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기운을 몰고 올
진주의 첫 교회, 진주교회
[그림 한국교회] 형평 운동과 교회
    2020년 03월 04일 09:43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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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도 담도 없는 집에서 시집살이 삼년 만에 시어머님 하시는 말씀 애야 아가 며늘아가 진주낭군 오실 터이니 진주 남강 빨래 가라 진주 남강 빨래 가니 산도 좋고 물도 좋아 우당탕탕 두들기는데 난데없는 말굽소리 곁눈으로 힐끗 보니 하늘 같은 갓을 쓰고 구름 같은 말을 타고서 못 본 듯이 지나더라 흰 빨래는 희게 빨고 검은 빨래 검게 빨아…..(중략) 건넌방에 내려와서 아홉 가지 약을 먹고 비단 석자 베어내어서 목을 매여 죽었더라…..(하략)”

새문안교회 대학생회 시절, 친교자리에서 이 ‘진주난봉가’를 같이 부른 적이 많습니다. 사실 가부장적 시대의 잔상이 담긴 민요였는데, 왜 자주 불렀을까? “흰 빨래는 희게 빨고 검은 빨래 검게 빨아”란 가사에 혁명정신이 담겨 있다는 어느 선배의 해석이 주효한 것 같습니다. “아침 이슬”같은 노래마저 금지된 군사정권 시절의 암울한 상황에서 변혁을 꿈꾸며 자유롭게 부를 수 있는 이 민요에서 그나마 위로를 받은 것이지요.

코로나19로 인하여 진주에 가지 못하고 진주교회를 그렸습니다. 우리 ‘한국기독교목회지원네트워크’가 진행하는 부산목회자 기독교고전읽기의 회원인 진주 주약교회의 김광영 목사에게 사진을 부탁하였습니다.

진주하면, 논개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논개는 전북 장수에서 주달문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열네 살 때 아버지가 죽고 시정잡배였던 숙부가 지방 토호에게 민며느리로 팔아버리고 행방을 감추었다는 사실을 뒤 늦게 안 논개 모녀가 외가로 피신하자, 토호가 장수현감 최경회에게 고소하여 문초를 받게 되었습니다. 딱한 사실을 알게 된 최경회는 무죄로 방면하고 관아에 머물게 하여, 병으로 고생하던 최씨 부인의 시중을 들었는데 최씨 부인이 지병으로 숨을 거두자, 18세가 된 논개는 최경회의 부인이 되었습니다.

최경회가 1593년 경상우도 병마절도사가 되어 출전한 진주성 전투에서 전사하자, 논개는 왜장을 끌어안고 강물로 뛰어들어 순절하였습니다. 그러나 첩이었다는 이유로 유교 사회와 문중에서 기피인물로 외면당하지만, 충절이 인정받아 왜장을 끌어안고 죽은 바위에 ‘의암(義巖)’이란 글씨가 새겨졌고, 18세기에는 논개의 애국충정을 추모하는 사당인 ‘의기사’가 촉석루 옆에 세워졌습니다. 논개가 끌어안고 죽었다는 왜장이 누구일까에 대해 관심이 많지만 굴종과 지배를 거부한 항거 자체가 소중한 것입니다.

우리 사회에 혐오와 배제, 차별이 만연하여 여전히 인권문제가 심각한 국면에서, 진주교회가 3.1운동은 물론 한국역사상 최초로 인간평등을 주장하며, 차별 관습을 타파하고 저울처럼 공평한 사회를 만들자는 형평사운동(衡平社運動)에 크게 기여한 것을 알게 되어 기뻤습니다.

봉래동의 진주교회는 1905년 11월 5일에 호주장로교회의 의료선교사 커렐(Dr. Hugh Currell, 한국명 거열휴)과 부인, 두 딸과 한국인 동역자 박성애 부부 등이 첫 예배를 드림으로써 설립되었습니다. 1906년 선교사들은 광림학교와 시원여학교를 설립하였고 교역자를 양성하는 경남성경학원도 세웠습니다. 순교자 손양원 목사가 이 성경학교 출신입니다. 의사 커렐은 1913년 진주지역 최초의 서양식 병원인 배돈병원(培敦病院)을 설립하였습니다. 처음에는 초가집 방 한 칸을 시약소로 사용하여 환자들을 치료하다가, 호주 장로교회의 유능한 여성선교사 페이튼(Paton) 선교사의 이름을 따서 배돈병원이라 부른 것입니다.

1919년 3월 18일 장날, 약 2만여 명이 만세운동에 참가했습니다. 서울 다음으로 많은 인원이 참여한 진주 3.1운동은 일주일간 지속되었습니다. 진주교회 교인들과 광림학교의 교사와 학생들은 물론, 배돈병원의 의사와 간호사들이 적극 참여했습니다. 당시 일제고등경찰이 상부에 보고한 문서에 의하면 ‘3월 18일 진주 장날에 예수교 예배당에서 울리는 정오의 종을 신호로 일제히 조선독립만세를 외쳐 약 1만여 명이 운집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런 역사적 사실에 주목하여 진주교회는 종탑을 복원하고, 2012년 3월 18일에 타종식을 거행하였습니다.

그림=이근복

2013년 4월, 진주교회는 형평운동 90주년을 맞이하여 ‘진주에서 최초로 일반인들과 백정들이 함께 예배 드렸던 교회’라고 새겨진 표지판을 비전관 앞뜰에 세웠습니다. 형평사 운동은 1923년부터 일어난 백정들의 신분해방 인권운동으로 이학찬 등 백정 출신과 강상호 등 양반들이 합심하여 조직을 결성했습니다. 당시 백정들은 법제상으로 해방되었으나 실질적으로는 여전했던 차별 해소를 요구했는데, 개화 양반도 참여하는 등 많은 이들의 호응을 얻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습니다.

이는 “19세기 후반 진주는 기존 질서에 대한 저항세력의 중요한 거점이 되었다.”(『믿음의 흔적을 찾아』(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16) P.189)는 구절에서 보듯이 지역운동의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는데, 형평사 운동을 촉발시킨 것은 선교사들의 백정선교였습니다. 당시 옥봉과 서장대 아래 350명 정도가 천시 당하며 살아가던 백정들을 입교시키고 존비귀천의 차별을 없앤 것입니다. 양반교인 일부가 본당의 합석예배를 반대했지만, 라이얼(David M. Lyall) 선교사의 교육과 설득, 스콜스(Nelle R.Scholes, 시원학교 교장)와 켈리(Marry J.Kelly) 선교사의 헌신적 노력으로 합석예배가 이루어져 형평사운동의 든든한 기초가 놓였습니다.

호주교회의 이런 민중선교를 저는 영등포산업선교회에서 일할 때(1983-1990) 경험했습니다. 노동자 권익을 위해 선교사를 파송하며 후원하였습니다. 2002년 호주 멜버른에서 안식년을 가질 때 멜버른한인교회의 1부 예배에서 설교하시어 자주 뵈었던 첫 선교사였던 우택인 목사(Richard Wooten)는 호주로 돌아가서도 우리 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을 지원하였으며, 1978년, 열심히 협력하던 나병도 (Steven Lavender )선교사는 정치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추방당하였습니다. 저는 안도선 (Antony Dawson) 선교사와 호주교포로서 노동자선교를 자청한 임경란 선교사와 같이 일하였습니다. 노동자선교 발전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인명진 목사님이 영등포산업선교회에서 일하게 된 계기도 호주 선교사로서 장로교신학대학에서 구약학 교수로 있던 변조은 (John P Brown) 목사의 권고와 주선으로 이루어졌다는 고백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최근 『다시, 그리스도인 되기』(비아, 2016)에서 이 구절을 읽으며 느낀 바가 큽니다.

“교회는 서로 사랑하고 더불어 살아가며 죄로 깨어진 세상에서 은총의 문화를 일구는 한 백성이 되도록 부름 받았다. 그 부름에 응답하지 못한다면 교회가 되는 일은 실패로 끝나고 말 것이다.”(211쪽)

지금 코로나19로 온 국민이 힘겹게 살아갑니다. 특히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이 더욱 막막하고 어려운 때에,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백정들을 품었던 진주교회(현 담임목사 송영의)가 은총의 문화를 우리 사회에 진작하여, 새날을 기다리는 이들에게 생기를 주길 소망합니다.

필자소개
이근복
성균관대학교와 장로회신학대학원 졸업. 전 영등포산업선교회 총무, 새민족교회 담임목사,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교육훈련원장 역임. 전 크리스챤아카데미 원장. 한국기독교목회지원네트워크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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