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50년 8월, 즉결처분 또는 살인
    [ 군대 ] 남문전 비행 사건 - 어느 육군 대위의 죽음 ①
        2012년 04월 30일 08:58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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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대이야기 연재를 시작하며

    오래 전에 들었고, 자주 듣지만 납득할 수 없는 이야기. “술자리에선 종교, 정치, 군대 얘기 화제로 삼지 마라.”

    그러나 왜?

    종교 이야기는 꼭 절이나 교회에서 해야 하는가. 같은 종교 아니면 말도 섞지 말아야 하는가. 신앙과 생활이 따로국밥이니 성직자들을 장사꾼이라 하는 것 아닌가. 정치 이야기 역시 따로 모여 해야 하는가. 이념이 다르고 지지정당이 다르면 토론도 하지 말아야 하는가. 정치란 원래 더러운 것이고, 그래서 피하다 보니 이렇게 고생하고 사는 것 아닌가. 종교, 정치 모두 중요한 문제인데 스스로 재갈을 무는 것, 잘못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군대 이야기는 왜 하지 말라는 걸까. 남자들은 군대 이야기만 나오면 허풍떤다고 한다. 고생을 과장하다 보니.

    초등학교 때 모범 어린이라고 신문사에서 뽑아 데려간 곳이 논산 훈련소였다. 고등학교 때는 교련복이 외출복이었고, 제식훈련에 총검술까지 배웠다. 할머니는 6.25 한국전 때 미군 네이팜탄에 맞아 돌아가셨다. 아버지는 무공훈장을 탄 백마고지 상이군인. 그 피 값으로 대학을 졸업했다. 난 해병대 제대했고, 아들만 셋인데 모두 군대 보냈다. 보통 집안이다. 평범하다.

    변호사가 되어 군대 사건도 접해 보았다. 즉결처분, 특수임무 수행자(북파공작원), 병무 비리, 차세대전투기(FX) 사업 양심선언, 총기난사, 천안함 사건 등등. 이건 특별한 경험이다.

    군대 간 아들에게 편지 보내고 싶었다. 종교, 정치 이야기는 나중에 천천히 하더라도 군대 이야기를 하고, 경험을 나누고 싶었다. 게을러서 미루었으나 이젠 써야겠다. 우리 의식 깊이 숨겨져 있는 것. 군사문화. 이 이야기로 이놈의 맨얼굴을 그릴 수 있다면 좋겠다. <필자 주>

    1999년 어느 날 명동성당 천주교인권위원회 상담실로 할머니 한 분이 찾아 오셨다. 곧 칠순이 된다는 할머니는 기품이 배어 있었고, 총기 또한 넘치는 것처럼 보였다. 할머니는 내게 일목요연하게 자신이 가져온 사건의 내용을 설명하고 해결 방안을 물었다. 할머니와 상담하던 나는 그 내용이 너무 심각하고 해결하기가 어려운 문제였으므로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할머니의 얘기는 이렇다.

    6.25 전쟁 당시 낙동강 지구 전투

    신혼이던 오빠, 급하게 귀대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3.8선에서 총성이 울리며 비극적인 전쟁이 시작됐다. 할머니는 당시 여고생이었고 신혼이었던 오빠의 대전 집에서 오빠 가족과 함께 살고 있었다. 육군 대위였던 오빠는 주말 외박을 얻어 집에 와 있었다. 오빠는 귀대하라는 방송을 듣고 급하게 지나가던 군 트럭을 타고 집을 떠났다.

    H대위(오빠)가 귀대한 후 가족들은 부산으로 피난을 떠났다. 가족들은 피난처에서 수소문 끝에 H대위와 같은 부대원들의 가족들을 찾았다. 이들은 소속부대 후생장교로부터 쌀과 의류 등을 지원받으면서 어려운 피난살이를 꾸려나갔다.

    그런데 그해 8월 경 후생장교였던 문모 중위가 할머니와 가족들에게 H대위에게 ‘나쁜 일’이 생긴 것 같다고 귀띔해줬다. 가족들은 H대위가 전사한 것으로만 생각했다. 그런데 문 중위는 “H대위가 연대장에게 즉결처분당한 것 같다”면서 “지금은 전시인 만큼 절대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즉결처분이라니? 그 말을 들은 가족들은 공포에 질렸고, 부인은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고향으로 떠났다. 할머니는 오빠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오빠는 부상을 당해 후송된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며 희망을 잃지 않으려 애썼다.

    “연대장에게 즉결처분당한 것 같다”

    할머니는 당시 부산도립병원을 사용하던 육군병원에 자원봉사활동을 하면서 오빠의 소식을 알아보고 있었다. 드디어 9월 초 오빠를 안다는 사람을 만났다. 그는 부상당해 육군병원에 후송돼 온 학도병이었다.

    그가 전해준 얘기는 충격적이었다. “H대위는 8사단 16연대 소속이었다. 더 이상 오빠를 찾아서 헤매지 마라. 오빠는 대대장이었는데 상급자인 연대장한테 총살당했다. 유해를 찾을 방법이 있는지나 알아봐라.” 그리고 그는 “연대장 이름은 김00 중령이니 잊어버리지 말고 정확히 기억하라.”며 “그 사람이 지금 영도에 있다. 찾아가서 시신을 묻은 곳이라도 알려달라고 해 유해를 수습하라.”고 말했다.

    할머니는 그 얘기를 들은 다음 날 영도에 가서 김 중령을 찾아 나섰다. 물어물어 찾고 보니 그는 패전한 부대원들을 수습하고 있었다. 김 중령은 처음 보는 여고생이 찾아와 자신이 H대위의 여동생이라고 하자 깜짝 놀라면서 당황했다. 그는 자신과 동명이인인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이 연대장으로 근무하다 다른 데로 전출을 갔다고 말했다. 할머니는 그 말을 듣는 동안 그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직감했으나, 현장에서 그에게 따질 수 있는 방법도 마땅히 없었으므로 어쩔 수 없이 집으로 되돌아왔다.

    할머니는 1950년 9월 28일 수복된 서울로 올라와서 육군본부를 찾아갔다. 오빠의 생사를 확인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담당자라면서 미군이 나와 “지금은 전시 혼란기이기 때문에 생사여부를 명확히 파악할 수 없지만, 전사했다는 사람들도 실종됐다가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그 미군은 이어 “살아 있으면 연락할 것이고 전사했다면 국가에서 통지서를 보낼 것이니 집에서 기다리고 있으라.”고 말했다.

    이상한 소문의 공포

    당시 가족들은 불안에 떨면서도 H대위가 어디에선가 살아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고 살아갔다. 그 후에도 가족들은 H대위의 생사를 확인하기 위해 육군본부와 국방부 등 백방으로 수소문하며 찾아다녔으나, 누구도 H대위에 대한 말을 해 주지 않아 생사여부조차 알 수 없었다.

    H대위의 부인은 1950년 전쟁 당시 부산 피난살이에서 떠나 세 살 된 아들과 갓 태어난 딸을 데리고 친정 동네에서 삯바느질을 하면서 남편이 살아 돌아오기만 애타게 기다렸다. 그런데 그렇게 친정 생활을 하던 중 부인의 사정을 알게 된 사람들 사이에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동네 사람들은 남편이 장교로 참전했는데 생사조차 모르고 있다는 점, 만일 전사했다면 당연히 국가로부터 생계 보조 같은 것들이 나올 텐데 그것도 없다는 점 등이 이상하다며 수군대기 시작했다. 안 좋은 소문도 돌았다.

    H대위의 부인은 혹시 이 일로 친정집까지 연좌제에 걸리는 것이 아닐까, 겁을 먹고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친정에서 나와 서울로 올라와 생활했다. 그리고 가족들은 즉결처분과 연좌제 등의 이야기를 듣고 겁에 질려 더 이상 H대위 생사 확인 노력을 하지 못하였다.

    그러던 중 할머니는 1999년 초 텔레비전 뉴스를 통해 과거 의문사 사건에 대해 조사할 수 있도록 특별법을 만들었다는 사실을 알고 의문사위원회에 진정하여 진상을 밝힐 수 있는지 알아보았다. 그러나 의문사위원회에서는 시간적으로 한국전쟁 당시의 사건은 다룰 수 없으며, 민주화운동과 관련된 의문사 사건만 다룰 수 있다는 얘기를 듣고, 할머니는 천주교 인권위원회의 문을 두드리게 된 것이며, 거기서 필자를 만난 것이다.

    청와대 비서실에 ‘민원 전화’

    할머니 요청의 요지는 6. 25 전쟁 발발 직후 헤어진 오빠가 육군 대위로 상관에게 억울하게 즉결처분을 당해 목숨을 잃었는데 그 진실을 밝혀 달라는 것이었다. 즉결처분한 상관이 누구인지는 짐작하지만, 왜 언제 어디서 즉결처분했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는 것이었다. 막막했다.

    우리는 고민 끝에 일단 사건의 실마리가 될 만한 것은 모두 찾아보기로 했다. 다행스럽게 H대위는 육군사관학교 5기 졸업생으로 1950년 당시 현역 육군대위였고, 소속도 확실했다. 일단 국방부와 육군본부, 전쟁기념관, 육사 동기회 등이 떠올랐다. 나는 할머니께 제적등본을 준비하여 H대위가 오누이 관계임을 밝히고 병적 기록, 인사 및 교육 관련 기록을 입수하고 다시 상의하자고 말씀드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할머니의 연락을 받았다. 전쟁기념관에서 오빠가 근무했던 부대와 관련된 한국전쟁사를 찾았는데 다른 구체적인 자료는 더 이상 찾기 힘들다는 것이었다. 할머니는 국방부 등 담당자들이 모두 말로는 안타깝다고 하면서도 적극적으로 자료를 찾아 주려 하지 않는 것 같다고 말했다.

    나는 문득 청와대 비서실에 근무하는 지인이 떠올랐다. 이권이나 인사 청탁도 아니고, 이런 문제를 외면한다면 국가의 존재 의미가 없는 것이라는 생각에 전화를 걸어 부탁했다. 그리고 할머니께는 관련 자료를 수집하는데 관계 기관이 적극 협조하도록 조치해달라고 민원을 청와대에 내도록 조언하였다.

    그후 연락이 없어 잊고 있었다. 그런데 2004년 경 할머니로부터 연락이 왔다. 할머니가 전해준 얘기는 나를 또 놀라게 했다. 할머니는 그 동안 자료를 찾고, 분석하고, 재심청구를 하고 법정 투쟁을 해왔다. 거기서 할머니는 기적 같은 승리를 거뒀다. “무죄!”

    할머니의 기적 같은 승리

    즉결처분 당한 H대위는 50년이 훌쩍 넘은 세월을 보낸 후, 이제 할머니가 된 여동생의 놀라운 집념과 지혜로 억울함으로부터 조금이나마 벗어나게 됐다. 나는 당시 언론에서도 보도가 된 이 사실을 모른 채 지나쳤던 것이다.

    며칠 후 할머니는 판결문과 자료를 갖고 내게 찾아왔다. 나는 그 자료들에 대한 할머니의 설명을 들으며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재판의 승리는 오로지 할머니가 이룬 ‘기적’이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재심을 맡았던 변호사나 H대위의 육사 동기생회 회장도 똑같은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할머니의 설명은 이렇다. 할머니는 나의 조언을 받아들여 청와대에 민원을 냈다. 국방부, 육군본부도 몇 번이고 찾아다니면서 하소연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육군본부에서 민원회신을 받았다. 회신 공문에는 “1950. 8. 17. 사형(군법)(남문전비행(南文前非行)”이라 적혀 있었고 거주표 사본을 첨부했다.

    거주표란 현재의 병적 기록표나 인사 자료표와 유사한 것이다. 당시 예하 부대로부터 보고된 문건이나 상급부대의 명령 등을 참고로 하여 육군본부와 같은 곳에서 시간 순서에 따라 작성한 것이다.

    병적기록표라 할 수 있는 H대위의 거주표에는 임관부터 대대장 부임까지 내용이 기록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밑에 “실종으로 보고되었으나 사실은 사망임. 정식 보고는 없음”이라는 기록이 있었다.

    남문전의 비밀 밝히다

    그리고 실종이라 기재된 내용의 바로 위 줄에 붉은 색으로 “남문전비행 즉결처분(南文前非行 卽決處分)”이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할머니는 돋보기로 거주표를 샅샅이 살펴보았으나 ‘남문전비행’이 무슨 뜻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수원에 있는 남문에서 비행을 저질렀다는 것인가?’ 하는 생각도 해 봤으나, 6. 25 전쟁이 터지던 날 외박 중이었던 오빠는 대전에서 귀대하였다. 그리고 약 2달 후 경상북도에서 즉결처분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으니 수원 남문과는 아무 연관이 없다.

    할머니는 그 수수께끼 같은 구절을 앞에 놓고, 그 뜻을 알아내려 온 몸과 마음을 ‘남문전비행’이라는 화두에 쏟아부었다. 화두를 붙잡고 몸부림치는 ‘선승’처럼.

    그러던 중 어느 한 순간 꽉 막힌 상황을 실타래처럼 풀어줄 ‘단서’가 할머니의 머릿속을 번개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한자로 “남문”을 붙여 쓰면 “적”이 된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한자로 남문-南文을 띄어 쓰지 않고 붙여 쓰면 적-敵이 된다. 사실은 남南(남녘이란 뜻)이 아니라 적啇(뿌리, 밑동이란 뜻)인데, 거주표를 쓴 병사나 하사관이 이를 혼동하여 잘못 썼고, 문(文)자와 간격을 두고 쓴 것이다.

    할머니가 글씨를 쓴 사람 입장에 서서 생각하고, 결국 거주표 작성자가 잘못 쓴 것이라고 파악하고, 해석하였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었다. 이렇게 할머니는 돋보기를 사용하면서 글자를 확대해 보고, 종이가 뚫어지도록 보고 또 보고, 읽고 또 읽은 끝에 결국 ‘남문전비행’은 ‘적전비행’을 잘못 쓴 것이라는 결론에 이른 것이다. 할머니가 찾아낸 ‘적전비행으로 인한 즉결처분’이라는 기록은 H대위 사건의 실체를 접근해 들어가는 결정적 열쇠가 됐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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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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