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폭력·테러·학살·전쟁은 왜?
    [인류의 위기와 원효-맑스의 대화 ③] 눈부처 주체들의 적극적 평화
        2020년 04월 07일 12:09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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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류 위기와 원효-맑스의 대화 ②] 전 지구 차원의 환경 위기와 기후변동

    한 해 50만 명이 폭력에 의해 죽고 있다

    지금 무자비한 폭력이 곳곳에서 자행되고 있다. 종교 · 이데올로기 · 종족 · 젠더 사이의 갈등과 차이, 국가 · 자본 · 집단에 의한 이해관계와 혐오로 인한 폭력과 테러, 학살과 전쟁이 전 세계 곳곳에서 끊이지 않고 있다. 중동에서는 테러와 내전으로 인한 성폭력과 살상이 매일 일어나고, 얼마 전에 미국이 솔레이마니 사령관을 암살하였지만 이는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미국은 중동에서 드론으로 목표로 삼은 자들의 50배에 달하는 민간인을 죽이고 있다. 중남미에서는 마약이나 폭력집단이 적대 세력만이 아니라 무고한 시민까지 죽이고 있다. 세계 곳곳에서 국가는 동맹을 맺은 자본의 편에 서서 시민과 노동자를 감시하고 사찰하고, 집회를 하면 무자비하게 폭력을 동원한다. 인도에서는 수시로 남성들이 여성들을 살해한다. 민주화와 경제발전을 모두 성취하고 시민의식이 높은 한국에서도 n번방과 같은 성폭력은 도처에서 광범위하게 벌어진다.

    2012년 한 해에만 47만 5천 명이 폭력에 의해 살인을 당하였다. 이 해만 특별한 것이 아니기에, 인류는 매년 50만 명에 가까운 사람을 몽둥이나 총칼로 죽인다고 간주해도 될 것이다. 매년 평균적으로, 네 명의 어린이 가운데 1명이 물리적 학대를 받으며, 세 명의 여성 가운데 1명이 파트너로부터 물리적/성적 폭력을 당하며, 17명의 노인 가운데 1명이 폭력을 당한다.(WHO, Global Status Report on Violence Prevention 2014)

    사람만이 아니다. 오늘 하루에만 인류는 단지 먹기 위하여 2억 마리의 육지 동물을 도살하였다. 매년 인류는 720억 마리의 육지 동물을 살해한다. 물고기를 포함하면, 우리는 매일 30억 마리, 매년 1조 950억 마리의 동물을 죽인다.(Sentient Media, <How Many Animals Are Killed for Food Every Day>)

    물리적 폭력보다 더 무섭고 더 사악한 것은 구조적 폭력이다. 나라마다 약간이 차이가 있지만 상위 10%가 국민 전체 소득의 절반 정도를 차지한다. “국제구호기구 옥스팜은 … 세계 부자 8명의 재산 합계가 재산규모 하위 50% 인구의 재산 합계와 같았다고 지적했다.”(경향신문, <슈퍼 갑부 8명의 재산, 세계인구 절반의 재산과 비슷> 미국의 대다수 기업들에서 최하 임금과 최상 임금의 차이는 100배에서 300배에 이른다.

    불가능한 줄 알면서도 코로나 19가 아프리카로 넘어가지 않기를 간절히 소망했지만 이미 전역에 퍼졌다. 위생시설, 의료보건체제가 열악하기도 하지만 먹을 물도 모자라 손을 씻는 것이 사치인 나라와 지역이 대부분인데, 어떻게 방역을 하고 어떻게 감염과 죽음에서 벗어날 것인가. 굶주려 죽어가는 아프리카의 어린이를 볼 때마다 많은 사람들이 고통스러워하며 후원 단체를 찾아 기부를 한다. 하지만, 그건 늘 미봉책에 그친다.

    “해마다 대략 1500억 달러를 10년 동안 투자한다면, 지구상의 모든 가난한 이들이 기초적인 교육과 의료와 위생 시스템을 보장받고 적절한 영양, 식수, 여성의 경우 적절한 산부인과 치료를 받을 수 있다.”(UNDP, Annual Report 2006 ― Global Partnership for Development) 넉넉잡고 2000억 달러를 10년 동안 투자하면 10억 명의 사람들이 영원히 굶주리지 않게 함은 물론 그들에게 기초적인 의료와 교육을 실시하는 체제를 만들 수 있다. 그럼에도 지구촌은 해마다 기아에 허덕이는 8억여 명이 먹고도 남는 양, 4000억 달러(약 439조 원)어치의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며,(폐기물·자원 행동 프로그램, www.wrap.org.uk) 미국 한 나라에서만 너무 먹어서 비만 관련 의료비로만 매년 1,470억 달러를 지출하고 있다.(미국질병통제센타, www.cdc.gov) 한 쪽에서는 쌀 한 톨, 빵 한 조각이 없어서 죽어 가는데 다른 쪽에서는 너무 먹어서 비만으로 죽어가는 것은 얼마나 야만인가?

    이렇게 세계 차원, 국가 차원, 지역 차원에서 구조적 폭력이 상존하는 한, 천사도 늘 폭력의 가해자가 되고 영웅도 늘 폭력의 희생자가 된다. 빌 게이츠나 조지 소로스 등이 수십 조 원을 기부한 것에 박수를 보내지만, 그들 또한 착취한 대가로 1천 조 원이 넘는 재산을 축적한 구조적 폭력의 가해자들이다.

    집단섹스로 폭력을 예방하는 보노보와 동족을 살해하는 침팬지

    도대체 인간은 왜 이렇게 폭력을 행하는가. 폭력에 관한 한 인간이 짐승보다 못하다. 모든 동물이 이기적 유전자의 명령대로 자신의 유전자를 보존하고 확대하기 위한 본능을 따라 행동한다. 동물들은 평화롭게 공존하다가도 생존하고 번식하기 위하여 먹이와 짝을 놓고는 싸움을 벌인다. 인간을 제외한 다른 동물들은 싸우더라도 대개 위협으로 그치거나 짧게 끝낸다. 인간과 가장 비슷한 영장류도 마찬가지다. 고릴라는 약하거나 작은 동족을 결코 괴롭히지 않는다. 다툼이 벌어지면 제3자가 끼어들어 먼저 공격한 쪽에 충고하고 공격 당한 쪽을 감싸주며, 상대와 가만히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며 화해한다.(야마기와 주이치, <폭력은 어디서 왔나 ― 인간성의 기원을 탐구하다>)

    왜 오로지 인간만이 동종에게 잔인한 폭력을 휘두르는가. 이를 푸는 첫 열쇠는 침팬지 속의 두 침팬지, 침팬지와 보노보의 차이다. 침팬지는 가부장 사회를 이루고 있으며 힘에 센 자가 지배한다. 동료에게 폭력을 가하며 다른 집단의 침팬지를 공동 사냥하여 나누어 먹으며, 때로는 동족을 잡아먹기도 한다. 영아 살해도 자주 일어난다. 반면에 과거에는 피그미 침팬지로 불렸던 보노보는 서로 다툴 일이 생기면 대치하고 있는 두 세력 사이로 암컷들이 나타나 엉덩이를 내민다. 그러면 이들은 싸움 대신 집단 섹스를 행한다. 보노보는 수시로 암컷들이 다양한 수컷과 섹스를 하기에 영아 살해가 일어나지 않는다. 영국의 한 동물원에서 찌르레기 한 마리가 보노보의 우리 안으로 날아와서 유리창에 부딪쳐 떨어지자 보노보가 그 새를 조심스럽게 안고 나무 위로 올라가서 다시 날아가도록 도와주었다고 한다.(프란스 드 발, <보노보 – 살아가기 함께 행복하게>) 이처럼 우리에게는 침팬지와 보노보의 양쪽 유전자가 모두 있다고 볼 수 있다.

    더니든 스터디(The Dunedin Study)는 더 구체적으로 폭력의 기원에 대해 분석한다. 이들은 1037명이란 많은 모집단을 모아 49년 동안 계속 관찰하여 1천 2백 편 이상의 논문을 발표하였고 심리학, 범죄학, 보건학, 사회학 등에 걸쳐 엄청난 성과를 거두었다. 이 연구의 일환으로 진행된 한 논문에서는 두뇌의 모노아민산화효소(monoamine oxidase Alpha, MAO-A)의 낮은 발현 변이를 보이는 이들이 시냅스에서 신경 전달 물질을 분해하는 효소인 MAOA를 적게 생산하는 바람에 편도체는 활성화하고 전두엽은 활성화하지 못하여 공격성이 증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J. W. Buckholtz 외, <MAOA and the neurogenetic architecture of human aggression) 즉, 흔히 파충류의 뇌로 불리는 편도체는 폭력과 공포의 기억에 관여하고, 영장류의 뇌로 불리는 전두엽은 이를 조절하고 통제하고 감정을 조절하고 추리하는 작용을 주로 한다. 뇌에는 869억 개의 신경세포가 있다.(Suzana Herculano-Houzel, The Human Brain in Numbers: A Linearly Scaled-up Primate Brain) 여기에 시냅스가 연결되어 100조개의 네트워킹을 통하여 사고하고 행동하는데, 신경전달물질의 강도를 조절하는 것은 효소다. 모노아민산화효소가 적게 발현되면 편도체는 활성화하고 전두엽은 덜 활성화하여 폭력이 증대하는 것이다.

    사진 : 서로 모여 털다듬기를 해주고 있는 암컷 보노보들 https://www.insidescience.org/news/bonobo-matriarchs-lead-way

    구조적 폭력의 해체가 적극적 평화의 길

    불교는 평화에 대한 지혜로 넘쳐난다. 불자(佛子)는 불살생(不殺生), 곧 아힘사(ahimsa)를 최고의 계율로 삼는다. 스님들은 물속의 미생물마저 죽이지 않기 위해 일종의 여과지인 여수낭에 걸러 물을 마셨다. 하나의 생명만이 아니라 모든 생명이 서로 상호관계와 조건과 인과로 얽혀있다고 간주하여 무생물까지도 소중하게 여겼다. 불경은 어떤 경우에도 분노하지 말며 심지어 팔다리를 자르는 그 상황에서조차 자비와 인욕(忍辱)을 유지하라고 가르친다. 이에 아힘사는 불살생(不殺生)을 넘어 비폭력 사상으로 확장한다. 거의 모든 폭력이 소유욕과 탐욕, 나와 우리의 집착에서 비롯되는데, 불교는 무소유의 삶을 추구하고 탐욕을 말끔히 없애라 하며, 무상(無常)과 무아(無我)의 진리로 집착을 깨라고 한다. 또, 이데올로기와 망상, 편견에 휘둘려 폭력을 행사하기 마련인데, 불교는 부처마저 죽이라고 할 정도로 끊임없이 해체하고 극단을 지양하고 중도(中道)에 머물라 한다. 그래서 불자들은 내 안에 남은 폭력성, 분노, 탐욕, 망상이 모든 고(苦)의 뿌리라면서 이를 없애기 위하여 수행을 한다. 사회적으로는 간디처럼 비폭력 평화운동을 고집한다.

    그럼에도 필자는 이런 불자들의 주장에 일견 동의하면서도 공허함을 느끼며 불자들에게 개인적 고(苦)만이 아닌 구조적 폭력이 바로 고(苦)이기에 이를 없애는 실천도 함께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구조적 폭력(structural violence)’이란 인간이 지금 처해 있는 상태와 지금과 다른 상태로 될 수 있는 것, 잠재적인 것과 실제적인 것 사이의 차이를 형성하는 요인이다.(Johan Galtung, <Violence, Peace, and Peace Research>) 중증환자가 병원에서 수술을 하다가 죽는 것은 자연사이이지만, 제때 수술하면 살릴 수 있는데 수술비가 없다는 이유로 치료를 받지 못하여 죽는다면, 이것은 구조적 폭력이다. 구조적 폭력은 인간답게 존엄하게 살려 하고 모든 구속으로부터 자유롭고자 하는 인간에게 ‘피할 수 있는 모독’을 가하는 것이다. 갈퉁이 논파한 대로 구조적 폭력을 없애는 것이 적극적 평화를 이루는 길이다. 그럼에도 기존의 불교 평화론은 이를 경시하여 소극적 평화론에만 머물렀다. 구조적 폭력을 구성하는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 체제를 다른 체제로 전환하거나 기득권의 권력과 정보, 폭력의 독점을 해체하지 않는 한 폭력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여러 발전 단계들을 경과한다. 부르주아지에 대항하는 그들의 투쟁은 그들의 존재와 더불어 시작된다. 처음에는 개별 노동자들이, 그 다음에는 한 공장의 노동자들이, 그 다음에는 한 지역에 있는 한 노동 부문의 노동자들이 그들을 직접 착취하는 개별 부르주아에 대항하여 투쟁한다.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공격을 부르주아적 생산관계들에 가할 뿐만 아니라 생산도구 자체에도 가하며, 그들은 경쟁하는 외국 상품들을 절멸하고, 기계를 때려 부수고, 공장에 불을 지르고, 중세 노동자의 몰락한 지위를 다시 획득하려 애쓴다.”(마르크스 · 엥겔스, <공산주의 선언>)

    무장투쟁 없이 국가와 부르주아지의 폭력을 종식시키고 피 없이 만인이 다 같이 평등하고 존엄한 새 하늘을 열 수 있다면 이상적이다. 하지만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볼 때, 사회주의혁명은 역사적 발전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계급투쟁을 통해서만 성취될 수 있으며, 계급투쟁은 평화적인 방법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기득권의 동맹이 피지배계급을 폭력으로 억압하면서 구조적 모순을 강화하고 있기에 이에 대한 계급투쟁은 이들의 폭력에 맞서는 투쟁이어야 하며, 이는 폭력 이외의 다른 방법이 없다. 그러기에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혁명에서 잃을 것은 족쇄뿐이고 얻는 것은 세계라고 공언하고 있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보더라도 잘 조직된 무장투쟁을 수반하지 않은 민중의 운동은 거의 실패로 귀결되었으며, 성공하더라도 개량적 국면을 확대하는 정도에 그쳤다.

    집단학살의 원인은 동일성의 혐오와 배제

    집단과 국가 사이에서 인간이 행하는 직접적 폭력 가운데 가장 사악한 것이 집단학살이다. 이는 문명사회에서도 끊임없이 자행되고 있다. 왜 중세 암흑기도 아니고 교양과 상식, 이성을 가장 잘 갖추고 보통교육이 실시된 20세기에 집단학살이 수시로 벌어졌는가.

    이의 원인에 대해, 한나 아렌트는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아렌트는 600만을 학살한 주범인 아이히만(Adolf Otto Eichmann)을 재판하는 예루살렘 법정으로 달려가 재판을 참관하고서 더욱 충격에 빠졌다. 악마와 같을 것이라고 예상한 것과 달리, 그는 평범하고 선량한 이웃집 아저씨로 보였다. 이에 대한 분석과 성찰을 통해 아렌트는 착한 사람들도 비판이 허용되지 않는 전체주의의 맥락에서 ‘순전한 생각 없음(sheer thoughtlessness)’의 상태에 놓여 주체적으로 생각하고 판단하지 않으면 언제나 ‘아이히만’이 될 수 있다라고 생각하였다.(한나 아렌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스탠리 밀그램은 ‘권위에 대한 복종’ 때문이라 주장한다. 그는 스탠리 밀그램 실험(Stanley Milgram experiment)을 통하여 교사 역할을 맡은 이에게 학생이 문제를 틀릴 때마다 15볼트에서 시작하여 450볼트까지 단계적으로 전기 충격을 가하라고 지시했다. 450볼트까지 올리면 죽을 것이라고 말해주었다. 전기 충격을 가할 때마다 학생 역할을 맡은 이들은 소리를 지르고 고통스런 표정을 지었다. 그럼에도 피험자 40명 가운데 65%인 26명이 450볼트까지 올렸다. 그들이 머뭇거릴 때마다 밀그램은 단호하게 “누르세요.”라고 명령하였다. 피험자들은 4달러를 받았다는 부담감도 있었지만, 밀그램의 권위에 복종하여 그런 사악한 폭력에 동참한 것이다.(스탠리 밀그램, <권위에 대한 복종>)

    하지만, 필자는 아렌트와 밀그램이 일부만 본 것이고 핵심은 놓쳤다고 본다. ‘순전한 생각없음’과 ‘권위에 대한 복종’도 일부 작용하지만, 집단학살의 근본 원인은 동일성의 혐오와 배제다. 아무런 생각이 없이 그저 조직에 충실한 아이히만에게 히틀러가 독일 우파 시민을 학살하라고 명령을 내렸어도 유태인에게 하듯이 별 거리낌 없이 이를 수행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를 푸는 실마리는 학살 이전에 특정집단을 타자화하는 혐오발언(hate speech)이 선행한다는 점이다. 나치즘도 5년 전부터 유태인을 악마화하는 라디오 방송을 전개하였다. 백인 어린이는 때리지도 못하는 신부가 마야족이나 잉카족의 어린이는 별 죄책감이 없이 죽였다. 이교도, 혹은 악마의 자식으로 타자화하였기 때문이다.

    72년 전인 1947년부터 1954년에 이르기까지 제주에서 서북청년단은 ‘섬 것들’로,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의 군경은 ‘빨갱이’로, 해안 사람(알뜨르)들은 ‘웃뜨르(중산간마을)’로 혐오하고 배제하자 선량한 제주도민들은 언제나 죽여도 좋은 ‘호모 사케르(homo sacer)’로 전락하였다. 그렇게 하여 그들은 3만에서 8만 명에 이르는 무고한 제주도민들을 죽였다. 21세기인 오늘도 언론이 혐오발언을 견제하거나 비판하지 않고 아시아인을 코로나19의 원흉이라고 지적하고 대중적 정치인들이 이를 선동한다면, 유럽에서 아시아인에 대한 테러가 끊이지 않을 것이다.

    제주 4.3 평화기념관에 전시된 사진, 민간인을 학살한 뒤 집총 자세 취하는 군인들 http://www.tongi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28324

    동일성에서 눈부처-차이로

    이처럼 동일성이 형성되는 순간 세계는 동일성의 영토로 들어온 것과 그렇지 못한 것으로 나뉜다. 동일성은 ‘차이’를 포섭하여 이를 없애거나 없는 것처럼 꾸민다. 동일성의 기원은 전염병일 것이다. 인류는 인종, 종교, 이데올로기, 입장, 신체 상태가 다르다는 이유로 이를 동일성에서 분리하여 타자로 규정하고 편견으로 바라보며 이들을 배제하고 이에 폭력을 행사하면서 동일성을 유지하거나 강화한다. 이에 대한 대안은 동일성에서 차이의 사유로 전환하는 것이다.

    “같다는 것은 다름에서 같음을 분별한 것이요, 다르다는 것은 같음에서 다름을 밝힌 것이다. 같음에서 다름을 밝힌다 하지만 그것은 같음을 나누어 다름을 만드는 것이 아니요, 다름에서 같음을 분별한다 하지만 그것은 다름을 녹여 없애고 같음을 만드는 것이 아니다. 이로 말미암아 같음은 다름을 없애버린 것이 아니기 때문에 바로 같음이라고 말할 수도 없고, 다름은 같음을 나눈 것이 아니기에 이를 다른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단지 다르다고만 말할 수가 없기 때문에 이것들이 같다고 말할 수 있고 같다고만 말할 수가 없기 때문에 이것들이 다르다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말하는 것과 말하지 않는 것에는 둘도 없고 별(別)도 없는 것이다.”(원효, <금강삼매경론>)

    동일성이란 것은 타자성에서 동일성을 갖는 것을 분별한 것이요, 타자성이란 것은 동일성에서 다름을 밝힌 것이다. 동일성은 타자를 파괴하고 자신을 세우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바로 동일성이라고 말할 수도 없고, 타자성은 동일성을 해체하여 이룬 것이 아니기에 이를 타자라고 말할 수 없다.

    원효의 변동어이(辨同於異)론을 현대에 맞게 다시 해석하여 필자는 ‘눈부처의 차이론’을 펼친다. 아주 가까이 다가가서 상대방의 눈동자를 똑바로 보면 거기에 비친 내 모습이 보인다. 형상이 부처님과 비슷해서 우리 조상들이 ‘눈부처’라고 붙였는데, 필자는 여기에 크게 세 가지 의미를 덧붙인다.

    첫째, 눈부처란 ‘주/객의 이분법을 해체하는 대대(待對)’다. 대대란 대립적인 것을 내 안에 모시는 것을 뜻한다. 태극에서 빨간 태극 안에 파란 동그라미가 있고, 파란 태극 안에 빨간 동그라미가 있는 데서 잘 알 수 있듯, 음과 양, 이데아와 그림자, 밤과 낮 등 모든 대립물은 서로 상대방을 품을 때 움직인다. 눈부처는 우선 상대방의 몸인데 내가 들어 있다. 그리고 상대방의 눈부처를 보는 순간에 내 눈동자에도 상대방이 담겨 있음을 깨닫게 된다. 이를 서로 바라보는 순간만큼은 너와 나, 주체와 객체의 이분법이 해체되고 상대방을 내 안에 서로 모시는 대대의 관계를 형성한다.

    둘째, ‘내 안의 불성(佛性)과 타인 안의 불성의 서로 드러남’이다. 설혹 상대방을 때리러 간 사람이라 할지라도 눈부처를 보는 순간 멈출 수밖에 없다. 이처럼 눈부처는 내 안에 타인과 공존하고 섬기려는 불성이 드러난 것이다.

    셋째, ‘동일성에 포획되거나 환원되지 않는 차이 그 자체’다. 이해하기 쉽게 허구적인 소설로 풀어 설명하자. 어떤 사람이 대학교 때 누이가 독일로 간호사로 가서 보내주는 돈으로 대학을 다녔는데, 어느 날 누이가 독일의사한테 성폭행을 당해서 자살했다. 그 사람이 대학을 중퇴하고 부단한 노력 끝에 중소기업을 운영하는 사장이 되었다. 그는 고유명사 ‘독일의사’뿐만 아니라 보통명사 독일의사도 되지 않기 위해서 직원 백 명 가운데 오십 명을 이주노동자로 고용하고 그들을 가족처럼 대해주었다. 그런데 어느 날 아들이 와서 아빠야말로 독일의사라고 말하고는 집을 나가버렸다. 아들이 회사 노동자 가운데 흑인 여성 이주 노동자를 데려와 결혼한다고 하자 유학자의 자손으로서 검은 피부를 가진 손자가 조상님의 제사를 지내는 것까지는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아들이 집을 나간 후 그는 밤새워 성찰하며, ‘내 안의 독일인 의사’를 발견하고 다음 날 아침 전화를 해서 아들과 그 흑인여성 이주노동자와 소풍을 가서 자기, 자기 안의 독일인 의사, 그리고 여성 이주노동자, 이주 노동자 안에 있는 누이, 이 네 자아가 하나가 되는 걸 경험했는데, 그 경지가 ‘눈부처 차이’다.

    모든 개념들은 동일성으로 환원하지만,(Gille Deleuze, <Difference and Repetition>) 눈부처의 차이는 내 안의 타자, 타자 안의 내가 대화와 소통, 교감을 하여 공감을 매개로 하나로 대대적(待對的)으로 어우러지는 것이기에 동일성으로 환원하지 않는다. 나와 타자 사이의 진정한 차이와 내 안의 타자를 찾아내고서 자신의 동일성을 버리고 타자 안에서 눈부처를 발견하고서 내가 타자가 되는 것이 눈부처의 차이다. 이 사유로 바라보면, 이것과 저것의 분별이 무너지며 그 사이에 내재하는 권력과 갈등, 타자에 대한 배제와 폭력은 서서히 힘을 상실한다. 그 타자가 이민족이든, 이교도든, 호모 사케르든 그를 부처로 만들어 내가 부처가 되는 사유다.

    눈부처 주체에 의한 세 가지 자유의 구현

    구조적 폭력을 일소하려면 이를 야기하는 근본 구조인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 체제를 해체해야 한다. 이는 5회, <신자유주의 체제의 모순과 불평등의 심화>로 미루고 그 안에서 맑스와 원효를 종합하면, 내적 평화와 외적 평화, 소극적 평화와 적극적 평화를 종합하여야 하며, 이것이 당위로 그치지 않으려면 눈부처-차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에 입각한 새로운 주체가 형성되어야 한다.

    눈부처 주체는 소극적 자유, 적극적 자유, 대자적 자유를 종합한다. 소극적 자유(freedom from)는 모든 구속과 억압, 무명(無明), 탐욕에서 벗어나 외부의 장애나 제약을 받지 않은 채 생명으로서 생의 환희를 몸과 마음이 가는 대로 누리면서 자신의 목적을 구현하고 인간으로서 실존하는 것을 의미한다. 적극적 자유(freedom to)는 자기 앞의 세계를 올바로 인식하고 판단하고 해석하면서 모든 장애와 소외를 극복하고 세계를 자신의 의지와 목적대로 개조하면서 진정한 자기를 실현하는 것을 뜻한다. 노동과 실천을 통해 세계를 변화시키거나 수행을 통해 자기완성을 이룰 때 도달하는 희열감의 상태가 이 경지다. 대자적 자유(freedom for)는 자신이 타자와 사회관계 속에서 밀접하게 관련이 있음을 깨닫고 타자의 아픔에 공감하고 연대하여 타자를 더 자유롭게 하여 내 자신이 자유로워지는 것을 의미한다. 맑스가 꿈꾼 이상사회도 타자들과 사회 관계 속에 있는 개인들이 타자를 더 자유롭게 하기 위하여 연대하는 연합이었다.

    이처럼 눈부처 주체는 수행을 통하여 내 마음의 평화를 도모할 뿐만 아니라 고통 속에 있는 타자에 대한 동체대비(同體大悲)의 자비심을 가지고 타자를 구원하고 더 나아가 인간을 억압하고 있는 구조적 폭력을 없애는 실천을 하는, 타인을 더 자유롭게 하여 내 자신이 자유로워지는 환희심을 느끼는 존재다. 희망버스에, 촛불에 주체로 나섰던 이들이 바로 그들이다.

    (※ 이 글은 <인류의 위기에 대한 원효와 마르크스의 대화>(자음과 모음, 2015)를 쉽고 짧게 풀어서 쓴 것으로 매달 첫째 주에 연재하고 있습니다. 쪽수까지 명기한 상세한 각주와 구체적 논증은 이 책을 참고하기 바랍니다.)

    필자소개
    한양대 교수. 민교협 전 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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