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너진 일상, 혼란의 정치
    코로나, 총선 그리고 노동
    [평등의길]협력과 협동, 연대와 공생
        2020년 04월 02일 09:59 오전

    Print Friendly, PDF & Email

    이 글은 민주노총의 노동운동 활동가조직인 ‘노동자가 여는 평등의 길’의 소식지에 실린 글이다. 필자의 동의를 얻어 레디앙에 게재한다. <편집자>
    ————————–

    1. 코로나가 바꾼 세상

    근대와 전근대를 가르는 기준은 여러 가지다. 그러나 역시 가장 중요한 것은 ‘사회의 예측가능성’이다. 전근대인의 삶은 전쟁, 재난, 그리고 권력의 폭정 때문에 불규칙하고 위험했다. 근대사회의 출현은 원칙과 합리성을 통해 미래의 불안과 위험요소를 최소로 줄였다. 과학의 발전을 통해 재난을 예방하거나 방어했고, 민주주의와 법치의 발전은 정치를 통제가능하게 만들었다. 이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근대사회의 가장 큰 밑그림이다. 그리고 인간의 삶이 이전보다 ‘진보’했다고 믿는 근거였다. ‘코로나’ 이후 이 믿음은 발밑에서 무너지고 있다.

    과학과 의학은 바이러스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다. 신종 바이러스의 출현은 예상할 수 있으나 예측할 수 없고 주기적으로 반복한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지구는 홍역을 앓고 있다. 강도도 더 거세지고 있다. 방역과 보건체제를 가동하고 감독해야 할 국가의 실패도 심각하다. 동시에 바이러스의 확산은 신자유주의가 낡은 유물로 만든 ‘국가’ 와 ‘국경’을 다시 소환하고 있다. 이윤의 세계화를 위해 만든 국경 없는 세계는 바이러스를 나르고, 잔뜩 힘이 빠진 국민국가는 대처할 수단이 없어 허둥대고 있다. ‘코로나’ 로 일상이 무너진 세계는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불안한 세상을 만들고 있다.

    이 와중에 한국 사회는 21대 국회의원 선거에 돌입한다. 이번 총선은 극도의 혼란 속에서 치러진다. 새로 도입한 선거제도는 아무도 이해를 못한 채 적용하기 전에 이미 실패했다. 구세력은 완벽하게 복원했고, 새로운 세력은 등장하지 않았다. 진보정치는 길을 잃고 자원을 소진하며 버티고만 있다. 여와 야는 어떤 의제, 어떤 비전도 없이 각자의 지지층을 향해 ‘그럼 쟤들을 찍을 거냐?’는 말만 되풀이한다. 하긴 어떤 의제, 어떤 정책을 내놓아도 모조리 코로나로 수렴하는 상황에서 지지층을 향한 이미지 정치만이 인적 끊긴 사회의 빈 곳을 채운다. 이번 총선은 민주주의의 축제가 아니라 민주주의의 부정에 가깝다. 정치세력은 스스로 만든 규칙을 부정하고 시민사회는 어떠한 토론도 없다. 한국의 정치는 칼 쉬미트의 정의에 딱 들어맞는다. 이 나라에서 정치란 오직 누가 아군이고 적인지를 구분하는 기술일 뿐이다.

    지금 한국 사회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무너진 일상과 혼란의 정치”다. 우리가 경험해보지 않은 세계가 이제 시작한다.

    2. 바이러스로 들여다본 한국 사회

    코로나 경험은 의학의 차원을 넘어 다양한 문제를 들춰낸다. 우선 바이러스는 차별과 배제, 집단혐오라는 사회 질병이 우리 안에 깊숙하게 내재한다는 사실을 들춰냈다. 한국 사회가 낮은 수준의 신뢰사회라는 것은 코로나 이전부터 많은 연구자가 경고했다. 결국, 상대를 연민과 연대의 대상으로 보기보다는 이익의 대상 내지는 자기 이익추구의 방해물로 생각하는 이기적인 시민에게 연대는 기대할 수 없는 덕목이다. 이기적인 인간은 바이러스와 감염증에 대해서도 이것이 사회의 공동노력을 통해 차단될 때 내 건강도 보장받는다고 생각하기보다는 타자의 배제를 통해서만 내 몸의 건강을 달성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감염자, 내지는 감염의 여지가 있는 자는 배제해야 하는 적이 된다. 이런 사회에서 시민의 연대란 사치에 불과하다. 코로나는 한국 사회의 관계망이 대단히 연약하며 시민 사이의 유대와 신뢰가 허약하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했다.

    코로나는 ‘공공성’의 문제를 제기했다. 여당의 지지자들은 전 세계가 한국의 대처방식을 배우기 위해 줄을 서고 있다고 칭찬하기 바쁘지만 전문가의 생각은 다르다. 만약 감염의 폭발이 대구가 아니라 서울에서 발생했다면 우리 의료체계는 붕괴했을 것이다. 서울은 가장 많은 의료진과 병상을 확보하고 있으나 이미 전국에서 몰린 환자로 포화 상태다. 서울에서 대구 수준의 확산이 발생했다면 한국의 의료 시스템은 어떻게 됐을까. 시장화된 의료체계로는 대규모 감염증 사태 같은 재난에 대처할 수 없다는 교훈에 도달해야 한다. 이는 군대의 역설과도 같다. 평상시를 생각하면 공중보건의료체계를 유지하고 공공병원을 늘리고 담당 공무원을 두는 것은 모두 자원낭비다. 그래서 권영진은 역학조사공무원을 감축하고, 홍준표는 의료원을 폐쇄했다. 이런 대규모 발병사태에 의료진의 자발적 헌신과 민간병원의 호의에 기댈 수는 없다. 예방도 마찬가지고 의약품도 마찬가지이다. 언론의 희망 섞인 전망과 달리 전문가들은 코로나의 백신이 조만간 개발되기 어려울 것으로 본다. 시장성이 없기에 다국적 제약기업이 나서지 않기 때문이다.

    코로나는 국가와 국가의 경계에 대해서도 새로운 질문을 던진다. 신자유주의 세계화는 국가와 국경을 낡은 것으로 규정하고 자본과 노동이 자유롭게 이동하는 세상을 제시했다. 그러나 신자유주의가 꿈꾼 유토피아는 허리케인 카트리나나 동일본 대지진에서 보듯 거대한 재난에 취약한 정부를 만들었다. 국가별 복지 시스템을 해체하고 빈곤을 키웠다. 노동의 자유로운 이동은커녕 취약한 공권력의 빈자리를 난민혐오와 이주민차별로 채웠다. 세계화론자들이 그토록 외쳤던 국제적 협력은 찾아볼 수 없고 각국은 자기네 국경을 걸어 잠그고 폐쇄를 선택했다. 그러나 국가의 폐쇄가 감염방지에 유효하다는 증거는 여전히 없다. 반면 세계화를 상징하는 하늘길의 확장이 바이러스 확산의 고속도로 역할을 하는 것도 사실이다. 국민국가 체제를 강화하고 신고립주의를 선택하는 것이 답인가, 아니면 여전히 개방된 국경과 개방된 경제를 유지하는 것이 답인가를 놓고 격론이 벌어지고 있다.

    그러면 도대체 이 바이러스는 어디서 왔는가? 중국을 가리키기도 하고, 박쥐를 이야기하기도 하지만 모두 지엽적인 대답이다. 답은 ‘기후위기’에 있다. 전염병을 일으키는 요인은 세균과 바이러스다. 그러나 그 위험함은 바이러스가 세균을 이길 수 없다. 바이러스는 전염성이 높으나 세균과 비교하면 생존능력이 낮아 널리 퍼지기 어렵기 때문이다. 인류는 위생과 항생제라는 발명을 통해 세균을 정복했다. 이제 더 이상 세균성 질환으로 세계가 홍역을 앓지는 않는다. 그러나 산업발전, 화석연료 사용, 공장화된 축산업, 대규모 산불 등으로 인한 기후위기는 생태계를 파괴하고 서식지를 옮기고, 다른 종간의 접촉을 늘린다. 새로운 바이러스의 출현, 창궐, 확산은 앞서 말한 세계화와 지구온난화 때문이다. 우리가 변종 바이러스가 출현하고 순식간에 퍼질 조건을 만들었다. 어제는 사스, 메르스 등을 극복했고 오늘은 코로나를 극복할 수 있겠지만 내일은 또 다른 바이러스가 기다리고 있다. 기후위기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지금의 혼란은 우리의 일상이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코로나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의제를 우리 사회에 던졌다. 바로 ‘기본소득’이다. 그 어느 정치세력이나 학자보다도 성공적으로 이 개념을 대중에게 각인했다. 불과 두어 달 전과 달리 이제는 기본소득이라는 개념을 모르는 이가 드물다. 코로나로 인한 일상의 붕괴는 경제적 빈궁과 밀접하다. 따라서 지역주민과 밀접하고 민심의 동향에 민감한 정치인, 그중에서도 지방정부 수장들이 먼저 기본소득의 필요를 들고 나왔다. 운동진영도 이런 주장을 우호적으로 바라보고 있다. 그러나 실현가능성, 즉 현실성 여부를 떠나 풀어야 할 의문이 적지 않다. 우선 재난에 대응해 한시적으로 지급하는 것을 소득으로 볼 수 있는가? 얼마를 언제까지 지급하는 것이 적절한가? 보편적인 현금지급이 나은가 아니면 피해자에 대한 보조와 공과금 ·세액감면 같은 정책지원이 더 나은 대안인가와 같은 물음이다. 이 국면이 지나고 기본소득 의제가 한국 사회에서 어떻게 논의될지도 지켜봐야 한다. 한편으로 기본소득을 들고나온 것이 서울, 경기, 경남 같은 부유한 지방정부라는 것도 주목해야 한다. 이는 기본소득 개념의 본질적인 약점을 암시한다.

    코로나 위기 대응 시민사회단체들 입장 발표 회견 모습

    3. 총선의 의미

    코로나로 무너진 일상을 배경으로 치러지는 21대 총선은 혼란으로 가득한 최악의 선거다. 박근혜 탄핵의 대중동원과 이어진 대선은 모두가 알다시피 한국 사회의 앙시앵 레짐(구체제)을 청산하고 주도세력을 교체하는 길로 나가지 못했다. 청와대에 입성한 문재인과 민주당 세력은 3년의 표류 끝에 구체제와 화해하는 길을 택했다. 경제 성과를 만들기 위해 개혁의 대상인 재벌과 동맹을 맺었다. 옛 정치세력을 몰아내고 다당제를 통해 새로운 이념지형을 열려는 시도는 무위로 돌아갔다. 사회지배세력을 교체하지 못하고 86세대의 무능과 위선만 확인했다. 억눌렸던 여성의 목소리가 터져 나오지만 한편에서는 20대 남성이라 이름 붙은 백래시가 힘을 얻는다.

    이런 모든 결과가 결국 이번 총선을 4년 전의 재판, 아니 1991년의 연속으로 만들었다.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야 할 수구정치세력은 완벽하게 복원됐다. 당의 이름만 다를 뿐 민자당의 후예인 정당과 보수 야당의 맥을 이은 민주당, 두 거대정당의 격돌이라는 지긋지긋한 정치구도가 다시 무대에 오른다. 세상은 민주 대 반민주가 아니고 그래서도 안 되는데 죽기를 거부하는 좀비처럼 내용 없는 두 거대정당의 진영대결이 보수와 진보의 대결이라는 착시현상과 함께 대중에게 강제되는 것이 이번 총선의 핵심구도이다. 이 경우 되살아난 수구세력이 아니라 이런 부활을 용인한 민주당의 무능을 비판해야 한다.

    이번 총선이 혼란한 것은 제도의 실패 탓도 크다. 선거제도 개혁의 과정은 당시 자유한국당의 몽니 때문에 시끄러웠으나 더 큰 문제는 파국에 가까운 협상 과정과 조악한 결과물이다. 선거제 개편의 취지는 유권자의 실제 선택과 의석 점유율의 괴리를 줄이고, 신진정치세력의 의회 진출을 쉽게 하고, 궁극적으로 국회 개혁의 출발로 삼는 데 있다. 그러나 지금 시행하는 연동형 비례제는 이런 취지를 살릴 수 없는 개악에 가까운 형태다. 여기에 더해 위장위성정당을 만들어 개혁의 취지를 송두리째 부정한 거대양당의 몰염치 때문에 새 제도는 혁신 없이 정치에 대한 대중의 환멸만 키웠다. 새 선거제도는 대중이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복잡한 제도이다.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고 따라서 중요해 보이지도 않는 선거제 개편 논의에 대중의 투쟁 동력이 모일 리 없다. 대중의 투쟁이 결합하지 않으니 협상은 밀실에서의 밀고 당기기로 추락했다. 위력적이지도 않고 감동도 없으니 보수정당들이 대놓고 제도를 무시한다. 이 교훈을 얻은 것이 그나마 성과이다.

    코로나 때문이라고 우길 수도 있으나, 이번 총선은 의제가 없는 선거이다. 오죽하면 한 언론은 “정치 퇴행, 민주주의 위협하는 총선”이라 규정했다. 책임감 있는 정당이라면 코로나로 인해 무너진 일상을 복원하기 위해 무엇을 할지 이야기해야 한다. 그러나 거대양당은 서로에 대해 유치한 비난만 쏟아낼 뿐 미래에 대한 정책 제시는 관심이 없다. 민주당의 유일한 구호는 ‘탄핵세력의 복귀를 막자’고, 수구 야당은 ‘문재인을 끌어내자’이다. 해방 이후 대중의 정치적 상상력을 이렇게 옥죄는 선거도 없었다.

    이번 총선의 마지막 특징은 진보정치의 총체적 후퇴다. 선거가 시작하는 시점이지만 안타깝게도 우리는 진보정치 전반의 후퇴를 예견할 수밖에 없다. 이미 시작됐고 이 흐름을 뒤집기 어렵기 때문이다. 정의당의 패착은 한둘이 아니다. 선거제도 협상 과정에서는 여론을 주도하고 대의를 지키는 정당의 모습을 대중에게 각인하지 못하고 어떻게 보면 반 개혁적인 이기적인 주장(석패율제)에 집착하며 제도개혁의 부차적 존재가 됐다. 협상의 결과물도 최악이다. 의욕을 가지고 도입한 시민선거인단은 세력확장으로 이어지지 못한 채 당의 실력부족만 드러냈다. 후보를 둘러싼 추문은 당의 도덕성을 떨어트렸고 이에 대한 대응도 수세적으로 당의 이미지 하락을 부채질했다. 다른 진보정당도 나을 것이 없다. 녹색당은 진보정치의 독립성과 독자세력화라는 대의를 무너트렸고 민주노총 지지를 잃는 수모를 자초했다. 민중당도 마찬가지이다. 자력생존이 어렵다는 조급함이 낡은 비판적 지지론을 끌어냈고, 미수에 그쳤으나 진보정치의 대의로부터 이탈했음은 부정할 수 없다. 변혁당은 사회주의 대중화를 노선으로 채택하고도 대중선거에 참여도 못 하는 모순을 드러냈다. 노동당은 선거참여에 만족하는 정당으로 쪼그라들었고, 당을 박차고 나간 기본소득당은 민주당의 위성정당에 들어가는 기회주의를 드러냈다. 모든 진보정당이 선거가 시작하기 전에 이미 실패한 선거다.

    4. 총선 투쟁의 목표

    최악의 총선이지만 보름 남짓의 선거운동 동안 민주노조운동과 사회운동의 활동가들은 다음의 3가지를 목표로 삼아야 한다.

    지배세력, 즉 문재인 정권과 민주당, 재벌의 동맹이 한국 사회에서 헤게모니를 확장하는 것을 최대한 저지해야 한다. 좋게 봐줘야 사회자유주의와 보수주의의 연합정당이고, 북한에 적대하지 않는 자본가 정당인 민주당이 단지 대안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진보 대중의 지지를 수렴하는 것은 최악의 상황이다. 이런 총선 정세에서 자신이 가진 표 중 하나 이상을 민주당이 아니라 진보정당에 던지는 행위는 대단한 의미가 있다. 활동가라면 염세주의와 기권주의에 빠지지 말고 자신을 포함해 현장의 노동자, 주변의 시민이 한 명이라도 더 진보정당을 선택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어찌 되었든 선거는 당선이라는 결과로 수렴한다. 우리는 국회 환노위 1석이라는 결과에 만족하는 선거를 이제는 뛰어넘어야 한다. 이번 총선에서는 다수의 노동자 의원 당선, 사회주의자 국회의원 당선을 표면적인 목표로 삼고, 정치적으로는 정치조직에 의해 이념적으로 통제받는 의원의 배출이라는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선거투쟁에 임해야 한다. 의원이 정당의 통제를 받지 않는 것이 한국의 현실이다. 진보정당도 다를 것이 없다. 그러다 보니 의원의 우경화를 제어할 방법도 없고, 의원이 사회운동과 결합해 투쟁을 의회 안으로 끌어들이는 경험도 하지 못했다. 진보정당을 넘어 진보좌파의 원내 교두보 확보를 반드시 실현하자.

    마지막으로 운동진영 내부에 노동계급이 중심인 진보정치의 미래는 무엇이며 어떻게 그 길을 갈 것인지 공론을 만들어야 한다. 작게는 정의당 안에서 당 운동의 궤적을 비판적으로 되돌아보고 당원을 향해 ‘이것으로 충분한지, 이것으로 가능한지’ 질문을 던져야 한다. 활동가 개인의 선호와 상관없이 정의당이 선거 이후 좌우 어느 쪽으로 이동하는지는 우리 운동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다. 정의당 내부에서 노선에 대해 문제제기하는 것이 다름 아닌 계급투쟁이다. 이와 함께 다른 정당의 동지들, 당적을 가지지 않은 동지들과 함께 노동계급이 중심인 진보정치의 미래는 무엇인지, 그것은 어떻게 실현할 수 있는지 토론을 시작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5. 사회운동 좌파가 코로나와 총선을 뛰어넘기 위해

    모든 것이 불투명해 보이는 코로나 감염증 사태 속에서도 분명한 것은 재난 상황을 핑계로 삼은 자본의 해고 공세다. 이미 전경련과 경총이 ‘쉬운 해고’를 들고 나왔고 보수언론과 경제지가 불을 지피고 있다. 지구적 감염확산이 2008년 금융위기 이후 고장 난 자본주의에 다시 한번 타격을 가할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자본은 노동계급에 대한 공세로 위기를 감추고, 계급분할지배로 위기를 극복하려들 것이다. 이에 맞서 좌파는 사회의 가장 취약한 계층의 이익을 우선 방어해야 한다. 일용노동자, 플랫폼노동자, 특수고용 노동자, 저임금노동자, 이주노동자, 불안정노동자, 5인 미만 사업장, 구직자와 영세자영업자가 생존의 기반을 잃지 않도록 국가의 지원을 끌어내는 투쟁을 지금 당장 벌여야 한다. 그리고 정권과 총자본에 대해 전면적인 해고금지를 요구해야 한다. 재벌·대기업에 대해서는 사내유보금으로 고용유지, 주총에서의 배당 자제를 압박하고, 구조조정에 선제대응하자. 이 기회를 산업투쟁과 계급 일반 이익을 실현하는 노동운동의 출발로 만들자.

    덧붙여 한 번의 타격만으로도 회복할 수 없는 상태가 되는 사회취약계층은 여유를 부릴 틈이 없다. 예상되는 경제위기는 수요와 공급이 동시에 멈추며 발생하는 현상으로, 경제 생태계가 아래로부터 무너지는 위기이다. 따라서 위로부터가 아니라 아래부터 둑을 쌓고 지원을 쏟아야 한다. 그러나 문재인 정권은 위로부터 물을 부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100조 원을 금융지원 형태로 기업에 쏟고, 정작 취약계층에는 온갖 조건을 갖다 붙인 100만 원을 5월 이후에나 지급할 계획이다. 4대보험 납부면제를 이야기하지만 취약계층은 4대보험 바깥에 있는 경우가 많다. 결국 이것도 기업에만 도움이 된다. 최저임금 투쟁에서 보듯 이들 취약계층은 조직도 없고 자기 스스로를 방어하지도 못한다. 조직과 자원을 갖춘 민주노총이 나서서 지금 당장 실효가 있는 대책을 정부가 내놓도록 강제하고 투쟁을 조직해야 한다.

    투쟁의 또 다른 축은 사회 공공성 확장을 통한 자본주의 구조개혁으로서의 사회대개혁 전략이다. 코로나가 던진 공영의료체계 확장과 공공방역체제 구축이라는 질문을 밀어붙여 병상과 보건인력 확대, 의대를 포함한 의료진 양성체계 재편, 제약·의료기자재 산업에 대한 공적규제, 공공의료원 늘리기 등 시장화된 의료체계를 공적구조로 재편하는 투쟁을 기획하자. 사회 공공성 확장은 자연스럽게 재원의 확보를 요구한다. 법인세 증대, 부자증세, 금융과세로 이런 요구가 이어져야 한다. 누진세를 전제한 소득세 인상을 사회양극화 극복과 공공성 확대를 위한 연대수단으로 인식하고 이를 수용할 필요가 있다.

    기후위기에 대한 경각심과 행동이 반자본주의운동 혁신의 시작이다. 기후위기는 부문운동이 아니다. 기후변화와 자본주의는 분리할 수 없다. 민중의 건강한 삶과 지속가능한 사회를 실현하기 위해 이제 좌파라면 생태주의와 사회주의 결합을 어떻게 이룰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 한국 좌파뿐 아니라 사회 전반이 세계적 흐름에 많이 뒤처져 있는 것이 사실이다. 기후위기는 지구적 빈곤(양극화), 대표성의 위기와 더불어 오늘날 자본주의의 가장 약한 고리임에 틀림이 없다. 기후위기를 강조하는 것이 종말론을 퍼트리는 행위는 아니다. 자본주에서 벗어나는 것이야말로 파국적 종말을 피하는 길이다.

    이에 더해 기후위기를 매개로 한국 사회에서 이데올로기 투쟁을 펼쳐야 한다. 지금까지 우리 사회는 ‘안보(=안전 보장, security)’를 국방으로 좁게 이해하고, 이것을 우파의 전유물로 생각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고용보장의 영어 표현이 잡 세큐리티job security이듯, 안보는 헌법이 우리에게 약속한 국가의 의무, 즉 시민의 생명과 재산의 보장이라는 틀에서 이해해야 한다. 외부의 적으로부터 보호하는 것이 국방이고, 공안을 지키는 것이 경찰력이라면, 시민의 건강과 안전을 공적으로 지키는 것이 안보다. 일자리를 비롯 경제적 삶의 조건을 지키는 것도 안보고, 사회적 존엄을 지키는 것도 안보다. 기후위기를 해결해 인류의 생존을 궁극적으로 확보하는 것도 안보다. 안보라는 개념이 사회 안에서 확장되고 이 과정을 좌파가 주도해야 한다.

    진보정치에 있어서는 정치개혁 취지를 살리지 못한 연동형 비례제의 한계와 그마저도 지키지 않은 거대양당의 문제를 부각하며 노동자·민중이 주도하는 혁명적인 선거제도 개혁 투쟁을 기획해야 한다. 다른 축으로는 노동계급이 중심인 진보정치를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인 실천 투쟁을 기획해야 한다. 선거 결과가 영향을 미치겠지만 현실의 권력관계에 사로잡히지 말고 필요하다면 더 큰 연합을 구성해서 진보정치 재편과 혁신을 좌파가 주도해야 할 것이다.

    6. 결론을 대신해서

    유발 하라리는 최근 언론 기고문에서 코로나 이후의 세계를 조망하며, 인류가 ‘전체주의적 감시와 국수주의적 고립’을 강화하는 길과 ‘시민의 신뢰에 기반한 참여확대와 지구적 연대’를 강화하는 길 사이에서 설 것이라 예견했다. 그가 권하는 선택이 무엇인지는 분명하다. 자기격리나 거리두기가 코로나 이후의 세상을 규율하는 규칙이어서는 안된다. 우리는 여전히 협력과 협동, 연대와 공생을 재건할 사회의 밑바탕으로 삼아야 한다. 지킬 것은 이윤이 아니라 인간의 삶이다.

    필자소개
    노동운동 활동가조직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