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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소개] 『결 : 거침에 대하여』(홍세화/한겨레출판)
        2020년 03월 07일 04:02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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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어떤 결의 사람인가요?”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 『쎄느강은 좌우를 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 『생각의 좌표』 등으로 우리 시대에 뼈아프지만 명쾌한 질문을 던져왔던 진보 지식인의 대부 홍세화 작가가 11년 만에 신작을 출간했다. 세상의 거친 결들이 파도를 치며, 이따금 주체할 수 없이 그 큰 결에 휩쓸려버릴 때에도 한결같이 중심을 지켜온 그의 사유들은 분열로 어지럽혀진 세상에 또 다시 중심을 잡을 나침반으로써 삶의 방향과 결을 되돌아보게 한다.

    사람도, 인간관계도, 사회도 모두 섬세하거나 온유하지 못하고 거친 결을 가지고 있다. 환대와 배려, 겸손을 품은 사람이 약자가 되는, 이 정제되지 못한 사회에서 우리는 둥글어지기보다는 뾰족하고, 거칠어져야만 ‘편하게’ 살 수 있게 됐다. 과거에 비하면 분명 자유로운 시대에 살고 있지만 신자유주의라는 구조 속에서 자신도 모르는 새에 억압된 삶을 살고 있다. 이를 전일적으로 관철시킨 적소가 ‘학교’와 ‘군대’였으며, 우리는 이처럼 ‘정상적인’ 체제 속에서 은밀히 노예로 길들여져왔다. 힘없는 자들은 국가폭력에 맞서 “아니오”라고 말하지 못하고 자본가들에 의해 만들어진 거짓 담론과 정치가들의 아젠다 세팅에 교묘하게 이용당한 채 이제는 ‘자발적으로 복종’하게 된 것이다.

    불의를 외면해야 편하고 안락한 삶을 누리며 ‘인간다움’을 포기한 채 거칠어져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이 세상에 작가는 말한다. 한국 사회라는 산(山)에서 내려와 ‘조금 더 낮게’ 걸으며 지배와 복종에 맞서는 자유인으로, ‘조금 더 낫게’ 패배하는 자유인이 되어 보자고. 이 책은 그런 안간힘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설령 진정한 자유를 누리며 인간답게 살고자 하는 이들이 극소수일지라도 함께 연대해 그 길을 한번 가보자고.

    “착하면 손해 본다. 그래도 넌 착한 사람이 되어라”

    자유를 누리며 ‘나를 짓기’보다는 자기 형성의 자유를 내던지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과거에는 노예들 중 소수가 해방을 위해 용감하게 싸웠다면, 오늘날 ‘멋진 신세계’의 노예들은 대부분 ‘편한 노예’로 살기 위해 경쟁하고 있다. 이런 세상 속에서 홍세화 작가의 글은 인문학적 시선과 사회비판적 시선을 가로지른다.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때론 거칠게 역린하며 촌철살인을 내던진다.

    먼저 1부, ‘자유, 자유인’에서는 권력과 물질이 승리를 구가하는 시대에 나를 짓고, 자유인으로 남기 위해 세속 사회에서 패배자가 될 것을 사유한다. 모두가 장교가 되고 싶어 하는 사회에서 사병으로 남아 조금 더 정의로운 세상, 조금 더 자유가 약동하는 사회를 꿈꿀 것을 강조한다. 자유인이 되기 위해서는 외로움과 불안을 대가로 치러야 하지만, 자기 내면을 탄탄히 쌓고 절제할 줄 아는 사람일수록 이를 잘 이겨낼 수 있다.

    2부 ‘회의하는 자아’에서는 모두가 완성된 존재처럼 살아가는 사회에서, 어제보다 조금 더 나은 존재로 나를 짓기 위해 남과 나를 비교하는 대신, 회의하는 자아가 될 것을 성찰한다. 나를 짓는 자유를 누리는 자유인은 고결함을 지향한다. 여기서 고결함은, 남과 경쟁하여 승리한 자의 몫이 아니라 ‘자신과의 끝없는 싸움’의 산물이다. 좀 더 정확한 진리에 다가서고 편견과 오류를 멀리하도록 나의 사유세계를 반성적으로 들여다볼 것을 권한다.

    3부 ‘존재와 의식 사이의 함정들’에서는 ‘존재를 배반하는 의식’을 지니고 있음에도 의심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내 생각은 어떻게 내 생각이 되었나” 끊임없이 되물을 것을 사색한다. 우리가 안고 있는 계급, 분단, 지역, 젠더, 생태 문제는 매우 복합적이다. 그러나 각자가 자기만의 래디컬을 주장하게 되면 결국 모두 극단주의로 치달을 위험이 있다. 항상 겸손한 자세로 회의하는 자아가 되어 나 자신도 타인에게 설득될 수 있다는 조건 아래 내 가족과 이웃과 동료를 설득하자고 말한다.

    4부 ‘난민, 은행장 되다’에서는 돈이 없으면 죄가 되는 것을 넘어 죄를 짓도록 이끄는 한국 사회에서 우리 주위의 무관심과 냉대 속 이웃과 난민에 대해 상상력을 키워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모든 사회 구성원이 소박하게 살지언정 사회적 연대가 살아 있는 사회, 최소한의 인간 존엄성만큼은 지켜주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이를 보장해줄 수 있는 방법은 시민들 스스로 적극적으로 연대하고, 올바른 정치참여가 이루어질 때 비로소 가능하다.

    “패배자들에 대한 기억은 소멸하지 않을 수 있는가”

    사람과 사람 사이에 흐르는 정, 인정. 그 출발은 타인의 고통과 불행에 대한 공감 능력이며 측은지심일 것이다. 어렵고 소외된 이들을 들여다보고, 성기기 짝이 없는 사회안전망의 틈을 메우는 아교 역할을 해내는 것이 바로 인정이다.

    그러나 지금 이 시각에도 우리 주위에는 인간의 존엄성을 누리지 못하는 수많은 장발장이 존재한다. 몸이 아파도 병원에 가지 못하고 누추한 집에 누워 있는 사람, 절대적 빈곤에 처해 빵 한쪽을 훔치다 절도범이 되는 사람, 노숙인을 비롯해 주거 조건이 열악한 사람 등이다. 한시도 결핍 상태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이 21세기 장발장들의 생존 조건은 늘 한계 상황에 직면하게 하고 준법과 위법의 경계에 머물게 한다. 홍세화 작가는 이러한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사회의 무관심과 냉대가 국가로 하여금 거리낌 없이 벌금형을 내리게 하고, 이들을 더욱 가난의 막장으로 몰아붙이고 있다고 말한다.

    언젠가부터 우리는 국가나 사회를 비롯해 그 누구도 나를 도와주지 않는다는 것을 학습해왔다. 불안은 더욱 가중되어 나 하나, 내 가족 챙기기도 어려운 이 세상에서 남을 도와주다가는 오히려 짓밟히게 된다는 것이 사회적 통념처럼 굳어졌다. 홍세화 작가는 이런 사회의 구성원들은 결코 ‘오늘’을 누리지 못한다고 이야기한다. 누구든 인간의 존엄성을 지킬 수 있게 가난하고 어려움에 처한 국민을 사회가 나서서 연대하여 도와야 한다고 말한다. 비록 그 과정에서 패배자가 될지언정, 친절과 배려, 환대와 겸손의 미덕을 다시 되돌릴 것을 사유한다. 장발장은행은 그런 사회를 향한 작은 씨앗의 하나일 뿐이며, 이 ‘보이지 않는 사회적 연대’를 실현하여 인간을 위한 질문과 비판이 날을 설 때 희망의 불씨를 되살릴 수 있을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이러한 패배자들에 대한 기억이 소멸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소수의 힘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라고 거듭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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