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대환은 옳다…대중을 향해 귀를 열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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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년 08월 31일 09:56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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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 글은 최근 <레디앙>에 실린 주대환 전 민주노동당 정책위의장의 글 "민주노동당, 공부 좀 하라 그리고 나를 논쟁하라"와 이에 대한 최백순 독자의 반론 “사민주의가 욕설이라고? 사회주의가 금기어다"와 관련, 실명을 밝히지 않은 ‘베른슈타인’이라는 필명의 독자가 <레디앙> 편집국에 보내온 투고입니다. <편집자 주> 

    존 레넌의 ‘이매진’이 우파 정당 후보의 정치 광고음악으로 사용되는 것은 사회주의자였던 그에 대한 모독일 뿐 아니라, 한국에서 존 레넌을 사랑하는 좌파들에게도 충분히 분노할만한 일이다. 빼앗기고 또 빼앗겨도 꿈마저 빼앗길 수는 없다.

    그러나 꿈을 안고 살아가는 우리가 살고 있는 공간은 바로 이 척박한 땅, 국가보안법의 서슬이 시퍼렇게 살아있고 사민주의이든 사회주의이든 좌파는 모두 빨갱이로 치부되는 곳, 바로 대한민국이다.

    ‘사회주의’ 불문율처럼 규제당한다는 말은 사실과 달라

    지난 지방선거 때 김종철 서울시장 후보는 ‘사회주의’ 선거운동을 전개하겠다고 했다. 방송 토론회에 출연해서도 ‘사회주의’에 대해 말하기를 서슴지 않았다. 당 내 여러 정파에서 비판의 목소리가 높았다. 대중들에게 ‘사회주의’라는 용어는 거부감을 줄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선거를 앞두고 ‘사회주의’를 언급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2004년 총선 당시 노회찬 후보는 비교적 자주 ‘사회주의’에 대해 이야기하였다. 대중의 호감을 얻기 위해 자신이 ‘사회주의자’라는 사실을 숨기지 않겠다고 했다. 그러나 대중은 이미 달라져 있었다. 오히려 그런 그의 솔직함에 더욱 호감을 가졌다.

    따라서 ‘사회주의’라는 말이 대중에게 거부감을 줄 수 있기 때문에 언급하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은 다분히 시대착오적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당 내에서 ‘사회주의자’라는 말이 ‘불문율’처럼 규제 당하고 있다는 주장은 사실과 다르다. 당 밖의 대중들에게 접근할 때는 이견이 있을 수 있겠지만, 적어도 당 내에서는 자신이 ‘사회주의자’임을 밝히기를 꺼려하거나 ‘사회주의’를 ‘불문율’로 규제하는 사람은 없다.

    오히려 당 내에서는 주대환 전 정책위 의장이 말한 것처럼 ‘사회민주주의자’라는 말이 ‘수정주의자’나 ‘개량주의자’라는 말과 함께 욕설처럼 쓰이고 있다. ‘사회민주주의’를 말하는 사람은 노동을 배신하고 자본과 타협하려고만 하는 ‘기회주의자’로 취급당하기 일쑤이다.

    ‘사민주의’ 욕설처럼 쓰이는 것 맞다

    이 역시 무척 시대착오적인 발상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노동자를 죽이는 정부나 자본과 협상을 하려고 나서기보다는 투쟁을 하는 것이 우선이겠지만, 그리고 혁명에 대한 기대를 여전히 저버리지 않는 것도 개인의 자유이지만, ‘사회민주주의’를 ‘기회주의’와 동의어로 치부해 버리는 것은 아직까지도 ‘국가사회주의’의 망령에 사로잡혀 있는 낡은 사고방식일 뿐이다.

    지지자들의 표에 대한 성격에 의해 진보정당이 규정되는 것은 옳지 않다. 그러나 주대환 전 정책위 의장은 매우 적절한 지적을 했다. 민주노동당은 ‘노동당’이지 ‘사회당’이 아니다. 민주노동당은 혁명을 꿈꾸는 ‘사회주의자’들이 정당이 아니다.

    민주노동당은 ‘사회주의’는커녕 ‘사회민주주의’가 무엇인지조차 자세히 알지 못하지만 ‘부자에게 세금을, 서민에게 복지를’이라는 구호에 끌려 ‘무상의료, 무상교육’이 실현되는 나라를 꿈꾸며 당원이 된 평당원들의 정당이다.

    자기네들끼리만 알아들을 수 있는 운동권 사투리로 NL이 어떻고 PD가 어떻고 떠들어대는 것은, 그리고 ‘사회주의’가 어떻고 ‘사회민주주의’가 어떻고 떠들어대는 것은 ‘무상의료, 무상교육’으로 대변되는 ‘사회민주주의’적 공약에 끌려 평당원이 된 사람들로 하여금 소외감과 실망만 느끼게 할 뿐이다.

    운동권 사투리에 소외되고 실망느끼는 평당원들

    우리가 얻은 2백만 표는 혁명을 꿈꾸는 ‘사회주의자’들이 던진 표일까? 아니면 ‘사회민주주의’적 공약에 호감을 가진 노동자들과 일반 대중들이 던진 표일까? 우리가 얻은 2백만 표가 ‘사민주의’에 대한 지지표라는 주장은 비교적 합당하다.

    실제로 특정 정파에 속해 있지 않은 평당원들에게, 또는 당 밖의 대중들에게 민주노동당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생각을 물으면 대부분 영국 노동당이나 독일 사민당 같은 ‘사민주의’ 정당이라고 답한다. 민주노동당이 특정 정파들에 의해서만 좌지우지되는 운동권 동아리 연합의 성격을 넘어 진정한 대중 정당으로 거듭나려면, 무엇보다도 평당원들과 일반 대중의 요구에 귀를 기울여야만 한다.

    우리가 얻은 2백만 표의 상당수가 민주노총 조합원들의 표라는 주장은 별로 설득력이 없다. 물론 민주노총 조합원들의 표가 적지는 않았겠지만, 그러한 주장은 민주노총 조합원들의 대부분이 민주노동당의 당원인 것도 아니고 또 대부분이 민주노동당에 표를 던지는 것도 아닌 현실과 너무나 동떨어져 있다.

    민주노동당 강령 사민주의 자체를 부정하는 것 아니다

    이러한 난관을 타개하기 위한 해결책 중의 하나로 주대환 전 정책위 의장이 예로 든 영국 노동당은 이미 노동조합으로 조직된 노동자를 집단으로, 노동조합 전체로 가입시켰다는 사실을 참고할 수 있을 것이다. 민주노동당이 ‘사회당’이 아닌 ‘노동당’의 길을 가고자 한다면, 개인으로만 하여금 당에 가입하게 하지 말고 노동조합을 당에 가입할 수 있게 해야 할 것이다.

    영국 노동당과 독일 사민당이 욕을 먹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들이 ‘사민주의’ 정당이라서? 아니다. 그들이 ‘사민주의’ 정당임에도 불구하고 ‘사민주의’ 정책이 아닌 ‘신자유주의’ 정책을 펼치고 있기 때문이다. 영국 국민들과 독일 국민들이 그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사회주의’가 아니라 ‘사민주의’에 충실하라는 것이다.

    당 강령이 ‘사민주의를 뛰어넘는 정당’임을 규정하는 것은 ‘사민주의’ 자체를 부정한다기보다는 외국의 기존 ‘사민주의’ 정당들이 보여준 한계와 모순을 뛰어넘고자 하는 의지로 보는 것이 합당하다.

    당의 현실적 좌표는, 그리고 당이 내건 공약이나 정책들은 ‘사회주의’는커녕 우리가 그렇게 뛰어넘고자 하는 유럽의 ‘사민주의’ 정당들에도 한참 미치지 못한다.

    영국 노동당이 중도좌파 정당답지 못하다고 비판할 수는 있어도 중도좌파 정당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잘못된 좌표 설정이다. 아무리 블레어가 ‘제 3의 길’을 추구하며 ‘신자유주의’ 정책을 대거 도입했다고 하더라도, 영국 내에서 시행한 사회복지 관련 정책들은 우파 정당이 것이 아니라 명백한 중도좌파 정당의 것이다.

    영국노동당이 중도좌파라는 게 왜 사적취미인가

    ‘사회주의’ 선거운동을 표방했던 김종철 전 서울시장 후보가 모델로 삼았던 켄 리빙스턴 런던시장의 ‘런던 플랜’ 역시 중도좌파 정당이자 ‘사민주의’ 정당인 노동당에서 나온 정책이다. 그런데도 영국 노동당을 중도좌파 정당으로 규정하는 것이 “눈가림을 시도하는 것”이고 “사적인 취미”에 해당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지난 서울시장 선거에서 당은 눈가림을 시도하는 사적인 취미를 계획하고 지원한 것이었던가? 중도좌파 정당인 영국 노동당에서 나온 ‘사민주의’ 정책이 대한민국의 현실에서 참고해도 좋을만한 정책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 아니고?

    ‘민영화 저지’를 요구하는 것이 ‘사회주의’적 요구인가? 아니다. 오히려 ‘제 3의 길’로 상징되는 ‘신자유주의’ 시대에 공공재의 국유화라는 ‘사민주의’의 기본 원칙에 충실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민주노동당은 분명 합법정당이다. 투쟁하는 정당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법과 제도를 바꾸기 위하여 투쟁하자는 것이지 당이 앞장서서 법과 질서를 어기자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선관위가 당의 지역위원회에 대해 불법 판정을 내려도 계속 우리의 방식을 고집하자는 것인가? 그렇게 한다고 해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사민주의 vs 사회주의’ 논쟁이 부적절한 이유

    물론 풀뿌리 민주주의의 실현을 위해서는 광역체제보다 기존 지역위원회가 훨씬 효과적일 것이다. 그렇다면 지역 주민들을 설득하여 여론을 형성하고 법의 개선에 나서야 한다. 법을 어기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오히려 법과 제도의 테두리 안에서 투쟁을 건설하는 것이 더욱 효과적이며 성숙한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인민과 얼굴을 맞대고 스킨십을 해야 하는 것이 진보정치의 기본이다. 그러나 법과 제도의 테두리를 벗어나는 것만이 대중에게 다가서는 방안이 될 수는 없다. 오히려 현재 대한민국의 법과 제도가 얼마나 반민중적인지를 당원들에게 교육하고 일반 대중들에게 홍보하여 법과 제도의 개선을 이루어내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진보정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홍세화 당원이 쓴 <진보에 관한 작은 생각>이라는 글의 일부를 소개하며 글을 마치겠다.

    “나는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사민주의자로 만족한다. 만약에 내가 프랑스 사회구성원이라면 사회주의자일 것이다. 소수가 혁명적인 생각을 갖고 있는 것보다 다수의 생각을 조금 바꾸는 것이 더 혁명적이라는 그람시의 주장에 21세기 사람들은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볼세비키 혁명은 20세기 초에나 가능했다. 실제로 러시아 혁명은 볼세비키의 능력이 뛰어났기 때문이 아니라 당시 러시아 지배계급이 무능하여 적응능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나는 오늘 사민주의자로 만족한다. 내가 사회주의자라고 말하지 않는 것은, 나아가 사회주의를 주장하는 사람과 논쟁을 벌이고 싶지 않은 것은 한국사회구성원들의 의식 지형이 그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한국사회구성원들의 정치사회의식과 직접 관련된다. 즉, 한국사회구성원들은 절대 다수가 사회주의와 사민주의의 차이에 대해서 알지 못하고 관심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주의든 사민주의든 그것들이 ‘사회악’이거나, 적어도 ‘한국사회에 맞지 않다’는 점에 대해서는 절대적 합의를 이루고 있다.

    즉, 모르면서 다 알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헤게모니가 작동하고 있는 곳에서 ‘사민주의 대 사회주의 논쟁’은 절대 다수의 동의나 참여 없이 사회변화가 가능하다는 전제 위에서나 의미가 있다.

    둘째 이유는 이상사회를 미리 그려 놓고 그것을 위해 진보운동을 하기보다는 오늘 이 사회의 불평등과 고통을 덜어내는 것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즉 평등하고 고통없는 사회를 그리기보다 지금 이 사회의 불평등과 고통을 끊임없이 줄여나가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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