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영화가 쓰레기라고? 세상은 향기로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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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년 09월 08일 12:51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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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덕 감독의 영화를 빼놓지 않고 봐온 젊은 정치학자 이광일 교수가  ‘몇 명 없는’ 객석에 앉아서 김감독의 최근작 「시간」을 보고 감독과 영화에 대한 여러가지 생각을 적은 글을 <레디앙>에 보내왔습니다. 원고는 다소 길지만 김감독과 그의 영화에 대한 공감을 넓히는 데 적지 않은 도움이 줄 것을 기대하면서 전문을 싣습니다. 이 글에는 영화 줄거리가 들어있으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편집자 주> 

최근 한국 영화산업의 문제점에 대한 촌평이 영화 「괴물」과 대중의 영화수준에 대한 발언으로 축소되며 매스미디어의 ‘집중조명’을 받았던 김기덕 감독의 열세 번째 영화 「시간」이 개봉되었다.

김기덕에 대한 ‘과잉편견’ 또는 ‘또 다른 억압’

해외에서의 관심에 비해 상대적으로 국내에서는 크게 주목받지 못했던 그가 자신의 작품을 둘러싼 논란을 통해서가 아니라, ‘작품외적인 발언’에 의해, 그것도 ‘대중의 폭발적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는 사실은 무언가 씁쓸함을 금할 수 없게 만든다.

     
 ▲ 지난 8월 7일 종로 스폰지하우스에서 열린 김기덕 감독의 신작 ‘시간’의 시사회에서 김기덕 감독이 기자회견 내내 침울한 표정을 짓고 있다.(사진=연합뉴스)  
   

특히 그에 대한 ‘비판’ 가운데 다수가 그의 작품을 정독하지 않은 사람들에 의해 채워지고 있다는 지적을 접하면, 이 씁쓸함은 단지 필자 개인의 선호 문제로 돌려질 수 있는 것만은 아닌 듯하다. 물론 이것이 모든 작품을 정독한 사람에게만 ‘비평’ 혹은 ‘감상의 변’을 토해낼 수 있는 권리가 주어져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특정 연출자에 대한 평가는 그가 진행해왔던 작업(작품)들과의 연관 속에서 이루어질 때, 더욱 밀도 있게 진행될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을 지적하기 위해서이다.

이것은 김기덕 감독의 경우 더 유념해야 할 사항인데, 그이처럼 특정 시점의 작품에 대한 인상과 그로부터 형성된 선호에 의해 작품세계 전체가 ‘비평의 도마’에 오르는 경우도 드물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그러한 평가들 가운데 다수가 그의 작품에 대한 ‘과잉편견’을 담고 있다면, 문제는 더욱 심각해진다. 왜냐하면 그것은 평자들의 인지, 의도 여부와 무관하게 그에 대한 ‘딱지붙이기’, ‘정체성의 고정화 효과’를 조장하는 ‘또 다른 억압’을 함축하는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지우(한정우 분)와 세희(박지연 분)는 연인이다. 그러나 이들은 정말 서로가 사랑하고 있는지 확신할 수 없다. 지우는 세희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항상 주변의 여성들에게 관심과 욕망의 시선을 보낸다.

‘시간’, 사랑을 집착으로 만들다

세희는 그와 같은 지우의 모습이 시간이 가져다준 결과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나신(裸身)을 앞에 둔 지우가 민감히 반응하지 않는 이유도 바로 그 ‘시간이 가져다 준 낡음’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지우에게 자신이 ‘낡은 존재’라고 생각하면 할수록, 그의 사랑을 확인하고자 하는 세희의 ‘집착’은 더욱 강해진다.

이제 그녀에게 ‘집착’과 ‘사랑’은 동일시되고 정비례의 함수관계를 이룬다. 그리고 이것은 성형을 통해 자신을 새롭게 하고자 하는 제어할 수 없는 욕망의 실행으로 이어진다.

지우에게서 갑자기 사라진 세희는 6개월 후 성형을 통해 새희(성현아 분)라는 이름으로 다시 나타나 그와 ‘새로운 관계’를 맺게 되지만, 지우의 사랑에 대한 그녀의 집착은 끝나지 않는다.

   
 

그녀는 ‘사라진 세희’의 이름으로 지우에게 편지를 보내 그가 과거의 자신(세희)을 사랑하는지, 아니면 지금의 자신(새희)을 사랑하는지 시험하고 확인하고자 한다.

결국 이 사실을 알게 된 지우는 한편으로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표현된 그녀의 ‘끔찍한 행위’에 대해 원망, 분노를 넘어 두려움조차 느끼지만, 다른 한편 과거의 세희와 현재의 새희 가운데 누구를 사랑하는지조차 알 수 없는 그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고통스러워 하다가 세희가 그랬던 것처럼 성형을 한 후 사라져 버린다.

이렇게 ‘역전된 상황’ 속에서 그들의 고통과 혼란은 지속된다. 새희 또한 지우가 그랬던 것처럼 그를 찾아 나서지만, 또 다른 남성들의 시선과 욕망–따라서 이것은 ‘또 다른 새희’의 사랑에 대한 고통과 집착을 다른 한 면으로 한다–을 경험할 뿐, 그 어디에서도 지우를 확인할 수 없다. 결국 새희는 이러한 불확실성이 주는 고통과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또 다시 성형을 하고 세상 속으로 사라져 버린다.

사랑이라는 창을 통해서 정체성을 살피다

「시간」은 사랑이라는 익숙한 소재를 매개로 정체성의 문제를 정면에서 다루고 있다. 「시간」은 우리에게 한편으로 ‘오감과 이성’, ‘현상과 본질’의 관계를 연상시키게 하면서, 다른 한편 ‘그렇다면 나는 누구이며 나에게 사랑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계속 던지도록 만든다. 과연 시간 앞에서 ‘온전히 남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하지만 「시간」은 이에 답하지 않는다. 「시간」은 오감, 혹은 현상이 이성이나 본질보다 저열하다거나 그것의 외적 표현이라는 ‘위계성에 기댄 진부한 결론’을 말하지도 제시하지도 않는다. 김기덕 감독은 그의 다른 영화에서처럼 관객들에게 어떤 결론도 주입하지 않는다.

단지 그가 보여주는 것은 지금까지의 고통스런 현실이 되풀이되고 있다는 사실뿐이다. 이런 측면에서 엔딩크레딧 이후의 ‘결론과 해석’은 관객을 포함한 감상자, 비평가의 몫으로 남는다.

그의 작품 속에서 통상 다른 영화들에서 보이는 것과 같은 긴장과 갈등의 급격한 해소, 이른바 대단원이 희미하게 다가오는 까닭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그의 작품은 ‘끝이 곧 시작이다.’

「시간」에서도 지우와 세희의 고통은 마지막 순간까지 반복된다. 그리고 이 반복으로 인해 우리는 그들이 직면해 있는 고통이 그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들의 문제이기도 하다는 점을 명료하게 느낄 수 있게 된다. 그런데 바로 이 지점은 그의 작품에 대해 무언가 불편해 하는 많은 사람들의 ‘비판’, 나아가 ‘비난’이 증폭되는 곳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그 불편함은 어떤 요인들로부터 연유하는가.

그가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요인 두 가지

그 출발은 그동안 많은 평자들이 지적하였듯이 그가 이 사회 비주류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점에서 시작된다. 그의 영화 속에 포착되는 것들은 이 사회의 저변에 위치한 인생들, 그래서 무언가 결여된, 문제를 안고 있는 ‘열등하고 비정상적인 삶들’이다.

이런 측면에서 ‘정상적인 관계’ 속에 있다고 간주되는 이들에게 그들은 ‘쓰레기 같은 군상들’일 수 있으며, 그가 그들의 관계들, 삶에 주목하고 있다는 점에서 어떤 ‘인상비평’이 말하듯, 그의 영화는 ‘쓰레기 같은 영화’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여기에 그가 ‘아름다운 이야기’를 만들지 않는다는 것이 첨부되어야 한다. 그의 영화는 일상, 작은 것이 아름답다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에게 일상은 너무나 고통스럽다.

‘주류의 아름다움’에 익숙한 많은 사람들에게 김기덕이 그리는 그 고통스러운 일상의 삶들은 매우 불편한 것으로 느껴질 수밖에 없는데, 그 이유는 그가 담고 있는 그 저변의 삶이 기존의 통상적 규범들을 위협하며 넘나들고 미래를 불투명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그들이 「섬」, 「파란대문」, 「나쁜 남자」, 그리고 「사마리아」 등의 소재들과 그 속에서 이루어지는 소통의 방식에 대해 곤혹스럽고 불편해 하면서도,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 그리고 「시간」에 대해 ‘호의적인 반응’을 보이는 이유를 간파해 낼 수 있다.

불편함을 던져놓고, 절대 그냥 놔두는…

그런데 이런 요인들과 더불어 그들을 더욱 불편하게 만드는 것은 그가 이 불편함과 긴장을 계속 자극하기만 할 뿐 해소시켜주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더욱 불편하고 찜찜하다.

   
 ▲ 김기덕 감독의 영화 <나쁜 남자>

이러한 요인들로부터 기인하는 불편함은 「나쁜 남자」에서 극대화된 바 있다. 한기(조재현 분)의 선화(서원 분)에 대한 사랑은 왜 그토록 과도한 공격의 대상이 되는가. 

그것을 둘러싼 온갖 비난들은 그에 대한 규범적 판단 이전에 이 사회의 밑바닥 그늘에서 성장하여 사랑을 세련되게 표현하지 못하는, 즉 한기로 상징되는 ‘쓰레기 같은 군상들’에게는 그와 같은 사랑의 방식도 ‘사랑’일 수 있다는 점을 애초부터 배제한다.

그 이유는 「시간」에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사랑으로부터 진부함으로’ 나가는 지우와 세희의 관계가 그런대로 공감할 수 있는, 따라서 내면화된 통상의 규범을 자극하지 않는 것이라면, ‘사창가 양아치’와 ‘고상한 미술학도 여대생’의 낯선 만남과 모진 관계로 시작되는 「나쁜 남자」의 사랑은 일상적인 것으로 수용되는 그 어떤 규범과 긴장을 유발시키면서 불편함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로 인하여 「나쁜 남자」의 사랑이 변할 수 있다는 것조차 부정된다는 것이다. 거기에도 예외 없이 「시간」은 흐르고 있는데, 그들은 그 두 사람의 관계가 변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이미 변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왜 ‘나쁜 남자’는 ‘고상한 여대생’의 사랑을 받을 수 없는가. 이미 그들의 관계는 변하여 더 이상 선화에게 한기는 ‘나쁜 남자’가 아닐 수 있는데도 말이다. 그것은 ‘그 낯설고 폭력적인 만남’에 대한 그들의 부정적인 도덕의 잣대가 어떤 형태로든 모든 것을 변화시키는 ‘시간’의 발목을 잡고 놓아주지 않기 때문이다.

‘나쁜 남자’를 욕하기 위해 시간까지 묶어놓다

즉 그들은 시간을 되돌려 한기가 반성하고 그가 그들이 용인하는 일반적 규범의 경계 안으로 들어오지 않는 한 그를, 따라서 그 둘의 관계를 인정하지 않을 작정인 것이다. 하지만 김기덕 감독은 이러한 그들의 요구를 무시한다. 오히려 그 둘을 ‘이동하는 사창가’로 개조된 타이탄에 태워, 사창가에서 세상 속으로 내보냄으로써 그들의 불편함을 더욱 자극한다. 과연 그들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렇지만 중요한 것은 이러한 주관적 선호와 무관하게 「나쁜 남자」로 상징되는 그 ‘불편한 것’들이 지금 이 순간에도 끊임없이 재생산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그것들을 외면하고 싶어 하는 ‘불편한 사람들’ 또한 직간접적으로 거기에 개입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이처럼 김기덕 감독의 영화에는 언제 끝날지 모르는, 칼날 위에 서 있는 것과 같은 일상의 위태하고 불안한 삶들, 그 속에서의 크고 작은 비명, 흐느낌이 흐르고 있다. 그리고 그 고통은 「섬」, 「수취인불명」, 「해안선」에서처럼 소름끼칠 정도의 섬뜩한 영상들에 의해 극대화된다.

   
 

그리고 바로 이 점이 그의 영화를 거부하게 하는 또 하나의 이유로 추가된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이해할 수는 있지만, 그 섬뜩함 때문에 그에게 다가가는 것이 부담스럽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감성적 거부’에 대해 다른 연출자들의 작품에 나오는 더욱 섬뜩한 표현들을 들이대며 ‘그에게만 너무 민감한 거 아니야’라고 다그칠 필요는 없다. ‘타인의 취향’이니까.

섬뜩함을 타고 나타나는 불편함

하지만 이러한 여유가 지금 피사체가 된 현실이 그의 영상이 주는 충격보다 더 섬뜩하고 무섭고 모질 수 있다는 점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그의 표현방식 또한 이러한 현실을 부각시키기 위한 ‘그 나름의 취향’으로 존중되어야 하지만, 설사 그를 비판함으로써 그것을 순치시킬 수 있다고 하더라도, 또 그가 그런 방향으로 움직인다 하더라도 그 현실의 관계가 완화되거나 사그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상기하는 것은 중요하다.

이런 의미에서 김기덕 감독에게 그들이 기괴하다고 느끼는 ‘독특한 표현방식’은 선택적이고 부차적이다. 「시간」이 보여주는 상대적으로 정제된 영상, 유머의 출현 등을 지적하며 그것에 대해 대중에게 좀 더 가까이 접근했느니 무어니 하면서 ‘호감’을 보내는 평가들이 달갑지 않게 여겨지는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인적 선호를 넘어 그 섬뜩한 표현기법을 계속 문제 삼는다면, 그것은 현실을 어떤 통상의 정제된 영상, 이미지 속에 가두어 두고 싶어 하는, 혹은 가두어 둘 수 있다고 믿는 또 다른 관념, 이데올로기의 표현이라고 밖에 해석할 수 없다.

그렇다면 이제 「시간」은 무엇인가. ‘시간’은 단순한 물리량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 사회에 상존하는 다양한 관계들, 거기에 내재하는 긴장과 갈등을 매개로 계속 재구성되는 삶들의 변주를 통칭하는 또 다른 이름일 뿐이다.

따라서 만일 세희가 지우에게 낡은 것이 되어 버렸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사랑에 대한 그녀만의 병적인 집착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관계가 이미 그들이 사랑이라고 느꼈던, 과거의 그것과는 다른 ‘그 어떤 무엇’으로 변화되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일 뿐이다.

‘봄-여름-가을-겨울’ 그리고 ‘봄’인 이유

   
 

물론 그 변화는 동일한 의미와 무게로 다가오지 않는다. 그렇기에 시간이 가져다주는 낡음, 즉 그 관계의 진부함은 지우에게는 새로운 여인들에게 주는 눈길, 욕망의 계기로, 세희에게는 지우의 사랑을 독점하고픈 더욱 큰 ‘집착’의 계기로 다가온다.

하지만 이 순간 그들의 관계는 더 이상 그들 자신만의 관계가 아니다. 이미 거기에는 지우의 또 다른 눈길과 욕망, 그것을 차단하려는 세희의 ‘처절한 몸부림’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직간접적인 또 다른 익명 혹은 기명의 사람들과의 관계들이 병렬적으로 놓여있거나 착종되어 있다. 그렇기에 그들의 불안과 고통은 증폭된다.

그러면 이러한 상황으로부터 벗어날 수는 없는가. 「시간」은 그 대답 대신 ‘시간’을 상징하는 밀물이 이 연인들이 함께 했던 해변 조각공원의 흔적들을 삼키는 것과 함께 엔딩크레딧을 올린다. 그렇게 하여 썰물이 되면 그러한 관계들이 다시 반복될 것임을 강하게 암시한다.

거기에는 인간으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운명과도 같은 길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문제해소를 위해 성형은 계속 반복될 것이지만, 정작 문제는 해결될 것 같지 않다. 그렇게 시간의 끝은 보이지 않는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이다. 김기덕 감독의 영화는 여기까지이다.

현실에서 다시 시작되는 영화

하지만 이제 영화는 현실 속에서 다시 시작된다. 이제 그는 연출자가 아니라 ‘관객’ 내지는 대중이다. 그 밀물의 출렁거림은 영화관을 빠져나오는 이들에게 다가와 속삭인다.

‘너는 누구냐?, 너는 저 고통의 현실에 공감하고 있니? 과연 네가 현실의 진부하고 익숙해진 관계들로부터, 그 경계들로부터 뛰쳐나올 수 있을까? 어떻게? 모든 것을 놓치거나 버려야 될지도 모르는데.’

그의 역할은 현실과 만나는 곳에서 끝나고 이제 그 이후는 이 ‘시간’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채워야 할 몫으로 남는다. 이런 맥락에서 그는 문제를 드러내 보여주는 자이지 올바른 방향과 결론을 제시하는 계몽가, 교육자, 도덕론자가 아니다.

그렇다면 이 시간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사랑이라는 것, 세상이라는 것은 다 그런 거야!’ ‘사람은 다 똑같아’라고 스스로를 달래며 ‘시간’, 따라서 기존의 관계들을 타고 그냥 흘러갈 수 있다. 이렇게 하여 「시간」이 주는 불편함, 고통을 차단시키는 것이다.

하지만 이 방식은 불안과 고통을 내면에서 더욱 증폭시킬 터인데, 그러한 방식으로는 ‘시간’을 객관화시켜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거기에서는 변화의 수단으로서의 성형 그 자체가 시간, 즉 그들이 맺고 있는 관계들과 분리되어 목적이 되고 결국 ‘너와 나’는 시간의 주변을 맴도는 타자로 존재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만일 이것이 출구가 아니라면 어떻게 해야 하나. 이제 남은 것은 「시간」을 현실 속으로 가져와 적극적으로 대면하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성형을 통해 새로운 모습으로 나타난 세희의 등장이 아니라 이들의 단절된 관계를 상징하는 성형 이후 6개월이라는 바로 그 시간이다.

만일 성형이 그들 관계에서 형성된 아픔을 치유하는 나름의 의식이라면, 그 불안, 아픔이 만들어진 관계들과 단절된 상황에서 모색되는 치유행위는 그들의 ‘사랑’이 지속되든, 아니면 파국으로 귀결되든 어떤 능동적인 힘도 발휘하지 못한다.

결국 그것은 관계 속에서 형성된 아픔을 어느 일방의 책임으로 해소시킴으로써 그것을 우회하거나 외면하는 것으로 나타날 뿐이다. 그것은 지우의 성형, 또 다시 이어지는 새희의 성형처럼 고립된 자신의 세계 속에서 동일한 의식을 되풀이 하는 순환의 연속일 뿐이다.

김기덕이 가지고 있는 ‘민주주의자 기질’

그렇다면 지금 영화관 밖으로 나오며 「시간」에 불편해하거나 자극받았던 우리의 시선은 어디를 바라보고 그 발걸음은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 그 반복되는 ‘순환 고리’의 어디에서 숨쉬고 있는가.

감독 김기덕의 힘은 어떤 경계에 서서 끊임없이 우리를 불편하게 만드는 것에 있다. 그런데 그 경계는 대칭이 아니라 비대칭이고 거기에는 배제, 억압이 숨쉬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관계의 비결정성에 주목하는 민주주의자로서의 ‘기질’을 지니고 있다.

「시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거기에는 어떤 규범적 판단 이전에 ‘반복으로 비추어지는 일상 관계의 고정’에 대한 거부가 흐른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대단원의 결말을 통해 현실의 고통과 불만을 해소시켜주는 영화와, 고통의 현실을 마지막까지 보여주면서 그 어떤 결론도 내리지 않은 채, 그것이 재생산되는 영화 밖 현실로 이어지게 하는 영화 사이의 차이를 발견하게 된다.

바로 여기에 그의 빛남이 있다. 삶의 무게에 눌린 다수의 사람들은 영화 속에서마저 긴장과 고통으로 숨죽이다가 그것을 짊어지고 극장 밖 현실로 나가고 싶어 하지 않는다. 바로 이것이 김기덕 감독이 다루는 소재와 이야기, 표현 방식에 대해 불편함을 느끼는 진정한 비밀의 거처인지 모른다.

김기덕을 불편해하는 진정한 비밀의 거처

그들은 그냥 시간을 따라 흐르고 싶은데, 그는 저 마음 깊은 곳에 똬리를 틀고 호시탐탐 시간의 경계를 넘고자 하는, 따라서 새로운 관계를 모색하고자 하는 욕망을 계속 자극하면서 불편하고 불안한 상황을 조성하기 때문이다. ‘익숙한 것’에서 이탈하여 ‘낯선 것’과 대면할 것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처럼 익숙한 경계를, 그것을 떠받치는 기존의 통상적 관계들을 문제시하는 주체들은 많지 않다. 그리고 그러한 문제의식을 자신의 것으로 수용하고자 하는 사람들 또한 마찬가지이다. 이것이 그의 작품이 ‘관객빈곤’에 시달리는 가장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일 터인데, 아이러니하게도 그를 옹호하는, 혹은 비난하는 사람들 가운데 적지 않은 이들은 그 이유를 그의 작품이 ‘예술영화’이기 때문이라는 진단으로부터 끌어내고자 한다. 그리고 그들은 ‘해외영화제를 누비며 국위선양하는 그와 같은 영화감독이 한 사람쯤 있는 것도 좋지’라는 반응으로 그의 위상을 규정한다. 다 좋다. 나름대로 일리는 있고 취향이니까.

하지만 이렇게 하여 그는 다시 한번 ‘대중’과 거리가 먼 기이한(grotesque) 존재로 규정된다. 하지만 대중들은 알지 못한다. 그와 같은 평가, 규정이 대중의 고통스런 현실을 그린 ‘예술작품’을 알아보지 못하는 바로 대중 자신에 대한 ‘조롱’이라는 것을.

이런 측면에서 진정 대중의 수준을 비하하는 것은 김기덕 감독이 아니라 바로 그와 대중을 갈라놓으려는, 그것이 ‘예술영화’임을 판별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그 고상한 분들’이라는 점을. 나아가 이러한 평가와 규정은 김기덕 감독이 한국영화의 구색 맞추기를 위한 잔여범주로서 존재해야 할 뿐 결코 ‘주류’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의미를 함축하는 것이기도 하다.

대중 수준을 비하하는 ‘고상한 자’들

   
 

이것은 그들이 대중성 운운하지만, 정작 대중은 주체가 될 수 없다는 그들의 숨기고 싶은 진의를 드러내주는 것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대중이 그를 특이한 존재로 보지 않게 될 때, 즉 그가 다루고 있는 관계들이 자신들의 이야기임을 알게 될 때, 어떤 방식으로든 대중은 지금 이 순간 당연한 것으로 수용되는 통상적 사회관계들의 경계를 재구성하고자 할 것이기 때문이다.

현실이 이와 같기에 김기덕 감독의 영화를 쓰레기라고 한 인상비평에 대해 ‘맞아! 쓰레기야’라고 응답한 그의 ‘자학적 반성’을 비대칭적인 현실과 그 사이의 놓여 있는 완고한 경계에 대한, 진정 누가 자신들을 비판하고 있는지 알지 못하는 대중들에 대한 우회적 문제제기로 해석하며 받아들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바로 그 현실이 너무 완고하기에 그의 ‘민감한 반응’을 접하며 ‘불편한 존재’로서의 그가 좀 더 의연히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 모습을 보여주었으면 하고 기대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시간」이 아니라 ‘시간’이 필요하기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영화를 ‘쓰레기’라고 한다면, 이 세상은 진정 향기로운가. 당신들의 ‘시간’은 고상하고 아름다운가. 정작 두려운 것은 그 시간이 불편하다는 것을 이유로 시간의 끝을, 혹은 시간을 고정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그의 발상을 고정시키고, 그를 둥그스름하게 만들고자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여 기존 관계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소통, 나아가 새로운 관계의 재구성에 대한 시도 자체를 봉쇄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의 주장이 옳은지 여부는 접어두더라도 그가 한국영화산업에 말하고자 하는 ‘고통’을, 혹은 기존의 관계 속에서 억압받고 배제된 이들이 호소하는 ‘고통’을 그 자체로 진지하게 바라보지 않는 이 단절된 사회관계들이 ‘정상적인 것’으로 통용되는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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