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펑더화이, 류칸을
    이촨에서 장사 지내다
    [국공내전 ㉜] 1948년 계속되는 장제스와 국민당의 시련
        2020년 04월 22일 10:09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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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8년 원단, 내전 3년째 첫날이 밝았다. 일년 전 국군은 린비아오의 동북 민주연군을 흑룡강 너머까지 쫓아 버리며 기세를 올렸다. 중원에서도 리센녠의 해방군을 산지사방으로 쫓아버렸고 산둥에서도 해방구 수도인 린이를 점령하는 등 기세를 탔다. 그러나 겨우 일년 뒤 각 전장의 형세는 바뀌었다. 동북에서는 린비아오의 동북 야전군이 국군을 대도시에 고립시키며 만주를 석권해 가고 있었다. 화북에서도 스자좡을 잃었으며 국군은 베이핑과 텐진 등 거점을 방어하며 물러서고 있었다. 중원에서는 진기로예 야전군과 화동 야전군이 합동작전을 벌이며 국군의 철도선을 파괴하고 병력 배치를 교란하였다. 전황이 이렇게 되자 장제스와 국군은 부득이 전면방어 방침에서 지역방어 방침으로 돌아섰다. 운용할 수 있는 병력이 부족해졌던 것이다.

    1948년 1월 중원의 국민정부군은 3개군, 34개 사단, 79개 여단으로 모두 54만 6천명을 보유하고 있었다. 중원 지역에서 국군의 전략적 목표는 진푸로(텐진-푸커우) 등 철도선을 지키고 핑한로(베이핑-한커우) 및 룽하이로(란저우-롄윈강) 철도를 이용하여 해방군을 분할 섬멸하는 것이었다. 특히 류보청과 덩샤오핑의 중원 야전군이 점거하고 있는 따베산 근거지는 장제스의 두통거리였다. 장제스는 하루속히 따베산의 해방군을 소탕하여 난징과 우한 등 중요 도시의 안전을 확보하기를 희망했다.

    군사적으로 뒤숭숭한 국민정부와 장제스에게 연초부터 좋지 않은 소식이 잇따랐다. 1948년 1월 1일 ‘국민당 혁명위원회(약칭 민혁民革)’가 출범하였다. 국민정부의 치외법권인 홍콩에서 설립된 이 조직은 주석인 리지선(李濟深)을 비롯 펑위샹, 탄핑산, 차이팅카이, 천치메이 등 국민당 원로들이 광범위하게 참여하였다. 펑위샹은 장제스와 이른바 ‘장펑대전’이라 부르는 군벌전쟁을 치른 바 있었으며 차이팅카이도 한때 장제스에 대항하여 반기를 든 적이 있었다. 무엇보다 국민당의 대부라 할 수 있는 쑨원의 부인 쑹칭링이 명예주석으로 참여한 것은 장제스에게 커다란 타격이 아닐 수 없었다. 쑹칭링은 쑨원 사후 삼민주의의 완전한 실현을 주장하며 장제스 일인 독재에 반대해 왔다. 국민당 안에서 좌파라고 할 수 있는 이들이 이제 공개적으로 장제스에 반대하는 조직을 설립한 것이다.

    ‘국민당 혁명위원회’는 선언문에서 “장제스 매국 독재정권은 국민당 창당대회의 정신을 저버리고 있다. 이 정권을 엎어버리고 민주와 독립, 평화를 실현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창립 당시 본부는 홍콩에 두었으며 후난, 광둥, 푸젠에 지부를 두었으며 조직원은 천여명에 이르렀다. 민혁은 설립 후 장제스의 정책이나 내전 방침에 줄곧 반대하였으며 점차 공산당의 주장에 기울어 갔다. 1948년 5월 1일 노동절에 공산당이 내세운 “각 민주당파, 각 인민단체, 저명한 인사들이 신속하게 정치협상회의를 개최하자, 인민대표대회 개최를 토론하여 민주연합 정부를 설립하자.”는 주장에 적극 호응하였다. 5월 5일에는 리지선 등 민혁의 대표 인사들과 무당파 인사들이 연명으로 전보를 보내어 공산당의 주장에 찬성하기도 하였다. 마오쩌둥을 비롯한 중공 지도부가 회신 전보로 열렬히 환영하였음은 두말할 것도 없다.

    마오쩌둥과 함께 선 민혁 주석 리지선(마오의 왼쪽 두번째)

    민혁의 구성원이 많지는 않았지만 국민당 안에서 존경받는 명망가들이 다수 참여하여 그 영향력이 결코 적지 않았다. 전세가 공산당 쪽으로 기울어질수록 민혁이 은밀히 방조하는 ‘기의’가 잇따랐다. 민혁 인사들은 우화원(吳吴文) 왕안칭(王晏清), 류창이(劉昌義) 장전(張軫张) 등 국민당 지휘관들의 귀순에 은밀히 힘을 보탰다. 베이핑 평화회담을 주선한 것도 민혁이었으며 ‘윈난기의’ 등으로 내전에서 밀리던 장제스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입히기도 하였다. 이들은 결국 내전 말기 공산당이 주도한 정치협상회의에 참가하여 신중국 창립에 참여하였으며 현재까지도 중국 내에서 조직을 유지하고 있다. 타이완과 티베트를 제외한 중국 각지에 지부를 두고 있으며 당원은 십만명에 이른다고 한다. 중국 정부의 방조가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2017년 상하이에서 열린 국민당 혁명위원회 13차 대회

    1948년 1월 8일에는 광시 군벌의 맏형격인 리쫑런이 부총통 선거 출마를 선언하였다. 리쫑런은 바이충시 등과 함께 국민당 내 유일하게 남아있는 광시군벌의 수장이었다. 그는 1929년 바이충시와 함께 장제스에 맞서 이른바 ‘장계전쟁’을 벌였으며 패퇴하였다. 그는 패배에 굴하지 않고 1930년 옌시산, 펑위샹 등과 함께 이른바 ‘중원대전’에 참가하였으나 다시 패배하였다. 그런 가운데서도 살아남아 바이충시를 국방부장으로, 자신은 베이핑 행원 주임으로 세력을 유지하며 장제스를 견제해 왔다.

    1948년 5월에 치러질 총통 선거는 국민정부 첫 번째 선거였다. 1945년 2차 대전이 끝난 뒤 국공 양당이 지루한 정치협상회의를 벌였으나 끝내 결렬되어 내전이 일어났다. 국민정부는 내전 발발 후 1946년 연말에 ‘제헌 국민대회’를 열어 헌법을 제정하였다. 1946년 12월 25일 ‘중화민국 헌법’이 통과되어 1947년 1월 1일 공포되었다. 그해 12월 25일 헌정이 실시되어 중국은 역사상 처음으로 헌정시대를 맞았던 것이다. 이제 장제스의 유일한 정치적 라이벌이라 할 수 있는 리쫑런이 출마를 선언하였으니 장제스의 신경이 곤두설 수밖에 없었다.

    1947년 하반기부터 시작한 장제스의 불운은 거기에 그치지 않았다. 전쟁으로 피폐해진 경제난이 더욱 가중되어 민심이 이반되었다. 1948년 1월, 국민당 통치지구의 물가가 다락같이 올랐다. 1월 2일, 하루 동안에 쌀 한근(중국의 근은 500그램)이 6만위안에서 9만위안으로 뛰었다. 그후 텐진, 상하이, 난징, 베이핑 등 전국 각지의 물가가 치솟기 시작하여 2월 16일에 이르면 상하이의 쌀값이 한근에 210만위안에 이르렀다. 5월 4일에는 470만위원이 되었으니 국민정부에서 찍어낸 돈이 그야말로 휴지값만도 못하게 되었다. 1948년 내내 물가앙등은 계속되어 쌀, 밀가루, 식용유, 면방직, 담배, 장작, 석탄 등 모든 생활 필수품의 품귀현상이 계속되었다. 장제스와 국민정부에 대한 민심이 날로 흉흉해질 수밖에 없었다.

    1948년 소녀가 물건을 사려고 돈을 보자기에 싸고 있다.

    생활이 날로 어렵게 되자 노동자들이 들고 일어섰다. 1월 29일 상하이 신신(申新) 제9 면사 공장에서 6천여 노동자들이 배급 지연 항의와 임금인상을 요구하며 파업에 나섰다. 그러자 2월 2일 군경과 국민당 특무들이 파업 노동자들을 공격했다. 이들은 장갑차를 앞세우고 공장 안으로 진입하여 노동자 3명을 때려죽이고 60명에게 중경상을 입혔다. 300명이 체포되었으며 해고된 노동자가 400명이었다. 이 사건이 발생한 뒤 지역의 노동조직과 공산당 상하이 비밀조직이 지원하는 단체 등이 후원회를 조직하는 등 광범위한 항의투쟁이 벌어졌다. 국민정부는 체포된 노동자 대다수를 석방하고 해고된 노동자 상당수를 복직시키며 민심을 달래려 하였다.

    중공, 민심을 공략하기 위한 세심한 배려

    1948년 1월 12일 중공 지도부 중앙지대 사령인 런비스가 ‘토지개혁의 몇 가지 문제’를 제기했다. 서북 야전군 전선위원회 확대회의에서 런비스는 토지개혁 과정에서 드러난 좌경적 오류를 지적하고 개선안을 이야기했다. 그는 “상공업 분야에 모험적인 정책을 써서는 안 된다. 지주나 부농이 소유한 토지나 이들이 운영하는 상공업도 몰수해서는 안된다. 양식이 있는 신사(지역에 있는 유력한 인사들을 말한다.)들도 보호해야 한다. 90퍼센트 이상의 인민을 이익으로 단결시켜야 한다.” 고 주장했다. 그는 또 “공산당은 함부로 때리거나 죽이는 것을 견결히 반대한다. 범죄자에 대하여 혹형을 가해서는 안된다.”고 강조했다. 그러자 중공 중앙은 런비스가 쓴 이 문건을 즉각 전국적인 지도문서로 결정하였으며 신문에도 발표하여 공산당의 공식방침임을 분명히 하였다.

    1월 18일에는 마오쩌둥이 ‘현재 당의 정책 중 몇 가지 중요 문제에 대하여’라는 문건을 기초하였다. 그는 이 문건에서 “그동안 당내에서 있었던 좌경적, 우경적 오류를 시정해야 한다. 중농이나 중소 상공업자, 지식인들에 대하여 어떠한 모험적인 정책도 해서는 안된다.”고 강조했다. 그는 “신민주주의 정권은 노동자계급이 영도하는 인민 대중의 반제반봉건 정권”이라고 규정하였다. 그는 또 “노동자계급과 당이 동맹하는 자들을 영도하려면 두 가지 조건이 있다. 하나는 공동의 적에게 투쟁하여 승리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피영도자들에게 물질적 이익을 주어야 한다. 그리고 정치교육을 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장제스와 국민정부를 지탱하는 세력을 고립시키기 위한 정책과 방침을 더욱 구체화하였다고 볼 수 있다.

    중공 중앙은 2월 27일 마오쩌둥이 기초한 ‘상공업 정책에 대한 당내 지시’를 발표했다. 지시의 요점은 “부농이나 지주에 대한 반봉건적인 투쟁방식을 상공업자에게 그대로 적용하는 경우가 있다. 상공업을 파괴하면 전체 인민이 피해를 보게 되니 적극 보호해야 한다. 각지의 공산당 지방정권은 노동자와 자본가가 생산관리위원회를 구성하여 산업에 힘쓰도록 지도해야 한다. 노자 간에 서로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영도해야 한다.”고 지적하였다. 결론은 “그렇게 하여 지금 고립되고 있는 적을 철저하게 고립시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결국 공산당의 당시 방침은 농촌에서 소작인이나 빈농, 중농까지 적극 포괄하여 경자유전의 토지개혁을 실시하며 부농을 중립화시키라는 것이었다. 도시에서는 협조하는 자본가를 보호하여 생산의 증대나 물가안정에 힘쓰라는 것이니 민생에 실패한 국민정부를 더욱 고립시키려는 정책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방침은 노동자와 농민을 중심으로 지식인과 민족 자본가를 포괄하여 새로운 정부를 세운다는 ‘민주연합 정부론’과 이를 뒷받침하는 ‘신민주주의’ 이론과 맥을 같이 하는 것이었다.

    펑더화이, 이촨(宜川)에서 류칸을 장사 지내다

    중국 옌안시에서 동남쪽 황허변에 이촨이라는 작은 현이 있다. 이곳에는 중국의 3대 폭포 중 하나로 유명한 후커우 폭포가 있어 많은 이들이 찾는다. 린비아오의 동북 야전군이 동계공세로 천청을 낙마시킬 무렵, 펑더화이가 지휘하는 서북 야전군은 산시성 이촨현에서 후쫑난의 주력 부대 중 하나인 29군을 깨뜨렸다. 이촨이 옌안 가까이에 있으므로 홍색수도이던 옌안이 해방군의 위협 아래 놓이게 된 것이다. 압도적인 병력의 열세 속에 운동전을 주력 전술로 쓰며 치고 빠지던 서북 야전군도 이때쯤 되면 웬만큼 체력을 보충하였다. 3만명이 안되던 병력이 보충과 부대통합을 통해 7만 5천명으로 늘어나 있었다.

    표시된 부분이 이촨. 그 주변의 시안, 옌안, 바오지 등 주요 지역은 붉은 원 표시

    국민정부에서 서북쪽을 책임지고 있는 곳은 시안에 있는 시안 수정공서였다. 공서 주임인 후쫑난이 지휘하는 집단군은 29개 여단 33만명의 대군을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병력이 산시성과 산시성 남부 등에 분산 배치되어 있었다. 시안 북쪽인 섬감녕 변구쪽은 17개 여단이 시안을 중심으로 옌안, 뤄촨, 이촨 등에 분산 배치되어 있었다. 그때는 이미 류보청, 덩샤오핑의 진기로예 야전군과 천겅, 셰푸즈 집단군이 중원의 북쪽과 산시성 남부에 출몰하며 후쫑난 집단군을 견제하고 있었다. 후쫑난 집단군은 서북쪽과 산시 남부 등에 병력을 나누어 양면작전을 해야 하는 처지였다.

    이촨에는 황푸 2기생인 장한추가 수비하고 있었다. 후쫑난 군 주력부대 중 하나인 29군은 류칸의 지휘 아래 뤄촨, 펑링 등에서 기동방어를 하도록 명령을 받고 있었다. 그밖에 회족 장군인 마부팡과 마홍쿠이가 칭하이와 닝샤에 주둔하여 응원 태세를 갖추었다. 바오안, 안볜, 류린에도 국군 부대들이 주둔했지만 서북 야전군에 의해 견제받거나 포위를 당한 형편이어서 응원할 수 있는 상태는 아니었다.

    서북 야전군은 1947년 겨울 류린을 공격한 뒤 휴식과 부대 정돈을 하며 반격기회를 노렸다. 펑더화이와 시중쉰 등 지휘부는 공격 방향을 놓고 고심을 거듭했다. 류린을 다시 공격하는 방안이 있었으나 식량 부족과 추위, 그리고 성이 튼튼하여 포기했다. 서진하여 룽둥(龍東) 공격을 검토했지만 역시 지역의 식량이 부족하고 마부팡, 마홍쿠이 등 기동력이 강한 강적이 버티고 있어 대상에서 제외하였다. 결국 남은 길은 남하하여 관중을 치는 것뿐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중국에서 관중이란 산시(陝西) 중부를 일컫는다. 그곳에 만리장성의 네 관이 있는데 통관(潼關), 우관(武關), 란관(藍關), 쑤관(蕭關)의 관문 안을 관중이라 하였다. 그곳은 사람도 많고 물자가 풍부하여 대규모 병력이 작전하기에 적합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또 관중으로 남하하면 시안을 위협하여 류보청, 덩샤오핑의 야전군과 천이, 쑤위의 부대, 그리고 천겅과 셰푸즈 부대의 합동작전에 호응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후쫑난 집단군이 파견한 페이창후이(裴昌會) 병단이 되돌아와 응원할 것을 기대한 것이다

    그때 중공 중앙군사위는 펑더화이에게 옌안, 이촨선으로 출격하여 손에 넣고 그 다음에는 남쪽인 웨이수이(渭水)의 북쪽으로 진격하라고 명령하였다. 그곳에 위북(渭北) 근거지를 설립하라는 것이었다. 펑더화이는 우선 일부 병력으로 이촨을 포위 공격하여 황링, 뤄촨을 수비하던 류칸의 국군 29군이 구원을 오도록 유인하기로 하였다. 구원 병력을 우세한 병력으로 이동 중에 섬멸하고 이촨 수비군을 공격, 섬멸하기로 한 것이다. 나아가 황링 산기슭에 있는 각 도시와 읍을 점령하고 옌안을 수복하여 섬감녕(陝甘寧: 산시,간쑤,닝샤)과 진남(晉南: 산시 남부) 해방구를 하나로 연결시키기로 하였다.

    2월 22일, 서북 야전군 이촨 공격부대는 예정된 방침에 따라 이촨성으로 출동했다. 다른 부대들은 주변 소읍과 마을들을 점령한 뒤 와쯔지에(瓦子街) 북쪽 지역에서 국민당 구원군을 기다렸다. 24일, 이촨 공격부대들은 이촨성을 포위하고 27일에는 이촨성 밖 국군 거점들을 공격하여 점령했다. 국민당 군 정편 76사단 24여단은 성 안으로 압축되었다. 이촨성이 포위된 뒤 후쫑난은 급히 국민당군 부대에 구원 명령을 내렸다. 정편 제29군 군단장 류칸이 인솔하는 정편 27사단, 90사단 등 도합 4개 여단은 26일 뤄촨, 황링선에서 뤄이 공로(뤄촨-이촨간)를 따라 경무장으로 급히 달려 27일에 와쯔지에 지역에 도착했다. 이때 서북 야전군은 계속 이촨 수비군을 포위 공격하고 있었다. 그 외 9개 여단 병력을 집중하여 와쯔지에 동쪽에서 남북 고지에 매복하고 있었다. 일부 병력은 기동방어로 적을 깊이 유인하기로 하였다.

    29일이 되자 구원군 일부가 이촨성 서남쪽 예정 진지로 유인되었다. 해방군은 와쯔지에 서쪽에서 국군 측면 뒤쪽에 맹공을 시작했다. 해방군은 와쯔지에를 점령하고 정편 90사단 일부를 섬멸했다. 류칸은 해방군의 포위공격에 빠졌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부대에 명령, 와쯔지에 남쪽 고지에 모여 포위망 돌파를 기도하였다. 그때 서북 야전군 다른 부대가 와쯔지에 남산을 점령하여 류칸군의 퇴로를 끊었다. 3월 1일 오전, 서북 야전군은 총공격을 시작하여 17시까지 격전을 벌여 전부 섬멸했다. 29군단장 류칸은 끝까지 독전했으나 형세가 기운 것을 알고 수류탄을 터뜨려 자결하였다. 29일 저녁 서북 야전군 공성부대는 이촨성 수비군에 총공격을 시작했다. 3일 새벽이 되자 국민당 수비부대가 모두 섬멸되고 해방군이 이촨성을 점령하였다. 이촨을 수비하던 장한추도 포로로 잡혔다. 장한추는 신중국 건립 후 서북 고급보병학교 교관으로 임명되었다. 그후 산시성 정치협상위원 등을 지냈다. 장한추가 전범으로 처벌되지 않고 곧바로 등용된 것을 보면 펑더화이나 마오쩌둥 등 중공 중앙이 그를 다른 국군 지휘관들과 달리 보았음을 알 수 있다. 장한추는 중일전쟁에서 타이얼좡 전투와 창사 방어전에서 일본군과 용감하게 싸워 공을 세웠다고 한다. 그밖에 그가 등용될만한 다른 기록을 찾아볼 수 없으니 자세한 사정은 알 수 없다.

    서북 야전군은 이촨 전투에서 후쫑난 집단군 주력인 29군을 비롯하여 5개 정편여단 3만여명을 섬멸하였다. 국군 중장 2명, 소장 3명을 사살하였으며 소장 4명을 포로로 잡았다. 중공 중앙은 3월 3일 전화로 대첩을 축하하였다. 마오쩌둥은 3월 7일 인민해방군 총사령부 대변인 명의로 담화를 발표하였다. ‘서북대첩을 평가하며 신식 정군운동을 논한다.’가 그것이다. 마오는 이 담화에서 이촨괴 와쯔지에 대첩이 서북의 정세를 바꿨으며 중원의 형세를 호전시켰다고 칭찬했다.

    산시성 이촨의 와쯔제 전투 열사능원

    이촨의 와쯔제 전투 열사능원을 참배하고 있는 중국 청소년들

    펑더화이, 류칸의 유체를 후쫑난에게 보내주다

    류칸은 황푸군관학교 1기생으로 동기인 후쫑난의 휘하에 있었지만 그 용맹함과 백절불굴의 의지는 국군 지휘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다. 그는 1933년 국민당군의 공산당 근거지에 대한 4차 포위토벌 때 사단장으로 참전했다. 그는 따베산에서 홍군을 공격하다 오른쪽 눈에 유탄을 맞아 실명하였다. 그때부터 그는 ‘독안룡’으로 불리며 용맹을 떨쳤다. 중일전쟁에서 일본군과 여러 차례 맞서 싸우며 결코 물러서려 하지 않았다. 장성전투 때 류칸은 사단장으로 휘하 병력 1만여명을 거의 다 잃게 되자 총을 뽑아 자살하려고 한 일도 있었다. 참모장이 총을 빼앗아 말릴 만큼 그는 열혈의 투지를 가지고 있었다. 산시성 신커우(忻口)에서는 일본군과 격전 끝에 적 1만명을 사살하여 청천백일 훈장을 받은 일도 있었다.

    그러던 류칸이 마오쩌둥과 악연을 맺었으니 바로 얼마 전까지 마오쩌둥과 중공 중앙 지도부를 끈질기게 쫓던 국군 장군이었다. 대범한 마오쩌둥도 일년 내내 류칸의 부대에 쫓겨 섬북을 전전하였으니 이가 갈릴 만도 하였다. 마오는 언젠가 “내 류칸을 사마의로 만들어 주겠다.”고 했다가 “아니다, 류칸은 사마의도 아니다. 아무것도 아니다.”며 비웃기도 하였다. 이제 류칸이 펑더화이가 파놓은 함정에 빠지게 되었다.

    3월 1일 새벽 펑더화이가 총공격 명령을 내리자 그는 후쫑난에게 우선 포위망 뒤로 물러선 뒤 이촨을 구원하겠다고 요청했다. 그러나 후쫑난은 해방군이 류칸을 포위할 만큼 많은 병력이 있을 것으로 여기지 않고 류칸에게 계속 전진하라고 명령했다. 후쫑난의 지시를 받고 류칸은 절망적인 심정이 되었지만 명령에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19군이 와쯔지에 이르자 매복했던 해방군이 겹겹이 포위했다. 류칸은 해방군이 밤중에 포위하는 것이 어렵다고 판단했으나 해방군은 내리는 눈을 무릅쓰고 국군 부대를 완전히 포위한 것이다.

    류칸은 부대가 포위되었음을 알고 와쯔지에 남부 고지를 점령하라고 지시했다. 이 고지에 의지하여 류칸은 결사적으로 저항하며 후쫑난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후쫑난은 전보로 “지금 페이창후이 병단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구원하러 가고 있다. 형은 장병들을 격려하며 굳게 버티기 바란다.” 하고 회신했다. 그러나 류칸은 그 말이 빈 소리라는 것을 금방 깨달았다. 페이창후이의 5병단이 허난성 서부에 있는데 어느 세월에 구원을 올 수 있다는 말인가? 류칸은 대세가 그른 것을 알고 후쫑난에게 마지막 전보를 보냈다. “성공하지 못하면 인을 이룰 뿐이다.” 살신성인하겠다는 뜻이니 목숨을 버리겠다는 것이었다. 그 뒤 해방군이 류칸의 지휘소 백미터 거리까지 접근해 왔다. 본부에서 저항하던 경호병들도 모두 죽거나 사라지자 그는 수류탄의 안전핀을 뽑아 스스로 자결하였다. 류칸이 죽자 지휘관을 잃은 국군은 모두 투항하였다. 29군이 전멸당한 것이다.

    전투가 끝난 뒤 펑더화이는 포로를 점검하다 류칸이 자결했다는 보고를 받았다. 펑은 “국민당 장교들이 모두 죽기를 두려워하는 줄 알았더니 류칸, 이 자는 그래도 패기가 있구나. 후난 사람으로 체면을 잃지는 않았으니 사나이로다. 류칸이 반동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항일에 공이 있는 사람이다. 시신을 잘 싸서 옌밍(嚴明: 당시 국군 90사단장으로 전사)과 함께 후쫑난에게 보내 줘라. 후쫑난이 추도회라도 열어 주겠지.” 하고 지시했다. 펑더화이 자신도 후난성 사람이었던 것이다.

    20세 시절의 류칸,중국에서 항일명장으로 인정받고 있다.

    3월 7일 신화사 통신은 다음과 밝혔다. “후쫑난 선생과 국민당 장병 사상자 가족들은 유의하시라. 정편 제29군단장 류칸 중장, 정편 90사단장 옌밍 중장의 시신을 잘 수습하여 내일 오전 9시에 뤄촨성으로 보낼 것이다. 사람을 보내 받아 가시라.” 후쫑난이 이 소식을 듣고 난감해 하다가 류칸의 처와 옌밍의 처에게 뤄촨에 가서 시신을 운구해 오게 하였다. 시신이 시안에 오자 후쫑난은 추도회를 성대하게 열고 “나라와 당을 위해 순사한 영웅들에게 배워야 한다.”고 추모하였다. 그리고 장제스에게 두 사람을 상장으로 추서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장제스는 두 사람이 죽었다는 사실을 알고 후쫑난에게 불같이 호령했다. “도대체 싸움을 어떻게 하는 건가? 두 장사가 죽었어. 어쩔 셈인가?” 장제스는 다시 전보를 보내어 후쫑난을 책망했다. “이촨 패배는 국군의 비적토벌에서 가장 큰 좌절이다. 무익한 희생을 치르고 좋은 지휘관을 잃었다. 비통하고 슬프구나.” 장제스는 후쫑난의 직을 거두고 잠시 대기하라고 지시했다. 장제스는 류칸의 죽음을 알고 “살 의욕이 나지 않는다.”고 토로할 만큼 원통해 하였다고 한다. 그는 타이완으로 쫓겨간 1953년 류칸을 2급 상장(중장과 대장 사이의 계급)을 추서하여 잊지 않았음을 증명하였다.

    이촨, 와쯔제 전투 뒤 후쫑난은 휘하 3대 주력인 1사단, 36사단, 90사단을 모두 잃었다. 이때부터 후쫑난은 서북에서 공격할 여력을 잃고 방어에 치중하게 되었다. 서북 야전군이 방어에서 공격으로 전환하는 계기가 되었으니 그 의미가 결코 적다고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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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소개
    철도 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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