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원과 동북에서
    해방군, 전쟁의 주도권 강화하다
    [국공내전 ㉚] 린비아오, 쓰핑에서 권토중래
        2020년 04월 08일 10:42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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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공내전 ㉙] 해방군, 스자좡을 점령하다

    해방군 따볘산 포위공격을 분쇄하다

    화북에서 네룽전의 부대가 장자커우를 함락한데 이어 중원과 동북에서도 해방군의 공세가 이어졌다. 1947년 7월부터 10월가지 인민해방군 류보청 덩샤오핑의 진기로예 야전군과 천겅 세푸즈의 집단군, 그리고 천이와 쑤위의 화동 야전군이 각각 중원으로 진출하자 장제스는 대책마련에 부심했다. 류덩 대군은 따볘산에, 천셰 집단군은 허난성 서부로, 천이와 쑤위 대군은 예환소(허난, 안후이, 장쑤성 경계) 변구로 각각 진출하여 중원에 품자(品字)형 진세를 펼쳤던 것이다. 이들은 각 근거지에서 국군과 크고 작은 전투를 벌이며 새로운 근거지를 세우거나 확대하는데 골몰했다.

    장제스는 무엇보다 인민해방군이 중원에 자리잡는 것을 두려워했다. 특히 따볘산은 난징에서 가장 가까웠는데 대군이 다시 황허를 건너 따볘산을 증원하거나 쓰촨지역으로 진출하는 것을 걱정했다. 장제스는 ‘국방부 주장(九江) 지휘소’를 새로 설립하여 국방부장인 바이충시를 주임으로 임명했다. 장은 바이충시에게 33개 여단으로 따볘산에 대한 포위공격을 실시하라고 명령하였다. 그리고 22개 여단은 룽하이 철도(란저우-롄윈강)의 쉬저우에서 뤄양까지, 핑한철도(베이핑-한커우)의 정저우에서 레이허(漯河) 구간을 경비하게 하였다. 그리고 11개 여단은 황허와 화이허 사이에서 기동작전을 펼치라고 명령했다. 장제스는 바이충시에게 먼저 진기로예 야전군을 따볘산에서 쫓아내라고 일렀다. 그 다음 예환소 해방구와 허난성 서부지역을 도모하라고 명령했다.

    중공 지도부는 대책 마련을 서둘렀다. 류보청 덩샤오핑의 중원 해방구를 굳히기 위해 중앙군사위원회는 진기로예 야전군에 따볘산 지역을 견결히 사수하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천이와 쑤위의 화동 야전군과 천셰 집단군 에게는 핑한철도와 룽하이 철도를 습격하여 대규모로 파괴하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정저우, 카이펑, 신양(信陽) 등을 위협하라고 지시했다. 따볘산을 포위하고 있는 국민 정부군을 되돌려 구원 출동하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위위구조(圍魏救趙: 위나라를 포위하여 조나라를 구원하는 것)는 공산당 군대 득의의 전술이었다.

    류보청, 덩샤오핑은 휘하 진기로예 야전군을 둘로 나누었다. 사령원 류보청과 부정치위원 장지춘(張際春)은 따볘산을 벗어나 외선에서 작전을 벌이기로 하였다. 정치위원인 덩샤오핑과 부사령원 리센녠, 참모장 리다(李達)는 따볘산 해방구를 사수하며 침공해 오는 국군을 안팎에서 협공하기로 하였다. 따볘산을 고수한 해방군 부대들은 익숙한 유인과 반격, 고립과 포위 등 여러 전술을 펼치며 지리에 어두운 국군 부대들을 괴롭혔다. 해방군 부대는 여단과 연대 단위로 분산하여 따볘산 동쪽 방향으로 국군 부대들을 유인했다. 국군 부대들은 결전을 펼치려 했으나 분산하여 기습하고 후퇴하는 해방군 부대에 시달렸다. 긴장된 수색과 강행군, 그리고 소모전 속에서 국군 부대들은 피로에 지쳐갔다. 다른 국군 부대들은 류보청이 이끄는 주력부대가 따볘산을 벗어난 것을 발견하고 추격에 나섰다. 류보청의 외선 부대들은 18일 동안 후베이성 동쪽까지 천리를 행군하며 국군을 유인 분산시켰다. 따볘산의 포위 압력을 줄이려는 행동이었다.

    또한 류덩의 화동 야전군은 일부 부대로 핑한철도 정저우에서 쉬창 구간, 룽하이 철도의 정저우에서 카이펑 구간에 수시로 출몰하며 철도를 파괴했다. 그 과정에서 출동하는 국군 사단과 전투를 벌였다. 천겅, 셰푸즈 집단군은 이때 류보청 덩샤오핑의 진기로예 야전군에 속해 있었는데 계속 독자적인 작전을 펼쳐 왔다. 천셰 집단군은 핑한 철도의 레이허에서 주마덴(駐馬店) 구간을 철저히 파괴했으며 시핑등을 점령하며 국군 부대의 이동을 막았다.

    붉은 표시 부분이 따베산

    작전은 인민해방군의 선제공격으로 시작되었다. 12월 13일부터 화동야전군 천셰 집단군은 크고 작은 전투를 벌이며 15일 국군 보급기지인 쉬창(許昌)을 점령했다. 이 과정에서 국군 3,700명을 섬멸하고 화포 70문, 자동차 100량과 많은 군수물자를 노획했다. 쉬창은 삼국지의 주역 조조가 세운 위나라의 수도이던 유서 깊은 도시이다. 천이와 쑤위의 화동 야전군도 철도 파괴전투를 벌이며 국군 5,000명을 섬멸했다. 국군 제5군과 75사단 등이 구원을 왔으나 모두 화동야전군 요격부대에 막혀 전진하지 못하였다. 핑한철도 수비를 위해 국군 3사단과 20사단, 47군이 정저우에서 출동했으나 25일 새벽 진강쓰(金剛寺)등에서 천이와 쑤위 부대와 천셰부대의 합동 기습 공격을 받았다. 국군은 9,000명이 섬멸당하는 피해를 입고 췌산(确山)현으로 도주했다. 이를 쫓은 화동 야전군과 진기로예 야전군이 췌산현에서 합류하여 품자를 이뤘던 세 집단군의 합류가 이루어졌다. 국군은 부득이 따볘산 포위부대 13개 여단을 되돌려 핑한철도 확보에 나섰다. 따볘산의 포위토벌 압력이 풀리자 해방군은 12월 31일 철도파괴 전투에서 철수하여 휴식과 정돈에 들어갔다. 덩샤오핑, 리센녠이 지휘하는 따볘산 사수 부대들은 일부 부대와 지역 유격부대들이 현지 진지를 사수하게 하고 북쪽으로 이동, 따볘산을 벗어났다. 덩샤오핑, 례센녠은 화이허 북쪽인 안후이성 린촨(臨泉)현으로 이동하여 류보청의 부대와 합류하였다.

    3로 해방군은 이 작전에서 국군 1개 병단 본부, 1개 사단 본부, 2개 여단 및 기타 부대를 격파하여 모두 6만 9천명을 섬멸하였다. 철도 400킬로미터를 파괴하였으며 현성 50개를 점령하였다. 국군의 따볘산 포위토벌을 좌절시키고 악예환, 예환소, 악예섬(1) 해방구가 하나로 이어지게 되었다. 이때부터 비로소 화동 야전군과 진기로예 야전군이 전략적으로 혹은 단위 전투에서 합동작전이 가능하게 되었으니 해방군이 작전의 주도권을 더욱 강화하게 되었다.

    국민 정부군은 중원 지역에서 카이펑이 고립되었으며 정저우가 해방군의 사정거리에 놓이게 되었다. 다음 작전에서 해방군이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 것이다.

    1947년 악예섬 근거지에서의 리센녠

    덩샤오핑과 리센녠의 따베산 지역 군중사업

    덩샤오핑과 리센녠의 따베산 활동에 대하여 후베이 공산당 위원회는 이런 기록을 남기고 있다. 리센녠은 늘 이렇게 강조했다. “우리는 세 가지 애민운동을 벌이자. 첫째, 군중들에게 편지를 써서 주자. 그리하여 늘 선전하고 믿음을 주자. 둘째, 한줌 쌀도 절약해야 한다. 따베산이 전쟁에 휩싸인 지 일년이 지났다. 인민들은 죽지 못해 살고 있다. 우리 인민의 군대는 배불리 먹을 수 없다. 인민에게 곡식을 얻었으니 늘 절약해야 한다. 한줌 쌀을 아끼는 것이 전투에서 공을 세우는 것과 같다.” 하루는 리센녠이 황강(黃岡: 후베이성 동부의 도시, 현재는 시이다.)현의 거리에서 군인 하나가 칼에 꽃무늬 천과 당면을 걸고 으스대며 걷는 것을 보았다. 리센녠은 의아해 하다 주위에 명령했다. “저 자를 당장 조사하라.” 확인해 보니 그자는 경호연대 4중대 부중대장이었다. 용감하게 싸워 공을 세운 사람이었다. 리센녠은 즉시 류보청, 덩샤오핑, 리다등 지휘부와 상의하여 그를 즉결처분 총살하였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군기가 더욱 엄정해졌으며 사람들이 “과거의 홍군이 돌아온 것 같다.”고 칭찬했다고 한다.

    하루는 어느 병사들이 과수원의 과일을 따먹은 일이 있었다. 그러면서 “우리는 싸우며 물도 제대로 못 마셨다. 과일 몇 개 따먹은들 그게 무슨 대수냐?”하고 말하였다. 농부들은 화가 났지만 감히 말을 하지 못하였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덩샤오핑이 당장 대대장 이상 지휘관들을 모아놓고 “당신들은 중앙 홍군과 팔로군의 후예들이다. 영광된 혁명전통을 잊었는가? 누가 마오 주석과 주 총사령에게 흙탕물을 끼얹는가? 이게 3대 기율, 8항주의를 실천하는 길인가?”하고 일갈했다. 지휘관들은 “물건은 즉시 배상하고 다시는 그와 같은 잘못을 범하지 않겠다.”고 결의하였다.

    덩샤오핑, 리센녠과 류보청 등 고위 지휘관들은 모두 면으로 된 군복을 입었으며 스스로 바느질을 해서 깁기도 하였다. 먹는 것도 잡곡에 채소 일색이었다. 1947년 12월 31일 덩샤오핑과 리센녠이 진자이(金寨)현에 시찰을 나갔을 때 일이다. 그 지역 당서기가 돼지고기 몇 근과 해바라기씨를 바쳤다. 그러나 그 서기는 덩샤오핑으로부터 엄숙한 비판을 들어야 했다. “우리는 특수계층이 아니다. 누가 이렇게 하라고 했소? 우리는 이런 걸 먹을 권리가 없다.” 이어서 열린 지방 간부회의에 모직 코트를 입은 간부가 눈에 띄었다. 그는 국민당 부대 장교들이 쓰는 모자도 쓰고 있었다. 리센녠은 “고생하며 사업하던 기풍은 어디로 갔소? 당신이 이런 옷을 입고 마을에 가서 사업을 하면 헐벗은 백성들이 당신 말을 듣겠소? 당신에게 적정을 알려 주겠소?” 하고 물었다. 그 간부는 유구무언으로 고개를 떨구었다. 이처럼 리센녠은 백색지구의 군중사업을 중요시하였다. 백색지구란 오랫동안 국민당 치하에 있던 지역을 말한다. 그는 늘 “백색지구에서는 더욱 성심성의를 가지고 사업해야 한다.”고 강조하곤 하였다.

    공산당의 기록이므로 덮어놓고 믿을 수는 없겠지만 당시의 공산당 간부들과 지휘관들의 기풍을 짐작할 수 있다. 지금 중공 지도부도 부패척결을 강조하지만 저런 식으로 “인민과 똑같은 옷, 똑같은 음식을 먹자.”고 할 수 있겠는가?

    동북 민주연군 동계공세로 사실상 만주를 석권하다

    천청이 동북에 부임한 뒤 린비아오가 지휘하는 동북 민주연군은 끊임없는 공세로 국군을 밀어붙였다. 하계 공세에 이어 추계 공세를 펼치며 곳곳에서 국군을 공격했다. 이제 국군이 관할하는 지역은 진저우, 선양, 쓰핑, 창춘등 28개 도시에 불과했다. 국군의 총병력은 58만명에 이르렀으나 기동할 수 있는 병력이 부족하고 사기가 떨어져 있었다. 다시 숨쉴 틈도 없이 동계 공세가 시작되었다. 동북 민주연군은 1947년 12월 15일부터 선양 바로 위 도시인 파쿠를 포위 공격하며 지원오는 국군을 차례로 무찔렀다. 국군은 파쿠의 포위를 풀고자 원군을 보냈으나 공주툰(公主屯)에서 신3군, 26사단이 신리툰(新立屯)에서 차례로 섬멸 당했다. 장제스는 선양에서 고위 군사회의를 열고 패배 원인을 검토했다. 장제스는 지휘가 졸렬하고 지휘관들의 사기가 땅에 떨어졌다고 판단, 천청을 해임하고 웨이리황을 동북 초비사령관으로 임명했다.

    장제스와 웨이리황. 천청의 후임으로 동북 초비사령관으로 부임하였다.

    웨이리황이 동북에 부임했지만 동북 민주연군의 공세가 계속되었다. 동북 민주연군은 1947년 2월 6일 선양 남쪽 랴오양(遙陽)을 함락하였다. 이어서 20일에는 안산을 함락했다. 두 곳에서 국군 2개 사단이 모두 섬멸되었다. 승세를 탄 민주연군은 선양 북쪽의 요충지 장우(彰武)를 함락한데 이어 국군 해로 수송의 요충지 잉커우를 압박했다. 민주연군 대군이 잉커우를 공격하자 수비군 주력인 국군 58사단이 귀순했다. 58사단장 왕자산(王家善)은 잉커우가 완전히 포위되자 앞날이 불리하다고 판단하고 휘하 8,000여 장병과 함께 귀순했다. 왕의 귀순에는 여러 차례에 걸친 동북 민주연군의 공작이 있었다. 세 불리하니 저항하지 말고 대세를 따르라고 설득했던 것이다. 왕이 본래 애국심이 있어 47년 12월부터 기의할 마음을 먹었다고 하였으나 귀순자들이 늘 쓰는 말이라고 판단된다. 어쨌든 왕의 부대가 총부리를 거꾸로 돌리자 잉커우는 바로 민주연군의 수중에 떨어졌다. 잉커우 성내에 있던 국군 52군 부군단장, 잉커우 시장, 교통부대장 등 요인들이 체포되었으며 저항하는 국군 3,000여명이 섬멸되었다.

    민주연군은 공세를 늦추지 않고 파쿠의 수비군을 카이위안(開原)에서 섬멸한 다음 쓰핑을 공격하였다. 쓰핑은 불과 1년 전 린비아오가 국군의 맹장 두위밍에게 크게 패하여 내준 통한의 요충지였다. 마오쩌둥이 “중국의 마드리드로 만들라.”며 사수를 명령했지만 린비아오는 세 불리하다고 판단하였다. 린비아오는 고수하여 소모전을 하는 것보다 후퇴하여 병력을 유지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였다. 그 길로 헤이룽장 너머 하얼빈까지 후퇴하여 린비아오는 “후퇴장군”이라는 명예롭지 못한 별명을 얻었다.

    하계 공세에서 민주연군은 쓰핑을 맹공했지만 국군 맹장 천밍런이 죽기를 각오하고 고수하여 끝내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이제 쓰핑이 바람앞의 촛불처럼 함락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웨이리황은 쓰핑에 구원군을 보낼 것을 검토하였으나 휘하 지휘관들이 모두 반대하였다. 동북 인민해방군(2)이 도처에 매복하여 구원군 공격을 꾀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웨이리황도 해방군의 전술을 훤히 알고 있으므로 구원군을 보내지 않았다. 다만 부임 초기이고 쓰핑 고수를 바라는 장제스와 지휘부에 명분이 필요했으므로 지휘관들의 의사를 확인했을 뿐이었다. 웨이리황은 부사령관인 정동궈를 난징에 보내어 그와 같은 방침을 장제스에게 보고하였다.

    쓰핑에는 국군 1개 사단, 1개 보안연대가 수비하고 있을 뿐이었다. 턱없이 적은 병력에 구원군은 소식도 없고, 사기가 땅에 떨어진 쓰핑은 맥없이 함락되었다. 1948년 3월 6일의 일이었다. 쓰핑이 함락되자 이웃한 지린(吉林)의 수비군이 스스로 성을 버리고 창춘으로 후퇴하여 몇몇 도시를 제외한 남만주 전체가 해방군의 손에 들어갔다. 해방군이 점령한 곳이 면적으로는 동북의 97퍼센트, 인구로도 86퍼센트에 이르렀으니 사실상 만주를 석권한 셈이었다. 해방군의 병력도 일년 사이에 105만명으로 성장하였다. 그야말로 상전벽해의 대변화가 일어난 셈이었다. 이로써 선양과 창춘, 진저우등 국민당의 거점 도시들은 보급기지인 잉커우를 잃고 사방이 포위되어 고립무원의 처지가 되었다.

    쓰핑 점령후 시내에 입성하는 해방군

    동계 공세는 3개월 동안 지속되었다. 동북 인민해방군은 국민당군 156,470명을 섬멸했는데 그중 포로가 105,000명이었다. 사살 43,150명, 기의라 칭하는 귀순이 8,320명이었다. 전략적 요지인 쓰핑과 지린, 잉커우등 18개 도시를 함락했으며 베이닝 철도(베이핑-선양)와 중창철도(하얼빈-만저우리, 쑤이분허-다롄)을 차단하였다. 국군은 창춘, 선양, 진저우등으로 몰려 고립되었다. 중공 지도부는 동계 공세의 결과를 높이 평가하였다. 마오쩌둥은 ‘서북대첩을 평가하고 신식 정군운동을 논한다.’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동북 야전군이 동계 공세 중에 영하 30도의 혹한 속에서 적 대부대를 섬멸하고 성을 점령하여 그 위세를 전국에 떨쳤다.”

    왕자산 귀순의 전말

    왕자산이 귀순하게 된 것은 세 불리하다고 느껴서이겠지만 꼭 그런 이유만은 아닌 것 같다. 왕자산은 본래 장쉐량 휘하의 동부군 출신이었다. 그는 한때 일본군에 투항하려는 상급 지휘관의 명령에 불복하기도 했지만 일제가 만주국을 세운 뒤 만주군 장교로 복무하였다. 소장으로 진급한 그는 1945년 8월 14일, 일본군 장교를 죽인 뒤 소련군을 영접하였다. 그러나 소련군이 만주군을 통제하는데 염증을 느끼고 국민정부군 고위층과 접촉하여 국민정부군 휘하에 편입되었다. 국민 정부군 통수부는 왕의 능력을 샀는지 그를 만주 파견 선봉군 총사령으로 임명하여 자무스(3)로 보냈다. 그때는 국군 주력이 아직 동북에 배치되지 않았을 때였다. 국군 주력이 동북에 오자 그는 동북 초비사령관 두위밍의 휘하에 있게 되었다. 그때부터 그는 직계 출신과 만주군 등 잡패군 사이에 있는 차별을 겪게 되었다. 장제스 직계군은 모두 미제 장비에 보급도 좋았지만 왕자산 등 잡패군 출신들은 일본군이 버리고 간 무기와 장비를 주었던 것이다.

    1946년 10월 왕자산은 자신의 부대를 이끌고 주둔지인 펑청(風城), 좡허(庄河)로 갔다. 거기서 신 6군 군단장 쉬잉(許穎)의 지휘를 받았는데 쉬는 소장이고 자신은 중장이었다. 젊고 계급이 낮은 사람의 지배를 받았으니 사람이라면 누구나 열패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국민당군 직계 정규군과 잡패군의 차별이 그와 같았던 것이다.

    1947년 6월초, 동북 민주연군이 안동에서 국군 신6군을 공격하자 잉커우는 고립된 거점이 되었다. 두위밍은 왕자산을 잉커우 수비군 사령으로 보냈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죽을 곳으로 보낸 셈이었다. 하지만 능력이 뛰어난 왕자산은 잉커우를 수비하며 동북 민주연군의 네 차례 공격을 막아내어 두위밍을 비롯한 동북 국군 지휘부의 인정을 받게 되었다. 그제서야 왕의 부대를 58사단으로 개편하여 정규군에 편성해 주었다. 두위밍은 왕을 잉커우 수비사령 겸 잉커우 시장으로 임명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여전히 여전히 차별대우가 심하였다. 무기나 장비도 전혀 개선되지 않았다. 왕은 민주연군의 공격을 막아낸 뒤 진지를 시찰하며 “중국인이 중국인을 공격한다. 저렇게 사상자가 많으니 이게 동족상잔이 아니고 무엇이냐?”고 한탄했다고 한다. 그는 다음날 아침을 먹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내전을 싫어하는 사상이 생겼다고 토로하였다. 국민당이 동북에서 하는 행동을 보고 그는 이렇게 한탄하였다. “중앙이 생각해 주기를, 중앙이 오기를 그토록 바랐더니 막상 중앙이 더 큰 재앙이로구나. 이런 노래를 백성들이 괜히 부르는 게 아니다.” 그의 부대가 가진 무기는 52군에 넘겨주고 또다시 수리한 낡은 무기를 받게 되자 그는 더욱 화가 나고 머리가 복잡해졌다. 국민당과 군대의 부패를 목격하며 “우리는 조만간 장제스와 국민당군과 동귀어진(함께 끝장나게 됨) 할 것이다.”하고 한숨 쉬었다.

    그때부터 왕자산은 측근 부하들과 공산당 관련 서적을 읽게 되었다. 그중 마오쩌둥이 저술한 ‘지구전을 논한다.’ ‘현재의 형세와 임무’ ‘연합정부를 논한다.’등을 읽고 감명을 받았다. 공산당에 대한 희망이 생긴 것이다.

    1948년 춘절 직전 형세는 날로 국민당에게 불리해져 갔다. 왕자산은 “이제 국민당은 안 된다. 몇 개 고립된 거점만 남아 있을 뿐이다. 잉커우는 가장 작은 거점이니 먼저 당할 것이다. 출로를 찾아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때 동북 민주연군 총사령부에 있는 스위린(石玉林)이 왕자산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는 예전 항일유격대 시절 전우였다. 스위린은 왕에게 기의를 권했는데 이로써 처음으로 동북 민주연군과 연결이 생기게 되었다.

    기의는 마음을 먹는다고 해서 되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장병들에게 선언할 수도 없으며 누구에게 함부로 말해도 안되었다. 왕은 스위린에게 “동북이 떨어지기 전 국면이 더 긴장되어야 한다. 압력이 더 강해져야 기의를 할 수 있다. 지금부터 준비를 잘 하겠다.”고 전하였다.

    왕자산은 또 사단 참모, 각 연대장 및 장교들과 전쟁문제를 토론하였다. “국민당 군대는 왜 계속 패하기만 하고 공산당 군대는 왜 싸우면 승리하는가?”를 토론하였다. 그와 장교들은 “공산당 병사들은 모두 가난한 사람들인데 해방을 원하고 신중국을 원한다. 인민들이 옹호한다.”(4)는 점을 인정하게 되었다. 그리고 국민당은 지주계급의 이익을 옹호하고 인민을 통치하려고만 해서 모두 반대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왕자산은 “광복 후에 우리는 조국의 부강을 위해서 국민당에 투신하였다. 그런데 국민당 치하가 암흑천지이고 백성들은 도탄에 빠져 있다. 우리가 잘못된 길을 가고 있는 게 아닌가?” 1연대장은 그의 친구였다. 하지만 다른 2개 연대는 기의에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왕은 “인심은 변한다. 한번 누설되면 일을 그르치게 된다.”고 조심하게 되었다.

    왕자산은 부관을 시켜 연회 자리를 만들었다. 각 연대장, 부관들, 참모장 및 휘하 장교들이 회의실로 모였다. 왕은 “오늘 내 생일이다. 함께 마시며 즐겨보자.” 하고 분위기를 만들었다. 취기가 돈 뒤에 왕은 대취한 목소리로 “우리가 발붙일 곳이 어디요? 그래도 역시 국민당뿐이오? 나는 여러분 생각이 궁금하오.” 그랬더니 휘하 장교들이 왕의 의중을 추측하고 “우리는 사단장님이 가는 곳이면 어디든 따라 갑니다.”하고 대답하였다.

    1948년 춘절뒤 동북 민주연군이 잉커우를 공격했다. 그때 52군 지휘소가 잉커우에 있었는데 52군 사령관 정밍신(鄭明新)이 얼어붙은 랴오허의 강물을 깨뜨려 58사단의 퇴로를 차단했다. 배수진을 치고 싸우라는 것이었다. 왕자산은 이제 기의할 시기가 왔다고 판단했다. 왕은 동북 민주연군 랴오난군구 (遙南: 랴오둥 남쪽을 관할)에 사람을 보내어 기의할 의사를 전했다. 양쪽은 협의 결과 대략 다음과 같이 합의했다.

    “기의 인원은 본래 계획한 대로 한다. 개인의 재산은 개인 소유로 한다. 가족들은 동북 민주연군 가족의 대우로 한다.” 이런 조건을 2월 25일 오후 3시 중대장 이상 간부회의에서 공포하니 모두 기뻐하였다. 장교들이 모두 만주군관학교 동창들이어서 의기투합하기가 쉬웠다.

    그날 오후 왕자산이 정밍신에게 요청했다.

    “우리 방어회의를 열어 대책을 논의합시다.” “좋다.” 왕이 수락했다. 그날 오후 2시에 헌병대, 수상경찰국, 시정부 경비대, 공안국, 염경(소금판매 문제를 전담) 등 8개 무장단체의 대표들과 관련자 36명이 58사단 회의실에 모였다. 회의 중 부관이 양자산에게 군단 참모가 전화를 걸어 사단장님과 통화를 원한다고 전했다. 왕이 회의실을 나서자 곧바로 부관이 경호중대를 이끌고 회의장에 들어와 참가자들을 제압했다. 미리 짜두었던 행동계획이 성공한 것이다. 58사단 장교들은 이미 대부분이 기의하기로 결의한 상태였다. 저녁 7시에 58사단 사령부 청사에서 세 발의 조명탄이 솟아 올랐다. 왕자산은 기의를 정식으로 선포한 뒤 부인과 함께 자동차에 올랐다. 동북 민주연군 랴오난 군구 사령원 우루이린(吳瑞林)이 왕의 부부를 영접했다.

    다음날 정오 58사단 장병들은 모두 잉커우에서 철수하여 바이자이즈(百砦子)에 집결 명령을 기다렸다. 잉커우에는 동북 민주연군이 공격을 시작하여 수비하는 적을 섬멸했다. 왕자산은 “나는 장제스에 대하여 환상을 품었다. 장제스가 반동통치를 하는 것을 보고 더 이상 그를 위해 이름을 팔면 안 되겠다고 생각하였다. 사단 장병들이 광명의 길을 가야 한다고 생각하여 기의했다.”고 말했다. 왕의 부대는 기의한 뒤 인민해방군 4야전군(5)에 편입되었다. 나중에 윈난의 잔적 토벌과 6.25 전쟁에도 참전했다. 왕자산은 헤이룽장성 군구 부사령원을 거처 랴오닝성 정치협상회의 부주석을 지냈다.

    왕자산(앞줄 맨 오른쪽) 이 귀순한 뒤 부하들과 기념촬영을 하였다

    <각주>

    1. 악예환 해방구는 후베이, 허난, 안후이성에 걸쳐 있다. 예환소는 허난,안후이,장쑤성 일대를, 악예섬은 후베이, 허난, 산시성 일대에 걸쳐 있다. 걸쳐있는 성 일부를 점거하고 있었으며 성을 모두 차지한 것은 아니었다.

    2. 2월에 동북 민주연군에서 동북 인민해방군으로 개칭하였다.

    3. 헤이룽장성 동북부에 있는 도시이다. 쑹화장, 헤이룽장,우수리장에 면해 있다.

    4. 모두 왕자산이 귀순한 뒤에 한 이야기이다.

    5. 1948년 11월 1일 동북 야전군이 제4야전군으로 칭호가 개편되었다. 이에 따라 팔로군- 동북 민주연군-동북 인민해방군- 동북야전군- 제4야전군 순으로 칭호가 바뀌었다.

    필자소개
    철도 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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