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도쿄 우에노 공원,
쇼군의 사원에서 근대 공원으로
[근현대 동아시아 도시] 막부 붕괴와 메이지의 상징
    2020년 02월 25일 03:56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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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목서 향기가 가득한 어느 가을, 우에노 모리 미술관에서는 유명한 서양 인상파 화가의 전시가 있었다. 국립서양미술관에서는 유럽 왕실의 소장품이, 국립도쿄박물관에서는 정창원의 보물이 소개되고 있었다. 각 전시관마다 입장권을 구입하기 위한 줄이 길게 늘어서 있었고 그 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입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도 서둘러 줄을 서야 한다는 생각으로 발걸음을 옮기다 문 듯 왜 이곳에 이렇게 많은 박물관들이 모이게 되었을까 궁금해졌다.

우에노 공원에는 도쿄국립박물관, 국립과학박물관, 도쿄도미술관, 도쿄도문화회관, 우에노연주악당, 우에노 모리 미술관, 국제어린이도서관, 동물원 등 많은 박물관과 문화시설들이 위치해 있다. 이는 이미 널리 알려진 워싱턴의 스미소니언 단지, 휴스턴의 뮤지엄 디스트릭트, 베를린의 박물관 섬, 비엔나의 뮤지엄 쿼터 등에 비해서도 뒤질 것이 없었다. 하지만, 조금 더 자세히 주변을 둘러보면 도쿠가와 집안의 사찰인 간에이지가 자리 잡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전히 남아있는 작은 사찰들과 많은 석재들이 어색하게 공존하고 있는 이유이다. 그 시작은 다음과 같다.

그림1 ) 우에노 공원 안내도

시골마을에 막부가 들어서다.

한적한 시골 마을에 지나지 않았던 에도가 거대도시로 발전하게 된 것은 1590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이곳에 입성하고 1603년 막부를 설치하면서 부터였다. 이러한 에도의 건설은 3대 쇼군인 이에미스(1623~1651)에 이르러서야 일단락되었다. 시가지의 건립을 위해 바다를 메우고 가로와 하천을 정비하고 다리를 놓았다. 에도에서 전국으로 통하는 도로도 정비되었으며, 1640년 거대한 에도성이 완공되었다. 7천명에 불과했던 에도의 인구도 50만명으로 증가하였다. 에도의 고지대인 야마노테(山の手)에는 다이묘를 비롯한 사무라이들의 저택이 지어졌고, 저지대로 침수 우려가 있는 시타마치(下町) 지역에는 죠닌들이 주로 거주했다. 그리고 그 외곽으로는 사원과 신사가 세워졌다.

그림 2) 에도성과 지금의 우에노 공원(1752)

우에노 산에 교토를 담다

에도성의 동북쪽에 위치한 우에노 산에 사원이 건립된 것도 이시기였다. 1624년 이에미스는 교토의 동북쪽에 위치한 히에이잔의 엔랴쿠지(延曆寺)를 모방하여 토에이잔 간에이지(東叡山 寬永寺)를 우에노 산에 세웠다. 건립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 때부터 자문 역할을 담당했던 천태종의 지도자 텐카이(天海)가 관여하였다. ‘토에이잔’이라는 이름은 ‘동쪽의 히에이잔(比叡山)’이라는 뜻이며, ‘엔랴쿠지’가 당시 연호에서 따온 사원의 명칭인 것과 같이 ‘간에이지’도 연호에서 그 이름을 따왔다.

우에노 산의 남쪽에 인왕문이 세워지고, 그 오른쪽에는 교토의 기요미즈테라(淸水寺)를 따라 기요미즈 관음당(清水観音堂)을 건립하였다. 벚꽃의 명소인 나라(奈良)의 요시노 산(吉野山)의 벚나무를 옮겨심기도 하였다. 우에노 산의 동쪽에 위치한 시노바즈연못(不忍池) 또한 교토의 비와코를 염두에 둔 것으로 비와코의 치쿠부시마(竹生島)를 형상화한 벤텐시마(弁天島)를 쌓았다. 우에노 산은 작은 교토가 되었다.

그림 3) 간에이지(17세기 에도명소도병풍 일부, 출처: 에도도쿄박물관)

막부의 사찰, 간에이지

간에이지의 사역은 약 30만평(지금의 우에노공원 면적의 3분의 2)으로 36개의 부속사원이 있었다. 1627년에는 이에야스의 위폐를 모신 도쇼샤(東照社)가 이곳에 건립되었다. 도쇼샤는 지금의 우에노 도쇼쿠(上野 東照宮)로 1651년 이에미츠가 대대적으로 다시 지었으며, 전국에서 250개의 등롱이 경쟁적으로 봉헌되었다. 또한, 이 곳은 황족들이 출가하는 사찰로 높은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1698년에는 에도의 서민들에게도 꽃구경이 허락되었다. 봄철 꽃구경 시기에는 아침 6시부터 오후 4시까지 개방하여 많은 관람객으로 붐볐으며, 도쇼구를 참배하는 서민들도 드나들었다. 하지만, 도쿠가와 집안의 사찰이라는 성격상 서민들이 마음껏 즐기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그림 4) 우에노 도쇼쿠(출처: 필자)

화재를 막기 위한 광장에 사람들이 모이다

에도는 크고 작은 많은 화재사건이 일어났다. 간에이지의 5층탑도 1639년 화재로 소실되어 다시 지어졌다. 메이레키 대화재(1657)는 피해가 상당했는데, 에도성뿐 아니라 다이묘의 저택과 사원, 민가 등 에도의 절반 이상이 불에 탔으며, 사망자도 3~10만에 달하였다. 이에 충격을 받은 막부는 대규모로 도시를 정비하고 방화대책을 강구하였는데, 주민들을 강제적으로 외곽으로 이주시켜 도로폭을 확대하고 히요케치(火除地)를 조성하였다.

이러한 히요케치는 주로 절이나 신사의 문 앞이거나 다릿목 등 사람이 많이 모이는 장소에 만들었다. 쇼군이 에도성에서 간에지로 참배하러 오는 길인 중앙로(御成道)를 확장해서 만든 시타야 히로코지(下谷広小路)도 그중 하나였다. 방화를 위해 만들어진 이곳에는 임시 연극극장이나 찻집이 들어섰고 점차 서민들의 오락과 사교의 장소로 변하였다. 시타야 히로코지는 료고쿠(両国) 히로코지, 아사쿠사(浅草) 히로코지와 함께 에도의 3대 히로코지로 불렸으며 서민들이 많이 찾았다.

그림 5) 간에이지와 시타야 히로코지(1849~62)

그림 6) 시타야 히로코지에서 바라본 간에이지(1735~1814, 출처: 보스턴 미술관)

간에이지, 막부와 함께 불타다

1868년 5월 15일 한발의 포탄이 시노바즈연못에 떨어졌다. 보신전쟁(戊辰戦争) 중 하나인 우에노전쟁의 시작이었다. 보신전쟁은 에도막부와 교토의 천황에게 권력을 반환하기를 요구하는 세력 간의 내전이었다. 1853년 흑선의 내항으로 인한 개항과 쇄국으로 국론은 양분되었고, 서양의 군사적 위협에 굴복해 불평등 조약을 체결한 막부에 대한 불만은 쌓여가고 있었다. 특히 막부와 대립해왔던 사쓰마(薩摩)·조슈(長州) 연합세력은 양이(攘夷)를 기치로 그들의 세력 기반을 확장해 나갔고, 힘이 약해진 쇼군 요시노부은 1867년 11월 9일 메이지 천황에게 통치권을 반납하였다.

하지만, 통치권의 반납은 형식적인 것으로 여전히 막부 세력은 정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이에 사쓰마 번은 막부 세력과 전쟁을 벌이려 하였고, 막부 세력도 사쓰마 번을 정벌하기 위해 군대를 파병하였다. 1868년 1월 12일 막부의 군함이 사쓰마 번의 군함을 공격하면서 전쟁이 시작되었고 막부 세력은 패배하였다. 요시노부는 오사카를 떠나 에도로 돌아왔으며 간에이지에 근신하며 메이지 천황에게 반항할 의사가 없다는 것을 표현하였다.

신정부군은 에도로 진군하였고 5월 3일 에도성에 무혈 입성하였다. 반면, 막부 세력 중 여전히 신정부군에 대항하는 세력은 쇼기대(彰義隊)를 결성하고 간에이지에 집결하였다. 5월 15일 오전 7시 신정부군은 총공격을 강행하였고, 오후 5시 쇼기대는 전멸하였다. 이 과정에서 간에이지의 가람도 대부분 불에 탔다. 에도막부가 실질적으로도 끝났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그림 7) 우에노전쟁(출처: 일본국회도서관)

새로운 공간이 되다

한동안 용도를 정하지 못하던 간에이지 부지는 1870년 의학학교와 병원의 예정지로 검토되었다. 일본에 의학을 전수한 네덜란드 출신 군의관 안토니우스 보드윈(Anthonius Bauduin)이 이 업무를 담당하였는데, 그는 의학학교와 병원을 건립하는 대신 이곳의 자연 환경을 보존해 공원으로 남기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의견을 제출하였다. 그 결과 우에노 공원은 1873년 일본 최초의 공원으로 지정되게 되었다. 1875년에는 시노바즈연못이 공원에 편입되었다.

공원에는 각종 근대 시설들이 들어서게 되었다. 박물관, 동물원, 경마장, 철도역사, 도서관 등 근대를 상징하는 건물들이 조성되기 시작하였고, 간에이지의 흔적은 지금도 남아있는 도쇼구와 몇몇 건물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지워졌다. 도쿠가와 막부의 공간에서 근대적인 공간으로 변모하게 된 것이다.

박람회와 박물관

1877년 제1회 내국권업박람회가 이곳에서 열렸다. 102일간 약 8만점의 새로운 공업제품과 생활용품, 완구, 미술품, 토산품 등이 소개되었다. 박람회장에는 가스등이 켜졌고, 공원 입구에는 미국산 관개용 풍차가 설치되어 풍력을 이용한 분수를 운영하는 등 전에는 보지 못하던 진기한 것들을 보여주었다. 이 박람회에는 세이난 전쟁이 진행 중임에도 불구하고 45만명이나 방문하여 관람하였다.

1881년 제2회 내국권업박람회에는 약 82만명이 방문하였는데, 중심건물이었던 미술관을 박람회가 끝난 뒤 1882년 우에노 박물관(지금의 국립도쿄박물관)으로 개관하였다. 이는 1851년 런던박람회를 마치고 그 결과물을 가지고 개관한 산업박물관(지금의 V&A 박물관)의 사례를 따른 것으로, 영국에서 유학을 하고 돌아온 마치다 히사나리(町田久成)의 역할이 컸다. 박물관은 박람회에 출품할 자료의 확보와 종료 이후의 보관문제, 그리고 이를 공개할 전시관 문제를 해결해 주었다.

1851년 런던에서 만국박람회가 열린 이래 박람회는 자본주의의 승리와 과학과 기술의 진보를 보여주었으며, 이를 기반으로 한 국가의 힘을 상징하는 무대가 되었다. 일본 역시 식산흥업과 부국강병을 위한 근대화를 위한 수단과 방법으로 박람회를 적극 활용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박물관이 만들어졌다. 메이지 정부는 근대를 상징하는 박람회를 이곳에서 개최함으로써 도쿠가와 막부의 공간이었던 과거를 종식하고 새로운 시대가 왔음을 시민들이 직접 느낄 수 있게 하였다. 1886년에는 우에노 박물관이 공원부지와 함께 황실 소유로 변경되었고 1889년 제국박물관으로 개칭하였다. 1890년에는 제3회 내국권업박람회가 개최되었고 박람회 종료 후 참고관이 박물관 소속으로 남았다.

그림 8) 제1회 내국권업박람회(출처: 일본국회도서관)

그림 9) 제1회 내국권업박람회 미술관(출처: 일본국회도서관)

근대문화가 이식되다

우에노 공원에는 박람회가 열리는 것 외에도 철도와 경마장, 프랑스 요리점 등 근대를 상징하는 새로운 시설들이 옛 모습을 변화시키며 속속 들어서게 되었다. 그중 가장 큰 변화는 철도였다. 1883년 우에노와 동북부의 쿠마가야(熊谷)를 연결하는 철도가 개통되었다. 일본철도는 옛 간에이지의 부지 약 98,512m²를 사들여 역사(驛舍)를 건립하였고 우에노역은 도호쿠 지역에서 도쿄로 오는 관문 역할을 하게 되었다. 많은 사람과 화물이 드나들게 되면서 거리도 자연스럽게 개발되기 시작하였다.

좌. 그림 10) 1907년 우에노 공원(출처 : 일본 국회도서관) *하단에 우에노역이 보인다.
우. 그림 11) 우에노 역(출처: dobohaku.com)

시노바즈연못은 경마장의 건설로 인해 지금의 규모로 축소되었다. 경마는 1860년 요코하마의 외국인 거류지에서 처음으로 열렸으며 1862년 전용경기장이 만들어졌고 이후 쇼콘샤(招魂社), 니시노마루(西の丸) 등에서도 대회가 열렸다. 일본 황실과 고급관료, 재계인사 등이 참여하여 설립한 공동경마사는 1879년부터 미국 그랜트 전 대통령의 방일에 맞추어 건설된 도야마학교 경마장에서 경마대회를 열어왔다. 하지만 교통이 불편하여 새로운 부지를 물색하게 되었고, 1884년 시노마즈연못의 절반에 가까운 면적을 메우고 경마장을 건설하였다.

시노바즈연못이 경마장으로 선택된 것은 교통의 편리함과 더불어 프랑스 파리의 부르고뉴 숲에 있는 롱샹 경마장과 같이 귀족들의 사교적이 모임을 위해서는 공원에 경마장이 있어야 적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해 11월 천황이 참석한 가운데 처음으로 이곳에서 경마대회가 열렸으며 1892년까지 경마를 진행하였지만 계속되는 적자로 인해 문을 닫았다.

그림 12) 시노바즈 연못에서 경마를 관람하는 메이지 천황(출처: 일본국회도서관)

일본의 프랑스 요리의 선구자로 알려진 세이요켄(精養軒)은 1872년 츠키지에 해군용지를 빌려 처음 문을 열었는데, 1876년 시노바즈연못이 내려다보이는 지금의 위치에도 가게를 열었다. 세이요켄은 국내외 명사들의 사교장으로 이름 높았으며 고급식당의 대명사였고, 문학속 작품의 배경이 되기도 하였다.

좌. 그림13 ) 메이지 시대 우에노 세이요켄(출처 : 角川書店「よみがえる明治の東京」/ wikimedia).
우.그림 14) 지금의 우에노 세이요켄(출처: 필자)

근대를 상징하는 비행기의 실험도 시노바즈연못에서 진행되었다. 라이트형제가 36.5m를 비행한지 6년이 지난 1909년 12월 9일, 일본에 체류 중이던 프랑스 해군장교인 르 프리외(Yves le Prieur)는 일본의 해군장교 아이하라(相原四郎)와 이곳에서 비행실험을 실시하였다. 이미 두차례 실패를 경험한 뒤였지만, 르 프리외는 100m를 날아 비행에 성공하였고 이는 일본 최초의 글라이더 비행이 되었다. 이어 비행에 나선 아이하라도 20m를 상승하였지만 연못으로 추락하고야 말았다.

그림 15) 비행실험(출처 : 村岡正明(2003) 航空事始 不忍池滑空記, 光人社NF文庫/ wikimedia)

조적(朝敵)의 동상을 세우다

1898년 우에노 공원의 남쪽 입구 부근에 사이고 다카모리(西郷隆盛)의 동상이 건립되었다. 사이고는 메이지 유신의 3걸 중 한 명으로 정한론을 주장한 사람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메이지 유신 이후 정권 다툼에서 패한 그는 가고시마 현으로 낙향하여 사학교를 운영하며 무사들을 규합하였고, 1877년 2월 구마모토성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일본의 마지막 내전인 이 세이난 전쟁에서 반란군은 메이지 정부군에게 패배하였고 사이고는 할복하였다. 사망 후 조적(朝敵)으로 불리던 사이고는 1889년 일본 헌법 반포를 기념한 대사면을 통해 사면되었고, 1898년에는 동상까지 건립되게 되었다. 이는 내부의 갈등을 모두 통합한 메이지 정부의 자신감을 상징적으로 드러낸 것으로 사이고 다카모리의 동상은 이러한 변화 속에 건립될 수 있었다.

그림 16) 사이고 다카모리 동상(출처 : Ohmi Gallery)

노동자가 모이다.

1920년 5월 2일 노동자 1만명이 우에노 공원에 모였다. 그들은 ‘8시간 노동제 실시’, ‘실업 방지’, ‘최저 임금법 제정’ 등을 요청하며 집회를 개최하였는데, 일본 최초의 노동절 기념행사였다. 이 사건은 정부에 의해 소비되고 제공되던 공간에서 시민들이 주체적으로 공간을 활용하기 시작했다는 것에서 큰 의미가 있었다. 이 기념행사는 1936년 2.26 사건에 따른 계엄령과 노동절 행사가 금지될 때까지 계속 되었다.

그림 17) 제1회 노동절 행사(1920.5.2, 출처 : 朝日クロニクル 20世紀 第2巻)

나가며

우에노 공원에는 그 뒤로도 미술관, 과학관 등이 들어섰다. 위에서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동물원도 우에노 박물관과 함께 개관하기도 하였다. 관동대지진 당시에는 도쿄시민의 피난처가 되었고, 물론 조선인이 억울하게 학살된 장소이기도 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군의 폭격을 피해 많은 사람들이 이곳으로 피난을 오기도 하였다. 우에노 공원은 에도막부가 무너지고 메이지 정부가 수립된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공간이다. 그리고 시민들은 점차 이곳을 자신의 공간으로 만들어가기 시작하였다.

<참고문헌>

wikip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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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용운(2010), 근대화와 박람회, 대한건축학회논문집(계획계), 26(8)

Julia Rasche(2011), Ueno Park during Meiji Times –. a Mirror of its Time: Discursive Space and Symbolic, Representation of Modernity, Vienna Graduate Journal of East Asian Studies, Volume 1

江戸東京博物館(2016) 常設展示総合図録 3版

洋泉社MOOK(2017), 浮世絵と古地図でたどる江戸の名所

호즈미 가즈오(이용화 번역, 2019), 메이지의 도쿄, 논형

호즈미 가즈오(이용화 번역, 2019), 에도의 도쿄, 논형

필자소개
서울역사박물관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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