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헌정시대, 장제스
    국민정부 총통으로 취임
    [국공내전㉝) 해방군 뤄양洛陽 점령
        2020년 04월 29일 10:00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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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뤄양은 옛날 동한의 수도이며 중국 6대 왕조의 수도이다. 삼국지의 주요 무대 중 한 곳으로 중원 지역의 전략적 요지이다. 뤄양은 황허를 끼고 있으며 동쪽에 위치한 허난성 성도 정저우와 나란히 자리잡고 있다. 서쪽으로는 시안이 있어 국공내전에서도 필쟁의 요처로 꼽혀 왔다. 국민정부는 뤄양을 난징에 이은 제 2의 수도로 정하여 이 고도는 정치, 문화, 교통방면에서 높은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해방군이 뤄양을 점령하면 정저우와 시안의 연결을 끊을 수 있고 두 도시에 대한 위협을 강화할 수 있었다. 뤄양을 지나는 중원의 동맥 룽하이로가 차단당하면 서북 전장에 국군의 병력 증원이 곤란하게 되고 부득이 친링산맥을 우회해야 하였다. 이런 입지적 조건 때문에 공산당은 뤄양을 호시탐탐 노려 왔다. 뤄양을 점령하면 후베이, 허난, 산시의 새 해방구와 황허 북쪽의 해방구를 하나로 연결할 수 있었다. 공산당은 뤄양 점령으로 튼튼한 후방을 갖기를 원하였다. 전투에서 승리하면 대량의 무기와 탄약을 얻을 수도 있었다.

    뤄양성 주위는 산과 언덕이 둘러싸고 있었다. 성벽이 높고 호는 깊었으며 토질이 단단하며 지형이 지키기는 쉽고 공격하기는 어려웠다. 국군은 성의 지형을 이용하여 높은 보루로 성을 방어하려 하였다. 또 영구적인 엄폐호 공사를 벌여 포격으로 파괴하거나 폭파하기도 어려웠다.

    뤄양성을 기어 오르는 해방군

    수비군은 206사단 5개 정편 여단과 중앙 포병 4개 중대, 차량화 대대인 5대대 등 모두 2만명이었다. 206사단 사단장 치우싱샹(邱行湘)이 뤄양성 내외의 수비군을 통일 지휘했다. 206사단은 1945년 1월 간쑤, 닝샤, 칭하이, 산시, 허난등 성의 실업자와 학업을 중단한 청년으로 편성되었다. 청년사단이라 불리는 206사단은 장제스가 직접 양성하였으며 장교들은 장제스에 대한 충성심이 강하였다. 병사들도 장기간 정신 교육을 받았으며 내부에서 특무 독전대가 엄중하게 감시하여 전투력이 강하고 쉽게 투항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촨전투 승리 등으로 기세를 탄 해방군은 어떤 희생을 감수하고라도 뤄양성을 점령할 태세였다. 뤄양을 공격할 해방군 지휘관은 화동 야전군 참모장 천스지와 정치부 주임 탕량이었다. 뤄양을 공격하라는 마오쩌둥과 중앙군사위원회의 지시에 따라 그들은 화동 야전군 2개 종대와 진기로예 야전군 2개 종대, 그리고 타이웨 군구 1개 부대를 통일 지휘하게 되었다. 3월 7일부터 해방군은 정저우와 시안 방향에 요격부대를 배치하여 국군 지원병력을 차단한 다음 뤄양성을 총공격했다. 먼저 성 외곽거점을 소탕한 해방군 부대는 강력한 포격의 엄호속에 뤄양성을 화약으로 폭파하는가 하면 공성 사다리(운제를 말한다.)와 같은 구식장비까지 총동원했다. 3월 11일 뤄양성 공격을 시작한 해방군 부대는 끝까지 저항하는 수비부대를 분할하며 공격, 격렬한 시가전을 벌였다. 3월 14일까지 격전을 벌인 해방군은 뤄양성안을 모두 소탕하여 성을 점령했다. 수비군 사령이던 치우싱샹 중장 등 1만 5천명이 포로로 잡히고 5천명이 사상당하는 등 국군 2만명이 섬멸당했다.

    국군 47군이 지원 와서 뤄양성을 구원하려 하였으나 요격부대인 해방군 8종대에게 격퇴당했다. 국군 18군은 쉬창(許昌)에서 덩펑(登封)을 지나 서북쪽으로 출동했다. 국군 통수부가 독촉하는 가운데 3월 14일 헤이스관 서남쪽 푸덴(府店)에 도착하여 47군과 합류하여 뤄양을 증원하려 하였다. 해방군 8종대는 이허를 건넌 9종대 주력과 협력하여 국군 지원군을 완강하게 저지했다. 그때 정저우에서 출격한 국군 2개 병단이 17일 뤄양에 접근하였다. 해방군 공격부대는 형세가 좋지 않다고 판단하여 주동적으로 뤄양성에서 철수하였다.

    3월 하순 진기로예 야전군과 화동 야전군 주력은 핑한루(平漢路)에 있는 주마뎬(駐馬驻), 쉬창을 점령하였다. 국민 혁명군이 동쪽으로 부대를 보내자 천겅과 셰푸즈 집단군은 4월 5일 다시 뤄양을 공격하여 점령했다. 동서 교통의 대동맥인 룽하이 철로를 가로로 차단하고 정편 47군 일부를 섬멸했다. 전광석화와 같이 신속한 해방군의 용병이었다. 이로써 중원의 국군과 서북 전장의 국군 사이에 연결이 끊겼으며 공산당은 허난, 산시(섬서), 후베이 근거지를 더욱 튼튼히 굳히게 되었다.

    다음은 마오쩌둥이 뤄양 전투시기에 각 부대 지휘관들에게 보낸 전문의 일부이다. 마오쩌둥과 중앙군사위원회가 얼마나 구체적으로 전투에 개입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1947년 3월 7일 :천스지와 탕량, 천겅과 세푸즈, 류보청 덩샤오핑, 공산당 한단 분국, 쑤위 및 중앙공작위원회에게(1)

    (1) 아군 펑더화이 부대는 청청(澄城), 바이수이(白水), 뤄촨 등으로 진격하여 린펀을 공격하고 있다.

    (2) 적 1사단, 30사단, 36사단은 전부 산시성으로 되돌아가고 있다. 일부는 위관(漁關)을 수비하고 대부분은 시안 일대로 돌아갈 것이다.

    (3) 당신들은 3, 4, 8종대를 지휘하여 뤄양을 빼앗고 쑨웬량의 구원병을 섬멸해야 한다. 그 외 뤄양과 뤄양-정저우 선을 신속히 공격하라. 2주내 임무를 완성하기를 희망한다.

    (4) 그 다음 산시성 동부로 전진하여 펑더화이 부대와 협력하여 후쫑난 군을 섬멸하라.

    (5) 한단 분국은 신속하게 15만명과 2개월치 식량을 준비하여 3, 4, 8 종대에 공급하라.

    군사위원회 7일 02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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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7년 3월 7일 전문: 천스지와 탕량, 천겅과 세푸즈, 류보청과 덩샤오핑에게

    뤄양 공격의 중점은 구원병을 요격하는 것이다.

    보내준 전문은 읽었다.

    (1) 뤄양은 중요한 도시이다. 구쭈통(국민정부 육군 총사령관, 정저우 지휘소 주임)이 증원하지 않을 수 없다. 당신들은 헤이스관(黑石關), 옌스(堰師), 신안(新安) 등을 점령한 뒤 일부 부대로 뤄양을 공격하라. 적의 구원군을 끌어들여 전력을 집중하여 요격 섬멸하라. 작전의 중점을 구원군 공격에 두어야 한다.

    (2) 이촨에서 승리한 뒤 시안 일대는 크게 흔들리고 있다. 30사단은 이미 허양(合陽)에 출동, 아군의 남하에 방비하고 있다. 1사단과 36사단이 위관에 집결하고 있는데 출동할지 여부를 9종대에 명령하여 알아 보라.

    (3 )아군 11개 여단은 5일과 6일 이틀간 이촨에서 서남쪽을 공격하라. 일주일 내 점령할 수 있을 것이다. -이하생략

    3월 7일 24시 군사위원회

    린펀 시와 주변의 주요 도시 표시

    쉬샹첸, 산시성 남부 린펀성을 점령하다.

    한편 산시왕 옌시산이 점거하고 있는 산시성의 남부에서도 해방군이 국군을 밀어 붙였다. 3월 10일 해방군 진기로예 군구 제1부사령원 쉬샹첸은 진기로예 군구와 진수군구 소속 해방군을 통일 지휘하여 산시성 남부의 국군 거점인 린펀성을 공격했다. 펑더화이의 서북 야전군이 와쯔지에, 이촨에서 후쫑난 휘하의 시안 쑤이징 공서 국군과 한창 공방전을 벌일 무렵이었다. 국군이 린펀에서 서북 전장의 뤄촨에 병력을 공수할 태세를 보이자 이를 견제하기 위해서였다. 허난성 뤄양 공격에도 호응하기 위해서였다. 산시성 남부에 홀로 버티고 있는 린펀을 점령하면 성도인 타이위안을 직접 겨냥할 수 있다. 해방군은 2월부터 작전 준비에 들어가 우선 린펀의 비행장을 공격했다. 국군의 서북전장 증원을 막기 위해서였다. 3월 7일 비행장을 공격한 해방군은 수송기를 파괴하여 순조롭게 목적을 달성했다. 그러나 정작 린펀성은 철옹성처럼 단단해 공격하기가 만만치 않았다.

    린펀 공격을 지휘한 쉬샹첸

    린펀성은 성위가 폭 10미터, 아래쪽은 20-30미터에 이르는 두터운 성벽을 가지고 있었다. 성밖에도 30여개의 위성 보루가 있어 공격은 어렵고 수비하기 유리한 조건이었다. 공격하는 해방군은 5만 3천명, 수비하는 국군은 2만 5천명이었다. 성이 튼튼하다 보니 공성전은 유례없이 치열했다. 해방군이 갱도를 뚫어 성의 관문을 폭파하려고 하자 국군은 갱도에 짙은 연기를 흘려넣어 굴착을 방해하였다. 갱도를 놓고 다투는 사이 해방군 부대가 다른 쪽 문을 돌파하여 마침내 성안으로 진입했다. 치열한 시가전 끝에 성을 완전히 점령하니 5월 17일의 일이었다. 무려 72일간이나 성을 놓고 공방전을 벌였던 것이다. 이 전투에서 해방군은 사상자가 1만 5천명에 이르렀다. 국군도 2만 5천명이 사살당하거나 부상을 입었으니 전투가 얼마나 처절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쉬샹첸은 린펀 전투를 이렇게 설명했다. “성을 공격하는데 들어간 폭약이 10만근(50톤)이다. 포탄이 10만발, 수류탄이 20만발이고 총알이 백만발이다. 그래도 공격을 포기하지 않았다. 마오 주석과 주더 총사령도 나의 이런 결심을 견결히 지지하였다. 인민들의 지원과 희생도 컸다. 인민들이 헌납한 문짝이 20만개, 갱목이 10만개이다. 인근 100킬로미터 안쪽의 문짝을 모두 헌납 받을 정도였다. 양식이나 담가등 다른 물품은 말할 것도 없다. 20만명의 노무자가 동원되었다. 이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결코 승리하기 힘들었다.” 이 작은 성 하나를 공격하는데 사람들의 희생이 그 정도였으니 내전기간 중국 인민들의 고통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이로써 해방군은 산시성 남부를 모두 점령하여 타이위안 공격에서도 작전의 주도권을 쥘 수 있게 되었다.

    장제스 국민정부 총통으로 취임하다

    1948년은 중국 역사상 처음으로 중화민국 총통 선거를 실시하는 해가 되었다. 본래 중화민국 헌법은 1936년 그 초안이 완성되었다. 그러나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헌법제정이 계속 지연되었다. 1945년 2차 대전이 끝나자 국공 양당 간에 정치협상회의가 열렸다. 마오쩌둥이 옌안에서 충칭으로 날아가 장제스와 담판을 벌이고 그 결과에 따라 협상 자리가 마련된 것이다. 그러나 협상이 끝내 실패하자 국민정부는 1946년 말 단독으로 ‘헌법제정 국민대회’를 열어 헌법을 제정하였다. 1946년 12월 25일 ‘중화민국 헌법’이 통과되어 1947년 1월 1일 공포되었다. 그해 12월 25일 정식으로 실시되어 중국은 역사상 처음으로 헌정시대에 들어갔다.

    장제스와 부인 쑹메이링

    1948년 3월 29일 ‘헌정실행 국민대회’가 난징에서 개최되었다. 장제스는 이날 개막사를 통해 “중화민국에서 드디어 헌정이 실행되었다.”고 선포하고 “대회가 매우 중요하며 선거를 통해 중화민국 조직을 완성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장제스는 당연히 중화민국의 초대 총통으로 선출될 예정이었다. 그런데 본래 제정된 헌법에 총통의 권력이 국회인 입법원의 견제를 받아 일종의 명예직처럼 되어 있었다. 장제스는 불만을 품고 4월 4일 열린 중앙집행위원회에서 “나는 총통 선거에 불참하겠다.”고 선언하였다. 그리고 총통 외 실권을 갖는 어떤 직책이라도 맡겠다는 뜻을 표현하자 회의가 매우 시끄러워졌다. 회의에 참석한 이들이 한뜻으로 장제스에게 “총통 선거에 참가할 것을 권유하자 장제스는 마지못하여” 수락하였다. 그러면서 총통에게 긴급할 때는 ‘긴급조치권’을 별도로 부여할 것을 요청하여 찬성을 얻었다. 4월 18일에는 후스(胡適), 왕스제(王世杰) 등 700여명이 제출한 ‘반란평정 시기의 임시조례’를 통과시켜 국민대회에서 통과시킨 총통 권력제한 조항을 사실상 폐지하였다.

    국민대회에서 가장 중요한 총통과 부총통 선거가 실시되었다. 총통 선거방식은 간접선거로 ‘헌법실행 국민대표대회’에서 선출하도록 하였다. 선거일은 1948년 4월 19일이었으며 투표장소는 난징에 위치한 국민대회당이었다. 부총통 선거도 함께 이루어졌는데 총통 선거와 별도 투표를 하는 방식이었다. 경쟁에서 이기더라도 과반수를 득표해야 당선되는 방식이어서 미달하면 결선투표를 해야 했다. 총통선거에서 장제스는 경쟁 후보인 쥐정(居正)을 압도적인 표차로 따돌리고 당선되었다. 장제스가 2,340표를 얻은 반면 쥐정은 269표를 얻었으니 들러리 노릇도 제대로 하지 못한 셈이었다.

    그러나 부총통 선거는 의외의 결과로 끝나서 장제스는 크게 실망하였다. 장제스가 지원한 쑨커 후보가 4차례 투표 끝에 리쫑런 후보에게 패했던 것이다. 부총통 선거에 입후보한 사람이 모두 6명이나 되어 투표가 4차까지 이어졌다. 그 결과 쑨커가 1,295표를 얻은 반면 리쫑런은 1,438표를 얻어 부총통에 당선되었다. 쑨커는 쑨원의 아들로 아버지의 후광을 입은 데다 장제스의 후원을 받고 있었다. 거기에 국민정부 부주석, 행정원장등 요직을 역임하기도 하였으며 현직 입법원장-우리로 말하면 국회의장에 비견된다-이었다.

    부총통에 당선된 리쫑런

    장제스는 쑨커의 당선을 위해 리쫑런을 불러 후보 사퇴를 종용했으나 리쫑런은 단호하게 거부하였다. 리쫑런은 오랫동안 군직에 있으면서 항일전쟁 등에서 혁혁한 공로를 세웠다. 비록 광시 군벌 출신이기는 하였지만 국민당 안에서 상당한 인망을 얻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총통은 장제스 외에 대안이 없다고 여겨졌지만 오히려 부총통 선거에서 전황부진과 민생파탄의 책임론이 부각되었다. 국방부장인 바이충시가 동북에서 연전연패한 천청 참모총장을 국민당 회의석상에서 비판하자 “천청을 죽이라.”는 고함이 터져나올 정도였다. 이런 선거 결과는 일년후 뜻밖의 사태로 번져 장제스가 하야하고 리쫑런이 총통 직무를 승계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어쨌든 장제스는 총통으로 리쫑런은 부총통으로 취임하여 선서를 하였으니 1948년 5월 20일의 일이었다.

    이날 취임식을 이쫑런은 이렇게 술회하였다. “장제스는 그날 길다란 마괘자를 예복으로 입고 나왔다. 그 전날 나에게 간편 군복을 입어도 좋다고 하더니…” 그날 리쫑런은 훈장이 잔뜩 달린 정장 군복 차림으로 취임식에 나왔다. 그런 차림으로 장제스의 오른쪽 뒤에 서니 마치 시종무관이나 부관처럼 보였다. 나중에 부통령으로 자리에 앉았으나 두 사람은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취임식에는 각국 사절 및 정관계 요인 등 모두 3,000여명이 참석했다. 장제스는 국민정부 주석이자 국방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어 보통 위원장으로 호칭하였다. 그러나 총통 취임 후부터는 총통으로 불리며 총통부에서 거주하게 되었다.

    공산당은 국민대회를 무시하는 태도를 보였다. 공산당은 5월 22일 장제스가 총통에 취임한 뒤 신화사를 통해 “옛중국은 멸망하고 신중국이 전진한다.”는 제목으로 논평을 냈다. 신화사는 논평에서 “국민당 정부가 총통선거에서 연출한 추태는 장제스 21년 통치에서 마지막 웃음거리가 될 것”이라고 평가절하하였다.

    밀리는 전황, 흔들리는 국민정부의 중원 방어체계

    장제스가 총통에 취임하였지만 국민정부의 전황은 여전히 좋지 않았다. 린펀과 뤄양의 승리 후에도 공산당은 공세를 멈추지 않았다. 토지개혁과 신민주주의 연합정부론을 중심으로 한 정치공세와 더불어 군사적 공세도 여전히 계속되었다. 1947년 하반기 마오쩌둥이 전략적 반격을 선언한 뒤 국민정부는 전면방어에서 지역방어 방침으로 전환하였다. 잇따른 패전과 병력의 부족에 따른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동북과 화북에서 이미 밀리고 있었고 서북에서도 펑더화이의 공세가 시작되어 전황이 바뀌고 있었다. 정치경제 및 군사의 핵심인 중원에는 국민정부군 54만명이 주둔하고 있었다. 중원에 배치된 국군은 3개군 산하에 34개 사단, 79개 여단 규모였다. 국민당이 보유한 정규군의 삼분의 일이 중원에 배치되어 있었다.

    중원에 대한 장제스와 국민정부의 전략적 목표는 철도의 안전이었다. 진푸철도(텐진-푸커우)와 핑한 철도(베이핑-한커우), 룽하이(란저우-렌윈강) 철도는 중원과 난징, 우한등 주요 도시를 지키는 핵심 동맥이었다. 따라서 철도를 수비하려는 국군과 공격하고 파괴하려는 해방군 사이의 공방전이 내전 발발 이후 계속 이어져 왔다. 이와 함께 장제스는 중국 남부를 지키는데 창장이 가장 중요한 천연의 방어선이라는 점을 인식하였다. 그는 창장에 국방부장 바이충시가 지휘하는 20만 대군을 펼쳐 두었다. 장제스의 이런 병력 배치는 따베산 점령으로부터 비롯한 공산당 중원 근거지가 난징과 우한에 가까운 점을 고려한 것이기도 하였다. 국민정부는 따파산(大巴山)(2)에도 병력을 배치하여 한수(漢水)를 넘어 공격할 우려가 있는 서북과 산시쪽 해방군에 대비하고 있었다.

    불과 2년전인 1946년 공산당 해방구에 대한 전면공격으로 해방군을 밀어내던 시절에 비하면 상전벽해의 변화가 아닐 수 없었다. 그때 국군은 중원에서 해방군을 산시와 쓰촨 등 변방으로 완전히 밀어내었고, 동북에서도 민주연군을 쑹화장 너머로 쫓아버렸다. 산둥에서도 천이와 쑤위의 부대가 장링푸의 부대 등에 밀려 해방구 중심지인 린이를 포기하고 후퇴하였으며 화북에서도 푸쭤이에게 연전연패하여 푸가 마오쩌둥에게 공개장을 보내는 수모를 겪었다. 마침내 공산당의 수도인 옌안마저 내주고 후퇴했으니 공산당의 운명이 풍전등화와 같았다. 공산당은 지도부를 둘로 나누었으며 마오와 저우언라이, 런비스 핵심 지도부는 일년이나 섬북을 전전하며 피난해야 하였다.

    국공간의 전황은 46년은 국군이 일방적으로 우세하였고 47년은 점차 대치상태로 들어갔다. 이제 48년이 되자 곳곳에서 국군이 패하며 밀리기 시작한 것이다. 국민정부의 전략도 처음의 전면공격에서 중점 공격으로 바뀌었다. 1947년 전황이 교착되었다가 1948년 1월이 되면 전면방어에서 지역방어로 바뀌었다. 이제 그 지역방어마저도 흔들리게 되었으니 장제스의 심사는 우울한 나날의 연속이었다.

    마오쩌둥 저작 신민주주의론

    마오쩌둥은 이 무렵 자신의 ‘신민주주의 혁명론’에 따른 통일전선 전술을 더욱 가다듬고 있었다. 그는 1948년 4월 1일 ‘진쑤이(3) 간부회의 연설’에서 중국 공산당의 신민주주의 혁명의 총노선이 될 방침을 밝혔다. 연설은 꽤 길지만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중국 혁명은 무산계급이 영도하는 인민대중의 혁명이다. 제국주의와 봉건주의, 관료 자본주의에 반대하는 혁명이다. 관료 자본주의는 중국 혁명에서 제외되며 혁명의 적이다. 토지개혁은 빈농을 주력으로 중농을 단결시켜야 한다. 단계적으로 봉건착취제도를 소멸시켜야 하며 농업생산을 발전시켜야 한다.” 또 “토지개혁 등 그동안 벌어진 좌경적 오류를 바로 잡아야 하며 농촌에서 노동하는 절대 다수의 노동인민들을 단결시켜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마오는 “봉건제도에 반대하는 통일전선을 세워야 하며 이것이 공산당의 가장 중요한 전략방침”이라고 주장하였다.

    이 연설은 ‘공산당인(共産黨人)’이라는 기관지의 발간사가 되었다. 또 ‘중국혁명과 중국공산당’ ‘신민주주의론’등에도 전재되었다. 마오쩌둥의 이같은 연설은 즉시 중국 공산당의 총노선이자 실천 방침이 되었다. 그가 섬북을 전전하는 동안 구상하고 구체화시킨 혁명론과 이에 따른 실천 방침은 점점 유연하게 변해 갔다. 극소수 자본가들과 지주들, 그리고 국민당 고위 간부들을 고립시키고 농민과 노동자, 지식인과 중소 자본가들을 포괄하려는 쪽으로 폭을 넓혀갔다. 토지혁명과 더불어 공산당의 이런 유연한 방침은 내전의 저울추를 점점 공산당쪽으로 기울게 하는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각주>

    1. 천스지와 탕량에게 보낸 전문인데 관련자들에게 함께 보내 공유한 것으로 보인다.

    2. 충칭, 산시(陝西), 후베이성 경계에 있는 산이다

    3. 진쑤이는 산시성과 쑤이위안(내몽골)성을 관할하는 해방구를 말한다

    필자소개
    전 철도노동자. 현재 해남으로 귀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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