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방군, 스자좡을 점령하다
    [국공내전 ㉙] 연재를 다시 시작하며
        2020년 04월 01일 12:34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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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공내전 연재를 다시 시작합니다.

    2019년 6월, 건강 문제로 중단되었던 국공내전 연재를 다시 시작합니다. 오랜 기간 글을 쓰지 못해 집필에 어려움이 많았습니다만 다시 중단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그동안 내전기를 읽어주신 독자들을 위해 지난 줄거리를 요약하여 싣습니다.(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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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줄거리>

    1945년 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패망하자 국공 양당은 주도권을 잡기 위해 분주히 움직인다. 중국 대륙에서 서남쪽은 국민당이 일본군에 저항하며 통치권을 행사하였다. 하지만 산둥, 화북, 서북, 동북 등 일본군 점령지에서는 공산당이 해방구를 확대하며 다가올 내전에 대비하고 있었다. 공산당은 뒤늦게 참전한 소련군과 협력하며 공업의 중심지인 만주를 선점하였다. 공산당 근거지 부근 곳곳에서 뒤늦게 진주해온 국군과 치열한 힘겨루기가 벌어졌다.

    중국에 안정된 연립정권 수립을 바라는 미국의 희망에 따라 국공을 중심으로 연립정부 구성에 대한 협상이 이어졌다. 옌안의 마오쩌둥이 충칭까지 날아가 장제스와 협상에 나섰지만 협상은 지지부진했다. 큰 틀에서는 합의했지만 근거지와 군사문제 등 핵심적인 부분에서 의견이 전혀맞지 않았던 것이다. 협상 과정에서도 군사적 충돌을 멈추지 않았던 국공은 1946년 본격적인 내전에 돌입한다.

    1946년 6월 하순, 국민당은 공산당 중원 해방구에 대하여 전면 공격을 감행하여 내전의 포문을 열었다. 압도적인 병력의 열세로 첩첩이 포위당한 중원의 공산당군은 국민당 내부의 첩자 덕분에 공격 정보를 입수하여 간신히 포위망을 뚫고 화북 및 서북, 그리고 쓰촨 쪽으로 탈출한다. 동북에서도 뒤위밍 휘하의 국민당군은 전격적인 공격전술을 택해 린비아오의 공산당군을 쑹화장 너머 하일빈 쪽으로 밀어 붙인다. 이때 국군은 공산당군을 섬멸할 절호의 기회를 잡았으나 미국의 중재로 휴전이 성립되어 쑹화장 남쪽에서 회군한다. 산둥에서도 국군이 천이와 쑤위의 공산당군을 밀어붙인다. 이때 중원 남부에서는 쑤위의 부대가 장링푸 등의 국군에 밀려 산둥 쪽으로 후퇴하여 천이의 부대와 합세하여 대항한다. 쑤위의 부대가 치고 빠지기 식으로 작은 승리를 거듭하지만 국군은 대범하게 밀어붙여 산둥의 공산당군은 중심도시인 린이를 빼앗기는 지경에 이른다. 화북에서도 푸쭤이 등의 국군부대가 화북 해방구 근거지인 장자커우를 빼앗는 등 연승을 거듭한다. 결국 1947년 3월이 되면 공산당은 수도인 옌안까지 빼앗기고 지도부를 둘로 나누게 되었다.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 런비스 등 중앙 지도부는 후쫑난 휘하의 국군 부대의 추격을 따돌리며 일 년간 섬북을 전전하게 된다. 주더, 류샤오치 등은 화북의 국군에 합류하여 토지개혁과 전황 호전을 모색하게 되었다.

    1947년, 쫓기는 와중에서 반전을 모색하던 마오쩌둥은 류보청, 덩샤오핑 부대에게 적지 한복판인 따베산으로 진격하라는 기상천외의 반격전략을 구사하게 한다. 산둥에서도 국군 정예부대인 장링푸를 전사시키는 등 전황이 교착상태에 빠지게 되고 동북에서도 린비아오가 파상공세를 펼치며 세력을 회복해 간다. 화북에서도 네룽전, 천겅 등이 치고 빠지는 전투를 통해 국민당군을 소모시키며 전황을 교착상태로 만들었다. “땅에 연연하지 말고 적을 소모시키라. 패하는 전투를 하면 안 된다. 단위 전투에서는 네 배 정도의 압도적인 병력으로 적을 섬멸하라. 성을 포위하고 구원 오는 적을 공격하라.”는 식의 마오쩌둥의 전략과 해방군의 득의의 전술로 전쟁에서 점차 주도권을 되찾게 된다. 한편 서북에서는 펑더화이의 서북 해방군이 열배가 넘는 후쫑난 부대를 피해 다니며 운동전으로 싸운다. 국군은 압도적인 병력과 장비의 우세 속에서도 미국의 견제, 파벌 간의 세력다툼, 직계군과 잡패군 사이의 불화, 국군 수뇌부에서 암약하는 첩자들에 의한 정보의 누설등으로 결정적인 승기를 잡지 못한다.

    마오쩌둥은 섬북을 전전하는 조건 속에서도 토지개혁과 민주연합 정부 구성 등 농민과 학생, 지식인들의 마음을 사기 위한 정치공세를 거듭한다. 이 과정에서 각지의 해방군 부대들도 교착상태에서 점점 전쟁의 주도권을 쥐게 된다. 동북에서는 두위밍에 이어 참모총장인 천청이 직접 국군을 지휘했으나 연전연패하여 웨이리황에게 물려주고 참모총장직에서도 해임된다. 산둥과 중원, 화북의 해방군은 중원에 대한 합동작전을 통해 국군의 부대배치를 교란하며 주도권을 되찾는다. 서북에서도 천겅과 펑더화이가 국군 부대들을 격파하며 후쫑난 휘하 부대를 위축시킨다. 그리고 마침내 화북에서 전황 타개의 중요한 전투를 치르게 된다. 스쟈좡 전투가 바로 그것이다.


    제29회 해방군 스자좡을 점령하다.

    장제스, 뤄리롱의 진언을 묵살하고 칭펑덴에서 패하다.

    린비아오가 동북에서 한창 하계공세를 펼치고 있을 때 화북에서도 해방군이 국군을 공격했다. 그러자 국군 베이핑 행원 주임 리쫑런은 휘하 부대 7개군 32개 사단(여단 규모)을 베이핑, 텐진, 바오딩 등 삼각지역으로 수축 이동시켰다. 베이핑, 텐진, 바오딩 지역을 강화하고 교통이 편리한 조건을 이용하여 기동작전을 벌이려는 것이었다. 병력이 집중되자 여차하면 동북을 증원할 태세도 갖추었다. 남은 3개군은 스쟈좡을 수비하게 하였다. 화북에는 공산당 산하의 해방군 진찰기 군구가 자리잡고 있었다. 진찰기 해방구는 산시, 차하르, 허베이성 일대를 관할했는데 네룽전이 줄곧 사령원을 맡고 있었다. 하지만 그 무렵 화북지역은 총사령인 주더가 전쟁 지도를 맡고 있었다.

    마오쩌둥과 중앙은 옌안이 점령당하기 전에 주더와 류샤오치 등 공산당의 정치 및 군사 지도부를 나누어 화북으로 보냈다. 주더를 화북으로 보낸 데에는 네룽전 등 화북의 군사 지도부에 대한 불만도 있었다. 네룽전 휘하의 해방군이 국민당 수성명장 푸쭤이에게 패하여 진찰기 해방구의 근거지인 장자커우를 빼앗기고 결국 화북의 주도권을 내줬던 것이다. 그 여파로 홍색 수도인 옌안을 빼앗기고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 런비스 등은 일년 넘게 섬북을 전전하는 신세가 되었다. 펑더화이가 지휘하는 섬북의 해방군은 열배가 넘는 후쫑난군에게 밀려 황무지로 피해 다니며 악전고투를 거듭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마오쩌둥과 중공 중앙은 진찰기 군구와 야전군을 분리하여 군구는 네룽전이 그대로 맡고 야전군은 양더즈(陽得志)에게 맡겼다. 그래도 해방구와 야전군을 전체적으로 통할하는 것은 군구 사령원 네룽전이었다.

    양더즈와 가족

    양더즈는 1928년 혁명에 참가한 뒤 분대장부터 출발하여 지역의 전투 사령원으로 승진한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양더즈는 장정 시절 구이저우성에서 우강(烏江) 도하를 지휘하여 국민당군에 쫓기던 홍군 본대를 위기에서 벗어나게 하였다. 그때 양더즈는 결사대를 조직, 대나무 뗏목을 타고 대안의 국민당군 진지에 돌격하게 하였다. 첫 번째 결사대는 뗏목이 뒤집히는 바람에 몰사했지만 두 번째 부대가 도하에 성공하여 대안의 진지를 빼앗았다. 홍군이 따두허(大渡河)를 도하할 때도 그가 직접 지휘하여 한 척만 있는 나룻배를 탈취, 홍군을 도하하게 하였다. 중일전쟁 시기에 양더즈는 국공이 함께 작전했던 핑싱관 전투에 참여하여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이처럼 양더즈는 위험천만하고 아슬아슬한 작전을 도맡아 지휘했다. 마오와 공산당 중앙도 그런 공을 인정하여 화북 해방구의 야전군 사령원 자리에 임명한 것이다. 양더즈는 마오쩌둥이 훗날 “이 사람이 바로 따두허 도하를 지휘한 연대장이다. 조선 인민지원군 부사령도 맡았다. 양더즈는 펑더화이의 조수고 내 고향 사람이다.”라고 칭찬한 일이 있었다. 양더즈의 고향이 후난성 주저우(株洲)였던 것이다.

    양더즈는 연대장 시절 국민당군 마훙빈(馬鴻賓) 휘하의 맹장 예청장(冶成章)과 싸운 일이 있었다. 양더즈의 부대는 1936년 간쑤성 칭양(慶陽)의 취즈(曲子)성에서 악전고투 끝에 예청장 부대를 섬멸하고 예를 사로잡았다. 예청장이 끝까지 저항하다 수류탄 파편에 다리를 다쳤던 것이다. 그때 예는 “나는 운이 없었을 뿐이다. 죽일 테면 죽이든지 마음대로 하라.”고 버티었다. 양더즈는 참을성 있게 예를 설득하여 감화시킨 뒤 놓아 보냈다. “우리는 부득이해서 당신들을 친 것이다. 당신들은 왜 우리와 힘을 합해 일본 침략자들하고 싸울 생각은 하지 않는가? 당신들은 인민들을 못살게 한다. 인민들의 양과 소를 빼앗고 우리 홍군을 공격한다. 그래서야 되겠는가?” 그리고 예전에 자신이 잡았던 국군 연대장에게 은화 세 잎을 주어 놓아 보낸 일을 설명했다.

    예청장의 부인이 금붙이 등 장신구를 내놓으며 살려달라고 하자 “우리 홍군은 그런 것 필요 없다. 함께 일본군하고 싸우기만 하면 된다. 우리는 한번 말하면 책임을 진다. 그대로 놓아 보내겠다.”고 하자 예청장이 감복했다. 예는 양더즈에게 무릎을 꿇고 사례하더니 떠나갔다. 예는 곧바로 군복을 벗었으며 훗날 국공내전 끝무렵에 마훙빈을 설득하여 기의하라고 권했다고 한다. 제 2차 국공합작이 이루어진 직후라서 가능한 일화였을 것이다. 양더즈가 사령원에 오를 무렵 화북 야전군의 정치위원은 뤄루이칭, 제2정치위원은 양청우가 맡고 있었다. 모두 장정과 항일전쟁, 내전을 함께 경험한 역전의 맹장들이었다.

    1947년 9월 중순 동북 민주연군이 추계공세를 시작하였다. 그러자 화북의 국민당군은 6개 사단을 베이핑-선양의 철로선과 산하이관 밖으로 이동시켰다. 중공 중앙은 국민당군의 동북 증원 움직임을 견제하려는 의도 아래 화북의 해방군에게 작전명령을 내렸다. 명령의 요지는 “지금 국군이 병력을 이동시켜 화북지역이 비어 있다. 주도적으로 작전을 펼쳐 적이 이동할 때 섬멸하라.”는 것이었다.

    군구 사령원 네룽전은 즉시 양더즈에게 뤄루이칭, 양청우와 함께 야전군을 지휘하여 바오딩 북쪽 쉬수이(徐水)를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쉬수이를 점령하면 곧바로 바오딩을 위협하게 된다. 바오딩은 베이핑과 스쟈좡의 중간에 있는 요충지로 이곳을 잃게 되면 스쟈좡이 고립되는 것이다. 네룽전은 또 쉬수이를 포위하면 반드시 국민당군의 구원군이 올 것이므로 구원군을 이동 중에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성을 공격한 뒤 구원군을 공격하는 해방군 득의의 전술을 쓰려는 것이었다.

    10월 11일 해방군이 쉬수이성을 맹공하기 시작했다. 해방군은 성을 공격하는 한편 병력을 따로 배치하여 쉬수이성 북쪽에서 지원군을 요격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일부 병력으로 쉬수이성 남쪽에서 바오딩의 국군을 견제하게 하였다. 국군 바오딩 쑤이징 공서 주임 쑨롄중(孫連仲)은 이같은 해방군의 움직임을 난징에 있는 장제스에게 즉각 보고하였다. 장제스는 베이핑에서 군사회의를 소집하였다. 베이핑 행원 주임 리쫑런(李宗仁)과 바오딩 주임 쑨롄중을 비롯하여 군단장 및 사단장 등 고위 장교 40여명을 모아 대책을 숙의하였다.

    당시 국군은 기동할 수 있는 병력이 부족하였다. 내전 발발 뒤 전사나 부상, 포로와 탈영 등으로 백만명 가까운 병력이 줄어들었던 것이다. 장제스는 부득이 스자좡 지역에 있는 병력을 이동하여 증원할 태세를 갖추게 하였다. 그런 한편으로 스자좡이 전략적 요충지이므로 스자좡의 수비도 튼튼히 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장제스는 스자좡을 수비하던 3군단장 뤄리롱(羅厲戎)에게 스쟈좡을 고수하는 한편 1개 사단을 빼내어 기동사단으로 편성하라고 명령하였다. 뤄리롱은 적은 병력으로 스쟈좡도 수비하고 기동병력도 편성하는 것은 어려움이 많으니 부대를 바오딩으로 이동하는 게 좋다고 진언하였다. 그러나 장제스는 뤄리롱의 진언을 듣지 않았다.

    12일까지 해방군은 2개 여단 병력으로 쉬수이성을 맹공하였다. 하지만 국군 1개 연대와 1개 포병중대의 적은 병력이 지키는데도 성을 함락시킬 수 없었다. 국군은 6개 연대와 전차연대를 동원하여 베이핑-한커우 간 철도를 통해 지원하러 왔다. 또 4개 연대가 동쪽 신청(新城) 방향에서 지원하러 왔다. 해방군이 지원군을 요격하여 이들 사이의 전투도 교착상태에 빠졌다. 그때 바오딩 쑤이징 공서 쑨롄중이 3군단장 뤄리롱에게 병력을 바오딩으로 북상시키라고 명령했다. 베이핑과 텐진에서 출격한 국민당군과 함께 해방군을 바오딩 북쪽 지역에서 협공하려는 것이었다.

    교착상태에 빠진 전황을 타개하고자 골몰하던 해방군 지휘부는 3군을 포착 섬멸하기로 결정했다. 해방군 지휘부는 일부 병력을 주력으로 위장하여 쉬수이성을 계속 포위 공격하는 한편 일부 병력과 민병들에게 국군 3군의 전진을 교란, 지연시키라고 명령하였다. 그리고 2개 종대 병력을 은밀히 이동시켜 칭펑덴으로 강행군하게 하였다. 해방군은 하룻밤 사이에 120리를 구보로 돌파하여 마침내 칭펑덴에서 3군을 완전히 포위했다. 불의에 습격당한 뤄리롱은 완강하게 저항하면서 베이핑과 바오딩에 구원을 요청하였다. 장제스는 지원 오는 국군에게 쉬수이군을 증원하고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남하하여 3군의 포위를 풀라고 명령하였다. 그러나 국군 지원군은 이미 각로에 배치된 해방군 요격부대의 저지를 받아 3군에 접근하기가 어려웠다. 21일부터 22일까지 총공격을 퍼부은 해방군의 공세에 3군은 완전히 섬멸 당했다. 군단장 뤄리롱을 비롯한 1만 1천명이 포로로 잡혔다. 해방군도 전투에서 전상자가 9천여명을 넘었다. 짧은 기간이지만 전투가 매우 치열하고 참혹했음을 말해준다.

    장제스는 뤄리롱의 진언을 묵살함으로써 3군이 이동 중에 공격받을 수 있는 위험을 자초하였다. 뤄의 요청대로 미리 바오딩에 배치되어 있었다면 쉬수이성의 지원도 한결 쉬웠을 것이다.

    뤄리롱은 황푸군관학교 2기생으로 군벌전쟁과 항일전쟁에서 역전의 경험을 쌓은 맹장이었으나 이 전투로 포로가 되었다. 이로써 진찰기 군구 야전군은 스자좡 공격에 중요한 교두보를 확보하였다.

    칭펑덴 전투 뒤 네룽전등이 포로가 된 국군 지휘관 뤄리롱과 대화하고 있다

    뤄리롱 포로가 된 뒤 “나는 쓰촨 사람이다. 고추가 먹고 싶다.”

    칭펑덴 전투에서 패하여 포로가 된 뤄리롱과 화북군구 총사령인 네룽전은 본래 사제관계였다. 뤄리롱이 황푸군관학교에서 생도로 있을 때 네룽전이 교관이었던 것이다. 뤄리롱은 포로가 된 뒤 쪽지를 써서 간수에게 청하였다. “나는 쓰촨 사람이다. 고추를 먹고 싶다. 여기 음식은 고추라고는 찾아볼 수 없으니 너무 힘들다. 내가 밥을 해먹으면 안되는가? 이 쪽지를 당신네 사령에게 전해 달라.” 간수가 쪽지를 네룽전에게 전하자 위와 같은 내용이 적혀 있었다. 네룽전은 “음, 과연 뤄리롱이구먼” 하고 미소를 지었다. 네룽전은 뤄리롱이 자신을 만나고 싶어하는 것을 알았다. 뤄리롱과 네룽전은 모두 동향으로 충칭시 장진(江津) 사람이었던 것이다. 며칠 뒤 네룽전과 화북군구 부사령원인 뤄루이칭이 전선지휘소에서 뤄리롱을 만났다.

    “자네 3군을 지휘하는데 북벌할 때 기세가 어디로 갔나? 쑨촨팡을 칠 때 그 기세 말일세.”

    “없습니다. 그런 거.” 북벌할 때 네룽전은 뤄리롱과 함께 쑨촨팡을 공격하러 간 일이 있었다. 그때 뤄리롱이 용맹하게 싸운 일을 말한 것이었다. 네룽전이 뤄리롱과 대화할 때 옆에 있던 뤄루이칭도 황포 졸업생이었다. 그밖에도 서너명의 황푸 졸업생들이 해방군 지휘관으로 동석하였다. 네룽전은 뤄리롱 등 옛날 제자들에게 한참동안 이야기했다. “정의의 전쟁을 할 때는 인민들이 먹을 것을 들고 환영하거나 송별해 준다. 그런데 국군이 지나가면 냉냉하기 이를 데 없다. 이걸로 전쟁의 승패가 정해진 것 아닌가?

    그후 뤄리롱은 전범 수용소에 갇혀 10년 넘게 복역했다. 1960년 연말에 특사로 풀려나 다시 신정부에 기용되었다. 아마 네룽전 등 황푸시절 함께 했던 인연이 작용하였을 것으로 판단한다.

    해방군 대도시 스쟈좡을 공격 점령하다.

    스쟈좡은 허베이성의 성도이다. 인구는 1,100만명이며 베이징을 품고 있는 허베이성 성도이니 그 중요성은 다시 말할 필요가 없다. 일찍이 한나라 때 상산군으로 불렀으니 삼국지에 등장하는 상산 조자룡이 바로 스쟈좡시 딩타이(定太)현 사람이다. 스쟈좡은 전투 당시만 해도 스먼(石門이)라 불렀다. 스쟈좡이라는 이름으로 부른 것은 해방군이 도시를 함락한 뒤 한 달 조금 지난 1947년 12월부터이다. 스쟈좡은 베이핑,광저우,상하이,타이위안 및 산둥성 더저우(德州)등 주요 도시로 통하는 철도가 놓여있다. 철로는 물론 도로의 교차점이며 화북의 요지이다. 스쟈좡을 잃는다면 화북에 대한 통제권을 잃는 것이나 마찬가지여서 장제스는 특히 이 도시를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국민당군은 이전에 일본군이 구축한 공사를 기반으로 보강공사를 벌여 1947년이 되면 이미 원형의 완전한 방어체계를 구축하였다. 시 교외에서 시내 중심으로 넓이 8미터, 깊이 6미터의 바깥 해자와 넓이와 깊이 5미터의 시 안쪽 해자, 시내 주요 건물을 골간으로 하여 3중 방어진지를 갖추고 있었다. 보루는 크고 작은 것이 모두 6,000여개에 이르렀다. 시의 원형철로에는 6량의 장갑차가 있었으며 1개 탱크 중대가 있어 기동작전이 가능하였다. 시 동북쪽은 감제고지인 윈판산에 의지하고 있었고 서북쪽에는 군용 비행장이 있어 공중지원이 편리하였다. 1947년 10월, 스쟈좡을 수비하는 국민당군은 제3군 32사단과 2개 보안연대, 그리고 인근 19개 현의 보안대대였다. 그러나 칭펑덴에서 패배하여 스쟈좡은 고립되어 있었다. 11월초, 바오딩 ‘쑤이징 공서(保定“绥靖”公署)의 제3군 포병대대가 스쟈좡에 공수되어 왔다. 스쟈좡 총병력은 2만 4천명에 이르렀다.

    해방군 처음으로 대도시를 공격 점령하다.

    1947년 10월 22일, 칭펑덴 전투가 끝나던 날, 진차지 군구 사령원겸 정치위원 네룽전은 중공 중앙군사위원회에 스쟈좡 공격을 건의하였다. 중원 야전군 3개 종대와 6개 독립여단으로 하여금 승세를 타고 스쟈좡을 빼앗자는 것이었다. 중앙군사위원회는 즉각 이 요청을 승인하였다. 인민해방군 총사령 주더가 류샤오치와 함께 네룽전의 건의를 수락할 것을 마오쩌둥에게 요청하였다. 주더는 일찍부터 텐진, 바오딩, 스쟈좡의 삼각지역과 스쟈좡 공격을 주장해 왔다. 마오쩌둥은 곧바로 승인했지만 주더에게는 최전선으로 나가 시찰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마오의 허락이 떨어지자 화북 해방군은 전광석화처럼 빠르게 준비에 들어갔다. 주더는 마오의 당부에 고개를 흔들었다고 한다. 그는 상대적으로 안전한 기중(冀中: 허베이 중부를 관할했다.)군구 소재지인 허젠(河澗)으로 가라는 군 고위 지휘관들의 요청에 “당신들도 모두 여기 있지 않느냐? 내가 여기 함께 있다고 해서 적기가 나를 찾아내라는 법이 있느냐?” 하며 지휘소에 머물렀다. 하지만 작전회의 뒤 양더즈가 극력 간청하자 “야전군 사령이 총사령을 쫓아내는데 방법이 있느냐? 기중군구로 가겠다.”고 허락하였다. 주더는 양더즈 등 지휘관들에게 “이번 작전은 공병이 중요하다. 폭약과 공성에 필요한 장비를 충분히 확보해야 한다. 그리고 인민들을 움직여 물자 등 운반을 원활하게 해야 한다. 노동운동을 조직해서 부상병 호송 및 치료 등에 협조하게 해야 한다. 해방군 장병 가족들에게 식량등 생활을 미리 보살펴 마음놓고 싸울 수 있게 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해방군 전선 지원에 나선 인민들

    10월 25일, 인민해방군 총사령 주더가 출석한 가운데 진차지 야전군 작전회의가 열렸다. 주더는 “용감함에 기술을 더하자.”고 호소하였다. 스쟈좡이 대도시이고 방어설비가 튼튼하므로 토목공사 및 폭파 등 공병들의 활약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것이다. 야전군 사령관 양더즈, 정치위원 뤄루이칭, 제2정치위원 양청우 등은 작전계획을 숙의하였다. 그들은 “진지전을 주요한 공격전술로 한다.”고 확정하여 차근차근 공격하는 방침을 채택하였다. 갱도작업을 통해 보루에 접근하고 폭약을 써서 폭파하며, 포격을 보조수단으로 수비군의 공사를 각개 격파하기로 하였다. 그 뒤 보병돌격으로 수비군의 진지를 빼앗기로 하였다. 편성된 공격군은 8만명이 넘었다. 수비군에 비하면 압도적으로 우세한 병력이었다. 해방군은 바오딩 쪽에 요격부대를 배치하여 지원군을 차단하게 하였다. 그리고 칭펑덴 전투에서 잡힌 국군 장교 및 사병 1천명을 감화시킨 뒤 석방하여 스쟈좡으로 돌려보냈다. 수비군의 사기를 와해시키려는 치밀한 심리전을 펼친 것이다. 그리고 진찰기 해방구 내 민병과 노무자 10만명을 소집하여 담가 1만개, 우마차 4천대로 작전을 지원하게 하였다.

    해방군은 11월 4일 공격을 시작하여 스쟈좡을 사면으로 완전히 포위했다. 거점을 차근차근 공격하며 빼앗아 나가는 처절한 전투의 연속이었다. 스쟈좡이 공중지원에 의존하고 있으므로 비행장이 가장 먼저 공격대상이 되었으며 감제고지인 윈판산(云盤山)도 주요 공격대상이 되었다. 아무리 수비가 튼튼해도 고립되고 열세에 놓이면 힘을 잃게 마련이다. 비행장, 감제고지와 외곽진지가 차례로 점령되고 발전소가 포격되어 전기도 끊겼다.

    지휘관인 류잉이 마지막까지 독전하며 저항을 멈추지 않았지만 11월 11일 스쟈좡 성의 해자가 돌파되어 방어선이 무너졌다. 그리고 12일 마지막 저항거점인 따스차오(大石橋)까지 점령하여 스쟈좡시를 함락하였다. 국군 경비 사령관 류잉을 비롯하여 2만 4천 병력이 모두 섬멸되었다. 이 전투에서 해방군 전상자가 6천명인데 비해 국군이 3천명인 것을 보면 공격군의 피해가 훨씬 컸음을 보여준다. 나머지 국군은 모두 포로가 되었다. 해방군은 탱크 9량, 화포 100여문을 노획했다. 또 모터사이클, 자동차와 군용물자를 대량으로 노획했다. 공산당은 스쟈좡이라는 화북의 전략적 요지를 점령했으며 진찰기(晉察冀)와 진기로예(晉冀魯豫) 해방구를 하나로 연결하였다. 그리고 인민해방군이 중요한 도시를 처음으로 빼앗는 선례를 남겨 그후 도시작전에 중요한 경험을 얻게 되었다.

    푸쭤이에게 잇따라 패배하여 체면을 구겼던 네룽전과 양더즈, 양청우, 뤄루이칭 등 화북 해방구의 해방구 지휘관들은 칭펑덴과 스쟈좡 전투에서 승리하여 완전히 어깨를 펴게 되었다. 마오쩌둥과 중공 중앙은 축하전보를 보내 스쟈좡 함락을 치하했다. 마오쩌둥은 1947년 12월 섬북 미즈(米脂)현에서 열린 회의에서 ’지금의 정세와 우리의 임무‘라는 보고를 통해 스쟈좡 전투를 총괄했다. “공성전에서 적의 수비가 취약한 거점이나 도시는 반드시 빼앗아야 한다. 적의 수비가 어느 정도 강하면 기회를 보아 빼앗아야 한다. 적의 수비와 설비가 강한 곳은 조건이 성숙한 뒤에 빼앗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조건과 상황에 따라 신축자재한 것이 마오쩌둥 전술의 특징인데 공성전에 대한 전술도 유연하였음을 볼 수 있다.

    한편 장제스는 베이핑 행원에서 군사회의를 열어 스쟈좡 실함의 원인을 검토하고 대책을 논의하였다. 이 자리에서 바오딩 쑤이징 공서 주임인 쑨롄중이 사의를 표했다. 쑨롄중은 “소직은 무능해서 지금과 같은 엄중한 형세를 감당할 수 없다. 장위안(張垣:장자커우의 별칭) 쑤이징 공서 주임인 푸쭤이 장군에게 맡길 것”을 청원했다. 장제스는 이 자리에서 베이핑 행원, 장위안 및 바오딩 쑤이징 공서를 통합하여 ’화북 초비총사령부‘로 개편하고 푸쭤이를 총사령에 임명했다. 장제스의 직계가 아닌 변방의 장수 푸쭤이를 화북의 군사책임자로 임명한 것은 장제스가 스쟈좡 실함을 얼마나 심각하게 받아들였는지를 알 수 있다. 푸쭤이는 총사령에 임명된뒤 지역방어 방침을 채택하였다. 주력을 각 전략적 거점에 집중시켜 베이핑과 텐진, 바오딩 삼각지역을 확보하려는 것이었다. 연말에 화북의 양더즈가 지휘하는 진찰기 야전군이 동북 민주연군의 동계공세에 호응하여 군사를 일으켰을 때 푸쭤이는 주력을 남하시켜 곧바로 대응했다. 이로써 동북에 이어 화북도 공산당이 군사적 주도권을 쥐고 장제스를 압박하게 되었다.

    베이핑 간첩사건 중공 지하 비밀공작을 뒤흔들다

    쑨롄중이 갑자기 사임을 결심하게 된 데에는 칭펑덴과 스쟈좡 싸움의 패배 이외에도 ’베이핑 간첩단 사건‘이 중요한 원인으로 작용했다. 1947년 9월 29일 상하이 ’시대일보‘는 다음과 같은 충격적인 소식을 전하였다. “허베이 쑨롄중의 부하인 정치부 주임 위싱친(餘興欽)과 인사조 주임 세즈옌(謝子延)이 27일 새벽 중앙정부 당국에 체포되었다.” 두 사람 외에도 국민당 12전구 사령부 작전처장 셰스옌(謝社廉), 고등참모실 주임 위신칭(餘心清)이 체포되었으며 그밖에도 베이핑 행원,동북 행원, 푸쭤이 부대의 소장급 장교 등 모두 22명의 고급장교가 체포되었다. 이 신문은 이 사건에 대하여 이렇게 논평하였다. “정치평론가들은 이 사건을 화북 내전에 대한 통제가 강화되는 것이며 난징의 작전에 열심히 하지 않는 자들을 제거하는 것이라 보고 있다.” 잡힌 이 가운데 리정쉬안(李政宣)이 그날로 투항하였다. 리가 심문 중에 공산당 조직의 기밀을 모두 불어 버렸던 것이다. 이삼일 동안 중공 베이핑 지하정보 조직원 20명 이상이 체포되었다. 션양, 청더의 비밀 무선전신국도 적발되었다.

    중공 중앙은 9월 28일 이 소식을 확인했다. 저우언라이 연보 중 1947년 9월 28일자에는 이렇게 실려 있다. “UPI 통신 (United Press International: 미국의 통신사)에서 이 소식을 접한 저우언라이는 즉시 런비스와 양상쿤(陽尙昆)과 리커농(李克農)에게 통보하였다. 저우는 런비스 및 정보 책임자들과 회의를 열어 통신, 기밀, 정보공작에 대하여 보완방법을 의논하였다. 그 결과 기요처(機要處)로 통합되어 있던 공작을 정보, 통일전선, 군대 등 세부분으로 나누고 관련 문제들을 보완하도록 결정했다.”

    그렇다고 하여 시련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시안과 베이핑의 비밀공작을 총괄하여 지휘하던 왕스젠(王石堅)이 투항하자 체포자가 더욱 늘어났다. 지하 공작원 44명이 추가로 체포되었으며 연루되어 체포된 자가 123명에 이르렀다. 이중 끝까지 버틴 셰스옌 등 주요 공작원 5명은 1948년 9월 19일 중앙육군 감옥 사형장에서 처형을 당했다. 장제스는 이 사건을 적발하는데 공을 세운 관계자들에게 훈장과 은자 1만위안을 주고 포상했다.

    중공 정보책임자 리커농을 다룬 책

    중공은 정보책임자 리커농이 관련 사실을 조사하고 대책을 수립했다. 나중에 그는 저우언라이에게 보고하고 처분할 것을 요청했는데 저우는 “이런 사건은 기밀공작에서 불가피한 것이다. 이 조사보고서와 대책은 승인한다. 하지만 관련자 처벌은 필요치 않다.”고 대답하였다. 관련자를 처벌하면 리커농부터 처벌해야 했던 것이다. 한참 뒤 리커농은 이 문제가 자신의 과실이라고 인정하여 사람들의 감명을 사게 되었다.

    왕스젠을 중심으로 공작원 적발사건 이후에도 중국 공산당의 지하공작은 더욱 강화되었다. 중공 정보 3걸로 통하는 숑샹후이(熊向暉), 신젠(申健), 천충징(陳忠經) 외에도 궈루구이 등 수많은 지하 공작원들이 국민당 정부나 군부에서 암약하여 중국 공산당의 승리에 크게 기여했던 것이다.

    빨간 표시 부분이 칭펑덴 전투지역이고, 동그라미가 인근의 스자좡, 바오딩, 텐진, 베이징 텐진 위치

    필자소개
    철도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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