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끼리를 쏘기 전에···
꼼수·묘수, 지대 추구 정치의 오버랩
[소설 한국사회] 조지 오웰의 「코끼리를 쏘다」
    2020년 03월 11일 09:33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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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철마다 밑도 끝도 없이 차용되는 대의, 실리, 유연성, 전략, 선거공학, 심지어 시대정신까지 난무하는 말들을 보면서 ‘아 또 때가 됐구나, 메시아가 나타나 타락한 무리를 심판한 그 날’이 왔구나 싶었다. 그런 면에서 한국 정치는 지독할 정도로 전개가 뻔한 드라마가 종방 없이 계속되는 것 같다. 다음 선거철도 비슷한 풍경일 것이다. 십중팔구 예상 표절이 가능하다.

국회 다수당을 차지한 민주당은 다소 당혹스럽지만 민주세력 혹은 진보, 좌파라고 불리기도 했다. 민주대연합이란 말이 가진 함의는 미묘하다. 그 말이 정녕 온당하다면 노동자와 소수자, 약자들은 민주세력의 일원이 아닌지도 모르겠다. 민주대연합이라는 텅 빈 기표 안엔 오로지 매국 잔당의 득세를 방기한 죗값을 묻는 저주와 협박만 부유한다.

물론 이들도 한때 자신 나름의 철학과 신념을 갖고 한국사회를 바꾸겠단 의지로 결연했을 터이다. 안타깝게도 지리멸렬한 정치공학과 후진한 정치지형의 하수인을 자처해야만 하는 것은 상호 비극이 아닐 수 없다. 대중이 어떤 자극에 분노하고 슬퍼하는지만 계산하는 정치, 대중의 정념에만 호소한 정치는 역설적이게도 대중의 흥분과 기대, 자극을 위해 자신들의 행동을 결정한다. 상호 족쇄가 채워진 셈이다. 그것이 대중 정치의 대가다.

이들이 내세우는 정치전략이란 순전히 자신들의 머릿속에서 나온 것이라 생각하면 대단한 착각이다. 대중이 선호하는 감정기제, 집단표상. 분노, 혐오, 원망과 정념이 자신들의 의식과 무의식 속에 교차하며 암묵적 조율과정을 거쳐 자동 생산된다. 마치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처럼 주인은 노예 없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른다. 마찬가지로 대변자는 자신을 대변자로 인정해 줄 대중을 필요로 하기에 대중에 완전히 복속된다. 결국 대중의 감정과 방향에 따라 자신의 위치성도 결정된다. 한 치 앞을 못 보는 것이 아니라, 한 치 앞만 보면 된다는 것이 최종 결론인 셈이다.

조지오웰 「코끼리를 쏘다」는 그가 버마에서 제국 경찰로 살았던 일의 경험을 쓴 에세이다. 이야기는 간단하다. 그가 5년간 버마 제국 경찰로 일할 당시 자신의 관할구역 내에 발정 난 코끼리가 우리를 탈출해 시장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는 제보를 받는다. 야생 코끼리가 아닌 버마인들이 길들이는 코끼리였는데 사슬을 끊고 탈출한 것이다. 코끼리의 행방을 좇다 코끼리가 밟고 간 쿨리의 주검을 본다. 눈을 번쩍 뜬 채 “견디기 힘들었을 고통”을 담은 표정으로 죽어있는 그를 보자 총과 탄약통 5개를 들고 온다. 그가 총을 들자 동네 사람들은 그에게 코끼리의 행방을 적극적으로 알리기 시작한다.

큰 총을 본 그들은 내가 코끼리를 쏠 거라며 모두 흥분해서 소리쳤다. 그들은 코끼리가 자기네 집을 대놓고 부술 때는 대단한 관심을 보이지 않았지만, 이제 코끼리가 총에 맞을 거라고 하니 달라졌다. 영국인 군중이라도 그랬을 것처럼, 이 일은 그들에게도 제법 재미있는 사건이었다. 더구나 그들에게는 고기 생각도 있었던 것이다. 나는 어딘가 마음이 편치 않았다. 우선 나는 코끼리를 쏠 생각이 없었으며(필요하면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해 총을 빌려오라 했을 뿐이었다) 자기 뒤로 따라오는 군중이 있다는 건 언제나 당혹스러운 일이다. 나는 비탈 아래로 저벅저벅 걸어갔다. 총을 어깨에 걸친 데다 뒤로는 계속해서 늘기만 하는 군중이 서로 밀치며 졸졸 따라오니, 내 모습은 내가 느끼기에도 바보스러웠다. (36쪽)

그가 총을 든 순간 군중은 계속 그의 뒤를 따라붙기 시작했다. 무장하지 않은 다수의 군중은 그를 좇으며 그가 어서 빨리 난폭한 코끼리를 쏘고 굶주린 당신들에게 고기를 제공해 줄 것을 기대한 것이다. 그 소란 속에 80야드쯤 떨어진 곳에서 코끼리를 발견한다. 코끼리는 군중에 조금도 관심이 없이 풀을 뜯고 있었다. “멀리서 보니 평화롭게 풀을 뜯는 코끼리는 소보다도 위험스러워 보이지 않았다”. 그는 멀쩡한 코끼리를 전혀 쏘고 싶지 않아 조련사를 데려와 상황을 마무리하려고 했다. 그때 문득 뒤를 돌아 군중을 힐끗 본다.

막대한 인파였다. 적어도 2000명은 되고 계속해서 불어나고 있었다. 그들은 길 양쪽을 다 막고 길게 늘어서 있었다. 빛깔 요란한 옷들 위로 길게 이어져 이는 노란 얼굴들의 물결이 보였다. 모두 코끼리한테 총을 쏠 것이라 확실히 믿고서 제법 흥이 나 좋아하는 표정이었다. (중략) 그때 나는 내가 결국엔 코끼리를 쏴야 한다는 걸 문득 깨달았다. 사람들이 내가 그러리라 기대하고 있었으니 그래야만 했던 것이다. 나는 2000명의 의지가 나를 거역할 수 없게 밀어붙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손에 소총을 들고 서 있는 그 순간 나는 백인의 동양 지배가 공허하고 부질없다는 것을 처음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여기 무장하지 않은 원주민 군중 앞에 총을 들고 서 있는 백인인 나는 겉보기엔 작품의 주연이었지만, 실은 뒤에 있는 노란 얼굴들의 의지에 이리저리 밀려나는 바보 같은 꼭두각시였던 것이다. (38쪽)

코끼를 전혀 쏘고 싶지 않다는 의향은 결국 두려움으로 바뀐다. 군중들의 비웃음 뒤에 도사리고 있는 위협 “잘못되면 2000명의 버마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내가 쫓기다 붙들려 짓밟혀서, 비탈 위에 있는 인도인처럼 이를 싱긋 드러낸 송장 신세가 되고 만다.” 그는 탄약통을 탄창에 밀어 넣고 코끼리를 정조준한다. “마침내 그들은 자기들 몫의 작은 재미를 맛보게 될 터.”

코끼리가 쓰러지자 군중들은 좋아서 날뛰었다. 일시에 고통 없이 죽길 원했던 그의 바람과 달리 코끼리는 빨리 죽지 않고 침을 흘리며 다리를 떨고 오랫동안 덮쳐오는 고통을 시시각각 토해냈다. 그는 그 모습을 지켜보다 참지 못하고 코끼리의 심장과 목에 한 발씩 총을 쏘아 넣지만 아무 효과도 없었다. 코끼리는 한 시간 가량 살아있다는 사실을 저주할 만큼 고통스러워했다. 그는 견딜 수 없어 자리를 떠버린다. 이미 버마인들은 그가 자리를 뜨기 전부터 “칼과 바구니를 들고 나타났다. 정오 무렵엔 코끼리의 거의 뼈만 남았다”는 얘기를 듣는다. 코끼리 사살은 계속 회자됐고 동료들은 “쿨리를 죽였다고 코끼리를 쏘는 건 터무니없는 것이라고 했다. 코끼리는 그 어떤 드라비다 쿨리보다 가치가 있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공방 덕에 그는 코끼리 주인으로부터 법적 책임을 피해갈 수 있게 된다.

이후 1972년 조지오웰은 5년 만에 사직서를 제출하고 영국 경찰 제복을 벗어던진다. 그 뒤 그는 스페인 내전에 참가한다. 이 간명한 그의 행보는 무수한 함의를 지닌다. 언뜻 제국주의의 실상과 폭압을 폭로하는 것 같지만 이 작품에서 그 이상을 읽어낼 수 있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코끼리를 쏠 때 무언의 압박을 보내 백인 폭압자의 소임을 다할 것을 종용한 것은 피지배 계급인 군중이었다. 예의 군중이 원하는 지배자의 모습이란 “그 자신의 자유”마저 피지배자의 욕망에 할당하는 것, 끊임없이 서로를 식민화시키고 지배하는 것이다.

한국정치에 민주세력으로 불리는 당의 대의는 간명했다. 가공의 적을 향하는 대항 집단의 일사불란한 동일시. 모든 필요한 이론과 공학을 자신들의 이해관계로 착종시키고 내부화한다. 피해의 자리싸움, 약자의 외피를 쓴 이들은 노동자, 소수자들이 겪는 수난과 고통은 애초부터 자기 관심사가 아니라는 듯 오로지 매국 잔당에게 의회를 빼앗길 시 도래할 추상적 ‘고통의 보편주의’를 담론화한다. 그 속에서 구체적 현실은 매번 나중 문제로 치부됐다.

언제 약발이 다할지 모르는 수구세력의 무능에 반사이익을 얻기 위해 위기를 조성하는 것. 수준 낮은 적을 이기기 위해 꼼수를 묘수로 포장하는 것. 조악한 수사로 대중을 감화시키거나 개혁정당을 실리가 없는 입진보로 낙인찍는 일이 이들의 소일로 자리매김한 듯하다.

한때 자신만의 명분과 정치이념을 갖고 한국사회를 바꾸고자 출사표를 던진 86세대는 그 시절 눈물겨운 희생과 좌절 성공을 나눴다. 하지만 어느새 이들을 뒤따르고 있는 무수한 대중이 추동하는 환상을 대리 충족시키며 의석수, 공천, 재선 등의 지대추구로 자신들의 정치를 소급시켰다. 그 결과 자유, 평등, 인권, 정의란 대중의 욕망과 자신들의 이해관계가 상연되는 무대에서만 연출 가능한 의제가 돼버렸다.

코끼리를 쏘기 전 조지오웰이 느꼈을 죄의식, 균열, 망설임 그 결여의 틈에서 주체는 해방된다. 일시적으로 획득된 대의명분은 어쩌면 그의 말대로 “극장에서 드디어 커튼이 올라가기를 기다리는 수많은 사람들이 동시에 내는 소리”일지도 모른다.

필자소개
여미애
추계예술대학교에서 소설 창작기법을 연구했으며 성균관대 박사과정에서 현대 문학평론을 공부하고 있다. 독서코칭 리더로 청소년들과 붉은 고전읽기를 15년간 진행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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