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과거의 재해로부터의 교훈
    [책소개] 『재난의 세계사』(루시 존스(지은이) 권예리(옮긴이)/ 눌와)
        2020년 05월 04일 02:59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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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연재해의 역사는 곧 인류의 역사

    2천 년 전, 베수비오산이 분화해 폼페이가 괴멸했다. 수천 명의 사람이 화산쇄설류와 독성 기체 때문에 죽음을 맞았고, 한때 번영했던 도시는 불과 며칠 사이에 두꺼운 화산재 아래 묻히고 말았다. 오늘날 폼페이의 유적을 보면서 우리는 고대인들이 왜 활화산 바로 아래처럼 위험한 곳에 도시를 짓는 어리석은 선택을 했는지 의문을 품을 수도 있다. 하지만 화산 인근은 비옥하면서도 배수가 잘 되는 화산토의 성질 덕분에 농사를 짓기 좋은 곳이다. 사람들이 그곳에 모여 사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그런가 하면 홍수를 일으키는 강은 인류 문명의 요람이기도 하다. 나일강의 이집트문명이 그러했고, 황하에서 탄생한 중국문명이 그러했듯 고대 문명의 발전은 모두 홍수와 치수를 빼놓고는 말할 수 없다. 지금도 사람이 가장 많이 모여 사는 대도시들은 강 옆에 자리 잡고 있다.

    이처럼 인간은 언제나 자연재해와 함께 살아왔으며, 자연재해로부터 전적으로 안전한 곳은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봐도 좋다. 자연재해에 대비하는 미국의 정부기관인 미국지질조사국에서 33년 동안 일한 재해학자 루시 존스가 쓴 《재난의 세계사》는 11개의 대표적인 사건으로 지진, 홍수, 태풍, 화산 등 자연재해 앞의 인간과 사회의 모습을 돌이켜보고, 미래의 재난에 대비하는 법을 고민하는 책이다.

    언젠가 닥쳐올 재난, 피할 순 없지만 대비할 순 있다

    홍수, 지진, 화산과 같은 자연재해는 파괴와 비극을 낳는 끔찍한 재난으로만 여겨지곤 한다. 하지만 《재난의 세계사》에 따르면 이런 자연재해는 지구의 자연스러운 변동의 일부이기도 하다. 홍수와 태풍은 대기의 순환 과정에서 일어나고, 지진과 화산은 지각과 맨틀의 움직임으로 발생한다. 태풍을 비롯한 기상 현상은 바다의 물을 지구 곳곳으로 옮기고, 지진을 일으키기도 하는 단층은 산을 이루고 샘을 만들어 수많은 생명이 살아가는 터전을 마련한다. 화산 역시 땅속 깊은 곳의 다양한 물질을 지표면으로 내보내 생태계에 일조한다. 자연재해로 대표되는 지구의 복잡다단한 자연현상이 없었다면 지구는 지금처럼 온갖 생명으로 가득한 풍요로운 곳이 아닌, 훨씬 삭막한 곳이었을지도 모른다.

    《재난의 세계사》의 저자 루시 존스는 미국지질조사국에서 다양한 자연재해에 대비한 시나리오를 만들고 대비책을 세운 경험을 바탕으로 자연재해가 일어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이를 인간이 전적으로 통제할 수 있다는 오만을 버려야 한다고 말한다. 또한 현대사회는 고도로 도시화되고 복잡한 기술 체계에 의존하고 있기에 도리어 재난에 취약해져 있음을 지적하고, 자연재해에 대한 정확한 과학 정보를 습득하고 널리 알려야만 미래의 자연재해에 효과적으로 대비하고 피해도 줄일 수 있다고 말한다.

    20만 명이 넘는 사망자가 발생한 2004년 남아시아 지진 당시, 큰 지진 이후엔 쓰나미(지진해일)가 몰려온다는 사실을 해당 지역의 주민들이 알았더라면 얼마나 많은 이들이 목숨을 건질 수 있었을까. 2009년 허리케인 카트리나 사태 당시 미국 연방긴급재난관리청은 허리케인이 뉴올리언스를 휩쓸 수 있음을 알고 시나리오까지 만들어 둔 상태였지만, 준비가 충분치 않은 상태에서 닥쳐온 카트리나 앞에 속수무책이었다. 이미 재난이 벌어지고 난 뒤에 후회하면 늦다. 미리 대비해야 한다.

    재난 앞에서 희생자를 탓하는 심리, 우리는 극복할 수 있을까?

    1923년 간토 지진(관동대지진) 당시, 수천 명의 무고한 한국인이 학살당했다. 대지진으로 인한 사회적 혼란을 수습할 방법을 찾던 일본 정부의 의도와, 자연재해의 무작위성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책임을 돌릴 대상을 찾던 일본인들의 심리가 맞물려 일어난 참사였다. 1755년 리스본 지진 당시, 포르투갈의 원조 요청을 받은 네덜란드는 리스본 지진은 신이 내린 벌이라며 구호 자금을 보내길 거부하기도 했다. 20만 명이 넘는 사망자가 발생한 2004년 남아시아 지진 당시, 우리나라 한 교회의 목사가 지진을 두고 기독교를 안 믿어 하나님이 내린 벌이라고 말해 논란을 빚었던 일을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다.

    인간은 이전까지 겪어본 적이 없는 지진, 갑자기 불을 뿜는 화산과 같은 거대한 자연재해 앞에서 무력감을 느낀다. 이런 자연재해가 자연스러운 자연의 메커니즘이란 사실이 밝혀진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고, 알더라도 인간의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그럴 때 사람들은 책임을 물을 희생양을 찾거나 희생자들의 잘못을 탓하기도 한다. 희생자들이 그들의 잘못으로 위험을 자초했다고 비난하면 스스로는 잠재적인 희생자라는 사실을 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재난의 세계사》에서 저자는 이런 경향이 어쩔 수 없는 인간의 심리이기는 하지만, 극단적인 상황에서는 또 다른 비극을 낳거나 자연재해로 인한 피해를 수습하는 데 걸림돌이 될 수도 있다고 말한다. 책에 나온 사례들이 지금 우리가 보기에는 모두 비합리적인 광기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우리 스스로 거대한 재난을 마주했을 때, 우리는 과연 그들과 다르게 행동할 수 있을까?

    사회의 가장 약한 부분부터 무너뜨리는 재난

    자연재해는 물리적인 피해만 입히지 않는다. 지진이 나면 허술한 건물들이 먼저 무너지고, 홍수가 나면 제방의 약한 곳부터 붕괴하듯, 《재난의 세계사》는 재난이 닥치면 사회 역시 약한 부분에서부터 문제가 생김을 지적한다.

    1927년 미시시피강 홍수 당시 미시시피강 곳곳의 제방이 붕괴해 수십만 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 그런 와중에도 당시 미국 대통령 캘빈 쿨리지는 구호 활동에 연방정부의 자금을 지원하길 거부했다. “국민은 정부를 지원하지만 정부는 국민을 지원하지 말아야 한다”라는 그로버 클리블랜드 대통령의 말처럼, 그 역시 정부 개입이 최소한으로 머물러야 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정치적 이념이 적극적인 재난 구호의 걸림돌이 된 것이다.

    또한 당시 미국 남부에 만연한 인종차별은 그 끔찍한 모습을 더욱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흑인들은 무리한 제방 보수 공사에 강제로 동원되었다가 떼죽음을 당하기도 했고, 이후 피해 수습 과정에서도 흑인 이재민들은 차별을 당해 제대로 된 구호품을 받지도 못한 채 방치되기도 했다. 비슷한 일이 2009년 허리케인 카트리나 사태 당시 반복되어, 흑인들은 뉴올리언스의 무정부 상태의 원흉으로 지목되곤 했다. 자연재해는 아니지만, 이번 코로나바이러스 대유행을 맞아 세계 각국에서도 사회의 가장 취약한 이들이 가장 큰 고통을 겪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재난을 극복할 힘은 결국 우리에게 있다

    자연재해가 인간 그리고 사회의 약점만을 드러내는 것은 아니다. 《재난의 세계사》에는 재난 앞에서 다른 이들을 일으켜 세우고, 피해를 수습할 수 있도록 힘쓴 이들의 이야기도 나온다.

    1755년 리스본 지진 당시 포르투갈의 재상 드카르발류(훗날 폼발 후작)는 수도 리스본이 괴멸되고 모두가 혼란에 빠져 있던 시점에서 국왕 주제 1세에게 한 “죽은 자는 묻고, 산 자는 먹이면 됩니다”라는 침착한 조언을 시작으로 빠르게 피해 복구를 이끌었고, 덕분에 리스본은 훨씬 안전하고 아름다운 도시로 다시 태어났다.

    1783년 라키산이 분화해 아이슬란드 전체 면적의 6분의 1을 용암으로 뒤덮고 유독 가스를 내뿜어 섬 전체가 위기에 빠졌을 때 욘 스타인그림손 목사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고, 직접 익힌 의술로 다른 이들을 돕고, 덴마크로 가 구호 자금을 받아오는 등 지역사회가 재기할 수 있도록 온 힘을 다해 지금도 아이슬란드의 국민적 영웅으로 이름을 전하고 있다.

    1927년 미시시피강 홍수 당시에는 밀주업자(당시 미국에선 금주법이 있어 술의 제조와 판매가 불법이었다)들이 자기들이 검거될 위험을 무릅쓰고 직접 배를 몰아 홍수 피해자들을 구조하러 나서기도 했다. 2004년 남아시아 지진의 참혹한 현장은 통신기술의 발달 덕분에 전 세계로 전달되어 수많은 사람들의 공감과 연민을 불러일으켰고, 또 자연재해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웠다. 2011년 일본 도호쿠 지진 이후로는 후쿠시마 지역의 여성들이 성차별의 굴레를 떨치고 지역사회 재건에 앞장서고 있기도 하다. 이처럼 인간의 우애와 용기는 위기 앞에서 가장 밝게 빛나는 법이다.

    역사의 흐름을 바꾼 재난

    때로 재난은 한때의 사건에 그치지 않고 역사를 바꾸기도 한다. 《재난의 세계사》는 재난의 영향으로 인류 문명의 흐름이 바뀐 사례들에 대해서도 다룬다. 1755년 리스본 지진은 리스본에서만 수만 명의 사망자를 낸 참사였다. 하지만 한편으론 재난은 신이 내리는 벌이라는 서구의 뿌리 깊은 생각을 뿌리부터 뒤흔든 사건이었다. 독실한 가톨릭 국가였던 포르투갈의 수도가, 그것도 가톨릭의 가장 큰 축일 중 하나인 모든 성인의 날 대축일 미사 시간에 지진이 일어나 붕괴된 사건은 유럽의 지식인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볼테르는 〈리스본 참사에 대한 시〉를 써서 충격과 분노를 표했는데, 루소는 이 비극은 신이 아니라 건물을 높이 지은 인간의 자유의지 때문에 벌어진 것이라며 서신을 보내기도 했다. 1755년 리스본 지진은 유럽의 세속화, 그리고 근대 과학과 철학의 발전에도 영향을 끼쳤다.

    한편 1783년 아이슬란드 라키산의 분화는 북대서양의 섬인 아이슬란드뿐만이 아니라, 전 세계에 피해를 입힌 사례로 주목할 만하다. 물론 당시 인구의 5분의 1에 해당하는 1만여 명이 사망한 아이슬란드가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것은 사실이지만, 라키산에서 뿜어져 나온 황은 성층권까지 올라가 유럽은 물론 전 세계의 기온을 낮추었다. 그 결과 세계 각지에 기근이 일어나 수많은 사람이 죽었고(일본, 인도 등지에서 일어난 대기근에는 라키산 분화가 동시에 찾아온 엘니뇨의 영향도 있었다), 특히 유럽에선 결국 사회적 혼란이 가중되어 몇 년 뒤인 1789년의 프랑스대혁명에도 영향을 끼친 것으로 여겨진다.

    우리도 자연재해로부터 안전하지 않다

    우리나라는 비교적 자연재해로부터 안전한 나라로 여겨져 왔다. 하지만 안심할 수는 없다. 계속되는 기후 변화의 영향으로 기상재해의 피해는 점점 심각해질 것으로 보인다. 2016년 경주 지진, 2017년 포항 지진은 우리나라도 더 이상 지진으로부터 안전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산인 백두산과 한라산은 한때 사화산 혹은 휴화산으로 알려졌으나 현재는 모두 활화산으로 분류되고 있다. 현대문명의 발전한 과학과 기술은 옛날이라면 대처하지 못했을 방식으로 자연재해를 예측하고 예방하기도 한다. 하지만 자연의 모든 것을 알아내기에는 아직 인류의 지식이 부족하고, 때로는 알고도 대비가 부족해 큰 재난을 겪기도 한다.

    이 책의 원제 ‘The Big Ones(대재난들)’는 캘리포니아에 언젠가 일어날 샌앤드리어스단층 지진을 가리키는 말인 ‘The Big One(대재난)’의 복수형이다. 이 책의 저자 루시 존스는 과학자지만 한편으론 캘리포니아주가 맞이할 대지진에 대비한 시나리오인 ‘셰이크아웃 시나리오’를 만들어 지진에 대비한 훈련을 기획하고, 로스앤젤레스시 시장 에릭 가세티를 설득해 지진에 대비해 로스앤젤레스 전역의 사회기반시설을 보강하고 시의 내진 규정을 개선하고 취약한 건물의 보강 공사를 독려하기도 했다. 이와 같은 경험으로 책의 마지막 장에서 저자는 자연재해에 대비해 독자들이 직접 취할 수 있는 행동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우리 스스로 자연재해의 무서움을 깨닫고 준비할 때 세상은 좀 더 안전한 곳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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