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비 내리는 꽃그늘에서
대작(對酌)을 꿈꾸다
[한시산책] 포은 정몽주, 송은 박익
    2020년 02월 11일 11:48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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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화삼(玩花衫) – 木月에게

– 조지훈

차운 산 바위 우에
하늘은 멀어
산새가 구슬피
울음 운다

구름 흘러가는
물길은 七百里(칠백리)

나그네 긴 소매
꽃잎에 젖어
술 익는 강마을의
저녁 노을이여

이 밤 자면 저 마을에
꽃은 지리라

다정하고 한 많음도
병인 양하여
달빛 아래 고요히
흔들리며 가노니……

조지훈(趙芝薰, 1920-1968)의 이 시는 국어 교과서에 실릴 정도로 유명합니다. 암울한 식민지 시대를 살던 문학청년 지훈은 1942년 봄 문득 박목월(朴木月, 1916-1978)이 보고 싶었습니다. 사실 지훈은 목월을 한 번도 본적이 없습니다. 다만 둘은 1939년 『문장(文章)』의 추천을 받아 시인으로 등단한 인연만 있을 뿐입니다.

『문장(文章)』은 1939년 김연만이 민족문학의 계승과 발전을 위하여 창간한 문예잡지입니다. 『문장(文章)』은 일제의 조선어 말살정책으로 1941년 이미 폐간되었습니다. 지훈은 당시 조선어학회에서 일을 돕고 있었는데, 누군가가 경주에서 목월을 만나고 왔다는 얘기를 듣고 곧바로 목월에게 장문편지를 보냅니다. 만나고 싶다고요. 얼마 뒤 목월의 짧은 답장이 옵니다.

 경주 박물관에는 지금 노오란 산수유(山茱萸) 꽃이 한창입니다. 늘 외롭게 가서 보곤 하던 싸느란 옥저(玉箸)를 마음속에 그리던 임과 함께 볼 수 있는 감격을 지금부터 기다리겠습니다. 오실 때 미리 전보(傳報)주시압

지훈은 곧바로 전보를 치고 경주행 열차를 탔습니다. 지훈의 얼굴을 모르는 목월은 한지에 朴木月(박목월)이라고 쓴 깃발을 만들어 집 근처에 있는 경주 건천(乾川)역으로 갔습니다. 진눈개비가 묻어있는 봄비가 날리던 날이었습니다. 이렇게 두 문학청년은 만납니다. 목월이 스물여섯, 지훈이 스물두 살이었습니다.

시인 박목월(좌)와 조지훈

지훈은 보름 동안 경주에 머뭅니다. 석굴암에 가던 날은 복사꽃이 피었음에도 진눈개비가 내렸다고 합니다. 찬술을 마시고 꽃샘추위에 떨고 있을 때 목월이 외투를 덮어주기도 합니다. 시와 문학을 논하면서 경주를 두루 유람하고 고향 영양으로 돌아갑니다. 고향에 돌아온 지훈은 곧바로 목월에게 편지를 보냅니다. 목월에게 바치는 「완화삼」을 동봉해서요. 「완화삼」을 받아본 목월은 「나그네」라는 시를 담아 답장을 보냅니다. 시를 써도 발표할 공간이 없는 두 명의 식민지 문학청년은 그렇게 우정을 키워나갑니다.

혹자는 「완화삼」의 ‘술 익는 강마을의/ 저녁 노을이여’나 「나그네」의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 놀’이라는 구절을 들어 식민지 말기 혹독한 수탈시기에 무슨 술 익는 마을이냐고 비판하기도 합니다. 얼핏 맞는 말 같기도 합니다. 제목부터 ‘꽃잎에 젖은 적삼을 보다’라는 뜻의 「완화삼(玩花衫)」이니 말입니다. 그러나 저는 다르게 해석합니다.

『논어(論語)』에는 공자님이 제자들에게 뜻을 펼칠 수 있는 기회가 오면 어떻게 하겠냐고 묻는 대목이 있습니다. 제자들은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겠습니다.’ ‘인민이 예악(禮樂) 아는 나라를 만들겠습니다.’ 등등 각자의 포부를 말합니다. 마지막으로 증석(曾晳)에게 묻자 아래와 같이 대답합니다.

“늦봄에 봄옷이 이미 만들어지면 관 쓴 어른 5~6명과 어린이 6~7명으로 기수에서 목욕하고 무우대(舞雩臺)에서 바람 쐬고 노래 읊조리며 돌아오겠습니다.”(莫春者。春服旣成。冠者五六人。童子六七人。浴乎沂 風乎舞雩。詠而歸。) – 『논어(論語)』 「선진(先進)」-25

참 한가한 대답 같지요. 그런데 공자님은 증석의 대답에 무릎을 치며 감탄합니다. 왜일까요. 다른 이들은 ‘부강한 나라’를 꿈꾸고 있지만 증석은 ‘인민이 행복한 세상’을 꿈꾸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파트 걱정, 취업 걱정 없이 봄이 오면 아이들과 손잡고 봄소풍을 다녀오는 그런 세상을 말입니다. 저는 지훈의 시구나 목월의 시구에서 그런 꿈을 봅니다. 그럼에도 식민지 청년에게 그 꿈은 멀기만 합니다. 그 꿈을 향해 가지 않을 수 없으나 ‘흔들리며’ 갑니다.

벚꽃 만개하고 꽃눈이 연못 가득 내린 어느 봄날의 봄소풍. 이런 문화가 일상이 되는 세상을 꿈꿉니다.

시작이 장황하네요. 이번에도 우정에 관한 한시를 소개하려고 합니다. 이번에 소개하려는 한시는 고려 말의 학자이면서 관료인 송은(松隱) 박익(朴翊, 1332년(충숙왕 복위 1)-1398년(태조 7))의 시 「증포은(贈圃隱, 포은에게)」과 이 시에 대한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1337년(충숙왕 복위 6)-1392년(공양왕 4))의 답시(答詩)입니다. 참고로 송은 선생은 박천익(朴天翊)이라는 이름을 쓰기도 했습니다. 먼저 송은의 시를 볼까요?

포은에게

송계에 숨어사는 선비 집 오실 때
꽃 지고 해 저물어 문도 닫았었지
술동이 앞에 두고 내 뜻 물으시니
발 밖 반쯤 비친 청산을 바라보네

贈圃隱(증포은)

來訪松溪隱士家(내방송계은사가)
夕陽門掩落花多(석양문엄낙화다)
樽前問我幽閑意(준전문아유한의)
簾外靑山半面斜(염외청산반면사)

송은 선생은 고려가 망했을 때 태조 이성계의 부름을 거부하고 은거한 두문동 72현 중의 한 분입니다. 고려의 충신이죠. 고려의 국운이 기울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 밀양으로 낙향합니다. 그곳에서도 서울 송도(松都)를 잊지 못해 소나무를 심고, 호를 송은(松隱)이라 짓습니다. 친구이자 정치적 동지인 포은 선생은 송은 선생을 설득하기 위해 손수 밀양에 내려옵니다. 두 지사(志士)는 술잔을 기울이면서 서로의 마음을 나눕니다. 송은 선생이 먼저 위의 시를 읊습니다.

그대가 올 때까지는 꽃 지고 해 저물 듯 나라가 기우니 나는 대문을 걸어 잠그고 출사를 포기했었다오. 술잔을 기울이며 그대 내 속 뜻을 물으시는가? 내 마음은 청산에 은거하고 싶지만,

그대가 나를 설득하니 청산을 가리는 발처럼 내 마음도 흔들린다오.

송은 박익 선생 묘 벽화. 1999년 태풍으로 훼손된 묘를 수리하다가 발견되었습니다.

사실 송은 선생은 포은 선생이 내려올 줄 미리 알았던 듯합니다. 포은 선생이 송은 선생에게 보낸 아래의 시를 보면 밀양에 손수 내려가겠다는 편지와 동봉했던 게 아닌가 합니다. 포은 선생의 답시를 보기 전에 이때 보낸 시를 먼저 보겠습니다.

밀양 박 중서에게 부치다

평생 친구들 새벽별처럼 드물어지고
늙은 이 몸 외로이 지냄을 한탄하네
도은은 서쪽으로 가고 약재는 죽어
매양 생각나는 이는 박 중서뿐이라오

寄密陽朴中書(기중밀양박중서)

平生親舊曉星疏(평생친구효성소)
老圃如今嘆索居(노포여금탄색거)
陶隱西遊若齋死(도은서유약재사)
令人每憶朴中書(영인매억박중서)

송은 선생은 예부시랑 중서령(禮部侍郞中書令)을 지낸 바 있습니다. 그래서 송은 선생을 박중서(朴中書)로 지칭했습니다. 도은(陶隱)은 이숭인(李崇仁) 선생의 호(號)입니다. 도은이 서쪽으로 갔다는 것은 중국으로 사신 갔다는 뜻입니다. 도은 선생이 1386년(우왕12) 새해를 축하하는 사신인 하정사(賀正使)로 중국에 사신 갔으니, 이 시도 그렇고 포은 선생이 밀양에 간 것도 이 해가 아니었을까 합니다.

송은 선생의 시에 화답한 포은 선생의 시를 볼까요?

답시

봄바람에 말 멈추고 그대 집 물었더니
꽃 지고 새 우는 석양 바른 곳이라고
평생토록 뜻을 같이한 정든 나의 벗
맑은 담론 나누다 달 기우는 줄 몰랐네

答詩(답시)

東風歇馬問山家(동풍헐마문산가)
花落鳥啼夕照多(낙화조제석조다)
吾友平生同契厚(오우평생동계후)
淸談不覺月西斜(청담불각월서사)

시는 담백하여 이해하고 말고도 없습니다. 있는 그대로 이해하면 되니까요. 다만 ‘석양 바른 곳’이라는 말이 의미심장합니다. 석양이 바르려면 서향(西向)집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송은 선생이 살던 송악마을은 동남향입니다. 그럼에도 포은 선생이 이렇게 쓴 것은 기우는 해가 비추듯이 기우는 고려가 기대하는 사람이 바로 그대뿐이라는 은유입니다. 밤이 새도록 나누는 대화(淸談,청담)는 우국충정(憂國衷情)이었겠지요.

암튼 포은 선생이 다녀가고 송은 선생은 다시 조정에 출사합니다. 그리고 포은 선생이 살해된 다음에는 바로 낙향합니다. 나라가 바뀐 다음 태조 이성계는 판서와 정승 등 온갖 벼슬을 내리지만 모두 거절하고 고향에 은거하다 그곳에서 죽습니다.

포은 정몽주 선생 영정

송은과 포은 선생처럼 나라를 이끌어나가는 위치는 아니지만, 잔혹한 식민지 시대 같은 꿈을 꾸던 청년 시인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지훈과 목월입니다. 앞에서 소개했듯이 지훈이 목월에게 「완화삼(玩花衫)」을 보내자 목월은 「나그네」라는 시로 답장을 합니다. 두 시를 나란히 놓으면 마치 변주곡을 듣는 것처럼 비슷한 느낌을 받습니다. 마치 백설희의 「봄날은 간다」와 자우림의 동명 노래처럼요.

목월 시비. 목월이 교수를 지낸 한양대학교 교정에 세워져 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창궐하고, 젊은이들이 결혼도 연애도 못하는 잔혹한 세상에서도 모든 인민이 행복한 세상을 향한 꿈은 포기하지 말아야겠지요. 이번 한시산책의 마지막을 장식할 시는 목월의 「나그네」입니다. 이 시를 소개하면서 저는 식민지 시절, 청년 목월의 꿈을 위로하고자 합니다. 동시에 이 시를 보면서 아직도 꿈을 잃지 않은 사람들이 조금이나마 위로를 받았으면 합니다.

나그네- 박목월

江(강)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
南道(남도) 三百里(삼백리)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 놀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필자소개
최경순
민주노총 전국민주버스노동조합과 전국운수산업노동조합에서 일했고, 한국고전번역원에서 공부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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