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이함과 전략부재 그리고 한발 늦은 대응"
    By tathata
        2006년 09월 13일 06:52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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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향후 한국 노동운동의 주요한 틀을 결정짓는 이른바 노사관계 로드맵을 둘러싼 치열한 각축전에서 민주노총이 얻은 성적표는 초라하다. 민주노총은 ‘노사관계 민주화방안’으로 8대 요구안을 ‘링’ 위에 올려놓았지만 어느 하나도 관철시키지 못했다.

    오히려 민주노총이 철수한 노사정은 현재 노사관계법보다 후퇴된 안을 합의했고, 민주노총은 뒤늦게 울부짖었다. 민주노총은 어려운 진통 끝에 ‘결단’을 내려 노사정 대화에 참여했지만, 인상적인 성과 하나 남기지 못한 채, 노경총과 자본의 합작을 막아내지 못했다.

    교섭과 투쟁의 병행을 내세운 민주노총의 참여 전술은 결과적으로 교섭도 투쟁도 제대로 하지 못한 결과를 가져온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민주노총은 노사정합의가 “노동자의 기본권을 팔아먹은 야합”이라고 규정하며 강도 높게 비판하고 있다. 민주노총은 지난 12일부터 5일간 세종로 정부종합청사 앞에서 주요 연맹들이 돌아가며 ‘9.11 야합 규탄집회’를 개최하고 있는 중이다. 또 오는 17일 광화문에서 조합원 5천여명이 모인 전국노동자대회를 개최하여 ‘노사관계 로드맵 폐기’를 촉구할 예정이다.  

    민주노총의 이같은 대응은 국회 입법을 앞두고 이번 합의안을 저지하기 위해 불가피한 일이긴 하지만, 노사정 교섭과정에서 보다 적극적인 역할을 못했다는 점에서 한 발 늦은  대응이라는 평가를 받을 만하다.

    노경총이 복수노조와 전임자 임금지급 금지를 동시에 유예하는데 합의할 것이라는 얘기는 협상의 배후에서 공공연하게 오갔던 내용이다. 이용득 위원장 또한 비공식석상에서 여러 차례 “유예할 수 있다”는 입장을 밝혔다.

    민주노총은 이같은 사실을 알고도 치밀한 대응을 준비하지 못했다. 김태현 민주노총 정책실장은 “(민주화방안을 쟁취한다는) 원칙만 있었을 뿐, 협상의 구체적인 기준은 없었다”고 말했다.

       
    ▲ 지난 11일 노사관계 로드맵 합의가 발표된 노사정위원회 앞에서 민주노총 간부들이 항의시위를 벌이고 있다.
     

    민주노총의 핵심 관계자는 “로드맵 논의를 진행하는 기간 중에도 민주노총은 산별대표자회의와 중앙집행위원회, 교섭지원단 회의 등 회의만 수십여차례나 열었지만, 복수노조 · 전임자 부당해고와 같은 A급 과제에 대해서는 진지한 토론이 오간 적이 없다”고 말했다.

    그는 “노사정대표자회의에서 논의된 내용을 경과보고 하고, 회의 성원들에게 민주노총의 방침이 무엇인지 설명하는 것 외에는 회의에서 구체적인 전술을 제대로 논의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한국노총이 유예안을 준비하고 있는데, 민주노총의 대응이 무엇인가 물으면 대부분 ‘원칙’만을 말했을 뿐”이라고 전했다.

    민주노총은 노사정대표자회의에서 ‘8대 요구’로 원칙을 강조하는 것 이외에는 할 일이 별로 없었다는 이야기다. 그는 민주노총이 “원칙만 ‘앵무새’처럼 얘기하다가 나왔다”고 표현했다. 원칙을 지나치게 강조하다보니 이를 관철시킬 구체적 교섭 전술은 정작 논의되지 못한 셈이다.

    민주노총은 노사정 대화의 참여를 선언할 당시 ‘교섭과 투쟁의 병행’을 공언했다. 노사정 교섭을 진행하면서 현장 조합원들의 투쟁을 조직화한다는 방침이었다. 하지만, 로드맵 기간 내내 민주노총은 매우 조용했다. ‘8대 요구’를 조합원에게 알리기 현장 교육도 눈에 띄지 않았으며, 로드맵 저지를 위한 대규모 집회도 없었다.

    전재환 금속연맹 위원장은 “나중에 투쟁을 하면 된다는 안이한 생각으로 조합원 조직화가 소홀했다”며 “각 산별연맹 차원에서 자체적으로 로드맵 의제에 따라 투쟁을 조직하는 것도 부족했다”고 평가했다.

    민주노총은 지난 9일과 11일 노사정 물밑교섭이 긴박하게 돌아간 시점에도 거의 손을 놓고 있다시피 했다.  한국노총은 투쟁상황실을 설치하고, 전 상근자가 휴일도 반납한 채 저녁 늦게까지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여 ‘비상대기’를 하고 있었지만, 민주노총은 매우 평온했다. 지난 8일 연맹 위원장이 모여 기자회견을 개최한 이후 별다른 대응책이 없었다. 조준호 민주노총 위원장은 한미FTA 저지를 위해 시애틀로 갔다.

    이 시기에 이용득 한국노총 위원장은 이상수 노동부 장관과 수차례 비공식 접촉을 갖고, ‘3년 유예안’을 받아 줄 것을 주문하고 있었다. 위원장 단식 ‘카드’를 내놓으며 한국노총은 다양한 전술을 구사하고 있었던 것이다. 민주노총의 대응은 무디고 안이했다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가 이런 데에 있다.

    은수미 노동연구원 연구위원은 “이번 노사정합의가 매우 도발적이고 돌출적인 측면이 있기 때문에 민주노총의 책임만을 탓할 수 없다”고 전제하면서도, “민주노총이 급변하는 노사관계에 민첩하게 대응하지 못했다”고 비판했다. 특히 ‘중대한 시기’에 지도부의 공백 사태가 일어나 “리더십의 위기”라는 비판을 스스로 초래했다고 꼬집었다.

    전 위원장도 “시시각각 변화하는 노사정 협상에서 민주노총은 민첩한 대응을 하지 못하고 긴장을 놓고 있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민주노총의 한 관계자는 “정부가 노경총의 합의를 그대로 받아들일 것으로 생각지 못했다”며 “9일 이후부터 노사정 물밑협상이 어떻게 진행됐는지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고 토로했다.

    결국 민주노총의 안이한 상황인식과 전략부재가 9.11 노사 합의안을 만든 한 원인으로 지목된다. 은 연구위원은 “산별노조 시대에 사회적 대화의 필요성은 앞으로도 계속 제기될 수밖에 없는데, 민주노총은 이를 위한 전략수립을 시급히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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