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노동당은 '오른쪽 날개'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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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년 09월 06일 09:36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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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 날, 8월 20일 울산에서 나는 민주노동당 활동가들에게 고(告)하고 싶었다. 교육보다 학습이, 그리고 소통이 급하다고, 다시 말해서 당원을 어떻게 교육할 것인지 고민하기 전에 스스로 공부하는 일이 급하고 당원, 그리고 지지자와 대화를 하는 것이 중(重)하고 급(急)하다고.

작은 성공으로 잠시 잊고 있었던 민주노동당의 운명

그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나는 새삼스럽게 민주노동당의 족보를 밝히고 혈통을 들추어냈다. 그건 지친 당 활동가들에게 다시 한번 우리가 가는 길을 상기시키고, 그 길에서 당 활동가들의 사명이 무엇인지를 이야기하기 위해서였다.

우리 당은 ‘독일사민당형’이라기보다는 ‘영국노동당형’ 진보정당이다. 또한 그것은, ‘작은’ 성공으로 잠시 잊고 있었지만, 우리의 선택이기보다는 우리의 운명이었다. 즉 민주노동당의 모습과 성장 과정은 근본적으로 당이 태어난 시대와 나라가 21세기 초 대한민국이라는 사실로부터 연유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 당의 창당 조건이 보수/자유 양당체제가 소선거구제 위에 정립되어 있고, 노동자계급이 사회주의에 관심이 없는 조건 속에서 진보정당을 만들고자 했던 100년 전의 영국노동당의 처지와 같음으로부터 유래한 것이다.

1900년 2월 27일 창당한 영국노동당과 2000년 1월 19일에 창당한 민주노동당이 어찌 그리 비슷하게, 또 혹독하게 어려운 조건에서 창당했는지! 물론 여러 차례의 고통스런 실패 끝에 그 길을 찾아낸 전사(前史)까지도 흡사하다.

   
 ▲ 영국 노동당을 창당한 케어 하디
 

100년의 시차를 넘어 케어 하디의 고뇌가 우리의 가슴을 후벼 파는 이유가 있다. (민주노동당이 여러 차례 집권하여 우리가 지금 공약하고 있는 것들을 거의 다 이루고 난 후, 창당 세대가 다 죽고 나서 토니 블레어 같은 후손이 나타나 ‘당헌 제4조’를 없애려고 시도할지는 모르지만 그건 우리의 관심사가 아니다.)

민주노동당은 당원을 좀 편하게 해줘야 한다

그리하여 민주노동당의 당원은 굳이 말하자면 대중에 속한다. 어떤 이념을 위해 자신이 가진 그 무엇을 즐거이 희생할 용의가 있는 ‘주의자’들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것은 우리가 취했던, 노동조합을 중심으로 한 창당 전략 또는 성장 전략의 결과이다.

우리는 이념성보다는 대중성을 먼저 확보하고자 했다. 그래서 입당에 어떤 예비 기간도 두지 않고 제한도 두지 않았다. 그 전략이 옳았음은, 그리고 어렵사리 ‘민주노동당’이라는 당명을 채택한 창당대회가 옳았음은 지난 7년의 실천으로 충분히 검증되었다.

민주노총 조합원인 당원들도 단지 노동조합의 간부 또는 대의원이라는 이유로 조직의 결의에 따라 집단적으로 입당했다. 민주노동당의 강령을 한 줄도 읽어보지 않은 건 당연하다. “우리 당의 당원이 되기 위해서는 노동자라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당헌에 쓰지는 않았지만 실제로는 그런 길로 왔고 앞으로도 갈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분회장들은 분회 모임 참석률이 낮음에 지나치게 슬퍼하고 좌절할 필요가 없다. 분회 참석률 20퍼센트를 한탄하는 것, 그건 민주노동당을 스스로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그러므로 ‘당비’라든지, 당 조직 활동에서든지 모든 점에서 당원에게 지나치게 높은 수준의 의무를 지워서는 안 된다. 사실은 영국노동당처럼 차라리 노동조합 단체 가입의 경우도 인정하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그렇게까지는 하지 않더라도 당원을 좀더 편하게 해주어야 한다.

민주노동당 대변인의 ‘개념없는 행동’

그런 점에서 당내 민주주의에서도 당원 직선의 경우를 가능한 한 줄여야 할 것이다. 당의 문턱을 가능한 한 더 낮추고, 아직 참여하지 않고 있는 한국노총 산하 노동조합들이 당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는데 전력을 다해야 한다.

그런 성장 전략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최근의 박용진 대변인의 한국노총 이용득 위원장 비판은 ‘개념이 없는’ 행동이다. 도대체 무엇을 위한, 당에 어떤 도움이 되는 행동인지를 알 수 없다. 국민들의 눈에는 ‘지들끼리 싸우는 꼴’로 받아들여지거나, 아니면 이를 반박하는 한국노총의 이야기를 듣고서 비로소 민주노동당이 한국노총의 지지 마저도 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더 근본적으로는 한국노총, 나아가 민주노총 조합원들의 대다수가 이용득 위원장의 행위를 ‘이해’하고 있다면 박용진은 더 신중했어야 했다.

이른바 민주노총의 도덕성 추락으로 인하여 민주노동당이 피해를 입은 이후에, 그리고 민주노총 산하의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의 고임금으로 인한 여론 악화를 느끼면서 민주노총과 거리를 두어 이른바 ‘민주노총당’을 벗어나야 한다는 일부 당원들의 생각도 조급한 측면이 있다.

민주노총을 벗어나면 날개를 달 수 있나? 

민주노총만 벗어나면 날개를 달고 나를 것 같은가? 아니다. 그건 한화갑의 민주당더러 지역당이라는 한계를 벗어나야 한다면서 전남이라는 지역을 벗어나면 더 크게 발전할 것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우리는 사회당의 길이 아니라 노동당의 길을 가야 한다. 우리는 창당 전략을 지키고, 기본 노선을 지키고 일관되게 나가야 한다.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계급을 믿고 대중을 믿고 노동운동에 대하여 좀더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릴 필요가 있다.

그런 견지에서 본다면, 민주노동당 중앙위원과 대의원 지지단체 할당에서 28퍼센트로 되어 있는 민주노총 몫을 줄이려는 논의는 잘못된 것이다. 전농에 대한 14 퍼센트가 과대한 것이다. 이 비율은 국민 중의 농민의 비율의 두 배를 넘고, 당원 중 농민의 비율의 네 배를 넘는다. 이를 줄여서 장애인을 비롯한 소수자들의 몫으로 돌리는 것이 옳다.

2.

민주노동당이 바로 그런 ‘영국노동당형 대중정당’이기 때문에 당 간부, 당 활동가들의 역할이 더 크고 중요하다. 당 활동가들에게 ‘양보하고 인내하는’ 정신이 필요하다. 그리고 당 활동가는 공부를 더 많이 해야 한다. 역사를 더 많이 공부해야 하고 현실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그런 점에서 이미 여러 차례 교육을 받은 고참 당원들, 다 아는 얼굴들이 참석하여 자리를 메워주는 행사로 치뤄지는 ‘당원 교육’보다는 수준을 높인 당 간부, 활동가들의 ‘스스로 학습 프로그램’이 운영될 필요가 있다.

공부를 하되, 혹시 이데올로기적 편견 때문에 중요한 역사와 현실에 무관심하지 말자는 것이 내가 강조하고 싶은 이야기의 핵심이다. ‘오랑캐’라는 편견으로 청(淸)나라의 역사와 현실을 외면하던 복고주의, 사대주의, 형식주의, 근본주의 이데올로그들이었던 조선 선비들처럼 우리는 하지 말자는 것이다.

근본주의 이데올로그였던 조선 선비를 닮지 말자

박지원이 본 청(淸)은 단순히 오랑캐 나라라고 치부하기에는 배울 바가 너무나 많은 대문명국이었다.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의 역사와 성과를 편견 때문에 외면하지 말자는 나의 주장은 박지원의 주장과 같다.

오늘 우리가 홍역 같은 당의 위기 상황에서 읽는 선조 진보정당의 역사는 바로 우리의 이야기들이다. 120년 전 비스마르크 치하에서, 반사회주의자법 아래에서 분투노력하여 대중정당으로 성장한 독일사민당 창업의 역사도 대단하다.

100년 전 자유/보수 양당체제가 이미 자리 잡혀 있고 소선거구제가 그 체제를 뒷받침하고 있었으며, 노동자들은 사회주의에 관심이 없고 노동조합의 조직률은 낮고 그나마 조직된 노동자는 주로 숙련공들이어서 이른바 ‘노동귀족’으로 비판받고 있는 그런 악조건에서 온갖 우여곡절을 거쳐 영국사회에 뿌리내리고 노동/보수 양당체제를 만들어 집권까지 한 영국노동당의 역사도 절실하기 이를 데 없다.

     
▲ 20세기 초 미국의 사회주의 지도자 유진 V. 뎁스  
   

세계 진보정당의 시조인 독일사민당이나 중시조(中始祖)인 영국노동당의 역사만 중요한가? 어쩌면 1912년 대선에서 유진 뎁스를 내세워 6퍼센트의 득표를 하고서도 오래지 않아 역사 속으로 사라진 미국사회당의 역사가 우리에게 더 중요할지도 모른다.

모든 것들이 미국의 영향 하에 만들어진 대한민국이 아닌가? 같은 소선거구제와 자유/보수 양당체제를 영국노동당은 넘어섰고 미국사회당은 극복하지 못했다. 성공만큼이나 실패의 역사도 중요하다. 그 차이가 어디서 비롯된 것인지를 우리는 알아야 한다.

그래서 우리 당에서도 무슨 문제를 토론할 때 영국노동당이나 독일사민당, 또는 미국사회당의 역사적 경험을 들어서 논하는 정도는 되어야 한다는 거다. 고사(故事)를 들고 고인(古人)의 언행을 참고하여 옳고 그름을 논했던 선비들처럼 말이다.

"사민주의가 욕설이다"라고 쓴 이유

뿐만 아니라 역사를 공부해야만 보통선거권이 얼마나 소중하며, 4대 사회보험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알게 된다. 그런 것들은 모두 선조 사회주의자들이 오랫동안 염원하고 지난한 투쟁으로 쟁취한 것들이다.

솔직히 실망스럽다. 내가 그토록 입을 열기를 촉구했던 1,000명의 공직 후보들이나 지역위원회 위원장들은 다 어디가고 최백순 동지가 비판을 제기하는가? 그것도 나의 주장이나 취지와는 별 상관없이 주로 나의 어법(語法)에 대해서 말이다.

내가 “민주노동당에서는 사회민주주의가 욕설이다”라고 진술한 것은 다만 당 간부들의 학습과 관심의 폭을 넓히자는 이야기를 하려는 취지에서였다. 그런데 최백순 동지는 그 진술을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인 것 같다. 고맙게도 나의 편에 서서 그를 반박하는 필명 ‘베른스타인’은 또 누구인가? 베른스타인이라는 필명을 보니 누군가 나에게 “사회민주주의자를 자처하니 베른스타인의 이론을 찬성한다는 건가?”라고 물어 무척이나 당황했던 기억이 새롭다.

   
 ▲ 독일의 사회주의 이론가 베른슈타인
 

난 실은 베른스타인은 한 줄도 읽지 않았다. 나는 베른스타인의 주장을 간접적으로 들었을 뿐이고 그 논리에 설득당한 것도 아니다. 나는 100년 전에 살았던 그 사람이나 그의 주장에 대해서 큰 관심이 없었다. 레닌이 그토록 격렬하게 비난했던 1차 세계대전 당시에 유럽 사민당들이 전쟁에 찬성한 행위에 대해서나, 제국주의 전쟁 참여를 반대하던 로자 룩셈부르크를 죽인 행위에 대해서 찬성하는 것도 물론 아니다.

그러나 역사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특히 이론을 실천으로 검증하는, 다양하고 거대하고 의미심장한, 이전의 거의 모든 논의를 압도하는 세계사적 대실험들이 그 이후에 이루어졌다.

인류가 만든 가장 좋은 나라

그 중에서도 가장 규모가 큰 실험이 끝나갈 무렵에 고르바초프가 말했던가? 지금까지 인류가 만든 나라 중에서 스웨덴이 제일 낫다고? 손에 만져지는 것을 믿고 눈에 보이는 것을 믿는, 그것이 대중이 생각하는 방식이고 나는 그런 사고방식을 따르기로 했다.

나는 대한민국의 백성들에게 스웨덴 사민당을 비롯한 유럽 중도좌파 정당들의 역사적 성과를 가지고 진보정당을 믿고 지지해줄 것을 요구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정치가라면 죄다 사기꾼으로, 도둑놈으로 생각하는 대한민국의 백성들을 다른 무슨 이야기로 설득할 것인가? 무상의료, 무상교육이 가능한가? 물으면 우리는 어떻게 답하는가? “이미 유럽에서는 수십 년 전부터 다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답하지 않는가? 내가 무얼 잘못 알고 있는 건가?

유럽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은 이미 보수정당이 되었다고 말한다. 맞다, 아마 그럴 것이다. 그 정당들은 자기들의 성과를 지키는데 급급하니 그것이 곧 보수가 아니고 무엇인가? 그래서 ‘신좌파’도 나오고, 사회민주주의를 넘어서 세계사의 첨단이 가야 할 길을 모색하는 급진 좌파 학자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유럽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131세 되는 노인과 106세나 나이를 먹은 노인이 당뇨병과 치매에 걸린 모습을 보고서 7세 되는 어린이에게 고기를 먹지 말라 하고, 매일 그림 맞추기를 하라 하고, 심지어 “너희 할아버지처럼 되지 않기 위해서 자라지 않는 것이 좋다”고 말하는 것이 옳은가?

사회주의, 사민주의 그리고 민주적 사회주의

나는 대한민국 운동권 바깥 어디에서도 ‘사회주의자’가 따로 있고 ‘사회민주주의자’가 따로 있다거나 ‘사회주의자’와 ‘사회민주주의자’가 대립한다는 말을 듣지 못했다. 나의 느낌으로는 영국에서는 ‘사회주의자’라는 말을 즐겨 쓰고 독일에서는 ‘사회민주주의자’라는 말을 즐겨 쓰는 것 같지만 대체로 같은 뜻이다.

우리나라에서는 학문적 개념으로 다소 엄격하게 구분하기로는 자유주의에 맞선 세계관 또는 사상으로서 ‘사회주의’를, 이를 실천하는 특정한 태도와 방식, 어떤 도그마에 얽매이지 않는 현실주의, 실용주의 실천 철학이나 그로써 이룬 바 ‘사회민주주의’를 이야기하는 것으로 나는 이해하고 있다.

그럼에도 굳이 ‘사회민주주의자’라는 말을 거리낌 없이 즐겨 쓰는 나의 습관이 거슬리는가? 아무래도 내가 북유럽 사회민주주의 체제에 대한 우리 국민들의 호감을 (우리 당의 정치적 자원으로서) 중시하는 편인 것 같다. 그럼에도 나와는 다른 언어 습관을 가지고 스스로를 ‘사회주의자’로 부르기를 즐기는 김종철 동지가 영국노동당 출신의 켄 리빙스턴 런던 시장과 자신을 동일시(同一視)하는 것을 보고서 나는 크게 안도했다.

나도 30년 전에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책에 크게 감명을 받아 영국노동당 당원으로서 영국석탄공사에서 일한 경제학자 슈마허를 존경한 적이 있는데 그 역시 영국의 유명한 사회주의자였다. 그리고 영국석탄공사는 애틀리 노동당 정부가 2차 세계대전 후에 ‘미국 자본주의와 소련 공산주의 사이의 민주적이고 건설적인 사회주의 대안’을 현실화하기 위해 여러 산업들을 국유화하는 가운데 설립한 국영기업 중의 하나였다.

한 마디 사족을 덧붙이고 싶다. ‘민주적 사회주의’라는 말은 유럽의 사회(민주)주의자들이나 유로꼬뮤니스트들이, 아니면 신장개업한 동유럽의 옛집권당들이 자기들이 만들고자 하는 나라를 스탈린이 만들었던 그 끔찍한 일당 독재 체제, 말하자면 ‘독재적 사회주의’와 구별하여 가리키던 말이다.

그러니 ‘민주적 사회주의’를 만들겠다는 우리 당의 약속은, 유럽의 사회민주당들은 이미 수십 년 전, 아니 백 년 전부터 거듭해왔던 약속이고 부분적으로 지키기도 한 약속이다. 그것 역시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다.

3.

민주노동당 활동가는 대중과, 당원과 지지자와 그리고 우리가 지지를 받고자 하는 대중과 대화를 더 잘해야 한다. 그리하여 당을 노동자계급 대중이라는 물 속에 살아 헤엄치는 물고기 같은 존재로 만들어야 한다. 물고기는 피부로 자기가 살아가는 물의 온도와 염도를 느낄 것이다.

우리 당의 가장 큰 문제는 수동적인 일선 활동가와 지역 조직의 문제라고 나는 생각한다. 즉 피부가 제 역할을 안 하는 것이다. 지역조직은 더 능동적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다시 한번 “진리는 대중으로부터 나온다.”고 강조한다.

‘정책의 정치화’ 과정에 당원과 지지대중 참가해야

내가 “우리 당의 당론들이 원리론에 머물고 있는 건 아닌가?”라는 질문을 던진 것은 당을 비난하기 위해서나 개별 당론을 비판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민주노동당의 당론 형성의 과정에 문제가 있지는 않은지를 돌아보자는 취지다. 중앙당(정책위원회)이 원리론을 내놓고 정책연구원들이 원리론을 주장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당론의 형성 공정에는 다음 과정, ‘정책의 정치화 과정’이 있다. 당 일선 조직이 중앙당의 입장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당원들끼리 토론하고 지지자 대중과 대화하여 현실론을 세우고 이를 중앙당의 원리론에 대치시켜야 하는데 그 소박하고 자연스런 과정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민주노동당 일선조직들이 그런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당 간부, 당 활동가들이 노력하고, 원리론과 현실론의 내적 모순이 꿈틀거리는, 살아있는 당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다른 거대 보수정당들은 국회의원들이 이른바 ‘민의(民意)’를 수렴하는 역할을 한다. 나름대로 지지층의 바램을 반영하는 것이고 그래서 의원총회에서 당론을 결정한다.

그러나 우리 당에서는 의원이 소수이고 또 의원 중심의 당론 형성을 배격하는 터인데 정작 ‘당의 주인’이자 당론 형성의 주역이 되어야 할 당원들은 수동적이다. 그렇다면 당 간부, 당 활동가들이 적극적 역할을 해야 한다.

그런데 그들마저 혹시 앞으로 공직 선거 후보라도 한번 하든지, 아니면 장차 비례대표 후보라도 한번 하기를 꿈꾼다면 당내에 적을 만들지 말아야 하고 특히 거대 정파들에게 찍혀서는 곤란하니 혹 기존 당론과 다른 말이라도 한 마디 하는 걸 두려워한다. 민주노동당 간부, 활동가들에게 언론의 자유가 없는 것이다. 당내 민주주의의 과잉 속에 500만 지지자들의 바램이 당론에 반영되지 않고 있는 구조다.

당내 민주주의 과잉 속에 5백만 지지자 바램 당론에서 소외

그래서 당 활동가들은 당의 이익에 보다 충실해야 한다. 민주노동당의 ‘당리당략에 보다 충실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활동가들의 사고방식이 명분론보다는 실리론, 형식론보다는 내용론으로 가야 한다. 종종 당의 이익이라는 판단 기준도 잊을 정도로 우리는 자기만의 논리에 갇힌다.

반년도 더 지난 민주노동당 당 대표 선거의 부정 논란이 아직도 결말이 나지 않고 검찰 고발까지 가는 건 민주노동당 활동가들의 형식론, 명분론에 치우친 사고방식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건 아닐까? 물론 부정 선거 혐의자를 대표 비서실장으로 임명하는 오기(?)도 문제이겠지만 말이다.

민주노동당에서는 모든 것을 탄력성 있는 정치적 결정으로 채택하기보다는 법으로, 규칙으로 만든다. 지방선거 후보 20퍼센트 이상 여성 할당 제도를 보자. 그건 광역시도를 단위로 시도당 위원장이 책임지고 20퍼센트를 맞추라는 권고를 중앙위원회의 정치적 결의로 채택하는 것이 옳았다.

그런데 지역위원회를 단위로 강제적 규칙으로, 지역위원회 사정을 전혀 모르는 의원과 최고위원이 주도하여 만들어 놓았는데, 과연 그 규칙이 지방의원 중에 여성의원을 늘려 놓았는지, 아니면 지역위원회들에게 고통과 정치적 손실만을 주었는지 평가를 해볼 일이다.

내용 토론보다 규칙 논란으로 허비하는 회의

우리는 때때로 고루한 조선 후기 선비들처럼 형식론에 치우친다. 그리고 모든 문제를 당기위원회로 가져간다. 회의는 내용 토론보다는 규칙 논란으로 시간을 더 많이 소비한다. 회의 규칙을 잘 모르는, 그러나 바로 그 분들의 이야기를 당이 듣고 당론에 반영해야 하는 소박한 대중 정서의 중앙위원이나 대의원들을 소외시킴으로써 당이 입는 손해는 이루 말할 수 없다.

회의 한번 왔다가면서 “아, 이 당은 나 같은 사람이 참여할 당이 아니구나!”라고 마음 깊이 느낀다. 그 마음을 다시 돌리기는 힘들다. 그래서 당은 안으로부터 허물어지는 것이다.

당대 선비들, 서인이든 동인이든 모두의 눈에 광해군의 실리주의, 현실주의는 명분론에 벗어난 것이었다. 그러나 광해군을 몰아낸 인조반정이야말로 조선의 백성들에게는 재앙 그 자체였다. 성삼문이 충신이라는 명분론으로 보면 신숙주는 간신이어야 한다.

그러나 과연 당대 백성들에게 성삼문이 그렇게 좋은 사람이고 신숙주가 그렇게 나쁜 사람이었을까? 자신이 배운 공맹(孔孟)의 가르침을 누가 더 충실하게 따른 것인가? 한 가지 생각이나 논리에 너무 집착할 일이 아닌 것이다. 정치는 내가 아닌 만인(萬人)의 관점에서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스스로 만든 족쇄로 우리 발목을 채우기도 한다. 여러 사정이 있을 텐데 민주노총이 정치위원장으로 임명하여 추천한 사람을 “자진 사퇴한 최고위원이라 다시 최고위원으로 출마하면 안 된다”고 꼬장꼬장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것이 과연 당에 이익이 되는가?

겸직금지 원칙을 강조하는 의회주의자들

차라리 정치적 내용으로 반대를 한다면 당을 위해 무언가를 남길 것이다. 익산에서는 또 무슨 일이 있어 날이 갈수록 심각한 내홍에 시달리는가? 당내 정파 지도자들은 왜 이럴 때 나서서 문제를 정치적으로 해결하지 않는가?

‘당직 공직 겸직 금지의 원칙’을 세상이 우리에게 요구한 것이 아니다. 그건 우리가 의회주의를 경계하여 스스로 세운 원칙이다. 그런데 실제로 실천에 옮겨보니 그 규칙은 무력했다. 흡사 해일을 작은 방파제로 막아 낼 수 없듯이 우리 당은 이미 의회주의에 흠뻑 젖었다.

국회의원은 배우이고 다른 모든 당원은 관객이 되었다. 예컨대 임기를 절반으로 나누어서 의원과 보좌관이 역할을 바꾼다는 독일녹색당처럼 할 수 있겠는가? 그러기에 우리는 “국회에선 의원 아니면 인간도 아니다!”는 세상 이치에 너무 익숙해져 버렸다.

“한국 정치에선 국회의원 아니면 X도 아니다”는 걸 다 알면서 모르는 척 하면 도움이 되나? 그렇게 해서 과연 진보정당 고유의 새로운 정치활동 방식과 정치문화를 만들어나갈 수 있겠는가? 나는 ‘당직 공직 겸직 겸지의 원칙’을 부르짖는 바로 그 사람에게서 그 제도를 버릴 것을 주장하는 나보다 훨씬 심각하게 ‘내면화된 의회주의’를 발견하고 의아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언론이, 세상이 국회의원만 찾는다고 우리도 국회의원만 찾아서야 되겠는가?

당원에게 편안함과 자부심을 주는 정당

독일사민당의 전 총재 라퐁텐이 쓴 <심장은 왼쪽에서 뛴다>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다른 당원들과 마찬가지로 나에게 당은 고향이자 가족이었다. 비스마르크에 의해 억압받고 나치에 의해 박해받은 사민당은 당원들에게 서로를 위하는 인간 공동체 안으로 들어왔다는 믿음을 주는 전통을 가지고 있다.”

당원에게 당은 따뜻함과 편안함, 연대감과 자부심을 주어야 한다. 즉 내면적 삶을 풍부하게 해주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 당을 통해 세상을 보고 이해해야 한다. 당 간부, 활동가들이 아니고 누가 대화와 소통을 통해 이런 당을 만들 것인가?

4.

무어라고 부르는 것이 정확할까? 당이 월급을 주고 4대 보험을 들어주어야 할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구분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나의 주장의 핵심이다. 물론 현실은 조금 복잡하다. 당이 공채를 시도하지만 우리 당이 제시하는 열악한 조건으로 특별한 인연이 없는 사람이 누가 오겠는가?

그러다보니 당 사무원도 당 활동가 중에서 누군가가 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단 그를 당 사무원으로 채용하면 당이 최소한의 생활 임금을 보장하고 4대 보험을 들어주어야 한다. 그리고 그 신분은 활동가와 분명하게 구분을 해야 한다.

정당법에서 중앙당 100 명, 시도당 100 명이라고 한정해놓은 숫자는 당 사무원, 당에서 4대 보험을 들어주어야 할 사람의 숫자이지 당 활동가의 수가 아니다. 이 정도 규모이면 우리 당의 재정 규모로 보아서 결코 모자라지 않는다. 당이 사무원의 숫자는 되도록이면 줄이고 대신에 임금을 현실화하고 사업 예산을 늘려야 한다. 즉 당 사무원에 대해선 소수정예주의로, 전문성을 가진 사람 위주로 가야 한다는 것이 나의 오랜 주장이다.

법과 상식대로 당을 운영해야

지역위원회를 없애자고 주장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다만 지역위원회가 법에 정해진 대로 그야말로 당원들의 자발적 활동 단위로서, ‘당원협의회’로서, 당 활동가들이 주축이 되어 움직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역위원회는 지회, 분회와 마찬가지로 당 활동가들의 자발적 참여에 의존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자발성을 높이는 것이 관건이며, 그런 점에서 우리 당이 취해온 정책, 지역위원회 사무국장의 활동비를 중앙당이 지원한 정책은 도움이 되질 않았다.

중앙당과 시도당에 재정을 집중하여 국회의원 보좌관, 정책연구원, 당 사무원들의 임금 현실화, 전문성 강화, 4대 보험 가입, 사업비 확보를 해야 한다는, 요컨대 법대로 상식대로 정상적인 당 운영을 해야 하고, 그것이 당 혁신의 물질적 기초이고 출발점이라는 것이 나의 주장이었는데 이 간단한 주장을 곡해하는 사람이 아직도 있다니?

우리 당은 정녕 공식 당부(黨府)와 거기서 일하는 사무원과 지역위원회, 지회, 분회 같은 당원들의 자발적 조직 단위와 거기서 활동하는 당 활동가(자원 활동가, 당 간부)를 구분할 능력도 없다는 말인가? 그래서 선거관리위원회의 ‘지도’를 받아 강제적으로 그런 길로 마지못해 끌려가고 있다는 말인가?

혹시 지역위원회 상근자의 관점은 크게 다른가? 부산시당 해운대구위원회 조직부장 손은숙 동지의 말을 들어보라.

민주노동당은 고비용 저효율 구조

“부산시엔 14개의 사무실이 있다. 그 14곳에선 14명의 상근 활동가가 매일 거의 동일한 일을 한다. … 그 중 한두 사람만 해도 되는 회계처리와 기타 실무를 14명이 하면서, 당원들과 지역 주민을 만나거나 구정 백서를 보고 지역 현안을 찾아야 하는 시간보다 컴퓨터와 전화기 앞에서 더 많은 시간을 소모한다. …고비용 저효율 구조다.”(<매일노동뉴스>, 2005년 12월 19일)

“공직 선거에 여러 차례 낙선하고, 당원들은 수동적이고 편히 대할 동지라기보다는 가장 까다로운 고객처럼 다가와 마음 깊이 좌절하고 외로워하고 있는 당 활동가들이여, 먼저 마음을 편히 하라, 역사를 공부하라, 그리고 자부심을 가져라.”

이것이 내가 나 자신을 포함하여 당 간부, 활동가들에게 건방지게 고하고 싶은 이야기다. 대부분의 중앙당과 수도권 당 이론가들, ‘기호학파(畿湖學派)’가 “수렁에 빠진 당을 구할 다른 방법이 없다”고 영웅대망론으로 나갈 때 당 간부, 활동가에게 기대를 걸다니 난 역시 고루한 ‘영남학파(嶺南學派)’에 지나지 않는 걸까?

나는 왜 공직 선거 후보 경험을 한 1,000명의 동지들과 지역위원회 위원장들에게 기대를 거는가? 지역위원회 위원장들이나 공직 선거 후보로 나갔던 사람은 지역 사회에서 민주노동당의 차기 공직 선거 후보로 받아들여진다.

날개는 없고 다리가 달렸으니 날 수가 없다

그래서 만나는 사람마다 묻질 않는데도 민주노동당에 대해서 무언가를 묻고 말한다. 민주노동당의 어떤 행동에 대해서는 찬성하고 어떤 행동에 대해서는 반대하며 어떤 면에 대해서는 호감을 표시하고 어떤 면에 대해서는 반감을 표시한다. 말하자면 일상생활 속에서 어쩔 수 없이 대중과 더불어 대화를 하고 있는 것이다.

모택동이 말했던가? “조사 없이 발언권 없다”고. ‘촌놈’이 모스크바 유학하고 돌아온 똑똑한 젊은 사람들에게 얼마나 시달렸으면 그런 말을 했을까? 공직 선거 출마 경험을 가진 1,000명과 지역위원회 위원장 경험이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정직하게 보고 듣고 느낀 바를 말할 수 있는 당의 분위기를 만들어 주어야 한다.

그리고 세계 모든 진보정당에서 그러했듯이, 그들로 하여금 당의 오른 쪽 날개가 되도록 해주어야 한다. 우리 당에는 왼쪽 날개는 있는데 오른 쪽 날개가 없다. 오른 쪽에는 날개가 아니라 다리가 달려 있으니 날 수가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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