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선도, 시골살이에서
    예술적 도반 권해 만나다
    [한시산책] "층층이 포개어지고 동그랗게 모여 산의 너른 품 만들자"
        2020년 04월 25일 12:02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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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벗의 노래

     – 정연복

    홀로는 이슬 하나의
    무게도 견디지 못할 것 같은
    작고 여린 꽃잎들이

    층층이 포개어지고
    동그랗게 모여
    이슬도, 바람도 너끈히 이긴다

    하나의 우산 속에
    다정히 밀착된
    두 사람이

    주룩주룩 소낙비를 뚫고
    명랑하게 걸으며
    사랑의 풍경을 짓는다

    가파르게 깊은 계곡과
    굽이굽이 능선이 만나서
    산의 너른 품 이루어

    벌레들과 새들과 짐승들
    앉은뱅이 풀들과 우람한 나무들
    그 모두의 안식처가 된다

    나 홀로는 많이 외로웠을 생(生)
    함께여서 행복한

    참 고마운 그대여,
    나의 소중한 길벗이여

    사람은 홀로라면 어쩌면 꽃잎처럼 ‘이슬 하나의 무게도 견디지 못할 것 같은 여린 존재’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루하루 생존의 고단함 때문만은 아니지요. 우주의 광활함과 무한한 시간을 인식한다는 것도 홀로 견디기 힘든 존재적 무게입니다. 사람과 사람이 부대낀다고 어디 행복만 있겠습니까. 주변에 넘쳐나는 상식을 초월하는 반이성(反理性)의 독설과 배설들은 우리를 끊임없이 위협합니다. 우리가 사는 사회는 또 어떠한가요. ‘인간’이 아니라 ‘돈’이 우선되고 근본이 되는 이른바 ‘자본주의(資本主義)’ 사회입니다. ‘돈’으로 평가되고, ‘돈’을 ‘잘’ 벌 수 있어야 인정받는 사회입니다. 사람을 존중하고, 사람과 사람이 평화롭게 공생하는 ‘인본주의(人本主義)’가 뒷전으로 밀리는 참혹한 사회지요.

    물질은 넘쳐나지만 외로움은 일상화되었습니다. 기댈 곳이 점점 없어지는 요즘입니다. 산처럼 모든 것을 품어주는 너른 품이 아니어도, 이슬의 무게를 받쳐줄 또 하나의 꽃잎으로 내 곁에 있어주는 벗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사진 설명 : 해남 윤선도 종택 녹우당(綠雨堂). 대군 시절 스승이었던 윤선도를 위해 효종(孝宗) 임금이 하사한 집이다. 수원에 있었는데, 윤선도가 만년에 귀양에서 돌아온 다음해인 1668년(현종 9)에 현재의 터로 옮겼다. – 사진 : 고산 윤선도 유물전시관 홈페이지

    옛사람들은 정도야 덜했겠지만, 외로움이 왜 없었겠습니까. 더욱이 뜻이 높거나 예술적 재능이 뛰어나다면 세상과 불화하기 일쑤일 테고, 그만큼 외로웠겠지요. 뜻도 높고, 예술적 재능이 풍부했던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 1587년(선조 20) ∼ 1671년(현종 12))는 당대 누구보다도 시대와 불화한 이입니다. 윤선도는 총 세 번에 걸쳐 만 17년 동안 유배생활을 했습니다. 벼슬한 기간보다 유배생활 한 기간이 훨씬 깁니다.

    벼슬에서 물러나거나 유배에서 풀리면 시골에서 한적하게 지냈는데, 그때 마음에 와 닿았던 벗이 권해(權海)라는 분입니다. 권해에 대한 기록은 윤선도의 문집 『고산유고(孤山遺稿)』 말고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만큼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거문고를 잘 연주했다고 합니다. 윤선도는 권해의 거문고 연주에 반해 그를 ‘거문고와 단짝’이라는 뜻의 ‘반금(伴琴)’이라고 불렀습니다. 둘은 당대 최고의 예술인이면서 서로를 알아주는 그런 사이였습니다. 윤선도가 권해에게 준 시 「반금에게 주다(贈伴琴)」을 보겠습니다.

    소리는 혹 낸다 하더라도 마음이 그대처럼 이러하랴
    마음은 혹 이러하더라도 소리를 누가 그대처럼 내겠나
    마음이 소리에 나니 그것을 좋아하노라

    연주하는 기능이 아무리 뛰어나다 해도 곡을 이해하는 마음의 격조(格調)가 그대만한 이가 있겠는가? 마음의 격조가 아무리 높다고 해도 연주하는 기능이 그대에 미치는 이가 있겠는가? 참으로 격조 높은 찬사입니다. 고산 선생은 이 시 끝에 이렇게 덧붙입니다.

    ‘훌륭하오. 그대 마음이 은연중에 천지조화와 합치되어 거문고 일곱 줄에서 나는 온갖 소리들이 모두 방촌(方寸, 마음) 사이의 일이니, 내가 매양 들을 적마다 고기 맛을 잊는다오.(多君心曲暗合造化七絃百囀皆方寸間事余每聽之忘味)’

    맨 끝에 나오는 ‘고기 맛을 잊는다오’는 『논어(論語)』 「술이(述而)」편에 나오는 “공자께서 제나라에 계시면서 순 임금의 음악인 소악을 들으시며 석 달 동안 고기 맛을 알지 못하셨다.〔子在齊 聞韶 三月不知肉味〕”구절을 인용한 것입니다. 찬사 중의 찬사지요.

    사진 설명 : 고산 윤선도 유물전시관에 전시된 윤선도 거문고 아양(峨洋)(좌)과 고산유금(우). 아양(峨洋)은 백아와 종자기의 고사에서 나온 것으로 지기지우(知己之友)를 뜻한다.

    윤선도의 거문고 고산유금. 반금 권해에게 주는 금계(琴誡)가 적혀 있다. 금계의 내용은 ‘춘추 시대 거문고의 명인인 백아(伯牙)는 종자기(鍾子期)라는 지음(知音)이 있어야만 연주를 했는데, 그런 백아의 경지를 한번 뛰어넘어 보라’는 것이다. 

    궁벽한 시골살이를 하면서도 권해처럼 예술적 도반(道伴)을 만났다는 건 무척 행운이었을 겁니다. 그래서인지 윤선도는 권해에게 많은 시를 지어줍니다. 1643년(인조 21) 권해와 헤어지며 지은 시를 보겠습니다.

    贈別權伴琴(증별권반금)

    山門晩出送吾君
    人世閑忙此路分
    借問何時隨我去
    集仙臺上弄晴雲

    권 반금과 헤어지며 주다

    꾸물거리다 문밖에서 그대 보내나니
    바쁘고 한가함이 여기서 갈리는구려
    물어보세 어느 때나 나를 따라가서
    집선대에서 흰 구름과 놀아 볼는지

    멀리 가는 벗을 보내려면 아침 일찍 보내야 합니다. 그러나 마음은 벗을 보내고 싶지 않습니다. 시선(詩仙) 이백(李白)을 보내고 싶지 않은 강남 선비들처럼 마음으로는 독한 술 300잔이라도 먹여 하루라도 더 붙잡고 싶은 심정이겠지요. 그러니 꾸물거릴 수밖에요. 그러나 금쇄동을 나서는 권해의 앞날은 금쇄동에서처럼 한가하지 못할 겁니다. 그러니 얼른 돌아와서 금쇄동 집선대(集仙臺)에서 흰구름을 희롱하며 함께 놀아보자고 합니다.

    1636년(인조 14) 12월 병자호란이 일어났습니다. 윤선도는 배를 타고 강화도로 달려갔지만, 길이 막혀 다시 돌아옵니다. 그로부터 2년 뒤 병자호란 때 강화도까지 왔다가 분문(奔問, 난리를 당한 임금에게 달려가서 문후(問候)하는 것)하지 않았다는 등의 이유로 다시 유배를 갔다가 1년 뒤에 돌아옵니다. 그리고 다음해인 1640년(인조 18) 현 해남군 현산면 구시리에 있는 산속 조그마한 분지 금쇄동(金鎖洞)에 은거합니다. ‘금쇄(金鎖)’란 쇠 자물쇠란 뜻입니다. 자연 형상도 그렇고, 마음도 그렇고 세상으로부터 문을 닫은 곳입니다. 그런 곳에 예술을 알고 마음을 아는 벗 반금(伴琴) 권해가 왔으니 그동안은 너무나 행복했을 겁니다. 그런데 이제 그런 벗이 떠나려 하니 그 마음이 얼마나 헛헛했을까요.

    윤선도가 죽은 지 9년 뒤인 1680년(숙종 6) 당대의 대학자이자 정치가인 미수(眉叟) 허목(許穆) 선생은 다음과 같은 윤선도 묘비명을 짓습니다.

    比干剖心
    伯夷餓死
    屈原沈江
    翁窮且益堅
    至死不改
    其見義守死一也

    비간은 심장을 갈라 죽었고
    백이는 굶어 죽었으며
    굴원은 강에 몸을 던졌는데
    해옹은 궁할수록 뜻이 더욱 굳어 
    죽어도 변하지 않았으니
    의를 위해 목숨 걸기는 똑같다네

    해옹(海翁)은 윤선도의 호(號)입니다. 허목은 윤선도를 격정적으로 살아간 역대 충신들과 비교하며 찬양합니다. 시인으로 알려진 윤선도(尹善道)는 사실 격정적인 정치인이기도 했습니다. 서른 살이던 1616년(광해 8) 유명한 「병진소(丙辰疏)」를 올려 정계에 충격을 줍니다. 당시 살아있는 권력인 이이첨(李爾瞻)을 통렬하게 탄핵하였습니다. 그 중 한 대목을 보겠습니다.

    사진 설명 : 고산 윤선도 영정. 어머니와 형의 유골과 후손들의 얼굴을 참고하여 과학적으로 복원한 것으로 국가표준영정제88호로 지정되었다.

    ‘이이첨이 위복(威福)을 멋대로 농단한 죄를 다스리시고 다음에 유희분과 박승종이 임금을 잊고 나라를 저버린 죄를 다스리소서. 그 나머지 이이첨의 복심과 도당들에 대해서는, 혹 당여를 모조리 제거하는 율법을 시용하기도 하고 혹 위협에 못 이겨 따른 자들을 용서하는 율법을 사용하기도 하소서. 그러면 종묘사직에 매우 다행이겠습니다.(先正爾瞻擅弄威福之罪, 次治希奮、承宗忘君負國之罪。 其他爾瞻腹心徒黨, 則或用盡除黨與之律, 或用脅從罔治之法。 宗社幸甚。)’ – 『조선왕조실록』 1616년(광해 8) 12월 21일 2번 째 기사

    ‘위복(威福)’이란 벌(罰)과 상(賞)을 뜻하는 말로, 본디 임금만이 행할 수 있는 상벌의 권한을 가리킵니다. 이이첨이 임금의 권한을 참람하게 침범한 죄로 다스리라는 것은 역적의 율법으로 처단하라는 뜻입니다. 이 상소로 윤선도는 정계에서 주목을 받는 이가 되었지만, 당시는 이이첨은 살아있는 권력이었습니다. 윤선도는 유배형에 보내집니다. 그리고 7년 뒤 인조반정이 일어난 뒤에야 석방됩니다.

    윤선도를 정치인으로 기억하는 이가 있다면 아마도 예송논쟁(禮訟論爭) 때문이었을 겁니다. 어떤 이들은 조선시대 당쟁을 폄하하면서 그 표본으로 예송논쟁을 예로 듭니다. 민생이 중요하지 상복을 1년을 입느냐, 3년을 입느냐가 뭐가 중요하냐는 것입니다. 더욱이 그를 기화로 서로 죽이고 살리고, 세월을 보냈으니 혐의를 아주 지울 수는 없을 겁니다. 그러나 당시 상황을 알면 이건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당시는 신분제 사회였습니다. 부모의 신분과 재산을 자식이 세습하는 사회지요.

    현대에 알기 쉽게 예를 들겠습니다. 어떤 아버지가 강남에 30층 빌딩하고, 교외에 3층짜리 빌딩 두 개를 가지고 있다고 칩시다. 자식이 둘이 있는데, 아버지가 죽었을 때 3년 동안 상복을 입으면 강남에 있는 30층짜리 빌딩을 상속받고, 1년 동안 상복을 입으면 교외에 있는 3층짜리 빌딩을 상속받는다고 하면 누가 몇 년 동안 상복을 입을까요. 서로 3년 동안 상복을 입겠다고 하겠지요. 그런데 3년 동안 상복을 입는 것은 적장자만 가능합니다.

    1659년(효종 10) 효종(孝宗) 임금이 갑자기 세상을 떠납니다. 이때 효종의 어머니에 해당하는 인조(仁祖)의 계비(繼妃) 자의대비(慈懿大妃)가 살아있었습니다. 당시는 자식이 먼저 죽으면 부모가 상복을 입던 시절이었습니다. 당시 권력자였던 송시열은 효종이 적장자가 아니므로 자의대비는 3년 상복을 못 입고, 1년 상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그 주장이 채택되었습니다. 이에 남인들이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이렇게 시작한 것이 이른바 기해년(己亥年)에 일어난 예송(禮訟)이라고 해서 기해예송(己亥禮訟)입니다. 앞에서 예로 든 것으로 하면 효종은 자격은 없지만 30층 빌딩을 상속받은 게 됩니다. 그럼 누가 자격이 있을까요. 인조의 적장자인 소현세자(昭顯世子)가 자격이 있는데, 세자는 이미 죽었습니다. 그러나 아들이 버젓이 살아 있었습니다. 30층 빌딩을 상속받을 자격이 누구에게 있을까요. 이런 모순된 상황을 윤선도는 날카롭게 지적합니다. 이왕에 왕위를 이었으면 그게 적통(嫡統)이고, 적장자와 동일하게 대우해야 한다는 것이죠.

    그러나 당시는 서인의 세상이었고, 송시열은 살아있는 권력이었습니다. 윤선도의 상소문은 불살라졌습니다. 그리고 윤선도는 백두산 밑 개마고원 삼수(三水)로 유배됩니다. 그때 윤선도의 나이 74세였습니다. 그리고 7년이 지나 81세 되던 1667년(현종 8)에야 유배에서 석방됩니다. 윤선도는 석방된 뒤 보길도 부용동(芙蓉洞)으로 돌아가 85세가 되던 1671년(현종 12)에 그곳에서 눈을 감습니다.

    윤선도는 또한 당대 최고 부자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보길도에 있는 그의 유적이 폄하되기도 하였습니다. 저도 젊은 날 부화뇌동해서 윤선도를 그렇게 평하기도 했었고요. 그러나 그는 죽기 1년 전인 1670년(현종 11)에는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기 위한 농장인 의장(義庄)을 설치하여 그곳에서 나는 곡식으로 빈민을 구제하기도 한 따뜻한 사람이었습니다. 어부들의 노동요를 정리한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만 보아도 그가 얼마나 노동하는 이들을 존중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어부사시사」 봄노래 중 한 수를 보겠습니다.

    우는 것이 뻐꾸기인가 푸른 것이 버들 숲인가
    저어라 저어라
    어촌 두어 집이 안개 속에 들락날락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맑고 깊은 소(沼)에 온갖 고기 뛰노누나

    윤선도의 문집 『고산유고(孤山遺稿)』 중 「어부사시사」 부분

    어부사시사

    점점 각박해지는 세상입니다. 그만큼 벗의 존재는 더 소중하게 다가옵니다. 코로나바이러스만 아니라면 친구의 손을 잡고 먼 길을 떠나고 싶습니다. 마음속으로라도 그렇게 하자고 다짐하며 조미하의 시 「친구에게」를 소개하면서 이번 한시산책을 마치고자 합니다.

    친구에게
    – 조미하

    친구야
    요즘처럼 하늘이 맑은 날에는
    너와 함께 기차여행을 떠나고 싶다

    그동안 하지 못했던 이야기랑
    옛 추억도 소환하며 많은 시간을
    공유하고 싶어

    들꽃이 만발한 작은 시골 간이역
    을 지나고
    바다가 보이는 어느 어촌에서
    어부들의 그을린 얼굴을 보며
    건강한 그들의 삶을 느껴보고 싶어

    – 중략 –

    그리고 친구야
    우리 조금은 거칠어서 속상해진
    손을 꼭 잡고
    인적이 드문 시골의 코스모스 핀 길을 걷다가
    작은 우체국에서 엽서를 쓰자

    엽서에 꾹꾹 눌러서 쓴 손 글씨로
    서로에게 말로 하지 못한 마음을 전하자
    늘 맘속에 간직한 미안함도 함께

    집에 도착했을 때
    엽서를 보며 너와 함께 했던 예쁜 흔적을
    다시 한번 느끼고 싶어

    – 하략 –

    필자소개
    민주노총 전국민주버스노동조합과 전국운수산업노동조합에서 일했고, 한국고전번역원에서 공부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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