을 썼고 사랑하는 이에게 시를 써서 보내 아내로 삼게 되었으며, 좌절해 있는 후배에게 편지를 보내 삶의 희망을 다시 갖게 하였다. 나에게 이 펜은 무한한 가치를 갖는다. 하지만, 이 펜을 가지고 백화점에 가서 책 몇 권과 바꾸자고 하면 점원은 나를 미친 사람으로 여길 것이다. 이 펜이 시장에서 갖는 교환가치는 몇 십 원밖에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처럼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사물의 본래 가치가 후면으로 사라지고 교환가치가 이를 대체한다. 사람조차 그 사람의 품성보다 이를 통해 바라보게 된다. 결국 물신을 숭배하고 돈 몇 푼에 사람을 배신하거나 살해하는 일도 벌어진다.

    소외의 심화와 극복: 세계 혁명과 진속불이(眞俗不二)

    그럼, 이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대안은 크게 세 가지다. 하나는 근본적으로 노동자들이 조직화하고 연대하여 파업, 태업 등의 다양한 방법으로 저항하면서 자본주의 체제를 해체하고 대안의 사회를 구성하는 세계혁명을 꾀하는 것이다. 또 하나는 개인이 소외를 극복한 주체가 되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맑스가 말한 대로, 곳곳에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을 구성하는 것이다.

    누가 이 주체가 될 것인가. 문제는 노동자들이 ‘1차원적 인간’으로 전락하고, 자본과 국가의 포섭과 배제 전략에 휘말렸다는 것이다. 흔들의자에 앉아서 맥주를 마시며 야구를 보는 노동자가 파업하러 오라는 동료의 말에 반응하겠는가. 그의 현실은 노동자이지만, 자본이 만들어준 대중문화와 소비문화에 취하여 그는 계급의식을 망각한 채 자신이 부르주아인 것처럼 착각한다. 자본과 국가의 동맹은 ‘물질적 풍요, 복지, 대중문화, 이데올로기, 교육, 종교’ 등 다양한 방식으로 노동자를 포섭하여 ‘반역을 향한 꿈’과 ‘체제의 모순과 부조리’에 대한 분노를 거세시킨다. 이에 응하지 않는 자는 철저히 배제하여, 주권권력이 생사여탈권을 쥐고 언제든 죽여도 좋은 ‘호모 사케르(homo sacer)’로 전락시킨다.

    “평등한 상(相)이 또한 공(空)하다”란 곧 진제(眞諦)를 융합하여 속제(俗諦)로 삼은 “공공(空空)”의 의미이니, 순금을 녹여 장엄구를 만드는 것과 같다. (……) “차별상(差別相) 또한 공(空)하다”라 한 것은 이 속제를 다시 융합하여 진제로 삼은 것이니, 이것은 장엄구를 녹여 다시 순금으로 환원시키는 것과 같다. (……) 또 처음의 문(門)에서 “속제를 버려서 나타낸 진제”와 제2의 공(空) 가운데 ‘속제를 융합하여 나타낸 진제’인 이 2문의 진제는 오직 하나요 둘이 아니며, 진제의 오직 한 가지로 원성실성(圓成實性)이다. 그러므로 버리고 융합하여 나타낸 진제는 오직 하나이다.”(원효, <금강삼매경론>)

    순금을 녹여 금촛대, 금불상, 금반지와 금가락지 등 다양한 예술품이나 장신구를 만들지만 모두 금의 성질을 가지고 있듯, 중생이 어떤 형상으로 어떤 삶을 살든 모두 불성(佛性)을 가지고 있다. 반대로, 금촛대, 금불상, 금반지, 금가락지를 녹이면 모두 금덩이로 돌아가듯, 중생이 어리석음과 탐욕을 없애면 불성이 드러나며, 세속의 삶에서 모든 경계와 구분, 망령됨을 녹여 없애면 깨달음에 이른다.

    저 아름다운 연꽃이 높은 언덕에 피지 않는 것과 같이 내가 오랜 수행을 하여 부처가 되었다고 하더라도 고통 속에 있는 대중이 있는 한, 나는 아직 부처가 아니다. 그를 고통에서 구제하여 부처로 만들 때 나 또한 부처가 되는 것이다. 그러니, 중생과 부처가 둘도 아니라 하나도 아니다.

    <유마경>에서 “중생이 병을 앓으면 보살도 아프다.”라고 하였다. 해고 노동자, 비정규직 노동자, 여성, 노인, 장애인, 성적 소수자, 이주민, 난민 등 사회적 약자들의 고통에 동체대비(同體大悲)의 마음을 내어 이를 해소하는 일에 연대하는 바로 그 순간에 내 안의 불성이 드러난다. 예수님의 사랑, 공자의 인(仁), 부처님의 자비 모두 실은 공감이다. 이렇게 “공감을 바탕으로 연대한 이들이 서로를 더 자유롭게 하려고 노력/노동하는 연합으로서 코뮌”이 바로 우리가 갈 길이다. 이 코뮌에서 대중을 눈부처-주체로 거듭나게 하고, 연대 투쟁의 동력과 지혜를 얻고, 이를 바탕으로 정치투쟁을 전개하고, 나아가 새로운 세계혁명을 준비해야 하리라.

    타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이기적 욕망을 자발적으로 절제하고, 타자의 고통을 자신의 아픔처럼 공감하고 연대하며 타자를 더 자유롭고 행복하게 하는 실천을 하면서 진정한 자기를 완성한다. 자기소외와 노동의 소외를 극복하고 자기의 혁명과 사회혁명을 종합한다. 타자와 연대하면서 그를 통해 자신도 거듭나는 눈부처-주체들이 사적 소유를 거부하며 기동전과 진지전을 종합하고, 사보타주, 불복종, 대항문화의 실천 등 다양한 전선에서 다양한 투쟁을 전개하며, 이를 네트워킹하여 세계혁명을 도모한다.

    사진 : 버니 보스턴(Bernie Boston)이 찍은 68혁명의 상징적인 사진. 시위대를 진압하러 출동한 주방위군의 총구에 한 학생이 분홍빛 카네이션을 총구에 꽂아 이를 무력화하였다. 이후 ‘꽃의 힘(flower-power)’은 68혁명의 구호와 지향점이 되었다. 이는 ‘폭력을 통한 지배와 억압, 강제로서 권력’을 지양하고 ‘평화와 아름다움의 공존을 이루는 힘’으로 ‘변증법적 종합’을 이루었다.

    https://en.wikipedia.org/wiki/Flower_Power_(photograph)

    ※ 이 글은 <인류의 위기에 대한 원효와 마르크스의 대화>(자음과 모음, 2015)를 쉽고 짧게 풀어서 쓴 것으로 매달 첫 월요일나 화요일에 연재하고 있습니다. 쪽수까지 명기한 상세한 각주와 구체적 논증은 이 책을 참고하기 바랍니다.

    필자소개
    한양대 교수. 민교협 전 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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