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즘 가장 뜨는 ‘단편’ 감독을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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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년 09월 05일 10:27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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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보기에 그는 영화만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는 일년 내내 영화를 찍으며 살고 싶다고 한다. 하지만 단편의 특성상 많이 만들어도 틀어주는 곳이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많이 만들 수도 없다고 한다. 일년에 단편을 4편을 만들어도,(그는 단편은 한달에 한편씩 만들 수 있다고 한다) 나머지 8달은 영화를 안 하고 놀고 있는 것인데, 사람들은 “4편이나 만들었네!”한다며 답답해한다.

    물론 그가 일년에 4편의 영화를 만든 것은 아니다. 영화를 만들어도 상영해주는 곳은 영화제 밖에 없고, 그 영화들이 영화제라는 관문을 통과해야 하기 때문에 그게 오히려 더 번거롭고 힘들게 보인다.

    단편영화의 생존 경로

       
    ▲ 김종관 단편영화 콜렉션 1 <사라지는 순간들>
     

    약 4년의 기간동안 만들어져서 이 DVD에 수록된 6편의 단편은 작은 수가 아니다. 나는 예전에 독립영화 감독들에게 한 감독의 단편 3편만 봤으면 좋겠다고 공공연히 떠들고 다니곤 했다.

    90년대 후반이었을 당시 대부분의 감독들은 자신의 단편을 2편정도 만들고 나면, 이미 지쳐서 충무로 연출부로 들어가거나 영화판을 떠나곤 했다. 그땐 지금처럼 단편 만들고 바로 충무로 장편 하던 시절이 아니었다. 정말 세편 이상을 꾸준히 만드는 독립영화인들이 많지 않았고, 그럴 수 있는 환경도 아니었다.

    물론 지금은 디지털 시대이고 영화를 제작할 수 있는 환경이 달라졌기 때문에 오히려 과도하게 다작을 하는 독립영화인들도 많다. 하지만 그 영화들이 모두 관객들과 만나는 것은 아니다. 국내의 독립영화제와 단편영화제들의 관문을 통과하기란 생각보다 아주 어렵다.

    최소한 10대1의 경쟁을 통과해야 비로소 극장에서 관객을 만날 수 있고, 수상도 노릴 수가 있다. 그런데 연이어 몇 편의 작품이 계속 주목을 받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계속 관객들에게 열렬한 지지를 얻어내고, 팬들을 만들어내는 것 역시 보통 일이 아니다. 그런데 최근 단편에서 가장 뜨는 감독이 김종관 감독이 아닐까 싶다.

    최근 그의 단편 6편을 묶은 DVD [사라지는 순간들 – 김종관 단편영화 콜렉션 1]이 출시되었다. 물론 미디어센터 미디액트의 지원(이것도 일정한 심사를 거쳐야 한다)을 받아서 한정본으로 출시된 것이지만, 개봉한 독립영화의 DVD도 만들어지기 어려운 상황에서 한 감독의 단편이 DVD로 만들어진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의 영화에 어떤 매력이 숨겨져 있을까? 무엇이 ‘사라지는 순간들’을 일목요연하게 담아내고 있는 것일까?

    단편영화는 단편영화스러워야 좋다

    그의 영화가 좋은 이유는 그만의 ‘단편영화스러움’에 있다. 뭐, 꼭 단편영화가 어떠해야 한다는 기준이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겠으나, 단편영화만의 매력과 특질은 있다는 것이다. 대략 20분 내외의 짧은 시간에 무엇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보여주거나 들려주는 방법일 텐데. 최근엔 짧은 시간에 너무 많은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거나, 중언부언하는 경우들이 너무 많다.

    또한 TV 드라마인지, 단편영화인지 의심이 가는 영화들도 너무 많고, 가장 안 좋은 경우는 주류영화의 단편버전을 찍는 경우들이다. 물론 그 시도들이 모두 지탄받아야 할 것들은 아니겠으나, 이제 단편영화만의 매력을 찾을 만한 영화들이 점점 줄어들고 있는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김종관의 단편들은 중언부언하지 않으며, 구체적인 순간을 포착해, 보는 이의 감성을 한순간에 길어올리는 정서적 자극을 준다. 또한 연이은 작품 활동을 통해서 자신만의 개성과 특질을 확대재생산하고 있다.

       
     ▲ <wounded…> DV 6mm, color, 3min.
     

    <wounded…>(2002년/3분/DV)는 손을 꼭 맞잡고 서있는 연인이 횡단보도 앞에 서있다가 여자가 신발 끈이 풀린 것을 보고, 손을 놓는 순간 남자는 횡단보도를 건너가고 결국 신호가 바뀐 반대편에서 서로를 바라보고 있는 순간을 포착한 ‘초단편영화’이다.

    그게 영화의 시작과 끝이다. 순간 그들은 왜 그렇게 손을 꼭 잡고 서있었을까? 그리고 왜 반대편에서 서로를 애타게 바라보고 있을까? 하는 감정이 들게 만드는 매우 짧지만 강렬한 작품이다.

    <사랑하는 소녀>(2003/19분50초/DV)는 <wounded…>의 장편버전이라 할만하다. 그들이 왜 그렇게 손을 잡고 있었고, 어떤 상황에 놓여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영화이다. 원래 <사랑하는 소녀>의 시나리오가 먼저 쓰여져 있었지만, 불가피하게 <wounded…>의 장면 밖에 찍지 못했고, 그걸 먼저 영화로 완성한 후 남자배우를 교체해 그 장면을 포함해서 처음부터 다시 찍은 것이다.

    사라져가는 순간을 포착하는 작업들

    김종관의 많은 영화들은 화면보다 소리로 먼저 시작된다. 소리로 주위를 환기시킨 후 그 소리가 있는 곳을 보여주는 방식이다. <사랑하는 소녀>도 예외는 아닌데, 도시의 소음 속에 떡볶이를 먹고 있는 ‘고딩’들이 보인다. 다음 장면이 먹은 것을 게워내는 ‘여고딩’의 애처로운 모습을 비추고, 바로 다음에 “사랑하는 소녀”라는 타이틀이 뜬다.

    어쩌면 상투적일 수 있는 이런 장면 배치는 사실 시미치 뚝 떼고 짐짓 이어붙인 것이다. 그녀가 과연 사랑스러운가? 이들의 모습은 사랑스러울까? 영화의 줄거리는 매우 단순하다. 실수로 임신한 고딩들이 임신 중절할 돈을 구해 거리를 헤매는 과정이다.

    그 이야기 안에 여러 가지 순간들이 포착되듯 영화에 담겨있다. 담배꽁초가 떨어지기 직전의 순간. 횡단보도를 건너기 직전의 기다림. 남자친구가 돈을 구해 돌아오기 바로 전 순간. 고모에게 돈을 달라고 말해야 하는 순간. 이 순간들은 DVD의 제목처럼 곧 사라지는 순간들이지만, 영화 속에서 계속 맴돌며 여운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그 안에 그들의 애처로운 모습이, 그들의 애처로운 사랑의 순간이 담겨있다.

       
    ▲ <폴라로이드 작동법 How to Operate a Polaroid Camera> 2004년. DV 6mm, color, 6’20"
     

    <폴라로이드 작동법>(2004/6분20초/DV)은 이번 콜렉션 제목과 가장 잘 어울리는 영화이다. 순간을 포착하는 폴라로이드 카메라가 등장하며, 영화 속 폴라로이드 사진이 영화의 처음과 끝을 장식한다.

    한 공간에서 남자가 소녀에게 폴라로이드 작동법을 설명한다. 그런데 남자의 목소리만 들릴 뿐 카메라는 남자의 얼굴도 보여주지 않고, 시종일관 소녀의 눈빛과 표정, 그녀의 미세한 떨림에만 집중한다.

    이것은 커뮤니케이션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남자는 자상하지만 건조하게 작동법을 설명할 뿐이지만, 소녀의 눈매는 이미 촉촉하고 그의 말을 알아듣지도 못한다. 그녀는 폴라로이드 작동법을 배웠지만, 알지 못한다.

    정작 이 영화는 작동법 이외에는 아무 것도 설명하지 않으면서도 가장 강렬하게, 소녀의 마음을 전달한다. 누군가를 사랑하게 된 어느 순간 아무 것에도 관심 없이 오로지 그에게로 모든 것이 집중되는 한 순간을 예리하게 포착한 것이다.

    김종관 스타일의 원류와 짐

    아마 이 영화는 시간이 지나도 김종관 영화스타일의 원류처럼 기억될 것이고, 감독에겐 그것이 짐이 될 수도 있겠지만 나는 그가 자신의 영화에 대한 열정으로 그 짐을 벗어던질 것으로 믿는다.

       
    ▲ <사랑하는 소녀 Tell Her I Love Her> 2003년. DV 6mm, color, 19’50"
     

    이 영화는 두 번의 유명세를 치렀는데, 한번은 영화 자체로 당연한 응분의 주목을 받았고, 다른 한번은 이 영화에 출연했던 배우 정유미가 <달콤한 인생>과 <사랑니>, <가족의 탄생>에 출연하면서, 그녀의 팬이 된 관객들이 <폴라로이드 작동법>을 찾아내면서 다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가 정유미의 데뷔작이라고 하는데, 그녀는 <사랑하는 소녀>에도 잠깐 등장한다.

    다소 갑작스런 일본어로 시작되는 <영재를 기다리며>(2005년/4분50초/DV)는 기다림의 영화이다.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간절한 기다림이 원망이 되고 절망이 되려는 순간 나타난 남자가, 자신의 손을 잡으며 따뜻한 말을 건네는데 다시 사랑을 느낄 밖에 없는 여자의 감정을 드러낸다.

    감정이 쌓이고 쌓여 극에 달했을 때, 순식간에 양질 전화되는 가장 짧은 시간을 영화는 보여준다. 이 영화는 카나 하라다라는 일본인 배우가 일본, 한국, 프랑스, 미국의 단편감독들에게 자신을 주연으로 하루 동안 단편영화를 찍을 것을 조건으로 만들어진 옴니버스 중 한편이다. 한국 남자배우의 이름은 김영재이다. 여기에서도 이야기에 집착하지 않고, 어떤 순간의 느낌을 포착하려는 그의 주제의식과 스타일이 잘 유지되고 있다.

    어두운 밤 한 여자가 버스를 타고 어디론가 가서 어떤 남자와 하룻밤을 지내고, 함께 시골길을 걸어나와 다시 버스를 타고 떠난다. <낙원>(2005년/14분/Super16mm)은 상영시간동안 노래 이외에 한마디의 대사도 없이 영화를 마무리한다.

    그들의 하룻밤은 정말 낙원과 같은 것이었을까? 그들의 과거와 현재는 어떤 모습들일까? 불현듯 등장하는 아이와 물방울 같은 이미지들로 영화에 감정의 여백과 골들을 만들고, 그것을 관객들이 자연스럽게 혹은 자유자재로 해석할 수 있도록 열어놓았다. 여자가 부르는 “슬픔의 심로”가 슬픔을 자아내기도 하고, 남자의 절룩거리는 발걸음을 따라하면서 장난을 치기도 하면서, 그들 사이의 정서적 교감을 받아들이게 만들어간다.

    <낙원>의 영어제목은 <Slowly>로 지었는데, 이전 영화들이 현실에 존재할 법한 순간적 감정의 떨림과 폭발직전의 상황들을 냉정할 정도로 차분하게 보여줬다면, 이 영화는 천천히 걸어서 가는 낙원을 몽환적으로 펼쳐보인다.

       
    ▲ 김종관 감독의 2005년작 ‘엄마 찾아 삼만리’가 실려있는 <눈부신 하루 One Shinning Day> DV 6mm, color, 135min.
     

    DVD의 맨 마지막에 탑재된 <엄마 찾아 삼만리>(2005년/44분/DV)는 잠시잠깐 개봉했던 옴니버스 프로젝트 <눈부신 하루>(2005년/김성호, 민동현, 김종관/DV)에 포함된 영화로 지금까지 김종관의 영화 중에서 가장 긴 러닝타임을 갖고 있다.

    이 영화를 보면 그가 사건을 만들고, 서둘지 않고 긴장을 증폭시키며, 그것을 해결해가는 방식에도 재능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노트북을 속여 팔아 돈을 차곡차곡 모으는 실업계 고딩 종환. 그에게는 표정도 없고 뒤돌아보는 법도 없다. 그의 비정함 때문에 성장영화라기 보다는 청소년 범죄영화처럼 보인다.

    이 영화에서 주인공을 맡은 김동영이 보여주는 연기는 매우 당차며 비범하다. 커다란 몸짓과 과도한 표정변화로 자신의 감정과 관객의 감정을 쥐어짜내지 않고, 굳은 얼굴로 강단있는 캐릭터를 소화해내고 있다.

    김종관의 영화에서 이렇게 강한 이미지의 캐릭터는 보기 어려웠는데, 그것은 배우의 능력이기도 하겠지만, <폴라로이드 작동법>에서 정유미처럼, <wounded…>와 <사랑하는 소녀>의 홍윤정처럼, <낙원>의 양익준처럼, 배우에게서 적절한 표정과 연기를 끌어내는 그의 연출력이 큰 몫을 했을 것이라 생각된다.

    친구 영수와 ‘땡땡이’를 치며 범죄행각을 벌였던 종환은 그 돈으로 돈벌러 간 엄마를 만나러 일본에 갈 비행기 티켓을 산다. 하지만 그는 온전히 일본으로 가지 못한다. 그가 맞이할, 사라지고 말 순간들이 영화 속에 더 남아있기 때문이다.

    “같이도 보고, 돌려도 보세요”

       
    ▲ <바람이야기 Wind Story>. 2002년. 16mm, color, 10min.
     

    이 여섯 편의 영화들이 김종관의 모든 영화들은 아니다. 그의 첫 작품 <바람이야기>(2002년/10분/16mm)는 이번 콜렉션에서 제외됐는데, 감독의 말에 의하면 나중을 위해 아껴두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언제라도 짬을 내서 단편영화를 찍기 위해서 <모놀로그 10부작> 시리즈를 기획했고, 그중 한편을 이미 만들어서, 제5회 제주영화제의 상영을 앞두고 있다.

    그가 이렇게 높은 창작열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물론 그의 영화를 지지해준 관객들의 평가가 큰 원동력이 됐을 것이다. 하지만 더 큰 영화만을 쫓지 않고, 충무로 영화를 하더라도 자신은 단편과 장편을 오가면서 지속적으로 독립영화를 하겠다는 의지가 충분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미 그는 충무로의 영화사와 시나리오를 쓰고 있다. 하지만 서둘지 않고 천천히 할 계획이며, 충무로와 독립영화를 오가면서, 단편과 장편을 넘나들면서 영화를 만들고자 한다. 그는 지금도 그렇지만 아마도 다작 감독이 될 것이다.

    물론 이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사람들은 더 좋은 환경에 더 쉽게 적응하고 어떤 경우 길들여지기도 한다. 그럼에도 난 그가 앞으로 만들 상업영화와 작정하고 만든 독립영화를 모두 보고 싶다. 그러기 전 그의 단편영화를 안 보신 분들은 혹은 몇 편만 보신 분들 찾아서 보시길. 소량 한정 판매라 못 구할 수도 있으니 사이좋게, 돌려보시고 같이 보시기도 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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