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백년 전의 『유토피아』
    [그림책] 『유토피아』(토마스 모어 원작/ 시몽 바이이 각색 그림/ 이숲)
        2020년 05월 04일 02:22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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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의 전속작가

    토마스는 왕의 전속작가입니다. 토마스는 왕의 인품에 반했고 왕은 토마스의 글솜씨에 반했지요. 하지만 두 사람의 관계는 한순간에 깨지고 말았습니다. 왕이 두 번째 성을 짓기 위해 토마스에게 새로운 법령을 작성하라고 명령했기 때문입니다.

    토마스는 세금을 늘리는 법령을 만들라는 왕의 명령을 거부했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가난한 백성들을 그렇게 괴롭히다가는 왕 스스로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질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왕은 크게 노하여 토마스를 궁 밖으로 쫓아냈습니다.

    집에 돌아온 토마스는 두루마리에 뭔가를 열심히 써 내려갔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 경비병들에게 새로운 법령이라며 두루마리를 전해 주었습니다. 곧 경비병은 토마스가 준 두루마리를 왕에게 전해 주었지요.

    “뚱보 왕은 여러분을 가난에 더 쪼들리게 하겠다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지금의 커다란 성 한 채로는 성에 차지 않는지, 성을 하나 더 짓겠다고 합니다. 이렇게 왕은 자기 백성에게 강제로 일을 시키고 돈을 빼앗고 고통받게 하기로 작정했습니다.”

    -본문 중에서

    토마스가 쓴 두루마리를 읽은 왕은 노발대발하며 토마스를 잡아 오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토마스는 이미 왕국을 벗어나 배를 타고 ‘유토피아’로 향하는 중이었습니다.

    유토피아

    굳이 알고 싶지도 않았고 배우고 싶지도 않았으나 알게 된 지식이 있습니다. 바로 교과서에 나오는 지식이지요.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 역시 그런 지식 가운데 하나입니다. 우리는 세계사 시간에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에 관해 배웠지만 왜 우리가 토마스 모어와 『유토피아』를 배워야 하는지 몰랐습니다.

    아마도 우리가 배운 역사라는 게 승자의 역사이기 때문에 배웠을 겁니다. 유럽의 제국주의 열강들이 세계를 정복했고 일본이 우리를 지배했기에 그들의 역사를 배웠을 겁니다. 유럽인들은 자신들이 어떻게 아시아와 아프리카와 아메리카의 문명을 파괴하고 원주민을 학살했는지는 철저히 숨겼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약탈과 정복을 정당화하는 역사를 썼습니다. 그게 아니라면 15세기 영국의 대법관이 쓴 책을 굳이 우리가 배울 필요는 없었겠지요.

    하지만 강압적인 학습은 아무런 자발적인 호기심도 불러일으키지 못했습니다. 저는 단 한 번도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를 읽고 싶은 적이 없었습니다. 아마 학교에서 토마스의 모어의 『유토피아』를 배운 학생들 가운데 99%는 『유토피아』를 읽고 싶다고 느끼지 못했을 겁니다.

    그림책으로 만난 『유토피아』

    저는 서른 살에 그림책이라는 시각 예술을 알게 되었고 곧 그림책과 사랑에 빠졌습니다. 그림책이 좋아서 그림책 마니아가 되고 그림책 서평가가 되고 그림책 번역가가 되고 그림책 편집자가 되고 작가가 되고 그림책 강사가 되고 그림책 서점 주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림책 『유토피아』를 만났습니다. 그림책으로 만난 『유토피아』의 세계는 흥미로웠습니다. 지금으로부터 오백여 년 전, 절대 왕권의 시대에 왕의 명령을 거부하고 백성의 편에서 왕에게 직언을 날리는 토마스의 행동에 통렬한 쾌감을 느꼈습니다.

    게다가 지금 토마스는 왕국을 벗어나 멋진 섬 ‘유토피아’로 가고 있습니다.

    “거기서는 왕자와 농부가 같은 식탁에 둘러앉아 밥을 먹고 집은 추위와 세월에 견디도록 돌과 모래로 지어졌지. 모두가 함께 일해 거둔 열매를 나눠 먹고, 돈은 아무 가치가 없는 곳이지.”

    -본문 중에서

    21세기의 지구

    지금도 영국에서 찰스 왕세자와 농부가 같은 식탁에 둘러앉아 밥을 먹는 일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세상에는 아직도 돌과 모래로 짓지 못한 집이 많습니다. 돌과 모래로 지은 집이 많은 한국에서는 돈이 없어서 집을 갖지 못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모두 함께 일하지만 그 결과를 공평하게 나누는 일도 거의 없습니다. 부자는 더 큰 부자가 되고 가난한 사람들은 더 가난해지고 있습니다. 돈이 권력이 되어 세상 거의 모든 것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21세기 지구의 모습입니다. 오백여 년 전에 한 영국인이 꿈꾸던 세상은 아직도 갈 길이 멀었습니다. ‘유토피아’는 여전히 이상으로 남아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그림책 『유토피아』를 보고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가 읽고 싶어졌습니다. 토마스 모어와 함께 21세기의 ‘유토피아’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어졌습니다. 차별이 없는 세상, 평등한 세상, 자본으로부터 자유로운 세상, 모든 사람이 행복한 세상을 토마스 모어와 함께 꿈꾸고 이루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21세기를 사는 독자가 오백여 년 전 작가의 『유토피아』를 보고 싶게 된 것은 강요된 입시교육 때문이 아닙니다. 내가 좋아하는 그림책 『유토피아』가 책의 행복과 지적인 호기심을 선물했기 때문입니다.

    필자소개
    세종사이버대학교 교수. 동화작가. 도서출판 북극곰 편집장. 이루리북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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