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삼성 청부입법' 의혹
    산업기술보호법 재개정 추진
    사업장 작업환경에 대한 공익적 문제제기 사전적 탄압 악용 우려
        2020년 02월 24일 07:31 오후

    Print Friendly, PDF & Email

    더불어민주당·정의당·민중당 의원 14명이 ‘산업기술의 유출방지 및 보호에 관한 법률(산업기술보호법) 개정안’을 반드시 재개정하겠다고 약속했다. 지난해 8월 국회를 통과한 산업기술보호법 개정안엔 노동자의 건강권과 직결된 정보까지 모두 비공개하도록 하는 독소조항이 포함돼있다.

    국회의원 14인은 24일 오전 국회 정론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심사와 표결 과정에서 국민의 건강권 보호에 치명적인 독소조항을 걸러내지 못했다”며 “입법 과정에서 국민을 대표하는 국회의원으로서 의무를 소홀히 했던 점을 반성하며 책임 있는 모습을 보이겠다. 이 법이 올바르게 다시 개정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기자회견엔 더불어민주당 박용진·박정·박홍근·신창현·우원식·이학영·제윤경 의원, 정의당 김종대·심상정·여영국·윤소하·이정미·추혜선 의원, 민중당 김종훈 의원이 함께 했다.

    사진=반올림

    지난해 8월 2일 국회는 산업기술보호법 개정안을 처리했다. 이 법은 본회의에서 여야 재적 297인, 재석 210인 중 찬성 206인, 기권 4인으로 통과했다. 반대 의사를 밝힌 의원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더불어민주당과 자유한국당은 물론 정의당 의원들도 이 개정안에 찬성표를 던졌다.

    산업기술보호법 개정안은 국가핵심기술의 불법 유출을 방지하기 위해 처벌을 강화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일본과 무역갈등이 있던 당시인 국내 산업기술을 보호해야 한다는 명분이었다. 그러나 산업기술 유출보단 직업병 소송에 휘말린 특정기업을 옹호하기 위한 법에 가깝다는 지적이 주를 이룬다.

    문제가 되는 조항은 신설된 제9조의2와 제14조 8호다. 제9조의2는 ‘공공기관은 국가핵심기술에 관한 정보를 공개해서는 안 된다’는 내용이다. ‘국가핵심기술과의 관련성’만 있으면 노동자의 건강권에 치명타를 주는 정보라도 해당 기업은 공개하지 않아도 된다. 특히 국가핵심기술과의 관련성을 판단할 구체적 기준도 마련돼 있지 않다. 정부와 특정기업이 비공개 대상 범위를 자의적으로 정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것이다.

    제14조 8호는 ‘적법한 경로를 통해 산업기술이 포함된 정보를 제공받았더라도 목적 외의 다른 용도로 사용·공개하면 처벌’하는 내용이다. 노동자와 시민의 생명·건강권 보호를 위한 공익적 목적의 정보공개도 3년 이하의 징역으로 까지 처벌받을 수 있도록 문을 열어 둔 것이다.

    삼성을 비롯한 일부 기업들은 현장 노동자가 질병에 걸려 사망하는 등의 사고가 벌어져도 영업비밀이라는 이유로 유해물질을 공개하기를 거부해왔는데, 해당 개정안이 법적으로 이 같은 논란을 차단해준 셈이다. 사업장의 작업환경에 대한 공익적 문제제기에 대한 사전적 탄압이라는 비판이 나온 이유다.

    특히 삼성의 청부입법이라는 시각이 주를 이룬다. 산업기술보호법 개정안이 논의된 산자위 법안 심사소위의 당시 회의록을 보면 ‘삼성’이라는 표현이 자주 등장하는데다, 삼성 측 법률대리인은 반올림과의 정보공개 소송 과정에서 “보고서 공개 논란이 입법적으로 해결됐다”며 개정 산업기술보호법을 적극 활용하고 있다고 한다. 반올림과 삼성은 공장 내 유해물질 사용 및 노출실태를 알기 위해 작업환경측정보고서에 대한 정보공개청구 소송을 진행 중이다.

    삼성전자 뇌종양 피해자 한혜경 씨의 어머니인 김시녀 씨는 “혜경이가 왜 병에 걸렸는지 알려면 어떤 환경에서 일했는지 썼던 약품이 무엇인지 알아야 하는데 삼성은 이 모든 게 다 영업비밀이라고 해서 (현행법으로도) 산재 신청만 10년이 넘게 걸렸다. (산업기술보호법 개정안은) 반올림 발목 잡는 삼성보호법”이라며 “뇌종양으로 투병 중인 혜경이를 위해, 노동자를 위해 잘못된 법은 반드시 바로잡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여야 의원들은 산업기술보호법 개정안을 반드시 재개정하겠다고 약속했다.

    우원식 민주당 의원은 “우리는 법안 처리 하면서 국가 안전보장과 국민 경제 발전이라는 말에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먼저 고려했어야 할 국민 건강과 환경에 미치는 악영향을 놓쳤다”며 “삼성에 직업병 발병의 책임을 묻기 위해 오랫동안 싸움을 지속해온 반올림과 노동자들의 노력을 좌절시키고 있다는 것에 부끄럽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우 의원은 “산업기술보호법이 노동자의 권리를 배제하고 특정 대기업 이익을 위해 복무하도록 두어선 안 된다”며 “국민의 생명과 건강, 환경보호라는 헌법적 가치와 원칙이 최우선으로 적용돼야 하며 취지대로 산업기술의 불법 해외 유출을 방지하는 데에 실효성 갖도록 재개정해야 한다. 정부차원에서 하위법령이나 내부 지침 개정을 통해 독소조항이 개정되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을지로위원회에선 산업기술보호법 재개정을 최우선 과제로 삼고 이번 20대 국회에서 반드시 재개정이 이뤄지도록 하겠다. 여의치 않으면 반드시 21대 국회가 개원하자마자 가장 먼저 처리될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 다할 것”이라고 말했다.

    윤소하 정의당 원내대표도 “헌법적 권리인 국민의 알권리가 애매모호한 규정으로 침해되는 일 없도록 법 재개정하겠다. 늦었지만 바로잡겠다”며 “노동자 안전과 생명관련 정보는 반드시 공개하도록 하겠다”고 약속했다.

    아울러 “이번 산업기술보호법 개정안처럼 독소조항을 은닉한 법들이 국회 심의과정에서 충분히 논의되고 걸러질 수 있도록 상임위 소위에 대한 접근성 높이고 정당과 시민사회단체 간 정보 공유 및 협력 강화할 것”이라며 “비록 20대 국회 얼마 남지 않았지만 독소조항 걸러내기 위한 방도 꼭 찾아내겠다”고 거듭 강조했다.

    한편 이날 오후 예정했던 산업기술보호법 대책위원회 주최의 산업기술보호법 헌법소원 청구 기자회견은 코로나19 확산에 따라 연기됐다. 헌법소원은 삼성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다가 백혈병으로 숨진 고 황유미 씨 13주기 하루 전날인 3월 5일 진행될 예정이다.

    필자소개
    레디앙 취재기자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