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위기와 기회에 대한
    국민·공산, 양당의 대응은?
    [국공내전㉛] 국민당은 통제를 강화하고 공산당은 조직을 재정비하다
        2020년 04월 15일 01:20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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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산당이 적극 공세로 돌아선 뒤 동북과 중원에서 국민정부는 점점 수세로 몰렸다. 스자좡까지 잃게 되자 난징의 장제스는 점점 초조해졌다. 1947년 11월 18일 국민정부 행정원은 회의를 열어 ’장쑤, 저장, 안후이, 장시,허난, 후난등 6성 연합 방어방침‘을 통과시켰다. 11월 26일에는 장제스가 직접 베이핑으로 가 군사회의를 열어 베이핑을 포함한 화북초비 총사령부를 설치했다. 사령으로는 ’수성명장‘이라 불리던 푸쭤이를 임명하였다. 장제스는 또 11월 27일 ‘국방부 초비(剿匪: 비적토벌) 군사 화중(주장九江 소재) 지휘부’를 설치하고 바이충시를 국방부장겸 사령으로 임명하였다. 1948년초 동북 초비사령으로 임명된 웨이리황을 포함하면 국군 안에서 가장 유능하다고 평가받는 지휘관들을 앉힌 셈이었다. 그밖에도 국민당은 광저우 행원 주임 쑹즈원이 광둥성과 광시성의 연합 쑤이징 공서 회의를 열어 ‘비적 연합토벌’ 방침을 검토했다. 류보청 덩샤오핑에게 따베산과 중원쪽 근거지를 내준 뒤에는 국민당 통치지역이라고 하여 안심할 수 없는 상태가 된 것이다.

    국민정부는 내부 통치도 강화하였다. 국민정부는 1947년 10월 27일 ‘민주동맹’을 불법단체로 규정하였다. 국민정부는 5월부터 민주동맹, 민주 건국회, 삼민주의 동지연합회 등 이른바 제 3세력들을 공산당이 장악하고 있다고 주장해 왔다. 국민당은 ‘중공 지하투쟁 노선과 강령’을 통해 위 민주당파들이 “중공과 밀접한 관계를 형성하고 있으며 그 태도와 자세를 면밀히 관찰하고 있다.”고 밝힌 바 있었다. 10월까지 국민당 특무들이 단체 관계자들을 종종 테러했으며 민주동맹의 몇몇 지도자들을 암살하기도 하였다. 마침내 불법단체로 규정하고 해산을 명령하며 ‘후방 공산당원 처치법’으로 처벌할 것이라고 밝힌 것이다.

    민주동맹 지도부 인사인 황옌페이(黄炎培) 등이 국민당과 교섭에 나섰으나 될 리가 없었다. 11월 5일 민주동맹은 조직원들의 안전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해산을 선언하였다. 민주동맹 주석인 장란(張瀾)은 “민주동맹 성원들은 즉시 정치활동을 중단하고 지도부와 모든 간부들은 사직한다. 조직은 즉시 해산한다.”고 선언하였다. 1948년 1월 18일, 민주동맹은 홍콩에서 중앙위원회를 열어 민주동맹 재건을 선언하고 활동을 재개하였다. 하지만 중국 안에서 이른바 ‘제 3의 길’은 사실상 파산하였다.

    민주동맹 지도부의 모습 맨 왼쪽이 장란 주석이다.

    마오쩌둥은 일찌감치 중간노선이 주장하는 것이 환상이라고 생각해 왔다. 1945년 2차 대전 종전 뒤 민족 자본가들과 소상공인들, 그리고 지식인들이 중심이 된 민주당파와 민주인사들은 ‘중간노선’을 주장해 왔다. 이들은 국민당의 일당독재를 반대하였으며 중국 공산당의 인민 민주독재 사회주의 노선도 반대해왔다. 둘 사이에 중간노선이 있으며 그것을 개량주의의 길이라고 주장하였다. 민주당파들은 미국이나 영국식 다당제를 중심으로 한 의회정치를 주장하고 정치 민주화와 경제 민주화를 통해 공화국을 건설하자고 역설해 왔다. 이들은 정치적으로는 영미식의 자유민주주의, 경제적으로는 소련식의 계획경제 사회주의를 실현하자고 주장하였다. 폭력혁명은 안 되며 친미와 친소 외교노선을 채택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장제스는 이들의 주장을 ‘서생들의 탁상공론’으로 치부했으며 “중국 5천년 역사에서 하필이면 지금 민주를 주장하느냐? 우리에게만 떠들지 말고 공산당에게 가서 주장하라.”고 코웃음쳤다. 공산당은 저우언라이를 중심으로 민주동맹 등과 친밀한 관계를 가지며 민주주의 강화를 주장했지만 장제스의 통치기반을 흔들고자 하는 전략적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내전이 격화되고 국민정부와 공산당의 힘겨루기가 본격화되자 중간노선이 설 자리는 점점 좁아졌다. 국민당의 탄압이 강화되고 공산당이 점점 전쟁의 주도권을 쥐게 되자 민주동맹의 입장도 점점 공산당에 동조하는 쪽으로 기울어져 갔다.

    국민정부의 통제가 강화되고 있는 가운데서도 국민당 통치지역 내 학생운동은 여전히 저항을 멈추지 않았다. 1947년 10월 29일, 저장대학교 학생 자치회장이 옥중에서 국민당 특무에게 살해되었다. 다음날인 30일 저장대학교 2,000여 학생들이 추도집회를 열었으며 31일에는 교수들이 국민당 특무의 처벌을 촉구하며 휴업 선언을 발표했다. 저장대학교 총장까지 기자회견을 통해 학생대표의 억울한 죽음을 개탄하자 분위기가 더욱 고조되었다. 11월 4일 베이핑의 대학생과 고등학생들 5천명이 휴업을 선언하는 등 학생 10만여명이 휴업과 가두행진을 벌였다. 이어 텐진, 상하이, 난징, 항저우, 쿤밍, 우한, 샤먼 등으로 항의가 번져갔다. 국민정부에 대한 민심 이반을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위기의식을 느낀 국민정부는 ‘내란 평정시기의 국가 위해에 관한 긴급조치 조례’를 선포하였다. 1947년 12월 25일 시행된 조례는 모두 12개 조항으로 되어 있었는데 가중처벌과 사형범위 확대를 담고 있었다. 내치에 대한 장제스와 국민정부의 불안을 알 수 있다. “내란죄를 범한 자는 처형이나 무기징역에 처한다. 내란죄를 범하는 자와 처벌은 다음과 같다. 부대를 이끌고 투항하는 자, 군사 요새나 군용물자 군사기밀을 적에게 제공하거나 파괴하는 자, 기밀을 공산당에게 누설하는 자, 군인을 선동하거나 기율을 지키지 않는 자, 금융 질서를 어지럽히는 자는 모두 사형에 처하거나 무기징역 혹은 10년 이상의 징역형에 처한다.” 또 규정은 “문자, 그림, 연설 등으로 공산당을 선전하는 자는 3년 이상 10년 이하의 유기징역에 처한다.”고 정하고 있다. 범죄를 저지른 자들은 군인을 제외하고 모두 특별 형사법정에서 재판을 받도록 하였다. 이 조례를 공포한 초기에는 “반란 평정지역”에 한해 시행하도록 하였으나 1948년 10월 30일이 되자 국민정부는 전국에 걸쳐 시행하도록 하였다.

    공산당, 조직을 정비하고 정치공세를 강화하다.

    내전 지역 곳곳에서 공세를 강화하던 공산당은 한숨 돌리게 되자 조직을 정비하였다. 1947년 겨울 인민해방군은 이른바 ‘신식 정군운동’을 시작하였다. 이 운동은 펑더화이가 지휘하는 서북 야전군에서 시작되었는데 다른 부대들도 곧 뒤따라 하게 되었다. 이 운동은 처음에 소박하게 출발하였다. 어느 병사가 간부를 붙잡고 울면서 호소하였다고 한다. 자신의 부모가 지주들에게 어떻게 착취를 당했는지, 형제가 착취에 저항하다 국민당 군벌 부대에 잡혀 죽은 것을 눈물로 하소연했는데 그 사연을 들은 간부도 마찬가지 형편이어서 나중에는 서로 붙잡고 울었다는 것이다. 그 후 서로 훨씬 친밀해지고 국민정부에 대한 투지가 더욱 불타게 되자 간부가 제의, 부대원 전체에 파급되었고 나중에는 서북 야전군이 조직적으로 이 운동을 전개하게 되었다.

    신식정군운동을 소개하는 책

    인민해방군 전체가 이 운동을 할 즈음에는 더욱 체계화되었다. 먼저 호소대회를 열어 국민정부와 지주들에 대한 투지를 고무하고 다음에는 계급적 각성과 자신의 임무에 대한 자각, 그리고 자기에게 견결히 투쟁할 투지가 있는지를 판단하게 하였다. 그 뒤에 서로에 대한 비판과 자아비판을 통해 각성하게 한다는 것이었다. 이 운동은 국군 포로들에게도 실시되었는데 먼저 사상개조를 한 다음 해방군으로 편입하는 과정을 밟았다. 중국 공산당은 이 운동을 통해 해방군의 정치적 군사적인 수준을 높였으며 군대 내 민주주의를 더욱 발전시켰다고 평가하고 있다. 하지만 투항한 국민정부 병사들의 해방군 부대 편입 과정에서 실질적 효과를 보았을 것이다. 자신의 전우였던 국군 병사에게 총을 겨누려면 사상무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마오쩌둥은 이 운동을 높이 평가하였다. 그는 나중에 이렇게 썼다. “신식 정군운동으로 군대 안의 관료주의를 극복해야 한다. 과거, 특히 1927년부터 32년까지 이루어졌던 부대 내 각종 위원회와 병사위원회를 회복하여야 한다. 이런 민주적인 운동으로 정치적 적극성과 자각성을 높이면 80만명에 이르는 국민당 포로들을 포용하여 해방군 전사로 다시 태어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2년 안에 160만명에 이르는 농민들이 해방군에 입대하게 될 것이다.”

    공산당은 또 1947년 겨울 무렵부터 당을 재정비하기 시작하였다. 공산당은 ‘정당운동(整黨運動)’이라는 캠페인을 벌였는데 주로 농촌 지역에서 이루어졌다. 공산당의 기반이 농촌에 있었고 이미 토지개혁 운동이 광범위하게 벌어지고 있었다. 따라서 정당운동은 토지개혁사업과 결합하여 진행되었다. “계급, 사상, 작풍 등을 점검한 뒤에 재정비하는 방식”이었는데 당원이 아닌 일반 민중들이 당원들이나 간부들을 심사하기도 하였다. 또 당의 지도부가 일반 민중의 의견을 들어 공정하게 처리한다고 하였다. 결국 부적격인 당원이나 간부들, 일반 민중들 사이에 평이 안 좋은 구성원들을 거르고 당의 분위기를 쇄신하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이때 좌경적 오류를 범한 일부 당원들을 처리하기도 하여 일반 민중들의 당에 대한 평가를 호전시키기도 하였다. 이런 방침대로 이루어졌는지 알 수는 없지만 마오쩌둥이나 공산당 지도부가 일반 민중들의 마음을 사기 위해 조직적인 노력을 기울인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악화되는 전황 속에서 억압적인 통제를 강화해간 장제스와 토지개혁과 조직 정비를 통해 민심을 얻어간 공산당의 방침이 대조될 수밖에 없다.

    공산당은 또 11월 26일, 네이멍구(内矇古)에 인민 자위군 사령부를 설립하였다. 네이멍구에는 1947년 4월에 이미 공산당 자치정부가 설립되어 있었다. 네이멍구는 본래 푸쭤이가 주둔하던 구이쑤이(현재 네이멍구의 성도인 후허하오터를 가리킨다.)와 바오터우(네이멍구 제2의 도시로 광업 등의 근거지이다.) 등 국민정부의 근거지였다. 공산당은 국민당의 세가 약한 네이멍구 동쪽에 근거지를 확보하다가 자치정부를 설립한 것이다. 자치정부 수반은 마란푸(馬蘭夫)로 몽골족이었다. 그는 일찌감치 혁명운동에 투신하여 윈저(云澤)라는 중국식 이름도 가지고 있었다. 공산당이 자치정부를 수립하고 자위군을 조직한 것은 중국을 체계적으로 통치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공산당원들의 자생적인 활동 능력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중앙 지도부나 군사위원회가 방침이나 지침만 하달하면 나머지는 현지 당원이나 지휘관들의 몫이었다. 공산당이 각지에서 조직을 갖추고 근거지를 확대해 가는 데에는 이런 자생적 활동능력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오랜 기간 국민당과 일본군의 탄압 아래 자생해 온 끈질긴 생명력이 치열한 내전 속에서도 뿌리를 내렸던 것이다.

    12월 1일, 타이완 민주자치동맹이 설립되었다. 타이완 민주자치동맹은 국민정부의 영향이 미치지 않는 홍콩에서 주비위원회를 결성하고 11월 12일 ‘타이완 민주자치동맹 강령초안’과 ‘타이완 민주자치동맹 규정 초안’을 통과시켰다. 자치동맹 주석에는 셰쉐홍(謝雪红)을 선출하였다. 이 조직은 타이완의 2.28 항쟁(1947년 2월 28일부터 타이완 원주민들이 국민정부의 탄압과 현지인 차별에 분노하여 일으킨 항쟁)이 실패한 뒤 기의에 참가한 혁명가와 동조자들이 창건한 단체였다. 이 조직은 ‘신타이완 총서(新臺灣 總書)’ 등을 발행하며 “타이완 인민들이 단결하여 제국주의 침략을 반대하고 국민당의 반동 통치를 반대하자.”고 호소하였다. 타이완 민주자치동맹은 나중에 주석인 셰쉐홍이 중국 인민정치협상회의에 참가하여 신정부 수립에 참여하였다. 타이완 민주동맹은 화북과 화동지역에도 지역조직을 설립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설립과 운영에 중국 정부의 방조와 묵인이 있었음을 판단할 수 있다. 중국은 아직도 공식적으로는 타이완 민주 자치동맹과의 관계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타이완은 장제스가 일찌감치 마지막 퇴로로 설정하여 심복인 천청을 파견하는 등 피난 준비를 다져 왔다. 타이완 민주동맹 등의 활동은 상징적인 의미로 보는 게 옳을 것 같다.

    그해 연말인 1947년 12월 25일부터 28일까지 중국 공산당은 섬북에서 이른바 ‘12월 회의’를 소집하였다. 섬북의 미즈(米脂)현 양자거우(楊家溝) 마을에서 개최된 이 회의에 마오쩌둥, 저우언라이, 런비스, 루딩이 등 피난중인 중앙 지도부를 비롯하여 섬감녕, 진수 변구 등의 당과 군사 책임자들인 허룽, 펑더화이, 린보취 등 19명이 참석하였다. 이 회의에서 마오쩌둥은 ‘현재의 형세와 우리의 임무’라는 보고를 통해 전쟁과 당의 사업에 대한 과제를 제기하였다.

    양자거우의 공산당 구거

    그 주요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1) 국내외 형세를 깊이 있게 분석하고 인민혁명 전쟁이 이미 중요한 역사적 전환점에 이르렀음을 지적하였다. 장제스 20년 통치가 소멸될 전환점이 되었으며 100년 넘은 제국주의의 중국 통치도 소멸될 전환점에 다다랐다. (2) 인민군대의 장기작전 경험을 바탕으로 분산 고립된 적을 먼저 공격하고 집중되거나 강력한 적을 나중에 공격하는 등 10대 군사원칙을 제기하였다. (3) 중국 공산당의 신민주주의 혁명에서 3대 경제강령을 언명하였다. 즉 “봉건계급의 토지를 몰수하여 농민의 소유로 한다. 장제스, 쑹즈원, 쿵상시, 천리푸 등을 수뇌부로 한 자본을 몰수하여 신민주주의 국가에 귀속되도록 한다. 다만 민족자본이 운영하는 공업과 상업을 보호한다. (4) 현단계 중국 공산당의 기본 정치강령은 다음과 같다. ”공업과 농업, 병사와 학생, 상업 등 피압박 계급, 각 인민단체, 각 민주당파, 각 소수민족, 각지 화교와 기타 애국분자로 민족 통일전선을 결성한다. 그래서 장제스 독재정부를 타도하고 민주 연합정부를 구성한다.“

    보고에서 마오쩌둥은 또 당시 진행되던 토지개혁과 정당운동의 방침과 원칙을 새롭게 제기하였다. 마오쩌둥은 토지개혁과 정당운동에서 나타난 좌경적 오류를 지적하고 회의에서 시정할 방안을 함께 토론하였다. 그 결과를 토대로 마오쩌둥은 ‘현재 당의 정책 중 몇 개의 중요문제’를 썼는데 그대로 정책과 방침이 되었다. 이 시기의 마오쩌둥은 개인의 독단적 지시보다 회의나 보고에서 제기된 문제를 토론하고 현실을 검토하여 당의 노선과 방침을 정하였다는 것을 볼 수 있다.

    회의는 다음과 같이 중요한 여러 문제를 결정하였다. 1) 중국 인민 혁명전쟁은 완전히 승리할 때까지 지속적으로 투쟁해야 한다. 적이 원병을 낼 시간이나 휴식할 시간을 주어서는 안 된다. 적들이 다시 인민을 공격하도록 해서는 안 된다. 2) 혁명적 중앙정부를 조직하기에 아직 시기가 무르익지 않았다. 해방군이 더 큰 승리를 하기까지 기다려야 한다. 헌법을 선포하는 일은 훨씬 뒤의 일이다. 공산당은 12월 회의가 “중국 혁명의 전환기에 중요한 문제들을 처리하였다. 전국 혁명의 승리에서 정치, 사상, 정책의 준비가 마련되었다.”고 자평하였다.

    마오쩌둥은 이 회의에서 ‘10대 군사원칙’을 발표하였다. 이 원칙은 ‘현재의 형세와 우리의 임무’에 포함되어 있었는데 “인민군대의 국내외 적에 대한 장기간의 투쟁 경험을 담고 있다.”고 평가하였다.

    그 중요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분산되고 고립된 적을 먼저 공격하고 그 뒤에 강력하고 집중된 적을 공격한다. 작은 도시와 중간 도시, 광대한 농촌을 먼저 공격하고 그 뒤에 대도시를 공략한다. 전쟁에서 적의 병력을 소모함을 주요 목표로 하고 도시나 지역을 빼앗는 것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 매 전투마다 병력을 집중하여 절대 우세한 힘으로 적을 모두 섬멸시켜야 한다. 소모전을 극력 피해야 한다. 준비 없이 공격해서는 안되며 전투를 장악, 주도해야 한다. 용감하게 전투하며 희생을 두려워 하지 말아야 한다. 피로나 연속작전을 두려워 해서는 안 된다. 이동 중인 적을 섬멸해야 하며 동시에 견고한 진지를 공격해야 한다. 그래야 적의 거점이나 도시를 빼앗을 수 있다. 성을 공격할 때에는 적의 수비상황 등을 고려하여 각각 다른 방법을 선택해야 한다. 공성이나 도시 공격은 기회가 오기를 기다리고 조건이 성숙하기를 기다려야 한다. 적의 포로와 적의 무기로 아군을 보충하라. 전투 간의 간격을 이용하여 휴식과 부대 정돈을 해야 한다.” 공산당은 ‘10대 군사원칙’이 내전에서 공산당이 승리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고 평가하고 있다.

    양자거우에서 생일을 맞은 마오쩌둥

    양자거우는 산시성(陝西省) 류린시 미즈현 동남쪽 20킬로 지점에 자리하고 있다. 1947년 11월 22일,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 런비스 등 중공 수뇌부와 중앙기관, 인민해방군 총사령부가 이곳에 도착하였다. 마오쩌둥을 비롯한 지도부와 중앙기관 등은 1948년 3월 21일까지 이곳에 머물러 내전을 지휘하고 당의 방침을 수립하였다. 마오쩌둥이 섬북을 전전한 마지막 마을이 된 셈이다. 마오쩌둥은 그 뒤 황허를 건너 허베이성 핑산(平山)현 시바이포(西柏坡)로 옮겨 전쟁을 지휘하였다. 그때는 이미 공산당이 승세를 타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1947년 12월 26일, 이른바 ‘12월 회의’ 이튿날이 마오쩌둥의 54번째 생일이었다. 각 해방구에서는 축하 전보가 잇따라 들어오고 어떤 사람은 마오에게 직접 생일을 축하하였다. 하지만 어느 곳에서는 전투배치 계획을 보고하고 어느 곳은 전투에 대한 보고를 하기도 하였다. 마오쩌둥은 보고를 받고 생일 축하 전보를 모두 거절하였다. “내 생일 축하는 받지 않겠다. 나 개인을 위한 것을 어찌 수락할 수 있는가? 나를 위해서라면 잘 싸우면 된다. 내 생일을 축하하지 않으면 잘 싸울 수 없다는 건가?”

    그래도 마오쩌둥 주변에 있는 중앙기관 요원들은 마오의 생일을 축하하고자 하였다. 1947년 전쟁의 위대한 승리를 축하하기 위해서도 생일 잔치를 해야 한다고 하였다. 중앙기관 책임자들은 경호대장인 왕둥싱(王東興)의 사무실에 모여 의논하였다. 왕둥싱은 “주석이 지역의 축하도 거절했는데 우리가 잔치하자고 한들 수락하시겠는가? 다른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하고 말하였다. 그래서 의논 끝에 특별한 의식 없이 저녁에 만찬을 하기로 하였다. 왕둥싱이 저우언라이를 찾아 보고하니 저우는 “주석이 아마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모두 하자고 하니 네가 주석에게 가서 상의해 보라.”고 권하였다.

    왕둥싱이 마오쩌둥에게 허락을 받으러 간 사이에 다른 사람들은 몰래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허락을 하면 사람들이 마오를 모시고 와 음식을 먹으며 잔치를 할 것이었다. 진수군구 사령인 허룽이 극단을 보냈으므로 공연도 할 참이었다. 그러나 마오쩌둥은 일언지하에 거절하였다. “많은 동지들이 혁명을 위해 피를 흘리고 있다. 그 사람들을 기념해야지 개인의 생일잔치를 한다는 말이냐? 부대와 조직의 동지들이 먹을 양식도 부족한데 잔치를 하자는 거냐? 이러면 나를 군중으로부터 이탈시키는 것이다. 내 나이 오십이 조금 넘었다. 후쫑난에게 잡혀 죽지 않으면 살아갈 날은 많다. 생일잔치가 급할 게 뭐냐?” 마오쩌둥의 태도가 완강하여 모두들 생일잔치를 할 생각은 포기하였다.

    왕둥싱(왼쪽)과 마오쩌둥 왕은 2015년까지 100세를 누렸다.

    생일날, 마오쩌둥은 평소보다 더 바빴다. 그는 자신이 보고한 ‘현재의 형세와 우리의 임무’에 대한 참석자들의 토론을 청취했다. 각지에서 온 사람들과 대화를 하는가 하며 지방의 사정과 인민들의 정서를 물었다. 한번 이야기하면 한참이 걸려 경호병들이 밥을 먹으러 가자고 재촉하기도 어려웠다. 그날 식사도 평소와 다름이 없었는데 검은 콩과 좁쌀을 섞어 삶은 것과 배추김치(酸白菜) 등이었다. 날이 저물자 허룽이 보낸 극단이 양자거우에 와 공연을 하였다. 그곳 농민들이 즐거워 하자 마오쩌둥은 공연장을 마을 가운데 세우라고 지시했다. 또 무대 앞에 자신과 중앙기관 요인들 자리를 따로 만들지 말라고 지시했다. 공연이 시작하기 전 마오쩌둥은 측근들과 공연장으로 가 무대 아래 가득찬 관중들을 보았다. 마오쩌둥은 기꺼워하더니 사람들 뒤쪽으로 조용히 가서 극을 보았다. 경호원들이 마오쩌둥을 위해 등받이 없는 걸상을 하나 가져다 주었다. 공연이 끝나자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는 함께 연극단원들을 만나 접견하였다. 저우언라이가 마오쩌둥을 보고 이야기했다. “당신 생일을 이렇게 쇠는군요.” 마오는 “정말 재미있지 않소?” 하고 대답했다.

    – 런민(人民)일보 1994년 1월 16일자 제5판에 실린 기사이다. 지도자의 후일담은 흔히 미화되기 마련이다. 그래도 여러 기록이나 실제 살았던 집들을 보면 신중국을 설립하기 전 마오쩌둥의 생활이나 언행은 참으로 소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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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소개
    철도 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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