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습사회를 뛰어넘기 위해
[책] 『사회적 상속』 (김병권/ 이음)
    2020년 04월 04일 05:53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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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평등과 특권 세습 문제가 한국에서 제대로 정치화된 적이 있을까? 이 문제는 끊임없이 사회적 논란만 되었지, 진지한 정책과제가 된 적은 없다. 정말 심각하게 생각했다면 세습사회의 뿌리를 잘라내는 대규모의 조치를 취하자고 너도나도 제안했어야 하지 않을까?”

세습자본주의에 맞서, 한국에서는 무엇을 할 것인가

피케티의 보편자산(Universal Capital Endowment), 애커먼·앨스톳의 사회적 지분 급여(Social Stakeholding), 독일 정부의 개인노동계좌(Personal Worker’s Account), 영국 노동당의 시민자산펀드(Citizen’s Wealth Fund)… 이들은 모두 불평등과 세습자본주의 문제에 맞서 고안된 정책대안들이다. 경제적 부는 물론, 정치·사회·문화적 자산 측면에서의 계급 간 격차가 세대를 넘어 점점 더 고착되고 있다. 세계적으로 많은 학자와 정치인들이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보다 근본적인 수준의 자산 이전과 재분배 방안을 고민하고 있다.

한국에서도 지난해 조국 전 장관 임명 논란 이후, 불평등과 세습자본주의 문제가 화두로 떠올랐으나, ‘합법적 불평등’ 구조와 ‘기득권 카르텔’을 해결할 대책은 좀처럼 찾기 어려웠다. 이철승 서강대 사회학과 교수의 『불평등의 세대』 등 학계와 언론의 불평등 담론에서도 ‘세대론’과 ‘시장 메커니즘’ 한계에 갇힌 소극적이고 국지적인 해법만 도출되었을 뿐이고, ‘공정’에 대한 사회적 요구는 현재의 기울어진 시스템 자체를 문제 삼는 데까지 나아가지 못했다.

이에 『사회적 상속』은 “자산의 세대 간 이전 및 영구적 부의 순환 메커니즘 도입”이라는 근본적 조치 없이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리고 청년기초자산과 최저-최고임금 제도를 중심으로 재산권과 교육제도 전반을 개혁하는 한국형 정책대안을 설계한다. 이들 개혁안은 현 사회 전체의 자산을 개인이 아닌 사회적 차원에서, 다음 세대에 정의롭게 이전시킨다는 의의를 지녔다는 점에서 사회적 상속안이다. 이는 단순히 특정 연령대를 지원하는 일시적 방편이 아니며, 불평등의 고착 구조에서 발생하는 경제적 비효율과 둔화 및 민주주의의 위기를 해소하는 경제정책이다.

청년기초자산과 최고임금을 중심으로 한국형 사회적 상속 모델을 설계

불평등과 특권 세습 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정치권과 여론 주도층은 ‘교육(입시)제도 개혁’을 그 해결책으로 제시해왔다. 이는 교육제도가 그나마 모두에게 공평한 신분 상승의 기제로 작동하고 있다는 뿌리 깊은 믿음 때문이다. 하지만 교육제도 자체가 이미 타고난 신분을 고착하는 ‘만리장성’으로,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불평등한 출발점’을 재생산하는 세습 효과를 낳는 기제로 작동하고 있는 현실에서 “입시제도 개편 등 학교 자체 재설계만으로는 풀 수 있는 것이 많지 않다.”

이는 교육제도의 사회적 기능 자체를 혁신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뜻이고, ‘교육개혁’의 과제가 교육제도 개혁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맥락 전체를 뜯어고치는 근본적 대책”이 필요하다. 이에 따라 『사회적 상속』 에서는 교육제도의 맥락을 크게 세 범주로 나누어, 각각의 범주에 맞는 대안을 모색한다. (①교육제도 입구: 인생의 출발점 다시 맞추기 -> ②교육제도 출구: 사회 진입 후 격차 한계 정하기 -> ③교육제도: 다양한 개인의 능력 개발)

①교육제도 입구의 즉각적인 조치로는 청년기초자산제를 제안한다. 이는 일정 연령이 된 모든 청년들에게 기본적인 수준의 사회출발자본을 제공하는 것으로 교육 평등을 위한 진전의 촉매제 역할 및 강요된 고용과 노동의 가능성을 제거하는 등의 전후방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상속의 사회적 순환의 시작점을 만들 수 있다는 의의가 있다.

②교육제도 출구 정책으로는 최저-최고임금제를 제안한다. 최저임금제에 위를 끌어내리는 최고임금제를 연동한 정책으로, 노동시장에서 학력/정규직 여부/사업장 규모 등에 따른 소득 격차가 일정 수준 이상으로 벌어지지 않도록 하는 방안이다.

③교육제도 차원에서는 “교육이 학교 밖 불평등과 연결된다는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대학입시 폐지, 대학 서열 체제 및 고교 체제 개혁 등의 대안들을 논한다.

이밖에도 자산 세습의 고리를 끊고 사회 전체의 부를 영구적으로 순환시키는 메커니즘을 모색하기 위해 이 책은 토지개혁의 역사적 사례와 토마 피케티의 임시적 소유권(temporary ownership) 개념을 한국사회에 적용할 방안을 모색한다. 마지막 부분에서는, 이들 정책이 제대로 작동하는 정치적 환경을 만드는 방안을 논한다.

한국의 정치 영역은 세계적 추세와 비교해봤을 때 유독 기성세대의 독점이 심하고, 다중 엘리트 정당 시스템이 공고하다. 즉 주요 정당들이 상위 20퍼센트 등 기득권 엘리트층의 이해관계만을 대변하게 된 상황에서, 다음 세대와 사회 전체를 고려하며 재산권 개념을 재정의하려는 시도들은 현실화되기 어렵다. 그렇다면 정치 영역 역시 사회적으로 상속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이를 위한 정치적 과제와 세대별 역할을 제안하며 논의를 끝맺는다.

청년에게 권력과 자원을 주자,
희망 없는 기성 정치를 바꾸는 정치의 사회적 상속

이 책 『사회적 상속』은 정책안의 이론적 배경과 사례를 심도 있게 논의할 뿐 아니라, 한국사회에 바로 도입할 수 있는 모델을 설계·제안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저자 김병권은 민간 싱크탱크인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 부원장, 서울혁신센터장, 서울시 협치자문관 등을 역임하며 정책 연구와 실행 영역을 두루 거쳤고 현재는 정의당 정의정책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다. 책 내용 중 일부는 정의당 총선 공약이 됐다.

이 책은 기득권 엘리트층인 ‘586세대’ 저자의 자기 반성으로부터 출발했다. 저자는 사회의 전 영역에서 막강한 권한을 행사하는 위치에 있는 동 세대의 상위 20퍼센트가 불평등과 세습 문제에서만큼은 판단 착오에 빠져 있다고 지적한다. 이들이 스스로 쏟아낸 비판만큼 “정말로 금수저-흙수저 사회, 성 안과 성 밖의 사회를 무너뜨리고자 했다면 상식적으로는 대규모 자산의 이동, 기회의 이동, 권력의 이동을 추진했어야” 했다. 그렇지 않았던 이유는 무엇보다도 이들의 삶 안에는 1997년 외환위기와 2008년 금융위기라는 분기점을 지나며 극적으로 심화된 세습자본주의 사회 현실을 체감하고 제대로 대처할 수 있는 인식론적, 경험적 배경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저자는 일갈한다.

저자는 586세대에게 남아 있는 시대적 과제가 있다면 “청년세대가 스스로 느끼는 현실을 표현하고, 소망하는 미래를 스스로 설계하고, 그 설계대로 실행할 수 있도록” 청년들에게 권력과 자원을 주는 것“이라고 제안한다. 그것이야말로 자산의 사회적 상속에 비견되는 정치의 사회적 상속이다. 따라서 선거권, 피선거권 등의 연령 문턱을 확실하게 낮추고, 선거기탁금 등 정치활동 비용을 높이는 제도도 개혁하는 등 청년세대가 정치 영역을 장악해나갈 수 있도록 판을 바꾸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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