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틴아메리카 좌파정부
몰락, 어떻게 볼 것인가②
[사회운동 포커스] 베네수엘라, 볼리비아, 에콰도르, 브라질 등
    2020년 03월 16일 03:35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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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틴아메리카 좌파정부 몰락, 어떻게 볼 것인가①

3. 베네수엘라: 무장한 볼리바르주의

베네수엘라는 석유국가로서 조숙한 발전을 이루었고, 따라서 다른 안데스 국가와 상이한 경로를 걸었다. 1920년대, 외국으로부터 받는 석유 지대(oil rent)는 마라카이보 강 지역을 토지과두제에서 금융적-지대추구적 엘리트로 전변시켰다. (즉 농업엘리트에서 석유엘리트로 변신했다.) 석유 통화(petro-currency) 국가인 베네수엘라에서 수입대체 산업화는 결코 장기지속적 전략인 적이 없었다. 그 대신, 베네수엘라는 미국의 석유시장에 밀접히 통합되었다. 베네수엘라 기업은 미국 기업의 세일즈맨, 프랜차이즈 업자가 되었고, 중간계급을 위해 자동차와 의류, 문화를 수입했다. 중간계급은 공공부문에 고용되어 번영을 누렸다. 그들 중에서는 전후 이탈리아와 스페인에서 온 이민자로 인해 백인 비중이 늘었다. 그보다 어두운 피부를 지닌 노동계급은 도시 주변부의 비공식경제에서 팽창했다.

1958년 이후로 정치시스템은 한 쌍의 정당, 즉 중도좌파인 민주행동당(AD)과 중도우파인 기독민주당(COPEI)가 운영했다. 두 정당은 좌파를 배제한다는 점에서 공모했고, 대통령궁을 번갈아 차지했으며, 의회를 지배했다. 그들은 석유 지대를 자신의 지지자에 쏟아 부었고, 석유지대가 감소할 때면 해외차관으로 보충했다. 1980-90년대 석유지대가 바닥을 치자, 이처럼 새로운 과두제 시스템은 위기에 빠졌다. 국가예산을 감축하라는 IMF의 요구나, 쏟아져 나오는 대통령 비리 폭로는 과두제 시스템을 더욱 악화시켰다. 1990년대 후반 일반적인 빈곤율은 86%에 달했고, 극빈은 65%에 이르렀다. 폭동이나 시위는 경찰의 총알 세례를 받았다.

이는 차베스가 56%의 득표로 대통령궁에 입성한 맥락이었다. 국가기구, 즉 의회, 사법부, 주지사, 경찰, PDVSA(반(半) 민유화된 석유기업체)는 AD와 COPEI의 지지자로 가득 찼지만, 대령 차베스의 경력이 보여주듯 군부는 더 분절화되어 있었다. 차베스는 IMF 교리를 거부하고, 빈곤에 대항하는 즉각적인 투쟁을 제시함으로서, 볼리바르 혁명이라는 비전을 제시했고, 폐쇄적인 정당지배를 대체하며, 메스티조 다수파를 끌어들일 수 있었다.

차베스는 정치기구에 대해서 ‘뿌리와 줄기’ 접근법을 취했다. (뿌리와 줄기 청원(Root and Branch petition)은 1640년, 주교제를 폐지하라고 영국 의회에 제출된 청원이다.) 그는 1999년 2월 취임한 날 헌법개정 국민투표를 위한 대통령령에 서명했고, 1999년 헌법은 투표를 통해 확정되었다. 헌법은 입법부의 권한을 약화시키고, 행정부와 ‘시민’권력이라는 새로운 권부(權府)를 강화했다. 입법부는 단원제로 축소되었고, 수정된 최다득표제로 선출하게 되었다. 또한 의회의 탄핵권은 소환 국민투표 메커니즘을 통해 유권자에게 이전되었다. 대중조직은 대법관과 전국선관위를 지명하는 역할을 부여받았다. 2001년 차베스와 새로운 의회가 토지개혁과 사회보장에 관한 법률과, 석유수입의 일정한 비율을 사회프로그램에 투입하기로 법률을 제안했을 때, 다른 부문은 강력히 저항했다. 즉 군대, PDVSA 경영진, 고용주 연합, TV 방송, 낡은 정치엘리트 등. 그들은 미국 국무부와 그 자매조직의 암묵적 지지를 받았다.

이러한 투쟁을 통해 부상한 새로운 국가계약은 기이한 혼합물이었다. 차베스는 비밀협상을 통해서 강경파 군부 지휘관을 은퇴시키거나 해고했다. 군부 나머지에 대해서는 매수하거나 진급을 시켜주었고, 자기 편으로 끌어들였다. 그들은 정권에서 상당한 경제적 이익을 누리는 높은 지위로 상승했다. 특히 군부 인사는 (원래는 2002-3년 석유회사 경영진의 사보타지에 따른 휴업기간에 일시적으로 도입되었던) 통화 통제, 외환 메커니즘에 접근할 수 있었다. 둘째, 석유가격이 상승하자 차베스는 쿠바와 협조하여 더 가난한 이웃국가와의 새로운 프로젝트를 개시했다. 즉 푸드키친, 보건의료, 교육, 직업훈련, 저렴한 수퍼마켓을 제공하는 미션. (또한 종종 군사지원이 포함되기도 했다.) 또한 2006년 이후, 정부는 2만 개 지역공동체 위원회에 돈을 쏟아 붓기 시작했는데, 지역사회 총회는 새로운 공공사업 중 우선순위를 결정했다. 이러한 노력은 노련한 인력과 행정전문가의 부족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었다. 그로 인해 2007년 베네수엘라의 중요한 좌파 집단인 급진운동당(Causa R)과의 관계가 멀어졌고, 차베스가 ‘21세기 사회주의’ 정책으로 전환하면서 그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다. (21세기 사회주의 정책은 일관성 있는 산업전략이나 노동자경영, 투자계획이 없는 상태에서 추가적인 국유화를 단행했다.)

요약하면, 차베스는 구 정치엘리트의 몰락을 배경으로 하여, 베네수엘라 석유 국가의 ‘전략적 선택성’을 극복하거나 우회했다.

(역주 – 밥 제솝에 따르면, 국가는 서로 다른 정치적 목적을 위해 행동하는 다양한 세력들에게 불균등한 기회를 제공한다. 즉 상이한 전략들 가운데 하나를 특권화시키는 구조적 선호로서 이른바 ‘전략적 선택성’을 지닌다.)

차베스 정권의 모순은 세계시장에 대한 종속적 관계에 기인한다. 일단 석유가격이 하락하기 시작하자, 외환 메커니즘은 (이미 부패의 온상이었으나) 수출품 유입의 기괴한 왜곡을 야기했고, 범죄화된 암시장을 창출했다. 합법 경제도 상품부족으로 인해 가격통제가 실시되었다. 이는 차베스의 후계자가 해결할 수 없는 문제였다.

4. 볼리비아: 탈식민화?

볼리비아는 베네수엘라보다 인구가 적고 더 가난하다. 종족적-지리적 분할은 더 극명하고, 단지 부분적으로만 ‘현대화’되었다. 정점에는 부유하고, 밝은 피부색을 지닌 농업기업 가문과 은행 가문으로 이뤄진 소수집단이 있다. 그들의 부는 산타크르주 주변의 동부 저지대, 오래된 식민지 도시, 라 파즈의 소나 수르에 기초를 둔다. 중간층은 엘 알토처럼 새롭게 도시화된 지역의 비공식 경제에 속한 메스티소 노동자, 원주민 소부르주아(트럭소유주, 상인, 건설업, 부동산업)다. 바닥에는 안데스 고원에서 근근히 생계를 유지하는 수준의 소농민이 있다.

1980년대 우고 반세르의 군사독재로부터 출현한 국가는 자유민주주의 형태 내에 19세기 과두제의 특성을 재도입했다. 강력한 상원은 인구가 적은 보수적 동부지역에 가중치를 부여한 셈이었다. 의회는 사실상 선거인단처럼 기능했는데, 다수의 대통령 후보자 중에서 누구도 다수를 차지하지 못하면, 의회가 대통령을 선출했기 때문이다. 정당연합(MNR, ADN, 과거 좌파였던 MIR)은 농업-금융 엘리트 중에서 부유한 자손을 선출하기로 공모했고, 전형적인 인물은 곤살로 산체스 대통령이다. 이러한 엘리트층은 과거 전투적 노동자운동의 중심지였던, 안데스 고원의 주석 광산을 폐쇄했고, 국가자산(가스, 석유, 통신, 전기, 철도, 물)을 매각함으로써 부를 축적했다.

오랫동안 배제를 경험했던 원주민 다수파는 <사회주의 운동>(MAS)이라는 정당으로 통합되었는다. 원주민 다수파는 가스와 석유 민유화에 대항하는 대중운동을 주도했다. MAS의 수장이었던 에보 모랄레스는 2005년 대선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MAS는 차베스보다 더 강력한 대중조직의 지지를 받았는데, 수년간 전투적 시위가 이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배 카스트는 2005년 이후에 여전히 상원을 통제했고, 9개 지방행정구역 중 5개를 통제했다.

모랄레스의 전략적 비전은 2003년 대중운동의 <10월 의제>에서 유래했다. 이는 제헌의회 선출을 요청했다. 집권 후 모랄레스는 신속하게 외국 가스회사와 더 유리한 협상을 진행했다. 또한 군인의 봉급을 인상하고, 더 광범위한 원주민 층에게 장교 훈련 기회를 제공했고, 새로 충원한 군인에게 교육 프로그램을 제공했다. 경찰의 갈취와 부패를 근절하려는 노력은 폭동을 야기했다. 정부는 이를 철회했지만, 야당은 경찰과 긴밀한 관계를 구축할 기회를 포착했다. 국가관료층은 모랄레스가 임명한 장관에 저항했고, 새로운 공공 상수도회사는 비효율성에 시달렸다.

가장 체계적인 저항은 정치시스템에 집중되었다. 보수야당은 새로운 헌법에 저항했고, 선출된 제헌의회를 포위하고 보이코트했으며, 동부지역에서 분리주의 운동을 동원했고, 수도를 수크레로 이전하자는 운동으로 관심을 돌리고자 했고, 상원에 대한 통제력을 바탕으로 헌법의 모든 조항에 대해 2/3 가결을 부과했다. 그 결과는 타협물이었다. 본질적으로, 토지개혁은 무력화되어서, 현존 토지소유에 대해서는 적용되지 않았다. 불균형적인 상원은 유지되었다. 새로운 선거체계(강력한 최다득표제. 대통령 득표율에 따라 각 정당 의회 의석수에 상한을 두는 제도)는 단기적으로는 모랄레스에 유리했지만, 대의체계의 편향을 야기함으로써 보수파에 유리하게 작동할 수도 있었다. 카리스마적 대통령에 권력을 집중시킴으로써, 새로운 선거체계는 모랄레스에 대한 MAS의 의존을 강화했다.

그 결과 새로운 국가계약은 잠정적 타협이었다. 의미 있는 토지개혁이 봉쇄됨으로써, 농업기업은 중국의 축산업을 위한 콩 생산을 확대하는 데 집중했다. 전통적인 엘리트는 도시 중심부에서 나타난 새로운 원주민 중산층에게 짜증을 내면서, 모랄레스의 임기가 끝나기만 기다렸다. (가스 소득의 증가는 건설업 호황을 야기했고, 이는 새로운 원주민 중산층을 낳았다.) 반면, MAS의 배후에 있던 전투적 동맹은 부문의 이해관계에 따라 분열했다. 일부는 점점 더 현실에 안주하는 정권에 통합되었고, 일부는 경제성장이 감속하면서 정권으로부터 멀어졌다. 2016년, 정부는 모랄레스 대통령의 임기 연장에 반대하는 국민투표 결과를 무시하고, 사법부를 활용함으로써 정부는 취약성을 드러냈다.

(역주 – 모랄레스는 4선 연임에 나서기 위해 개헌을 시도했다. 2016년 2월 개헌 국민투표에서 국민은 반대표를 던졌으나 모랄레스 대통령은 개헌 대신 헌법소원을 통해 4선 도전을 강행했다. 헌법재판소는 대통령의 연임을 제한한 규정이 위헌이라도 판단했다.)

모랄레스는 2019년 대선 1차전에서 승리를 거두었으나, 정치적 균형은 그에 불리하게 바뀌었다. 야당은 국가 내부에서 제도적 지지를 끌어냈고 (예를 들어 경찰, 지방행정부, 헌법재판소, 궁극적으로 군부 고위사령관), 대중시위를 이끌었다.

(역주 – 모랄레스는 2019년 11월 10일에 대통령선거 부정 선거 파문에 의한 전국적인 반정부 시위로 인해 대통령직을 전격 사퇴하였으며 멕시코로 망명했다가 1개월 만에 아르헨티나로 망명지를 옮겼으며 현재 테러 선동 혐의로 체포영장이 발부된 상태다.)

5. 에콰도르: 좌파적-기술관료적 현대화

1999년 거대한 경제위기 이후, 중도 좌파 마후아드 행정부는 미국 달러를 에콰도르 통화로 채택했다. (즉, 달러리제이션.) 볼리비아와 마찬가지로, 엘리트에 대한 시위는 새로운 세력을 등장시켰다. 1990년대 중반, 아마존, 중앙 고원지대, 태평양 연안의 원주민 조직은 ‘에콰도르 원주민 민족연맹’(CONAIE)이라는 광범위한 동맹을 구축했다. 대중시위와 유권자의 불만으로, 1996년부터 2005년까지, 7명의 대통령이 교체되었다. 누구도 임기를 마치지 못했고, 4명은 부패로 기소되었다. 반신자유주의 세력, 즉 원주민, 운송부문 노동자, 학생, 군인, 근린 네트워크로 구성된 세력 역시 분절화되었다. CONAIE는 선거연합인 파차쿠티크(Pachakutik)를 후원했다. 파차쿠티크는 2003년 8석을 얻었고. 급진 인사라고 여겨진 구티에레즈 대령의 정부에 참여했다. 그러나 그는 집권하자 변절했고, 2005년 대중시위로 축출되었다. 그에 따라 파차쿠티크는 분열했고, 사기가 떨어졌다.

2007년 1월 취임한, 라파엘 코레아는 이러한 세력을 통일하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 파차쿠티크 내에 친 쿠티에레즈 분파는 처음부터 그에 반대했다. 그렇지만 그는 신자유주의적 규범에 굴복하지도 않았다. 차베스나 모랄레스와 달리 그는 지식인으로, 미국 일리노이 주립대학 경제학 박사 학위를 지닌 인물이었다. 그는 구티에레즈 후계자 밑에서 경제 장관이었는데, 국제통화기금(IMF)에 맞선 인물로 대중적으로 비추어졌다. 그가 노동경제학자 리카르도 파티뇨와 세운 ‘조국주권고양운동’(Alianza PAIS)은 정당이라기보다는 느슨한 연합에 가까웠다. (조국주권고양운동의 의회 대표부는 종종 대통령과 다른 입장을 지지하곤 한다.) 차베스나 모랄레스와 비교할 때, 코레아는 기술관료적이었다. 그의 강령은 대중운동으로부터 가져온 것이었지만 말이다. 즉, 신자유주의 정책의 중단, 새로운 다민족적 헌법을 기초하기 위한 제헌의회 선출, 원주민 권리의 중시, 자연자원에 대한 민족주권, 외국 군사기지 거부 등. 새로운 단원제 의회를 위한 선거시스템은 [지역구] 최다득표제와 개방형 명부 비례대표제를 결합했다. 입법부와 행정부의 충돌은 ‘공동 사망’(mutual death) 조항, 즉 새로운 총선으로 해소된다. (개방형은 유권자가 직접 비례대표 순위도 결정한다. 반면 폐쇄형은 정당이 비례대표의 순위를 정한다. 한국은 폐쇄형이다.)

볼리비아에서 헌법을 둘러싼 투쟁과 달리, 코레아 행정부는 헌법개정이 극적으로 확정된 후 저항에 직면했다. 행정부를 재조직하려는 시도는 관료의 내부적 저항에 시달렸다. 상수도 사업의 재국유화는 지방 공동체가 상수도 사업을 감독해야 한다는 원주민의 요구에 따라 의회에서 봉쇄되었다. 2010년 9월, 경찰에 자동적으로 수여되는 훈장과 보너스를 제한하려는 시도는 경찰과 공군의 폭동을 야기했다. (경찰과 공군은 의회와 비행장을 점거했고, 폭동은 지방으로 확산되었다.) 코레아는 반란세력과 대화를 하려다 인질로 잡혔고, 군부와 지지자들에 의해 구출되었다. 다음 주, 정부는 경찰의 봉급을 인상한다고 발표했다.

더 놀라운 점은 코레아와 파티뇨가 재정경제부를 재조정하는 데 성공했다는 점이다. 재정경제부는 이제 중앙은행에 민주적 통제를 가하고, 중앙은행의 준비금을 2008년 금융위기를 방어하는 데 활용했다. 또한 국내은행이 그들 자산의 60%를 국내로 송환하도록 지시했다. 나아가 파티뇨는 국가부채에 대한 감시를 제도화했다. 1976년 이후로 국제은행이 에콰도르 국가 지도자로부터 얻어낸 대부 조건을 밝히기 위해 장부를 공개했으며, 불법적이라고 여겨지는 부채의 상환을 취소했고, 나머지에 대해서는 협상을 진행해 2/3만큼 축소했다. 과거에는 부채 상환에 국가예산의 40%를 지출했고 상환액은 사회복지 지출의 3배가 넘었는데, 이제 그 비율이 역전되었다. 공공예산은 도로, 학교, 병원에 쓰였다. 2005-15년, 빈곤수준은 45%에서 25%로 감소했다.

에콰도르는 통화주권을 회복하지 않았다. 그에 따라 석유가격이 하락하고 2015-16년 달러 강세가 나타나자 두 배의 타격을 입었다. 이러한 타격은 중국의 차관으로 부분적으로 완화되었다. 이때 부통령 레닌 모레노가 코레아의 뒤를 이었다. 모레노는 집권 후, 민유화나 공공부문 삭감을 다시 뒤로 돌릴 기회를 잡지 못했고, IMF는 에콰도르 수도, 키토로 귀환했다. 그에 따라 2019년 9월 폭동에 가까운 시위가 벌어졌다.

(역주 – 모레노 대통령이 10월 3일 국제통화기금(IMF)와 맺은 협정에 따라 긴축 재정을 시작하면서 시위가 촉발했다. 대통령은 연료 보조금을 폐지했고, 그에 따라 유가가 두 배 가까이 상승했으며 다른 소비재 가격도 크게 올랐다.)

코레아는 차베스에 비해 훨씬 더 유능한 경제팀을 활용할 수 있었다. 경제팀이 공직에 남아 있는 한, 그들은 국가정책을 더 공정한 방향으로 이끄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카리스마적 지도자에 대한 의존은 이러한 정책이 단명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6. 아르헨티나: 좌파 페론주의의 부활

볼리비아나 에콰도르에 비해 더 부유하고 현대화된 아르헨티나 사회는 베네수엘라보다 더 극적인 경제 붕괴를 경험했다. 메넴(1989-99, 정의주의자당) 행정부와, 데 라 루아(1999-2001, 급진시민연합) 행정부는 IMF의 처방에 강력히 묶여 있었다. 행정부는 유권자의 저축계좌를 페소-달러 페그(고정환율제)를 방어하는 데 동원했다.

양당제의 위기는 1976-83년 군사독재 이후 출현한 대통령제 국가의 정당성에 의문을 낳았다. 양당 중에 더 강한 정당은 1945년 페론이 세운 정의주의자당(JP)으로, 노동조합 CGT의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JP는 기회주의적인 노선으로 전환했다. 그들은 군부독재 이후 하이퍼인플레이션 상황에서 집권했다. 메넴은 대법원을 예스맨으로 채우고, 신자유주의 의제를 밀어붙이기 위해 비상대권을 활용했다. 10년 후 경제가 붕괴하면서 유권자는 페론주의의 썩은 잔여물을 거부하고, 데 라 루아의 급진시민연합이 주도하는 자유주의 연합을 지지했다. 하지만 그가 더 나을 바가 없다는 사실이 드러나자 2001년 10월 그를 몰아냈다.

JP가 통제하는 의회가 임시 대통령을 지명했다. 임시 대통령, 에두아르도 두할데는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구식 정치인이었다. 하지만 페론주의자는 첨예하게 분열했고 (정의주의자당의 내분이 발생했다), 2003년 대선에서 JP의 후보자가 서로 경쟁했다. 새로 대통령이 된 네스토르 키르치네르(2003~2007)는 정당시스템에 능숙한 정치인이었다. 그런데 키르치네르는 메넴의 정책이 국내적 요구에 반해 거대 재벌과 국제 채권자의 이익을 대변한다며 비난했다. 그는 ‘더러운 전쟁’(군사독재의 폭력적 인권탄압)에 연루된 것으로 의심되는 군대 고위사령관의 거의 절반을 해고했고, 부패행위가 있다며 52명의 연방 시경찰국장을 해고했다. 그는 메넴의 대법원이 매수되었다며 대중의 분노가 대법관 탄핵 요구로 이어지게 했으며, 시민권 단체가 대법관 후보자를 검증하게 했다. 그는 상수도기업, 우편 서비스, 철도에 대한 재국유화를 개시했고, 공공운송, 연료, 식품에 대한 보조금을 확대했으며, 실업 가장에게 수당을 확대했다. 거시경제 정책은 해외채권자에 대한 채무상환이 국내성장을 위험에 빠뜨리지 말아야 한다는 원칙에 기초했다. 그는 공공요금을 인상하라는 IMF의 요구를 거부했고, 재정목표를 낮추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메넴주의의 붕괴가 낳은 도덕적, 정치적 공백에 직면하여, 키르치네르는 대중운동의 희망을 구현하는 데 성공했다. 즉 그는 새로운 계급블록에 기초하여 주권적이며 정치적 책무를 다하는 국가를 건설한다는 프로젝트를 수행하고자 했다. 키르치네르의 자신감과 권위는 한편으로 산타 크루즈 주지자로서의 경험에 근거한 것이다. 또한 그는 좌파 페론주의로부터 자원을 끌어왔다. 키르치네르의 프로젝트는 차베스, 모랄레스, 코레아의 프로젝트처럼 새로운 것은 아니었다. 그 대신에 그는 국내 산업기반과 공공부문 서비스를 재건하고자 했고, 노동조합과 실업자의 자기조직화를 동원하고자 했다. 이는 전통적인 페론주의 전략의 부활이었다.

아르헨티나의 위기 후 경제회복은 조직화된 노동계급을 강화했다. 노동조합 조직률은 1990년부터 2000년까지 65%에서 32%로 하락했지만, 2009년 37%로 상승했고, 특히 제조업, 건설, 운송 부문은 45%에 이르렀다. 이는 임금의 완만한 증가, 노동쟁의의 증가로 나타났다.

키르치네르는 아르헨티나의 전통적인 연방주의적 국가를 혁신하려는 시도를 전혀 하지 않았다. 아르헨티나의 정치시스템은 선출된 주지사에게 거대한 권력을 부여하며, 주지사는 동트 방식의 비례대표제 모델에 기초한 의회선거에서 폐쇄형 정당명부를 구성하는 책임을 진다. 이는 거대 정당블록에게 유리하다. 동시에 중앙 정당은 주 정당에 재정을 제공하는 의무가 있는데, 이는 양자 간 거래관계를 유발했다.

(역주 – 동트 방식은 상당히 복잡하다. 이를테면 137표, 94표, 63표, 33표를 얻은 A, B, C, D 당이 있고, 이들에게 총 대의원 8석이 배분된다고 하자. 그러면 가장 많은 표를 얻은 A가 첫 번째 의석을 가져간다. 그리고 그 A당의 득표를 2로 나눈다. 그 상태에서 다른 당과 겨룬다. 이런 식으로 1석을 가져간 당의 득표수 2로 나누고, 2석을 가져간 당은 득표수에서 3으로 나눈다.)

그렇지만, 2005년 중간선거에 이르러, 경제위기로 인해 새롭게 구축된 급진적인 계급동맹이 해체되기 시작했다. 또한 페론주의가 룸펜 노동자계급을 비호한다는 자유주의적 야당의 전통적 비난도 강화되었다. 그에 따라 키르치네르의 동맹자들은 그에 대한 지지를 중단했다.

2007년 말, 전 대통령의 부인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데 키르치네르가 집권했다(2007-2015년). 그녀가 농업 수출세를 44%로 인상하자, 계급동맹의 균열이 더 악화되었다. 이러한 조치는 ‘과두제’에 대항하는 급진적 페론주의로 제시되었지만, 농장주와 도시 중간계급 부유층 간 새로운 동맹을 활성화시켰다. 좌파는 페론주의의 제도정치로부터 거리를 두었고, 대통령 부부가 축적한 부에 불만을 품었다. 급진적 세력으로서 키르치네리즘은 2010년에 이르러 소멸했다.

7. 브라질: 빈민 친화적 노선

1990년대 말, 브라질의 위기는 아르헨티나, 베네수엘라만큼 극적이지 않았다. 2002년 대선에서 룰라는 대통령에 네 번째로 도전했다. 룰라는 61% 대 39%로 카르도주 대통령의 후계자를 꺾었지만, 의회에서는 1/5 미만의 의석을 얻었다. 의회는 내륙 소도시의 의원들과 중도우파 정당들이 지배했다. 브라질 국가는 여러 측면에서 페드로 2세의 왕국의 직접적 계승자였다. 1988년 헌법은 의회와 주지사에게 막대한 권한을 부여했고, 각 주지사는 자신의 지휘하는 전투경찰(military police)을 보유했다. 거대한 비례대표 선거구와 개방형 명부 투표는 잘 알려진 (즉 자금이 풍부한) 후보에게 유리했다. 즉 정당보다 후보 개인이 더 중요했다.

노동자당(PT)은 한때 국가를 바꾸기 위해 투쟁했지만, 2002년에 이르러 브라질의 정치규칙에 적응했다. 룰라가 취임한 후, 그의 전략적 비전은 화해였는데, 그의 슬로건은 ‘평화와 사랑’이었다. 그는 시장 친화적인 내용으로 채워진 ‘브라질인에게 보내는 편지’에 서명했다. 그의 임기 처음 두 해는 카루도주가 남겨놓은 가혹한 IMF 프로그램에 묶여 있었다. 의회에서 법안을 통과시키기 위해, 룰라의 ‘해결사’들은 부패한 내륙 의원에게 표 값으로 매월 7,000달러를 지불했다. 이는 PT의 실용주의와 일치했다. 룰라는 ‘통치하는 것은 협상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2005년 이러한 금품 제공을 둘러싼 스캔들이 언론에 터져나왔다. 그러나 룰라는 좌파적 방향으로 이동했다. 대중국 철광석, 콩 수출로 경제가 호황을 겪자, PT는 빈민의 생활수준을 높이기 위한 프로그램을 개시했다. 즉 보우사 패밀리아(빈곤층·극빈층에 생계비와 교육비를 지급하는 복지 프로그램), 가계대출, 최저임금, 노령연금 등. 룰라는 2006년 대선에서 61%를 얻었다. 새로운 연안 석유지대는 브라질인을 위한 휘황찬란한 부의 원천이라는 전망을 열었다. 민관 에너지 거대기업인 페트로브라스는 이 석유지대를 관리했다. PT는 야당 PMDB와 동맹을 구축함으로서 마침내 의회 내 다수를 형성했다.

2013년 이후로 경제가 악화되면서 정적이 국가기관을 활용할 기회를 잡았을 때, PT는 평화적이고 실용적인 적응이라는 전략의 후과로, 속수무책이었다. 사법부는 페트로브라스의 부패를 조사하면서, 룰라를 처벌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PT는 집권 당시, 빈민 가운데에서 광범위한 유권자 지지층을 조직하려고 시도한 바 없다. (PT 집권기에 4,000만 명이 빈곤에서 벗어났다.) 현재는 극우파가 장악한 수백만 명의 시위대가 거리에서 PT를 능가하고 있다. PT의 지우마 대통령(2011-2016년 집권)의 부통령이자 PMDB 소속인 미셰우 테메르가 주도하고, 군대 지휘부의 지원을 받아서 의회 다수파는 행정부에 대항했고, 2016년 끝내 지우마를 축출했다. 대법원은 룰라의 인신보호라는 헌법적 권리를 취소하고, 2심에서 형량을 9년에서 12년으로 늘렸다.

(역주 – 전 대통령 룰라가 국영석유기업, 리조트 불법 취득 등의 혐의를 받게 되어 정식으로 기소될 위기에 처하자, 2016년 3월 17일 호세프는 타개책으로 룰라를 수석장관으로 임명하였다. 연방정부의 장관직에 임명되면 연방법원, 연방검찰만이 사법권을 행사할 수 있어 현재 부패 수사를 주도하고 있는 상파울루 주 법원의 구속을 피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룰라는 2017년 7월 1심 재판에선 징역 9년 6개월형을, 2018년 1월 2심에서 징역 12년 1개월형을 선고 받았다. 룰라 전 대통령은 항소 절차가 진행되는 동안 불구속 상태로 재판을 받겠다며 인신보호영장을 신청했으나, 연방대법원은 이를 찬성 5대 반대 6으로 기각했다. 하지만 2019년 11월 연방대법원은 2심만으로도 구속할 수 있다는 기존 판결을 뒤집었고, 룰라는 석방되었다.)

PT의 화해 추구 전략은 2019년에 이르러 최악의 정치적 결과를 낳았다. 룰라가 감옥에 갇힌 상태에서 강경우파 보우소나루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8. 결론

니코스 플란차스는 『국가, 권력, 사회주의』(1978)에서 사회주의로 이행은 “국가권력의 장악으로 끝날 수 없다. 그것은 반드시 국가장치의 변형(transformation)으로 이어져야 한다”고 말했다. 여기에 우리는 다음과 같이 덧붙여야 할 것이다. “거리에 시민이 영구적으로 현존함으로써 (국가를 변형해야 한다). 그럼으로써 엘리트가 국가의 한 부문에서 다른 부문으로 이동하는 전략적 이전, 즉 사법부에서 교회로, 경찰에서 군대로, 헌법재판소에서 상원으로, 대학에서 미디로의 전략적 이전을 예측하고, 분쇄할 수 있다.” (즉 기존 지배계급이 상황에 따라 입맛에 맞게 억압적,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를 활용하려는 시도를 막을 수 있다.) <끝>

필자소개
사회진보연대 정책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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