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라틴아메리카 좌파정부
    몰락, 어떻게 볼 것인가①
    [사회운동 포커스] 베네수엘라, 볼리비아, 에콰도르, 브라질 등 사례
        2020년 03월 09일 11:01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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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틴아메리카 좌파 정부의 부상과 몰락에 대한 번역글이다. 다소 길어서 2회로 나눈다. 두 번째 글에서는 베네수엘라, 볼리비아, 에콰도르, 브라질, 아르헨티나의 구체적 진행 과정이 서술된다. 사회진보연대의 ‘사회운동 포커스’에 실린 글을 동의를 얻어 게재한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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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자 해설]

    1990년대 말부터 2000년대까지 라틴 아메리카에서는 핑크 타이드, 즉 좌파의 물결이 거셌다. 베네수엘라의 차베스, 볼리비아의 모랄레스, 에콰도르의 코레아, 아르헨티나의 키르치네르, 브라질의 룰라가 그러한 흐름을 대표했다. 하지만, 그 대표자들은 최근 처절한 몰락을 경험했다. 차베스 사후, 2019년 중반 베네수엘라 난민 규모는 500만 명을 넘어 인구의 15%에 달했다. 모랄레스는 2019년 대통령직을 전격 사퇴하고, 멕시코를 거쳐 아르헨티나로 망명한 상태다. 룰라는 2018년 1월 징역 12년 1개월형을 선고 받았다. 왜 이런 사태가 발생했나?

    이 글에 다루는 라틴 아메리카 5개국은 대체로 지방(주 정부)의 기득권을 강하게 보호하는 과두제적 연방제와, 왕조 국가의 유산인 권위주의적 대통령제가 공존하는 정치시스템을 공유한다. 얼핏보면 연방제와 대통령제라는 외형에서 미국과 유사해 보이지만, 라틴 아메리카는 본질적으로 의회민주주의를 결여했다. 그런데 핑크 타이드로 집권한 좌파-인민주의 정권은 이러한 정치시스템을 적절히 개혁하는 데 모두 실패했다.

    베네수엘라, 볼리비아, 에콰도르에서는 개헌이 이루어졌지만, 개헌은 대통령의 권한을 강화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이는 기존 기득권 세력(한국 식으로 말하자면 ‘적폐세력’)이 장악한 의회나 지방정부를 우회하기 위한 효과적인 방식으로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이는 비대한 대통령 권력으로 인해 권력남용이나 부패가 커질 위험성도 높였다.

    나아가, 특히 베네수엘라와 볼리비아에서는 대통령이 임명하는 사법부의 권한을 매개로 집권당의 지배 연장을 추구했다.

    예를 들어 베네수엘라에서는 2017년 대법원이 의회를 해산시켰다. 볼리비아에서는 헌법재판소가 대통령 4선을 합헌이라 판결했다. 사법부를 매개로 한 정치적 지배, 즉 ‘정치의 사법화’가 라틴 아메리카 좌파-인민주의 정권의 무기가 된 것이다. 이러한 시도는 야당 측의 강력한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대통령이 임명하는 사법 권력을 통해 정권 재창출을 시도했다는 사실은 한국에도 시사하는 바가 클 것이다. 왜 그렇게 청와대와 여당이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 도입에 목을 매었는지 생각해 봐야 한다.)

    반면 아르헨티나와 브라질의 경우에는 실질적인 정치시스템 개혁이 없었다. 그로 인해 기존 정치시스템의 모순, 즉 권위주의적 대통령제, 배타적 이익을 추구하는 지방주의와 같은 모순이 온존했다. (이러한 모순이 결합될 때, 이를 라틴 아메리카의 ‘후견주의’라고 부른다.)

    물론 라틴 아메리카 국가의 처절한 실패에는 세계적 경제위기가 작용했다. 각국은 경제 회복기, 호황기에 자원가격 상승에 고무되어 분배정책을 적극적으로 실행한 반면, 경제구조의 발전적 재편에 실패했다. 이런 사실도 현재 한국 경제에 시사하는 바가 클 것이다. 라틴 아메리카 5개국의 사례는 모든 점에서 현재 한국 상황을 비추는 거울이라 할 수 있다. 이 글은 《뉴 레프트 리뷰》에 실린 다음 글을 축약하여 번역한 것이다.

    Juan Carlos Monedero, Snipers in the Kitchen: State Theory and Latin America’s Left Cycle, New Left Review, 120, Nov-Dec 2019.

    중남미의 좌파 성향 지도자들 모습(위키피디아)

    * * *

    1. 라틴 아메리카의 국가형성 과정

    라틴 아메리가 국가 사이에는 명백한 유사성이 존재하고, 역사적 물결도 동시에 발생했다. 즉, 1810년대 이후 독립전쟁, 1870년대 이후 과두제적 안정화, 1930년대 이후 위기와 포퓰리즘적 반란, 1960년대 이후 군부독재, 1980년대 이후 민주화와 신자유주의화의 동시적 발생, 1990년대 이후 경제위기와 좌파적 전환.

    그렇지만 라틴 아메리카 국가 간에는 공통점만큼이나 수많은 차이가 존재한다. 영토, 주민, 통치기구라는 초기 결정요인을 통해 살펴 보자. 먼저, 대륙은 거대하고 지형학적 다양성이 매우 컸다. 또한 콜롬버스가 대륙을 발견하기 이전에 살던 주민의 사회적 구조가 상이했다. 마지막으로, 수 세기에 걸친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제국적 지배는 상이한 지배모델을 시행했다. 이러한 유산은 히스패닉(스페인계) 안데스 고원지대와 브라질을 포함하는 남부 원뿔지대(브라질, 파라과이, 우루과이, 아르헨티나, 칠레)를 분리했다. 아르헨티나의 국가형성 패턴 역시 안데스-카리브해 국가와 달랐다. 또한 볼리비아, 에콰도르, 베네수엘라의 국가발전 경로 역시 서로 달랐다. 따라서 남아메리카 국가에 대한 검토는 반드시 19세기 모체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1) 안데스 지역의 국가형성

    프랑스혁명(1798)과 나폴레옹의 마드리드 정복(1808)은 스페인의 라틴 아메리카 제국에서 최종적 위기를 촉발했다. 계몽주의적 이상과 미국 필라델피아와 스페인 카디스의 자유주의적 헌법은 대통령제 공화국이라는 모델을 제공했다. (나폴레옹 점령 기간인 1812년, 스페인 민중은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 지방에 있는 항구도시 카디스에 모여, 자유주의 사상에 입각하여 인민의 주권 보장과 권력분립을 내용으로 하는 입헌군주제 헌법을 제정했다.)

    그렇지만, 시몬 볼리바르(남아메리카의 혁명가, 1783-1830)와 그의 동료들은 미국이나 스페인과는 다른 사회적 환경에서 활동을 펼쳤다. 안데스 고원에서 스페인의 지배는 고도의 도시문명에 대한 정복을 토대로 구축되었다. 안데스 고원의 도시문명은 북아메리카 뉴잉글랜드와 비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볼리바르의 원칙은 예속을 통한 통합이었고, 교회의 통합 활동을 진척시키기 위해 인종 간 결혼(intermarriage)을 활용했다. 이는 미국에서 벌어진 배제와 학살과는 대비되는 것이었다. 대규모의 원주민을 억누르기 위해 군사적 강압이 상시적으로 활용되었고, 원주민은 크리오요(스페인 식민지에서 태어난 백인)의 광산이나 대농장에서 일하도록 강요를 받았다. 메스티소(백인과 원주민 사이에서 태어난 사람) 아들은 대토지 소유주의 사적 민병대에서 경력을 쌓을 수 있었다. 메스티소 계층은 스페인 왕당파 세력과의 독립전쟁에서, 그리고 그후 새로운 민족국가의 영토 경계를 결정하기 위해 벌어진 반세기간의 내부 전쟁에서 중심적 역할을 맡았다.

    새로운 국가는 자유주의적 계몽주의의 정치적 형태와, 부르봉 왕가 스페인이 행한 제국적 지배의 권위주의적 구조를 결합했고, 원주민을 배제했다. 헌법 모델은 일원적인 대통령제 공화국이었다. 강력한 행정부는 거부권이나 법령(예를 들어 대통령령)을 제정할 수 있는 권한을 포함해 광범위한 권력을 지녔다. 그에 비해 의회는 약했다. 이러한 모델은 참정권을 제한함으로써 과두제적 지배를 제도화했다. 사법부는 더욱 약했고, 국가의 감시자라기보다는 하인이었다. 교회와 군대는 헌법적 특권을 누렸다. 군사예산은 불균형적으로 비대했는데, 해외무역에 부과되거나 원주민에게 갈취한 세금이 그 원천이었다. 안데스 국가는 원주민 대중과는 전혀 타협하지 않았지만, 다만 점증하는 메스티소 계층에게는 군인 경력을 쌓을 수 있는 양날의 기회를 제공했다. 피착취자는 채찍과 칼로 학대를 받았지만, 주요한 정치적 분할은 착취자, 그 자신들 간에 그어졌다. 지방에 할거하는 카우디요(군사독재자)는 대통령궁을 노렸다. 또한 교권 개입을 반대하는 자유주의와 강경 보수파 간 쓰라린 투쟁은 프랑스혁명이 열어 놓은 이데올로기적 균열을 재생산했다. 한편으로는 브루봉 스페인의 지방행정 시스템이 취한 단일한 명령구조와, 다른 한편으로 고립된 대농장, 멀리 떨어진 소도시, 모르는 사람은 찾아갈 갈 수 없는 외딴 지역의 지역주의 간에 갈등이 존재했다. 교회는 전체 주민에 도달하고자 하는 유일한 이데올로기적 기구였다. 그에 반해, 도시에 사는 자유주의적 저널리스트와 지식인의 생산물은 오직 스페인어를 쓰는 엘리트에게만 제한되었다.

    세계 시장은 19세기 후반부에, 이처럼 곧 부서질 듯한 과두제 국가를 다시금 강화했다. 대토지 소유주는 역동적인 산업자본주의 경제에서 일차 상품의 수출자로서 새로운 역할을 발견했다. 대토지 소유주는 국가 인프라(도로, 항구, 철도, 극장, 대학)를 강화하고 현대화할 수단, 즉 해외신용과 동기, 즉 주로는 자유주의적 대통령의 의지를 발견했다. 그들이 진입한 국가 간 체계는 여전히 대체로 제국적 왕조로 구성되었다.

    2) 아르헨티나의 국가형성

    아르헨티나의 국가형성을 살펴보면, 영토, 주민, 제도적 기구가 상이했다. 값비싼 금속이 없고, 주민도 매우 적었기 때문에, 라플라타 강(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 사이를 흐르는 강)과 팜파스 대초원은 스페인 왕에게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스페인 왕은 뒤늦게도 1776년에야 이 남부 지역에 총독을 임명했다. (현재의 볼리비아 남부, 파라과이, 우루과이, 아르헨티나를 포함한다.) 이 지역에서 제국의 속박은 상대적으로 가벼웠고, 농촌 노동자, 즉 토지가 없는 메스티소 마부나 캄페시노(농장노동자)는 안데스의 원주민 페온(날품팔이 농장노동자)에 비해 얼마간 더 자율적이었다.

    이미 부에노스아이레스는 네델란드, 영국에 금괴, 고기, 가죽을 밀매하는 밀수품 항구라는 비공식적 역할을 수행했다. 총독은 부에노스아이레스 시(市)가 관세를 부과하도록 허용했고, 이는 사람들이 선망하는 부의 원천이 되었다. 부에노스아이레스는 독립전쟁의 최전선에 섰고, 1810년 5월 대중적 도시봉기가 벌어졌다. 그렇지만 미래에 ‘아메리카의 파리’가 될 이 도시를 멀리 떨어진 선교 도시와 북서부의 목장과 연결할 만한 이데올로기적 동일성이나 물질적 인프라가 거의 없었다. 북서부 목장주인 크리오요 저명인사들은 오히려 페루의 제국 센터에 기대를 걸었다. 지역에 할거한 강력한 대토지 소유주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1819년 헌법, 즉 통일적이고 현대적인 공화국을 건설하겠다는 헌법을 거부했다. (이 헌법은 강력한 대통령, 주의 주민 수에 비례하는 의회를 제시했다.) 그들은 가우초(원주민과 스페인 혼혈의 카우보이)로 구성된 사적 군대를 양성했고, 아르헨티나 연방 내에서 부에노스아이레스로부터 주의 자율성을 획득하고자 싸웠다.

    이러한 충돌은 50년간 단속적으로 진행된 엘리트 간 내전이라는 양상을 띠었다. 영국은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자유주의자들을 무장시켰다. 그렇지만 연방주의자든, 중앙집권파든 간에, 양자는 원주민의 절멸과 주변국과의 보복적 국경분쟁을 추구하는 군대를 양성하는 데 동의했다. 1853년 수정 헌법은 강력한 대통령제를 명기했고, 대통령은 주에 기초하여 구성된 선거인단이 선출했다. 또한 의회는 간접 선출되는 상원을 통해서 주의 통제를 받도록 기울어졌다. 그리하여 과두제적인 헌법적 타협이 점차 형성되었다. 1880년, 보수파가 편안히 권력을 누리던 부에노스아이레스 시는 수도가 되어 부에노스아이레스 주로부터 분리되었고, 항구세는 중앙정부 재무부로 들어갔다. 그렇지만, 이러한 단계에서 사회경제적 세력관계의 변화가 이미 진행 중이었다. 특히 지중해 국가로부터 수백만 명의 노동자가 이주했다. 이는 궁극적으로 과두지배에 대한 도전을 낳았다.

    3) 브라질의 국가형성

    이러한 히스패닉 공화국과 달리, 브라질은 제국적 왕조로 출발했고, 브라질의 독립은 브라간사 왕자가 선언했다. 그는 곧 페드로 1세 황제가 되었다. 스페인의 광대한 부왕령(副王領)은 십여 개의 주로 쪼개졌다. (부왕령은 스페인 왕실이 해외 식민지를 원활히 통치하기 위해 아메리카 신대륙에 설치한 통치 기구다.) 제멋대로 뻗어 나가는 포르투갈어 사용 지역, 즉 300만 제곱마일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은 통일성이 위태로웠다. 영토, 주민, 국가기구의 관계 역시 독특했다. 19세기 초, 포르투갈인과, 포르투갈어를 쓰는 브라질인은 주민 300만 명 중 1/6을 차지했지만, 원주민 투피(브라질의 여러 하천, 특히 아마존 강 근처에 사는 인디오)는 강압적인 인종 간 결혼을 통해서 대규모로 흡수되었다. 다수의 주민은 아프리카 혈통의 노예였다. 항만, 대농장, 국내서비스는 노예에 의존했고, 매년 수만 명의 노예가 새롭게 도착하면서 그들의 숫자는 늘어갔다. 또한 자유로운 흑인 수공업자와 흑인 노동자 계층도 상당했다. 엘리트에게 아이티 지지자(노예혁명 지지자)는 항존하는 위험이었다.

    1808년, 나폴레옹이 리스본에 접근해오자 포르투갈 왕궁은 리오로 피신했는데, 이때 절대주의 통치라는 낡을 대로 낡은 올가미를 동반했다. 그러나 이러한 절대주의 통치는 이질적인 농업수출 지대(북동부의 설탕 공장, 최남부의 목축지대, 동부 미나스 제라이스의 금광, 다이아몬드광)를 통합할 수 없었다. 또한 강력한 지주와 엘리트(주지사, 귀족, 군대 장교)가 누리는 통제권과 후견 네트워크를 약화시킬 수도 없었다. 중앙주의자(왕정, 군대, 부유한 리오의 상인, 국가관리)와 연방주의적 과두세력 간 관계는 불안정성으로 요동쳤다. 왕정이 도입한 1824년 헌법은 행정권과 통제권 양자를 황제에게 부여했다. 황제는 상원을 지명하고, 하원을 해산할 수 있었다. 하원 선출을 위한 선거인단은 2층으로 구성되었다. 상대적으로 넓은 층에 선거인단을 선출하는 투표권을 부여했지만(수공업자와 소규모 상인도 포함되었다), 선거인단은 귀족과 장교로 제한되었다. 연쇄적으로 벌어진 지방의 반란은 (일부는 대중적인 봉기로 변이했다) 군사력으로 제압했다.

    1880년대, 왕당파 외부에 있는 각 부문, 즉 도시노동자, 군대, 커피 생산지대의 자신감이 커졌다. 정치화된 도시노동자의 투쟁은 1888년 노예제 폐지를 관철시켰다. 페드로 2세가 우루과이, 파라과이와 벌인 연속적인 전쟁은 군대를 강화했다. 중부-남부에서는 커피산업이 호황이었다. 바로 이들이 공화주의를 새롭게 지지했다. 하지만 1889년 군부가 페드로를 폐위시키자 연방주의자가 우위를 점했고, 그들은 선거권을 훨씬 더 엄격히 제한했다. 1891년 브라질 연방 헌법은 가장 강력한 주들이 통제했다. 대통령은 상 파울로와 미나스 제라이스 주에서 번갈아 나왔다. 이러한 과두제적 구조는 제툴리우 바르가스가 주도한 1930년 혁명으로 전복되었다.

    2. 새로운 세력, 새로운 국가형태: 1920-1990년대

    외부적인 경제적 충격, 즉 1929년의 붕괴와 대불황은 이러한 과두제적 국가형태에 최후의 일격을 가했다. 라틴 아메리카가 미국과 유럽에 의존적인 농업수출국가로서 세계시장에 편입됨에 따라 (브라질의 커피, 아르헨티나의 고기와 밀, 에콰도르의 코코아, 볼리비아의 주석), 상품가격의 하락은 그들에게 큰 타격을 가했다. 그렇지만 여타 내외적 변화가 이미 그들의 기초를 서서히 허물었다. 외적으로 보면, 볼셰비키 혁명 이후, 반자본주의적인 강대국의 출현하면서 국가 간 체계가 지각변동을 겪었다. 미국은 조만간 냉전의 리더십을 행사할 것이었다. 국내적으로 보면, 과두제적 지배가 감독한 경제발전(이민, 외국인투자)에 따라 새로운 사회세력이 성숙했다. 초기 노동운동, 정치화된 중간층, 사회주의-공산주의-무정부주의-급진적 민족주의 정당들의 부상, 군대 내 불만층 등.

    그 형태와 속도는 상이했지만, 대륙 전체에 걸쳐 급진적 정권이 새로운 국가계약(state compact)을 제시했다. 그들은 수입대체 민족발전을 개시하기 위해 새로운 노동계급을 끌어들였다. 즉, 브라질의 바르가스, 아르헨티나의 페론, 볼리비아에서 1930년대의 ‘군대 사회주의자’(military socialists) 흐름과 1952년 국민혁명당(MNR)이 주도한 혁명. 또한 에콰도르에서, 1920년대에 과야킬(에콰도르 최대 도시)의 금권정치세력으로부터 재정적 통제권을 빼앗으려는 청년장교와 그 동맹자의 시도가 있었다. 그 결과는 의도치 않게도, 계급투쟁의 부상, 농업 노동자 운동의 등장이었다. 쿠바 혁명이라는 사례는 농업 노동자 운동이 발전할 수 있는 길을 보여주었다. 과두제 세력의 대응은 군부 사령관이 수행했다. (군부는 미국의 훈련으로 강화되었다.) 군사독재가 권력을 장악했다. 즉 브라질(1964-85), 아르헨티나(1976-83), 볼리비아(1971-78), 에콰도르(1972-79).

    1980-90년대에 이르면, 군부독재에서 자유민주주의로 신중한 이행이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 사이에서 놀라울 정도로 상호복제되었다. 선거권이 확대되고, 과두제적 국가의 헌법적 형태가 수립되었다. 곧 대통령제 공화국, 보수적인 토지 이익집단이 지배하는 상원 말이다. 또한 군부는 결코 권력으로부터 멀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새로운 민주주의의 국내외적 맥락은 극적으로 변화했다. 라틴 아메리카는 부채를 가득 진 채로 세계시장에 편입되었는데, 이제 강력한 제도적 세력, 즉 워싱턴 컨센서스의 감독이라는 지배를 받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국가자산의 민유화(사유화)가 벌어졌다. 국가를 구성하는 제도적 복합체 내에서, 중앙은행과 재무부가 새롭게 영향력을 획득했다. 이는 자유롭게 유출입하는 금융자본의 이익을 특권화하고 노동자의 이익을 경시하는 국내외적 세력균형을 반영했다. 그러나, 1990년대 재앙과 같은 금융적 타격, IMF 긴축정책, 그리고 엄혹한 사회적 효과는 자유민주적인 여당을 길들였다. 이는 좌파정권이 권력을 장악하게 된 전반적 맥락이다. 이제 좌파 정권의 국가전략을 검토할 차례다. <계속>

    필자소개
    사회진보연대 정책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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