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지역의 독립운동,
의료, 교육에 크게 기여한 교회
[그림으로 만나는 한국 교회] '대구제일교회'
    2020년 02월 17일 09:54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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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광역시에 갈 때면 가슴이 답답합니다. 박정희 군사정권 이전에는 매우 진보적인 지역이었는데, 지금은 보수수구의 아성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지역사회의 변화를 위하여 노심초사 애쓰는 분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짠합니다. 가까웠던 선배 목사님의 부인은 1987년 6월 항쟁 때도 선글라스에 모자를 눌러쓰고 시위현장에서 떨어져 지켜보며 응원했다고 합니다.

쌀쌀했지만 봄기운이 감도는 지난 2월 5일, 대구에 갔습니다. 장애인교회를 세우고 정성껏 목회하며 민주화운동에 앞장섰던 서일웅 목사님의 팔순모임에 참여하지 못하고 이제야 뵈러 간 것입니다. 목사님, 친구 목사 두 분과 오찬을 나누고 같이 대구제일교회 카페로 갔습니다.

2월에 대구제일교회에 가는 것이 뜻 깊은 것은 3·1만세운동 민족대표 33인의 한 분인 이갑성 장로의 1919년 2월의 대구행이 대구제일교회가 독립운동에 앞장선 계기가 된 까닭입니다. 그는 이만집 담임목사에게 3·1운동 거사를 알리고 대구를 대표하는 서명을 부탁하지만, 이 목사는 큰 희생을 염려하여 거절합니다. 그러나 이만집 목사가 전한 독립선언서는 계성학교 아담스관 골방에서 학생들에 의해 등사되어, 대구와 경북지방 전역에 보내졌습니다.

3월 8일 토요일, 아침부터 서문시장에 사람들이 모여들었는데, 대구제일·남산·서문교회 교인들과 계성학교, 신명여학교, 성서학원 학생과 교사 등 기독인들이 다수였습니다. 김태련 조사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다가 일경에게 뺏기자, 이만집 목사가 공약삼장을 읽고 “지금이야말로 대한이 독립을 할 수 있는 때다. 모두 독립을 성취하기 위해 만세를 부릅시다. 대한독립만세”를 외쳤습니다.

순식간에 1천 여 명으로 불어난 시위대열이 일경의 제지를 뚫고 현 대구백화점 부근인 달성군청 앞에 이르렀을 때, 일본군 제80연대가 기관총을 겨누고 일본군경이 시위대에 달려들어 구타하고 체포하여 71명이 실형을 받았습니다. 목사, 장로, 등 교회지도자들과 교사, 학생, 상인, 병원 노동자 들은 6개월에서 3년까지 형량을 선고받았고, 이만집 목사는 최고형인 3년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습니다.

9일과 10일에도 시위가 이어지자 대구고보, 계성학교, 신명여학교에 휴교령이 내렸고, 65명이 체포되어 6개월에서 1년 징역형을 받았습니다. 교회에 YMCA가 있었고 교사들과 학생들이 만세운동에 적극적이어서 민족운동은 계속되었습니다. 특히 신명여학교 학생 20여명이 만세운동현장에서 체포되어 3명이 옥고를 치룬 사건은, 국권회복과 여권신장을 위한 대한애국부인회와 조선여자기독청년회를 통해 계승되어 광복의 밑거름이 되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지역사회에서 존경받아 교회성장에 기여한 이만집 목사는 1923년, “선교사의 정신지배를 받는 경북노회를 탈퇴하고 자치를 선언함”을 감행하고 선교사들의 독선적인 지배에 저항하여 민족교회를 지향하는 자치운동을 벌였습니다. 이에 경북노회는 분열되었고, 선교사들은 자치파를 이단시하고 마귀집단으로 규정하며 이 목사를 면직시켰습니다. 다행히 2005년 정경호 목사님과 이번에 만난 목사님들을 중심으로 복권운동을 벌인 덕분에 82년 만에 복권되었습니다.

‘대구 10월 항쟁’을 빼고 대구를 말할 수 없습니다. 1946년 10월 1일에 미군정하의 대구에서 발발하여 남한 전역으로 확산된 일련의 운동을 지칭합니다. 2010년 3월 대한민국 진실화해위원회는 《대구 10월사건 관련 진실규명결정서》에서 이 사건을 “식량난이 심각한 상태에서 미군정이 친일관리를 고용하고 토지개혁을 지연하며 식량 공출 정책을 강압적으로 시행하자 불만을 가진 민간인과 일부 좌익 세력이 경찰과 행정 당국에 맞서 발생한 사건”이라고 규정하고, 국가의 책임을 인정해 유족들에 대한 사과와 위령사업을 지원하도록 권고하였습니다.

미군정의 배급정책이 실패하여 민중들은 굶주렸고, 콜레라가 창궐한 대구는 더 심하여 민심이 흉흉했습니다. 더구나 친일 출신 국립경찰들이 일제 방식 그대로 쌀을 강탈하다시피 공출해가자 분노는 커졌습니다. 조선공산당이 주도하여 9월 총파업을 전개하자,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대구지부도 9월 23일부터 총파업에 돌입하였습니다. 10월 1일, 노동단체들이 저녁에 대구부청 앞에서 기아대책 마련을 요구하는 시위 도중, 경찰의 발포로 노동자 두 명이 사망합니다. 이튿날 아침, 노동자들이 집결하기 시작했고 굶주린 일반 시민들과 학생들도 시위에 합세했습니다. 만 여 명의 군중에 포위된 대구경찰서장은 무장해제를 선언하고 수감된 정치범들을 석방하였습니다.

조선공산당 지도부의 통제를 받는 노동자들은 질서 있게 경찰권을 인수하려 했지만, 흥분한 군중들이 경찰에 투석을 시작했고, 경찰관들이 총을 난사하여 17명이 사망하는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분노한 군중들은 정사복 경찰관들을 구타하고 경찰 무기고를 털어 총기로 무장했습니다. 군중들은 부잣집과 친일파들의 가옥을 털어 생필품과 식량을 길바닥에 쌓고 필요한 사람에게 나눠주었습니다. 그러나 가게나 은행 같은 곳은 거의 피해를 입지 않았고 경찰관을 집단폭행하거나 살해한 것은 그들 대부분이 일제 때부터 조선인들을 괴롭혀온 친일경찰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미군정은 10월 2일, 대구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미군을 동원하여 표면적으로는 질서가 회복되었지만, 시위가 인근인 경산군, 성주군, 영천군 등으로 확대되면서 경상북도 일대에서 민중들과 미군정 간의 충돌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이후 경북지역을 벗어나 전국적으로 확대되면서 항쟁은 1946년 말까지 계속되었습니다.

그림=이근복

경북 대구지역 최초의 대구제일교회는 1893년에 남성정교회(南城町敎會)라는 이름으로 설립되었습니다. 미 북장로회의 선교사 베어드(William M. Baird, 배위량)가 1893년 대구에서 개척 전도를 하면서 4월 22일에 예배를 시작한 것이 시초입니다. 1897년 선교사 아담스(Adams, J.E, 안의와)가 정착하면서 발전하기 시작했습니다. 1899년 이 지역 최초의 서양의료기관인 제중원(현 대구동산병원)을 설립하고, 1900년 대남소학교(현 종로초), 1902년 신명여자소학교, 1906년 계성학교, 1907년 신명여학교를 개교했습니다. 1933년에 제일교회로 개칭합니다.

대구제일교회는 1996년에 중구 동산동으로 이전하여 1989년 교회당 건축을 시작하여, 준공을 앞둔 1991년 2월, 이상근 목사를 원로목사로 추대했습니다. 2010년 12월에 13대 박창운 목사가 담임목사로 부임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중구에 있는 옛 예배당은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30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코로나19로 인하여 교회 출입이 금지되어, 옛 영남신학대학 교정에 지은 고딕교회당을 밖에서만 볼 수 있었고 역사관도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그래도 동산병원 뒤의 교회당을 둘러싼 ‘청라언덕’의 선교사 고택들은 운치가 있었고, ‘동무생각’의 돌비가 반겨주었습니다.

“봄의 교향악이 울려 퍼지는 청라언덕 위에 백합 필적에 … 청라언덕과 같은 내 맘에 백합 같은 내 동무야 네가 내게서 피어날 적에 모든 슬픔이 사라진다(이은상 작사, 박태준 곡).” 박태준(1900-1986)은 평양 숭실전문학교에서 공부했으며, 모교인 대구 계성학교 음악교사로 합창과 밴드부를 지도했고 가곡 등 150여곡을 작곡했습니다. “오빠 생각”이 대표적이고 “나 이제 주님의 새 생명 얻은 몸”(찬송 436장)도 유명합니다. 민족독립운동을 이끈 대구제일교회가 다시 앞장서서 지역사회 변화를 추동하길 바라는 마음을 품고 서울행 기차에 몸을 실었습니다.

필자소개
이근복
성균관대학교와 장로회신학대학원 졸업. 전 영등포산업선교회 총무, 새민족교회 담임목사,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교육훈련원장 역임. 전 크리스챤아카데미 원장. 한국기독교목회지원네트워크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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