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차마 어둠을 버리지
    못하는 별은 더욱 빛난다
    [풀소리 한시산책] 최명길과 김상헌
        2020년 03월 30일 09:44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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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경림

    네가 반짝이는 것은
    어둠과 함께 머무르기 때문이다
    너는 언제나 존재하지만
    캄캄한 밤에 가장 빛난다

    네 가슴의 별은
    별 숲을 사각사각 거닐며
    주운 별빛을 나누는 너의 지혜

    네가 이토록 아름다운 것은
    차마 어둠을 버리지 못하는
    사랑 때문이다

    그렇군요. 어둠이 있기에 별이 빛나는 것이군요. 빛과 어둠이 서로 대립되는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에 많은 위로를 받습니다. 남경림 시인의 이 시에서 또 위로를 받는 시어는 ‘차마’입니다. ‘차마’의 사전적인 의미는 ‘애틋하고 안타까워서 감히’ 또는 ‘애틋한 마음을 억누를 수 없어서’입니다. 인간이 인간다울 수 있는 것은 ‘차마’ 하지 못하는 것이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욕망의 충족을 위해 못하는 게 없는 것 같은 극단적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지만, 우리는 여전히 차마 그러지 못하는 사람들을 주변에서 봅니다. 그런 사람들을 보면서 위로를 받고, 또 삶을 이어나갈 힘을 얻습니다.

    영화 『남한산성』의 두 주인공 김상헌(좌, 김윤석 분)과 최명길(우, 이병헌 분)

    이번에 소개하고자 하는 한시(漢詩)의 주인공은 최명길(崔鳴吉, 1586년(선조 19)~1647년(인조 25))과 김상헌(金尙憲, 1570년(선조 3)~1652년(효종 3))입니다. 영화 『남한산성(南漢山城)』에서 최명길은 주화파의 대표, 김상헌은 척화파의 대표로 나옵니다. 청나라와 끝까지 항전할 것을 주장하는 이들을 척화파(斥和派)라 부르고 시세(時世)가 불리하니 나라를 보전하기 위해 화의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을 주화파(主和派)라 부릅니다. 화의를 주창하는 이는 거의 최명길 혼자이니 사실 파(派)라고 이름 붙이기도 어려운 형편이었습니다.

    청(淸)나라 태종(太宗)은 1636년 병자년(丙子年) 12월 1일에 청군 7만, 몽골군 3만, 한군(漢軍) 2만 등 도합 12만의 대군을 이끌고 조선을 침략을 선언합니다. 12일에 압록강을 건너고, 13일에는 평양, 14일에는 개성에 입성합니다. 그야말로 파죽지세였습니다. 14일 밤 인조(仁祖)는 강화도로 피란하려고 했지만, 이미 청나라 군대가 연신내를 지났다는 보고가 있었습니다. 인조는 하는 수없이 남한산성으로 향합니다.

    남한산성 총 대장의 지휘소인 수어장대(守禦將臺)

    조선은 남한산성에서 결사항전을 외치지만, 형세는 만만치 않았습니다. 포위된 남한산성은 식량이 떨어져가고 병사들의 사기는 바닥에 떨어집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637년 1월 22일 강화도가 함락됩니다. 결국 인조는 화의(和議)를 결심합니다. 실질적으로는 항복입니다. 최명길은 강화문서를 초안합니다. 김상헌(金尙憲)은 이 강화문서를 찢고 통곡합니다. 이때 최명길이 찢어진 강화문서를 주워 모으면서 “조정에 이 문서를 찢어버리는 사람이 반드시 있어야 하고, 또한 나 같은 자도 없어서는 안 된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병자호란이 끝난 뒤 최명길은 전후 처리와 민생문제 해결을 위해 동분서주합니다. 김상헌은 벼슬을 버리고 고향 안동으로 돌아갑니다. 이렇게 완전히 갈릴 것 같던 두 사람은 6년 뒤인 1643년 4월 청나라 수도 심양(瀋陽)의 남관(南館) 감옥에서 만납니다. 전 해 잡혀온 최명길이 북관에서 남관으로 이송되면서 이미 이곳에 갇혀있는 김상헌과 만납니다. 벽을 사이에 두고 바로 옆방을 쓰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감옥에서 정적(?)이랄 수 있는 두 사람은 극적으로 화해합니다. 사실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두 사람은 서로를 믿지 못했습니다. 조선 영조 때 실학자 이긍익(李肯翊)이 쓴 역사서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는 그때의 일을 아래와 같이 적고 있습니다.

    최명길은 김상헌이 명예를 구하는 마음이 있다고 의심하여 정승 천거에서 깎아버리기까지 하였는데, 같이 구금되자 죽음이 눈앞에 닥쳐도 확고하게 흔들리지 않는 것을 보고 드디어 그의 절의를 믿고 그 마음에 탄복하였다. 김상헌도 처음에는 또한 최명길을 중국 남송(南宋)의 간신 진회(秦檜)와 다름이 없다고 생각하였었는데 그가 죽음을 걸고 스스로 뜻을 지키며 흔들리거나 굽히지 않는 것을 보고 또한 그의 마음이 본래 오랑캐를 위한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이에 두 사람이 서로 공경하고 존중하였다.

    김상헌이 최명길의 본심을 인정하면서 지은 시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從尋兩世好(종심양세호) 양대토록 나눈 교분 다시 찾아서
    頓釋百年疑(돈석백년의) 백년간의 의심 몽땅 풀어 버렸네

    유빙이 흐르는 월곶 앞바다. 병자호란 때 1637년 1월 22일 청나라 군사들이 갑곶으로 상륙할 때도 유빙이 흘렀다고 합니다. 참고로 갑곶은 강화대교 근처에 있습니다.

    두 사람은 감옥에서 수없이 많은 시를 주고받습니다. 그 중 두 사람의 기질을 잘 표현하는 시가 있어서 소개하고자 합니다. 두 사람이 같은 운률(韻律)을 사용하여 여러 편의 시(詩)를 지었기 때문에 어떤 시가 먼저인지 정확하게 말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김상헌의 문집 청음집(淸陰集)에는 최명길의 시가 먼저이고, 김상헌이 그 시에 차운(次韻)하였다고 하니 최명길의 시부터 먼저 봅니다. 정도(경, 經)와 권도(權道)를 논한 시 「강경권유감(講經權有感)」입니다. 물론 『연려실기술』에는 김상헌의 시에 최명길이 화답한 것으로 나옵니다. 가능하다면 순서를 바꿔서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講經權有感(강경권유감)

    靜處觀群動(정처관군동)
    眞成爛熳歸(진성난만귀)
    湯氷俱是水(탕빙구시수)
    裘葛莫非衣(구갈막비의)
    事或隨時別(사혹수시별)
    心寧與道違(심녕여도위)
    君能悟斯理(군능오사리)
    語默各天機(어묵각천기)

    정도와 권도를 논한 감회

    고요한 곳에서 뭇 움직임을 보아야
    진실로 무르녹는 경지에 이른다오
    끓는 물도 얼음장도 다 같은 물이요
    갖옷도 삼베옷도 옷 아닌 것 없느니
    일이야 혹여나 때에 따라 다를망정
    속맘이야 어찌 정도와 어긋나겠소
    그대가 이런 이치를 깨닫는다면
    말도 침묵도 모두 천기에 맞을 거요

    철학을 논한 시라 좀 어렵습니다. 유학(儒學)에서 경(經)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 원칙을 말합니다. 삼경(三經), 불경(佛經), 성경(聖經)의 ‘경(經)’이 그런 것입니다. 여기서는 ‘경’을 ‘정도(正道)’로 의역했습니다. 권도(權道)는 변화된 상황에 임시로 맞추는 행위규범을 말합니다. 정도를 변증법적으로 현실에 맞게 적용한 것입니다. 때(時)에 따라 딱 맞는다(中)는 의미로 율곡 선생은 ‘시중(時中)’라고 했습니다. 암튼 정도와 권도 둘 다 필요하겠지요. 그러나 정도만을 고집하면 고루하여 사업을 망치기 쉽고, 권도만을 고집하면 방향을 잃고 미봉책만 나열하게 될 수 있을 겁니다. 최명길은 정도를 지키되 현실에 맞게 변증법적으로 적용하자고 주장합니다. 참고로 ‘난만(爛漫)’을 ‘무르녹다’로 번역해보았습니다. 무르녹다는 ‘가장 성하여 한창때에 이르다’는 뜻입니다. 과일이 가장 잘 익었을 때도 무르녹다 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여기에 원칙주의자 김상헌이 답시(答詩)를 보냅니다. 볼까요.

    成敗關天運(성패관천운)
    須看義與歸(수간의여귀)
    雖然反夙莫(수연반숙모)
    詎可倒裳衣(거가도상의)
    權或賢猶誤(권혹현유오)
    經應衆莫違(경응중막위)
    寄言明理士(기언명리사)
    造次愼衡機(조차신형기)

    성패는 다 하늘 운에 달려 있거니
    의에 귀결되는 것을 봐야만 하리
    그렇지만 아침 저녁 바뀐다 해도
    어찌 옷을 뒤바꾸어 입어서 되랴
    권도 쓰면 현인도 혹 잘못될 거고
    정도 쓰면 뭇사람들 못 어기리라
    이치 밝은 선비에게 말해 주나니
    급할수록 저울질을 신중히 하소

    이 시는 저의 스승이기도 한 고전번역원 정선용 선생께서 번역한 거라 그대로 올립니다. 권도(權道)의 ‘권(權)’은 저울을 뜻합니다. 맨 마지막 줄에 나오는 ‘형(衡)’도 저울을 뜻합니다. 지금도 ‘저울질’이란 말이 쓰이죠. 김상헌은 저울질하면 정도에서 벗어나 구차해질 수 있으니 신중히 하라 말하고 있습니다.

    두 분처럼 심양 감옥에 갇혔던 이경여(李敬輿)라는 분이 있습니다. 이경여는 위의 시를 보고 다음과 같은 시를 써서 두 분에게 보냈다고 합니다.

    二老經權各爲公(이노경권각위공)
    擎天大節濟時功(경천대절제시공)
    如今如爛同歸地(여금여난동귀지)
    俱是南館白首翁(구시남관백수옹)

    두 어른의 경(經)과 권(權) 각각 나라를 위함이니
    하늘을 떠받치는 큰 절개요  시대를 구한 큰 공적일세
    이제 두 분 마음이 무르녹아 한곳으로 이르니
    바로 남관에 갇힌 두 백발 늙은이들이라오

    나는 조선이 왜 병자호란 때 형편없이 당했을까 늘 의문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임진왜란이 끝난지 오래되지 않아 군사력이 바닥나지 않았을 것이고, 바로 9년 전인 1627년(인조 5)에 정묘호란(丁卯胡亂)을 당했으니 마음만 먹으면 준비할 시간은 충분히 있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군사의 숫자가 중요하던 당시에 조선의 인구는 당시 청나라 인구의 최소 5배는 되었다고 하니 청나라에 속수무책으로 당한 것이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를 보면서 약간의 해답을 얻었습니다. 1631년(인조 9) 4월 5일 기사를 보겠습니다.

    이원익 : 신이 듣기에 고려 때에는 갑자기 황해도 10만 병사를 징발하여도 끝내 능히 적을 막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현재 고려와 같은 군사력을 행사하지 못하는 것은 먼저 마음이 무너지기 때문입니다. 군정이 이와 같은데 일에 어찌할 바가 없습니다.

    인조 : 고려의 군사력이 이와 같이 최강인데 이유가 뭔지 모르겠습니다.

    이원익 : 고려는 병농(兵農)을 둘로 나누어 시행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병사는 군사 일에 전업하였기에 그 세력이 강하였습니다. 조선은 병농을 하나로 하여 병사가 농촌에 머무르고 농사꾼이 병영에 머뭅니다. 그러므로 직업이 전일하지 않아 군사력이 부진합니다. 선조조에 신이 영의정일 때 선조께서 병사와 농민을 나누는 법을 시행하고 싶어 하셨습니다. 신이 ‘이 일은 가볍게 바꾸어 시행할 수 없습니다. 내부의 우환 또한 고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고 말씀드리니, 선조께서 ‘경의 우려하는 바를 나 또한 알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인조 : 고려의 군사력이 비록 강하여 적을 토벌하는 데 어려움이 없었지만 변란이 계속 일어났으니 진실로 그대가 우려하는 바와 같습니다.

    臣聞高麗時, 猝發黃海道十萬兵, 終能禦敵, 而今日未行師之前, 先有潰散之心。軍情如此, 事無奈何。上曰, 前朝兵勢, 如是最强, 未知何故? 李元翼曰, 前朝則兵農, 分而爲二。故爲兵者, 專業於兵, 而其勢强。我朝則兵農爲一, 兵寓於農, 農寓於兵。故業不專一, 而兵勢不振矣。宣廟朝, 臣爲領相時, 宣廟, 欲行立兵之法。臣曰, 此事, 不可輕易爲之, 域內之患, 亦不可不慮也。宣祖曰, 卿之所慮, 予亦知之云矣。上曰, 前朝兵勢雖强, 討賊不難, 而變亂相繼, 誠如卿所慮也。

    갑곶에 있는 연미정. 병자호란 9년 전인 1627년(인조 5)에 정묘호란(丁卯胡亂)이 있었습니다. 당시 후금과 조선은 이곳에서 ‘형제의 맹(盟)’ 조약을 맺었습니다. 그런 치욕이 있었음에도 조선은 대비를 제대로 하지 못했습니다.바로 ‘내부의 우환 또한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이원익의 답변에 해답이 있는 것 같습니다. 고려처럼 무신정권이 들어설 위험을 없애자는 것이지요. 나라가 풍전등화에 놓이더라도 양반 사대부의 권력은 놓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나라가 망하더라도 기득권을 놓지 않겠다는 작금의 현실과 겹쳐져 보이는 대목입니다. 최명길 역시 기득권 사대부였지만, 양심과 지혜가 있어서 현실론을 많이 펼쳤지 않았나 합니다. 그가 실용적인 유학(儒學)인 양명학(陽明學)을 홀로 공부한 이유도 그런데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최명길과 김상헌은 영의정과 좌의정을 지낸 고관 출신입니다. 저는 나라를 들었다 놨다 하였던 이들의 우정 못지않게 평범한 이들의 우정도 매우 소중하다고 생각합니다. 일상을 함께 하면서도 물처럼 담백하고, 공기처럼 없는 듯 보이지만 없어서는 존재로 말입니다. 여러분의 일상에도 더 이상 말도 없고 더 이상의 사이도 없는 그런 정이 깃들기를 바라면서 김광섭의 시 「우정」으로 이번 한시산책을 끝맺음합니다.

    우정

    – 김광섭

    구름은 봉우리에 둥둥 떠서
    나무와 새와 벌레와 짐승들에게
    비바람을 일러주고는
    딴 봉우리에 갔다가도 다시 온다

    샘은 돌 밑에서 솟아서
    돌을 씻으며
    졸졸 흐르다가도
    돌 밑으로 도로 들어갔다가
    다시 솟아서 졸졸 흐른다

    이 이상의 말도 없고
    이 이상의 사이도 없다
    만물은 모두 이런 정에서 산다

    필자소개
    민주노총 전국민주버스노동조합과 전국운수산업노동조합에서 일했고, 한국고전번역원에서 공부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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