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뒤통수 맞은 민주노총 지금부터라도 정신차려야"
        2006년 09월 04일 09:48 오전

    Print Friendly, PDF & Email

    "한국노총이나 민주노총의 지도자라고 얘기하는 분들이 현장의 비정규직이나 미조직 노동자의 입장을 얼마나 이해하는 지 궁금하다. 민주노조를 만들기 위해 5년을 기다려왔는데 또다시 5년을 기다리라니, 이게 말이 되느냐?"

    포스코에서 민주노조를 만들기 위해 활동하고 있는 이혜우 씨는 노총과 사용자단체가 복수노조 5년 유예에 합의했다는 소식에 그저 황망할 뿐이었다. 그나마 포스코는 산별노조인 금속노조에 가입하면 교섭권을 인정받을 수 있지만 복수노조시대를 기다렸던 많은 노동자들은 민주노조를 만들기 위해 또다시 5년을 기다려야 하기 때문이다.

    지난 2일 서울 영등포구 노사정위원회에서 열린 제10차 노사정 대표자회의에서 한국노총과 경총, 대한상의는 핵심쟁점인 복수노조 허용과 전임자 임금 지급 금지의 시행을 5년 유예하는 방안에 합의했다. 직권중재폐지나 산별교섭 법제화 등 일부 쟁점들이 남아있긴 하지만 정부는 4∼6일 노사정 운영위원회를 거쳐 7일 로드맵을 입법 예고할 예정이다.

    기본권 원천봉쇄하는 반민주적 야합

    세계의 노동자들은 원하는 노조에 가입해 권리를 보호받는다. 복수노조가 금지된 나라는 한국이 거의 유일하다. ILO에서 열 차례나 권했던 복수노조를 또 5년 유예시킨 일은 기본권을 원천봉쇄하는 반민주적 야합이라는 비난을 면키 어렵다. 민주노총의 한 관계자는 "누가 한국노총에 이런 권리를 부여했냐?"고 반문했고 금속노조의 한 간부는 "돈 받아 쳐먹을려고 기본권을 팔아먹냐?"고 격분했다.

    어용노조 아래서 오직 복수노조 시대가 오기를 손꼽아 기다려왔던 많은 노동자들은 참담하기 그지없는 심정이다. 민주노총 김명호 기획실장은 "화물과 택시, 버스 등 많은 사업장에서 벌써 난리가 났다."고 말했다. 한국노총과 경총은 5년 유예에 대해 ‘노사관계의 미성숙’ 을 이유로 들었다. 밥 한 그릇 먹기 위해 5년을 줄서서 기다렸는데 노사가 "준비가 안 됐다"며 식당문을 걸어잠근 것이다.

    문제는 민주노총이다. 이번 상황은 충분히 예견됐었다. 이미 오래 전부터 많은 사람들이 삼성과 엘지, 포스코 등 무노조 대기업의 로비와 전임자 임금문제에 조직의 사활이 걸린 한국노총의 정치적 거래를 우려했기 때문이다. 5년 전에도 한국노총과 사용자단체는 똑같은 이유를 들어 복수노조를 5년 유예했었다.

    예견된 상황 아무런 대비도 하지 않은 민주노총

    그러나 민주노총은 아무런 대비도 하지 않았다. 오직 노사관계로드맵이 "민주노조를 무너뜨리려는 신자유주의 완성판"이라는 비판만 가할 뿐이었다. 김명호 실장은 "객관적 상황을 보면 쟁점은 많았지만 명확한 쟁점을 제시하지 못했다."며 "무엇을 쟁취하고 어디를 공격해야 할지 몰랐다."고 말했다. 결국 약삭빠른 한국노총이 노사관계로드맵 협상을 주도하게 된 것이다.

    전임자 임금지급 5년 유예가 발표되자 민주노총은 "내부검토를 하겠다"고 했다가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하는 등 허둥지둥됐다. 민주노총은 2일 긴급 중앙집행위원회를 열어 전임자임금지급은 ILO 권고대로 노사자율로 해야하고, 복수노조는 결사의 자유이기 때문에 미뤄서는 안된다는 입장을 정리했다.

    그러나 지난 2001년 복수노조와 전임자임금 문제를 5년 유예할 때에도 민주노총은 복수노조 유예에 반대했지만 투쟁을 조직하지 못했다. 이번에도 정부가 정리해고 요건완화 같은 일을 벌이지 않는다면 전임자임금지급 금지가 5년 간 미뤄진 상황에서 복수노조 즉각 실시를 주장하며 투쟁의 전선에 나서기 쉽지 않아 보인다.

    정부가 노총과 사용자단체의 합의를 수용하면 사실 정부는 더 우스워지게 된다. 스스로 ‘노사관계선진화방안’이라고 불렀던 것을 10년 전 합의내용으로 되돌린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민주노총은 한국노총 주연의 ‘노사관계 선진화 연극’을 구경하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막을 내릴 가능성이 높아진 것이다.

    노사관계 선진화는 산별노조 법제화

    1987년 민주노조가 폭발적으로 만들어진 이후 한국의 노동법은 기업별노조를 근간으로 유지되어 왔다. 그러나 금속노조와 보건의료노조 등 산별노조가 속속 만들어지고, 사용자들과 산별협약을 체결하면서 기업별노조 시대가 조금씩 저물어가기 시작했다. 여기에 지난 6월 30일 현대자동차노조를 비롯해 대기업노조 10만명의 조합원들이 산별노조로 전환하면서 산별노조시대는 거스를 수 없는 대세가 됐다.

    따라서 노사관계를 선진화하는 것은 복수노조와 전임자임금지급을 유예하는 일이 아니라 산업별노조 시대에 맞게 법과 제도를 확 뜯어고치는 일이다. 산별노조의 조합원이 있는데 사용자가 교섭에 나오지 않으면 부당노동행위로 처벌받도록 하고(산별교섭 의무화), 산별노조와 사용자단체가 맺은 협약은 최소한 조합원이 있는 사업장에서는 적용되도록(산별협약 효력 확장) 법을 제정해야 한다. 산별교섭을 위해 의무적으로 사용자단체에 가입하도록 하는 것도 검토할 필요가 있다.

    이렇게 될 경우 무노조 삼성에 금속노조 조합원 한 명만 있어도 삼성이 교섭에 나와야 하고, 임금삭감없는 주5일근무제나 불법파견 정규직화, 금속최저임금 832,690원 등 금속노조가 사용자단체와 맺은 협약이 적용되는 것이다. 산별교섭 법제화는 현재 기업별노조의 산별노조 전환을 촉진시키고, 노동자들이 노조 가입을 확대시키게 된다.

    민주노총은 3일 "전향적으로 변화하고 있는 산별시대에 걸맞게 산별협약의 제도화 등 노동법 개정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은 점에 대해 강한 유감 표명을 하였다."며 "산별노조 시대에 조응하는 노동법 개정 등 노사관계민주화 8대 요구가 쟁취될 때까지 강력히 대응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오늘부터 노사정 운영위원회가 열리고 정부는 7일 로드맵을 입법 예고한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른 때다. 단병호 의원실의 신언직 보좌관은 "노사관계선진화방안의 핵심은 산별교섭 법제화"라며 "지금이라도 민주노총이 강력하게 제기하고 조합원들에게 알려낸다면 이번 정기국회에서 쟁점화시켜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필자소개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