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지구 차원의 환경 위기와 기후변동
[인류 위기와 원효-맑스의 대화 ②] 화쟁적 합리성
    2020년 03월 03일 09:53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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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프롤로그-평등한 공동체의 꿈과 인간 본성의 구현(링크)
2. 전 지구 차원의 환경 위기와 기후변동
3. 폭력, 테러, 전쟁과 학살
4. 인간성의 상실과 소외의 심화
5. 신자유주의 체제의 모순과 불평등의 심화
6. 과학기술의 도구화와 상품화
7. 근대성의 위기
8. 분단모순의 심화와 동아시아의 위기
9. 욕망의 과잉과 상품화
10. 디지털사회와 4차 산업혁명의 역기능
11. 가상성과 재현의 위기
12. 에필로그

인류 멸망으로 가는 완행열차

지금 코로나19 바이러스로 한국은 물론, 전 세계가 혼란의 도가니다. 주지하듯 신종 바이러스는 인간이 환경을 파괴한 것이 근본 원인이다. 에이즈, 에볼라, 메르스, 사스 모두 인간이 더 많은 밭과 공장터, 주거지를 만들고자 숲을 개발하면서 시작되었다. 그전까지는 이들 바이러스는 박쥐, 원숭이 등 특정동물의 몸에만 기생하며 숲속에서만 자기복제를 하였다. 하지만, 그 숲을 개간하면서 바이러스는 변형을 거쳐서 인간의 몸을 숙주로 삼게 되었으며, 이로 인수(人獸) 공통의 전염병으로 진화하였다.

코로나 19만 해도 아직 백신을 발명하지 못한 상태에서 다른 바이러스와 달리 감염 초기에 본인도 모르는 무증상 상태에서 많은 바이러스를 배출하며 감염을 시키기에 더욱 방역이 어렵고 그만큼 공포를 확산하고 있다. 하지만, 설혹 이를 통제한다 하더라도 이것으로 끝이 아니다. 숲에서만 살던 수십 억 종의 특정의 바이러스 가운데 단 한 종의 바이러스만이라도 4-5년의 시간 동안 인간을 숙주로 삼을 수 있는 변형에 성공하여 박쥐와 같은 매개체를 통해 인간에게 전해지는 순간, 인류는 다시 신종 바이러스로 인한 팬데믹(Pandemic, 전 세계적인 유행병)의 상황에 놓일 확률이 크다.

어디 그뿐인가. 우리는 기압이 정체된 날이면 중국으로부터 온 것과 한국에서 생산한 것이 겹쳐져 미세먼지로 가득한 공기를 일터, 학교, 집은 물론 공원이나 숲에서도 마셔야 한다. 지구온난화로 인도양의 동쪽과 서쪽의 온도 차가 60년 만에 최고에 이르자 바다에서 비구름이 형성되지 않아 호주는 심한 가뭄이 들었다. 바짝 마른 나무나 풀이 서로 마찰로 발화하거나 번개에 의하여 점화하면서 산불이 곳곳에 일어나는 바람에 지난해와 올 초에 걸쳐서 10억 마리의 동물이 불에 타서 죽었다.

산불로 불에 탄 호주 뉴사우스 웨일즈 주의 목장과 소
https://www.farminguk.com/news/australian-bushfires-kill-thousands-of-livestock_54697.html

호주만이 아니다. 서식지 파괴와 오염, 기후변동, 또 이로 인한 먹이 부족으로 전 세계적으로 대략 38%의 생물들이 멸종위기에 있다.(The International Union for Conservation of Nature, <Wildlife in a Changing World, an analysis of the 2008>) 숨을 쉬고 먹이를 찾고 짝짓기를 하고 움직이면서 우리에게 많은 생각과 상상과 더불어 사는 기쁨을 주던 생물 가운데 40%에 가까운 생물 종을 매머드나 공룡처럼 이제 영원히 볼 수 없게 된 것이다. 오르도비스기-실루리아기 5차 대멸종에 이어서 6차 대멸종이 진행되고 있다.

지구 자체가 변하고 있다. 인류는 지질학적으로 홀로세(Holocene)에 이어 인간의 영향이 지질의 변화로 나타나는 인류세(Anthropocene)에 접어들었다. 콘크리트와 플라스틱 덩이가 지구 지질을 형성하고 지층에서는 닭 뼈 화석이 발견되며, 바다는 나노상태로 분해된 플라스틱 입자로 가득하다. 북극과 남극, 히말라야와 알프스 등 고산지대의 빙하는 날이 다르게 녹고 있다. 순록이 모기로 인하여 빈혈로 죽고, 펭귄이 떼죽음을 당하고, 사냥을 못하는 북극곰들이 굶어죽고 있다.

국제연합개발계획(United Nations Development Programme)의 연례보고서에 따르면, “ 21세기 중에 지구의 평균 온도는 섭씨 5도 이상 오르며, 2080년까지 18억 명이 물 부족으로 고통을 당하고, 해수면 상승으로 3억 3천만 명이 홍수를 피해 이주해야 하고, 2억 2천만에서 4억 명에 이르는 이들이 말라리아에 걸릴 것이다.”라고 추정한다.(Human Development Report 2007/2008)

지금 살아남은 생명이라 해서 얼마나 더 나을까? 환경 위기는 오염된 환경에 사는 인간에게만 한정된 문제가 아니라 지구 위의 모든 생명체가 이 모순 속에 던져진 ‘전 지구 차원의 환경 위기’이기에 사태의 심각성이 더하다. 도시에까지 날아온 미세한 양의 농약이나 채소의 잔류 농약이 우리 몸속에서 지방과 결합하여 여성호르몬과 같은 작용을 하여 극히 미량으로도 도시 남자들의 정자 수를 감소시키고 여성화를 촉진시키고 여성들의 난소암과 유방암을 유발하듯, 그것은 소리도 없이, 서서히, 그러나 분명한 속도로 다가오고 있다. 우리는 모두 인류의 멸망이라는 종착역이 얼마 남지 않은 완행열차를 타고 있다.

환경론/생태론의 대안

왜, 어떻게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 산업화와 도시화, 인구증가, 자본주의 체제와 세계화, 인간중심주의, 과학기술중심주의, 기계론적이고 이원론적인 패러다임, 가부장적 사고 등 원인은 다양하다.

이에 대해 환경론자들은 청정기술을 통하여 통제할 것을 주장한다. 유조선이 유출한 기름을 제거하기 위하여 유분산제를 뿌리면 당장 기름은 분해되지만, 독성물질이 바닷물을 오염시키고 플랑크톤을 죽이며, 석유덩이가 공이 되어 돌아다니며 해저의 생태계를 파괴한다. 이 예에서 보듯 환경론적 대안들은 기계론적 세계관과 인간중심주의를 바탕으로 하였기에 미봉책이다. 무엇보다 열역학 제2법칙에 따라 자연을 변형하면 다시 되돌릴 수 없는 무질서화한 상태인 엔트로피(entropy)가 증가함을 인식하지 못하였다.

반면에, 황토를 뿌리면 황토 속의 미생물이 석유를 분해한다. 미생물이 기름을 먹이로 하여 물질대사를 하는 것이다. 이 방식은 시간이 좀더 걸리지만, 2차 오염을 발생시키지 않는다. 황토처럼 엔트로피가 거의 발생하지 않도록 순환이 가능하게 하는 대안이 생태론(ecology)이다. 1907년에 미국 애리조나 주의 카이바브(Kaibab) 고원에서 멸종해가는 사슴을 살리려고 퓨마와 늑대 등의 천적을 사냥했더니 4천 마리였던 사슴이 1924년에는 10만 마리까지 불어났다. 하지만 먹이가 모자라는 바람에 사슴이 굶어 죽어 1939년에는 1만 마리만 남았다.(M. Roberts, Biology-A Functional Approach, 1986) 이렇듯 지구상의 생명과 자연은 서로 원인과 결과, 조건으로 작용하고 의지하면서 나고 자라고 사라진다. 그런데 이런 생태계(ecosystem)를 분리시켜 실체론으로 바라보면, 사슴을 살리려는 행위가 외려 사슴을 죽이는 카이바브 고원의 역설은 지구상 어디서든 일어날 수밖에 없다.

아르네 네스(Arne Naess)는 기존의 생태이론을 인간중심주의를 벗어나지 못했다며 ‘표층생태론(shallow ecology)’으로 규정하고, 대안으로 ‘심층생태론(deep ecology)’을 제안하였다. “그들은 생명평등주의(biospherical egalitarianism)의 입장에서 지구상의 모든 생명들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평등하게 바라보며 생명체끼리의 공생의 원리를 추구하자고 제안하였다.”(<The Shallow and Deep, Long-Range Ecology Movement>, 1973) 심층생태론자들은 인간이 상실한 ‘자연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감수성을 다시 회복하여 의식 개혁을 하고 삶의 방식을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인간은 생명의 유지에 필요한 것을 제외하고는 생명의 풍부함과 다양성을 훼손할 권리가 없다”라는 등 여러 강령을 만들어 실천할 것을 선언하였다.(<The Deep Ecological Movement: Some Philosophical Aspects>, 1998)

맑스의 관점-이윤이 없는 곳에 개발도 없다

심층생태론은 환경 파괴를 낳은 인간중심주의나 기계론적 세계관을 뒤집고 사고와 행동에서 근본적인 전환을 요구하고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하지만 심층생태론의 주장은 다분히 신비적이며 비과학적이다. 이들은 환경파괴의 주범이 자본주의란 것을 은폐하고 있다.

“자본주의적 생산은 그 중심 대도시에 인구를 계속 집적시켜감에 따라, 한편으로는 사회의 역사적 동력을 쌓아나가고, 다른 한편으로는 토양과 인간 사이의 물질대사를 방해한다. 즉 인간이 식품과 의류의 형태로 소비하는 토양성분이 토지로 되돌아가는 것을 막는다. 다시 말해 토양의 비옥도를 지속시키는 데 필요한 자연조건을 훼손한다. 그럼으로써 그것은 또한 도시 노동자의 육체적 건강과 농촌노동자의 정신생활을 파괴한다. …… 자본주의적 농업의 모든 진보는 노동자와 토지를 약탈하기 위한 기술의 진보이고, 주어진 임대 기간 동안 토지의 수확을 높이는 모든 진보 또한 토지생산력의 지속적인 원천을 파괴하는 진보이기도 하다.”(Marx, <Capital>, 1954)

이윤이 없는 곳에 개발도 없다. 이윤이 발생하지 않는데 숲을 개발하여 공장을 세울 기업과 국가는 없다. 위의 인용문에서 알 수 있듯, 맑스는 자연을 유기체처럼 물질대사를 하는 순환적인 존재로 인식하고 있다. 자연 자체는 물질대사를 하며 순환하는 생태론적인 것인데, 이 순환이 파괴되어 본래 모습으로 되돌아가지 못하는 까닭은 자본주의적 생산이 이 순환을 교란시키기 때문이다. 맑스는 자본주의 체제가 노동을 착취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대지(자연)를 착취하여 대지(자연)가 순환하면서 영구적으로 비옥성(자연의 본래성)을 지속시키지 못하도록 한다는 점을 분명하게 지적하고 있다. 또 환경 파괴가 노동자와 농민의 육체와 정신생활을 파괴함에 대해서도 기술하고 있다.

“인간은 직접적으로 ‘자연적 존재(natural being)’이다. 자연적 존재로서, 살아있는 자연존재로서, 인간은 한편으로는 ‘자연적 생명력’을 자연으로부터 공급받는 활력적인 자연 존재이다. 이 힘들은 인간 안에 기질과 능력, 충동으로 존재한다. …… 자기 바깥에 자신의 자연을 갖고 있지 않은 존재는 결코 자연적 존재가 아니며, 자연의 체계에 아무런 구실도 하지 않는다.”(Marx/Engels, Economic and Philosophic Manuscripts of 1844, 2011)

인간은 자연에서 나서 자연으로 돌아가는 자연의 한 부분이다. 인간은 직접적으로 자연적 존재다. 자연으로부터 생명이 기원했고, 그 생명체들이 진화하여 인간이 되었다. 인간이 마시고 먹는 자연은 화학변화를 일으켜 에너지를 만들며 인간의 몸이 될 뿐만 아니라 사고의 바탕을 형성한다. 자연의 생명력과 활력은 풍경으로, 공기로, 먹을거리로 인간의 몸으로 들어와 인간의 기질과 능력을 만들고 무슨 일인가 하려는 충동과 자극을 준다. 인간은 꽃과 풀과 나무가 어우러진 풍경을 눈으로 보고, 새소리와 물소리를 들으며, 꽃과 풀과 열매들이 내뿜는 향기를 맡고, 살갗으로는 바람의 감촉을 느낀다. 자연의 아름다움과 생명력을 몸에 담은 인간은 자연을 가꾸며 자연의 한 부분이 된다. 자연의 생명력이 인간의 본질로 전환한다.

하지만, 이런 본래의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해체하는 것은 자본주의다. 확대재생산의 원리에 의하여 자본의 탐욕은 끝없이 증식되기 마련인데, 자본이 증식되면 될수록 생산수단으로서 토지와 자연 또한 자본의 착취 대상으로 전환한다. 자본은 더 많은 이윤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 이윤을 더 늘리기 위하여 생산의 총량을 늘리거나 자본의 순환을 빨리하거나 자본의 유기적 구성을 고도화하며, 그럴수록 자연은 착취당한다. 자본은 더 많은 자본을 축적하기 위하여 생산을 확대하고 과소비를 조장한다. 대중 또한 자연과 인간, 생명의 가치보다 물질의 가치를 더 중시하고 탐욕을 증대하며 생태계를 파괴하는 데 스스로 동참한다.

그러니 맑스주의를 바탕으로 한 사회생태론(social ecology)자들은 “생태적인 변증법을 통하여 참여적 진화가 일어나는 새로운 차원의 ‘자유로운 자연(free nature)을 건설할 것”(머레이 북친, <사회생태론의 철학>, 1997)을 제안한다. 근본적으로 자본주의 체제를 해체하거나 혁신을 가하여 확대재생산의 원리를 자연과 문명 간의 균형의 원리로 바꿀 것을 천명한다. 물론, 맑시즘도 여러 가지로 한계는 있다. 그 중 한 가지를 지적하면, “맑시즘은 노동과정을 통해 다룰 수 없는 자연조건을 과소평가했고 인간의 역할과 기술력에 대해서는 과대평가했다.”(Jean-Marie Harribey, <Ecological Marxism or Marxian Political Ecology?>, 2008)

원효의 관점: 씨가 죽어서 열매를 낳는다

불교는 살아있는 모든 것을 죽이지 말고 자비심을 가지라고 말한다. 불교는 세상 모든 것이 조건과 인과(因果)로 맺어져 서로 의지처로 작용하고 있다고 본다. 이런 불교의 사상이 구조적이고 관계론적 사유를 하기는 했지만, 실체론과 이분법, 인간중심주의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채 사회와 인간을 바라보는 맑스를 보완한다. 원효는 연기론을 바탕으로 불일불이(不一不二)의 화쟁론을 편다.

“열매와 씨가 하나가 아니니 그 모양이 같지 않기 때문이요, 그러나 다르지도 않으니 씨를 떠나서는 열매가 없기 때문이다. 또 씨와 열매는 단절된 것도 아니니 열매가 이어져서 씨가 생기기 때문이요, 그러나 늘 같음도 아니니 열매가 생기면 씨는 없어지기 때문이다.”(원효, <금강삼매경론>)

서양의 실체론에서 보면, 딱정벌레 한 마리를 길을 가다 밟아서 생명이 정지했으면 ‘죽었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를 지켜보면 어느 사이에 개미가 새카맣게 모여 딱정벌레의 몸뚱이와 더듬이와 다리를 해체해선 가져간다. 이를 여왕개미에게 먹이면 여왕개미는 쑥쑥 개미 알을 낳고 딱정벌레의 남은 껍질에도 수억 마리의 미생물이 어디에선가 와서 생명 조화의 아름다운 세계를 펼친다. 그리고 그 미생물을 작은 벌레가 먹고 자라며, 그 벌레를 먹고 다시 딱정벌레가 자란다. 연기론에서 보면, 딱정벌레는 죽은 것이 아니라 개미와 미생물로 전이한 것이다.

사과는 사과 씨 없이 홀로 존재하지 못한다. 사과는 온도와 빛, 토양, 영양분, 미생물 등 모든 조건이 맞아서 이런 저런 원소들이 결합되어 이루어진 구성물에 지나지 않으며, 조건이 달라지면 사과식초로, 사과술로 변하기에 사과는 없다. 찰나의 순간에도 원소들이 분해되며 변화하고 있기에 공(空)이다. 씨는 씨이고 열매는 열매이며, 씨와 열매는 별개의 사물이니 하나가 아니다.[不一] 국광 종의 사과 씨는 육질이 단단하고 당도는 덜한 사과를 맺고, 후지 종의 사과 열매는 육질은 덜 단단하지만 당도는 높은 성질을 지닌 사과 씨를 품으니 씨와 열매가 둘도 아니다.[不二] 사과와 사과 씨 모두 상대방 없이 존재하지 못하고 금세 변하고 결국 사라져버리니 스스로 존재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공이다.

서양학자들은 불교를 여기까지만 이해하고 열등한 철학으로 간주하였다. 불교를 좀 안다고 자처하는 학자들도 연기론을 ‘inter-connection(상호연결)’ 정도로 이해한다. 하지만, 씨가 땅에 떨어져 자신을 썩히면 싹을 틔우고 꽃을 피워 열매를 맺고, 열매가 자기 몸을 흙에 던지면 씨를 남긴다. 이처럼, 모든 존재가 공하지만 기묘하게 존재한다.[眞空妙有] 존재들은 연기적 관계 속에서 이것이 원인이 되어 저것을 생성하며, 서로 변화하는 조건을 형성한다.

이를 자연과 사회에 적용하여 불이불이의 생태론의 지평을 연 이는 신라 말의 학자이자 시인, 개혁적 정치인인 최치원이다. 홍수를 막는 방법은 크게 보아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댐을 쌓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물이 흐르는 대로 물길을 터주는 것이다. 유럽 사회는 인간과 자연을 이항대립으로 나누고 인간에게 우월권을 주었기에 전자의 방식을 택하였다. 댐을 쌓듯 인간 주체가 자연에 도전하여 자연을 개발하고 착취하는 것을 문명이라 하였다. 그러나 댐은 물의 흐름을 방해하여 물을 썩게 하고 결국 거기에 깃들여 사는 수많은 생물을 죽이고 심지어는 주변의 기후를 변화시키고 지진을 일으키기도 한다. 이렇듯 이항대립에 바탕을 둔 서양의 패러다임은 전 지구 차원의 환경위기를 비롯하여 근대성의 위기를 낳은 동인이었다.

화쟁의 패러다임을 가졌던 최치원은 홍수를 어떻게 막았을까? 1,100년 전 신라 진성왕(887년~896년) 때 함양의 태수로 부임한 최치원은 위천의 홍수를 막고자 강의 유역을 넓히며 실개천을 만들고 활엽수만으로 상림(上林)을 조성하였다. 강은 흐르면서 이온작용, 미생물과 주변 식물들의 물질대사로 오염물질을 분해하는 자연정화를 하기에, 흐르는 한 윗물보다 아랫물이 맑다. 씨가 죽어서 열매를 맺듯 물은 나무의 양분이 되고, 열매가 죽어 씨를 내듯 나무의 뿌리는 흙속에 무수한 구멍을 뚫어 물을 품었다.

함양의 상림과 위천
http://www.knnews.co.kr/news/articleView.php?idxno=1265872

환경위기에 대한 화쟁적 합리성

이렇게 하여 상림은 10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홍수를 막을 뿐만 아니라 위천의 물을 맑게 유지하였다. 한 마디로 말하여, 엔트로피가 거의 제로인 대안인 것이다. 근대화와 산업화가 이런 패러다임으로 진행되었다면 환경파괴를 야기하지 않는 발전을 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최치원이 태수로 부임한 그해의 홍수는 어찌 막을 것인가. 최치원은 둑 너머에 나무를 심었다. 둑은 숲이 충분히 깊어진 다음에 헐었을 것이다. 숲이 동양적/불교적/탈근대적 대안이라면, 둑은 서양적/맑스적/근대적 대안의 은유다.

코로나19의 대안은 무엇일까. 개인적으로 손씻기와 마스크 쓰기를 철저히 하는 것이다. 집단 차원에서는 국가의 방역에 적극 협조하면서 혐오와 배제 대신 동체대비(同體大悲)의 마음으로 환자들을 끌어안고 돕는다. 국가적으로는 방역을 철저히 하고 보건소, 지역병원, 중앙병원을 잇는 의료체계를 확립하여 검사와 치료를 신속하고 체계적으로 행하고, 공공병원을 획기적으로 증설하고 시설투자를 하는 등 공공의례 체계를 강화하여야 한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신자유주의체제와 자본주의 체제에 맞서서 의료를 공공화하고 자연과 공존을 모색하는 방식으로 전환해야 한다.

환경위기로 넓혀도 마찬가지다. 개인 차원에서는 자본주의적 탐욕을 벗어나 타인을 위하여 욕망을 자발적으로 절제하고 적게 쓰면서 만족하는 소욕지족(少欲知足)의 삶으로 전환해야 한다. 집단은 점차 자연과 공존하는 생태공동체로 전환하고 유기농, 생태발자국이 덜 찍힌 지역음식(local food) 먹기 등을 실천해야 한다. 국가는 재생에너지 위주로 에너지 정책을 펴면서 생태 복지국가로 전환해야 한다. 세계 차원에서는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 체제에 대한 대안의 체제를 향하여 나아가야 한다. 전 세계 국가들은 유엔이 정한 지속가능 발전 목표(Sustainable Development Goals)를 국가의 목표와 일치시키고 17가지 과제를 수행해야 한다.

이를 위하여 반드시 필요한 작업이 맑스와 원효를 변증법적으로, 대립물을 서로 품는 대대(待對)의 방식으로 종합한 화쟁적 합리성이다. 이 가운데 핵심은 자연의 본원적인 가치와 이것이 시장 체제 속에서 화폐와 교환되는 양적 관계인 교환가치 사이의 모순을 지양하는 것이다. 맑스는 <자본론>에서 노동이 행해지지 않은 자연이 사용가치는 있으나 교환가치는 가지지 못함을 변함없이 주장한다. 햇빛이 쌀을 자라게 했지만, 햇빛의 가치가 쌀의 교환가치에 포함되지 않는다. 햇빛을 만드는 데 인간은 전혀 관여하지 못하므로 햇빛의 가치를 형성하는 사회적 필요노동시간은 없다. 하지만 인공태양을 써서 쌀을 자라게 한다면, 인공태양의 빛은 교환가치를 갖는다. 그렇다면, 햇빛의 교환가치를 인공태양을 매개로 추산하는 것이 가능하다. 이런 방식으로 자연의 본원적인 가치를 교환가치로 대체하여 추정할 수 있다. 이 경우 교환가치만을 따져 개발하는 것을 지양하고 자연의 본원적인 가치를 훼손하지 않는 것이 더 큰 가치를 생성한다는 생각으로 전환할 수 있다.

실질적으로 한국에서 한 해에 미세먼지로 인한 사회적 비용만 11조 8,000억 원에 달한다. (한국대기환경학회 등, <미세먼지 문제의 진단과 대응을 위한 공동 심포지엄>, 2016). 그렇다면 전 세계적으로 환경파괴와 기후변동이 야기한 슈퍼태풍, 가뭄과 홍수, 산불, 건강악화, 생물자원의 감소 등을 비용으로 환산하면 수천 조원이 넘을 것이다. 문제는 환경파괴의 열매는 자본과 관료가 차지하고 그 비용은 국민이 부담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자연의 본원적 가치와 교환가치를 종합한 것을 바탕으로 환경위기와 근대성의 위기를 낳은 근본 원인인 목적적 합리성을 화쟁적 합리성으로 전환하는 것이 시급하다. 목적 적 합리성의 패러다임에서 보면, 특정 지역의 개펄을 간척하고 개발하여 그곳에 공장을 건설하고 논으로 전환하여 생산하는 가치가 매년 100억 원이고, 그 개펄을 그대로 보존한 채 그곳에서 생산되는 어패류의 가치가 매년 50억 원이라면 개펄을 개발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하지만 이에는 다른 가치가 계산되지 않았다. 그 개펄에서 물고기와 조개들이 알을 낳고 성장하는 가치가 10억 원, 개펄을 막은 후 오염된 바닷물을 정화하는 가치, 바꾸어 말하여 개펄의 미생물이 바닷물을 자연정화하는 가치가 30억 원, 순천만처럼 개펄을 보존한 채 얻는 관광 수익이 20억 원, 주민이 너른 개펄을 보고 만지고 그 개펄에서 수많은 생명과 어울리고 대화하며 정서적 만족을 얻고 마을 공동체를 유지하는 가치가 10억 원이라면, 개펄의 개발을 중지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이것만으로도 개펄을 보존하는 것이 타당하지만, 이 비용에 개펄이란 자연이 갖는 본원적 가치를 더해야 한다. 개펄을 만들기 위하여 수억 년 동안 강물이 흐르며 토사를 바다로 밀어내고 바다가 수없이 파도를 치고 해류를 이동시키며 개펄을 만드는 데 소요된 에너지를 가치로 환산하면 수조 원도 넘을 것이다.

이제 근본적으로 양적 발전보다 삶의 질, GDP보다 국민의 행복지수, 경쟁보다 협력, 개발보다 공존, 한 사람의 열 걸음보다 열 사람의 한 걸음을 지향하는 국가와 사회를 추구하여야 한다. 무역량보다 이 땅의 강과 숲에 얼마나 다양한 생명들이 살고 있는지, GDP보다 거리를 지나는 시민들이 얼마나 미소를 짓고 있는지, 국부를 늘리기보다 얼마나 가난한 이들에게 공평하게 분배되고 있는지, 기업 이윤을 늘리기보다 얼마나 노동자들이 행복하게 자기실현으로서 노동을 하는지, 뛰어난 인재를 길러내기보다 못난 놈들이 얼마나 자신의 숨은 능력을 드러내는지, 내기하고 겨루기보다 얼마나 모두 함께 모여 신나게 마당에 노는지에 초점을 맞추어 국가를 경영하고 정책을 구사해야 한다.

(※ 이 글은 <인류의 위기에 대한 원효와 마르크스의 대화>(자음과 모음, 2015)를 쉽게 풀어쓴 것입니다. 쪽수까지 명기한 상세한 각주와 구체적 논증은 이 책을 참고하기 바랍니다.)

필자소개
한양대 교수. 민교협 전 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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