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헛되지 않은 비정규직 노동자의 죽음
        2006년 09월 05일 08:56 오전

    Print Friendly, PDF & Email

    죽어야만 겨우 이름 석자가 주변에 알려지는 사람들. 가난을 무거운 등짐처럼 지고 삶을 살아가는 수많은 익명의 노동자들. 그들 가운데 일부는 목숨을 던지며 이 사회에 항거하곤 했다. 그제서야 사람들은 그의 이름을 들어본다. 그리곤 곧 잊어버린다.

    저 세상에 있는 그들이 자신의 이름이 잊혀진다 해서 섭섭해할 리 없다. 다만 그 뜻마저 잊혀진다면 그들의 영혼은 분노할지도 모른다.

    현대자동차 비정규직 노동자 류기혁 씨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지 벌써 1년이 지났다. 그는 작년 9월 4일 새벽, 농성중인 노조 간부들에게 오렌지와 김밥을 마지막 선물로 안겨주고 비정규직 노조 사무실 옥상에서 목을 맸다. 서른 살의 청년이었다. 젊은 노동자 류기혁의 1주기 추모문화제가 9월 4일 현대차정문 앞에서 열렸다.

       
    ▲ 4일 저녁 6시 울산 현대자동차 정문에서 열린 비정규직노조 고 류기혁 열사 1주기 추모문화제에 참석한 노동자들이 고인을 생각하며 묵념을 하고 있다.(사진=금속노조)
     

    현대차 비정규직노조가 설립된 지 3년, 노조는 지금까지 떨어진 조직률을 회복하고 ‘합법적인’ 쟁의권을 확보하기 위해 투쟁해왔다.

    비정규직노조의 독자 파업으로 라인이 멈추기도 했고, 지난 25일에는 기아차 화성공장과 현대차 울산·아산·전주공장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공동 파업으로 라인이 멈추는 성과를 이뤄냈다. 

    억압의 세월을 살아내던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현장의 고통과 설움 때론 무기력함을 실감한 사람들은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 성과인지 잘 알지 못할 수 있다. 죽은 자의 죽음을 딛고 산 자들이 싸워서 쟁취한 것이기 때문이다. 때론 목숨을 제단에 바치면서 싸울 수밖에 없는 싸움이기 때문이다.  

    비정규직 힘으로 공장 멈추고 3자교섭 끌어내고

    물론 투쟁의 과정에서 현실의 ‘폭력’은 ‘법’보다 가까웠고, 수십 명의 조합원들이 관리자와 경비들의 폭력에 의해 크고 작은 부상을 입었다. 간부들의 고소·고발은 남발됐고, 지난 달 최병승 사무국장이 구속되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원청회사는 지난 8월 31일 불법파견 특별교섭에서 ‘원청회사, 원청노조, 비정규직노조(울산·아산·전주)’로 구성된 3자 교섭에 합의하면서 비정규직노조(지회)를 인정했다. 그리고 3자 교섭을 위한 실무협의에서 회사측은 추가 고소고발, 징계 등은 중단하고 이미 진행된 고소·고발에 대해서는 경찰에 조사 중단을 요청키로 했다.

    지난 5일 첫 본교섭이 시작으로, 주 2회 이상의 진행하기로 한 교섭에서는 임금, 기본협약, 집단교섭 성사 등의 비정규직노조의 임단협 전반에 대해 다룰 예정이다. 현대차 비정규직노조와 정규직 노조는 회사측과의 교섭이 의미가 없을 시, 공식적인 절차를 밟아 공동투쟁을 진행하기로 결정했다.

       
     

    젊은 노동자 류기혁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지 1년, 여전히 비정규직 노조에 가입하면 업체 폐업, 해고 등의 협박은 기본이다. 집회에 참석하면 두들겨 맞는 것은 예사다. 한 업체를 5개 업체로 쪼개고, 조합원은 계약해지해 활동을 원천적으로 막아버리는 현실이지만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이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 것은 틀림없다.

    추모제에 참석해 고개를 숙이고, 그를 생각하고, 지난 날을 되씹는 노동자들에게 지나간 투쟁의 시절이 파노라마처럼 스쳐지나간다.

    “연대와 단결, 부끄럽지 않도록 투쟁하자”

    그를 추모하는 제상이 차려지고 어둠은 짙어갔다.

    민주노총 울산본부 하부영 본부장이 말한다. "희망을 잃고 목숨을 끊었을 류기혁 열사를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진다.  1년 전이나 2년 전이나 달라지지 않은 비정규직 상황 속에서 나는 죄인"이라고. 하본부장은 "2주기에는 비정규직 문제를 완전히 해결해 노고를 축하하는 자리로 만들 수 있도록 죄인의 심정을 씻기 위해 함께 다시 한 번 결의하자"고 다짐했다.

    금속산업연맹 전규석 울산본부장도 "적을 향한 칼끝은 자본가에게 겨누고, 노동자계급의 연대와 단결을 강화하고, 부족하더라도 함께 부끄럽지 않은 투쟁을 만들어가자"고 했다.

    2년 전 박일수 열사를 보낸 현대중공업 사내하청지회 조성웅 지회장은 "박일수 열사 영안실에서 류기혁 열사를 처음 만났다"며 "비정규직이 노조에 가입하는 것은 자신의 운명을 거는 결단"이라는 비정규직의 현실을 짚었다. 또한 "더 이상 구호로 외치지 말고 자신의 조건에서 투쟁을 만들어가자"고 호소했다.

    "비정규직노조에 가입하는 건 운명을 거는 결단"

    이날 추모제 사회를 맡은 김태윤 비정규직노조 수석부위원장은 “집회에서 두들겨맞고, 업체는 5개로 쪼개지고… 과연 임단협이 체결될까 의심스러웠지만 결국 해냈다”며 “먼저 연대하고 부끄럽지 않은 투쟁을 하겠다”고 결의를 밝혔다.

    현대차비정규직노조 박현제 위원장은 “언제 끝날지 모르는 투쟁, 그러나 절대 묻히지 않을 투쟁”이라며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자부심을 만들기 위해 투쟁”할 것이라고 밝히고 “더 열악한 동지들의 입장에서 함께 생각하고 함께 하겠다”며 “모든 노동자가 승리를 안을 수 있도록, 또 다른 열사를 만들지 않도록 투쟁”할 것을 밝혔다.

    마지막 발언을 한 현대차 열사회 심재근 정규직 조합원은 “회사측의 부당한 전환배치에 항의하며 자결한 5공장 정규직 고 남문수 동지처럼 정규직도 죽음으로 내몰리고 있다며, 공세적인 연대와 투쟁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필자소개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