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평등한 공동체를 향한 꿈
    [인류의 위기에 대한 원효와 맑스의 대화 ①] 연재를 시작하며
        2020년 02월 03일 02:06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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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류의 위기에 대한 원효와 맑스의 대화’라는 주제로 민교협 전 의장이었던 이도흠 한양대 교수의 글을 연재한다. 많은 관심 부탁드린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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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프롤로그-평등한 공동체의 꿈과 인간 본성의 구현
    2. 전 지구 차원의 환경 위기와 기후변동
    3. 폭력, 테러, 전쟁과 학살
    4. 인간성의 상실과 소외의 심화
    5. 신자유주의 체제의 모순과 불평등의 심화

    6. 과학기술의 도구화와 상품화
    7. 근대성의 위기
    8. 분단모순의 심화와 동아시아의 위기
    9. 욕망의 과잉과 상품화
    10. 디지털사회와 4차 산업혁명의 역기능
    11. 가상성과 재현의 위기
    12. 에필로그

    원효 대사와 칼 마르크스

    프롤로그-평등한 공동체의 꿈과 인간본성의 구현

    촛불항쟁이 일어나 박근혜가 권좌에서 물러난 지도 3년이 다 되어간다. 그 길지 않은 시간 동안 무엇이 달라졌는가. 독재와 국정농단을 제외하고 달라진 것이 과연 무엇인가. 서민과 노동자의 삶은 더욱 곤고(困苦)해졌다. 불평등은 오히려 더 심화하고,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는 시늉으로 끝났다. 하늘로 오른 노동자들은 수백일 째 내려오지 못하고, 톨게이트 수납 노동자 농성과 문중원 기수의 죽음에 대해 양자의 가해자가 대통령 선에서 해결이 가능한 공기업임에도 이 정권은 침묵하고 있고, 김용균 이후에도 마스크 쓰는 것 말고는 별로 달라진 것 없이 노동자들은 매일 일터에서 죽음을 당하고 있다.

    미국과 트럼프의 눈치만 보다가 그나마 숨통이 트이던 남북관계조차 얼어붙었고, 이라크 파병 때보다 더 전쟁 위험이 큰 호르무즈에 그때보다 더 종속적인 관계에서 파병을 하였다. 조국 사태로 수개 월 동안 국력이 낭비되고 그 후유증이 계속되고 있음에도 대통령은 성찰조차 하지 않는다. 문재인 정권은 노동시간 단축을 유예하고 24조 원에 달하는 기업 지원책과 부동산 부양책을 발표하고, 박근혜 정권의 산업정책을 고스란히 계승하여 4차 산업혁명의 신기루를 만드는 것으로 모자라 인공지능 강국을 선포하는 등 노동을 배제하고 친기업 성장정책으로 전환하였다.

    촛불 이후에도 변화가 없는 것은 크게 다섯 가지다. 불평등의 심화, 비정규직과 정리해고, 공적영역의 민영화, 모든 영역의 시장화와 개인의 탐욕 증대를 야기한 신자유주의 체제가 그대로 유지되고 있기 때문이다. ‘자본-정권-보수언론-사법부-종교권력층-김앤장과 같은 전문가 집단’으로 이루어진 기득권 동맹이 조금도 균열되지 않았으며 민주당도 이 카르텔의 한 축을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미 종속 체제가 자주적인 관계로 조금도 개선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현 정권이 적폐의 핵심인 재벌과 미국을 청산하기는커녕 반노동 친미 · 친기업 정권으로 회귀하고 진정한 사회개혁을 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주권자로서 권리를 인식한 시민들이 촛불을 들기는 하였지만, 진보가 분열되어 있고 시민사회의 조직화를 이루지는 못하여 제대로 저항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상황에서 정치는 거의 작동하지 않고 있다. 보수진영은 일말의 합리성도 없이 극우적인 선전 선동에만 몰두하고, 여당은 전혀 정치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자유주의 세력들은 무조건적으로 조국과 문재인 정권을 옹호하면서 진보 진영과 점점 등을 지고 있다. 이 국면에서 광화문은 태극기 부대가 점거하였고, 진보진영은 이명박근혜 정권 때보다 더 투쟁하기 힘든 조건에 놓였다.

    촛불 이후 무엇을 할 것인가

    촛불 이후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유토피아의 오아시스가 말라 버리면 진부함과 무력함의 사막이 펼쳐진다.”(Jürgen Habermas, The New Conservatism, 1989) 분명한 것은 이럴수록 멀리 길게 보고 유토피아의 지평을 열고 더욱 전선을 명확히 하면서 맞춤한 전략과 전술을 짜고 연대를 도모하는 하는 것이다.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 체제의 극복 없이 그 어떤 대안도 미봉책에 그친다. 현재 불평등 하나만 보더라도 사회가 붕괴될 지경이다. 1,100만의 노동자가 비정규직으로 전락하고, 상위 10%가 전체 소득의 절반인 50.7%(2017년 기준 홍민기, <노동리뷰>), 배당소득의 93.9%를 차지할 정도로(국세청, <2017년 귀속 양도소득과 금융소득>) 불평등이 악화하였으며, 청년실업자는 30만 명에 이르며(통계청 2019년 8월), 971명의 노동자가 산업재해로 사망하였다.(고용노동부 2018년).

    불평등은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의 갈등과 대립으로 그치지 않는다. 불평등은 개인의 몸과 마음을 파괴하고 사회불안을 증대하고 공동체를 해체한다. “불평등이 심할수록 사람들은 협력하여 문제를 해결하는 전략 대신 경쟁과 힘에 의해 해결하는 전략을 선호하게 된다. … 불평등이 심해지면, 타인에 대한 신뢰도가 낮아지고 사회통합이 줄어들며 사회적 관계의 질은 내려가고, 범죄와 폭력은 증가하고, 스트레스가 증가하여 건강은 나빠지고 평균 기대수명이 떨어지며, 사람들 사이의 신뢰수준은 내려간다.… 소득 불평등이 높을수록, 적대감, 인종적 편견이 심하고 여성의 지위도 낮다.”(리처드 윌킨슨, <평등해야 건강하다>, 2008)

    설혹 개혁이 이루어진다 하더라도 불평등을 완화하지 않으면 개혁도 물거품으로 돌아간다. 결과의 평등 없이 기회나 과정의 평등과 공정도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개혁은 법과 시스템에 이어 사람과 문화가 바뀌어야 안착하는데, 불평등이 심할수록 사람들이 살아남기 위하여 치열하게 경쟁하고 탐욕을 키우면서 협력전략보다 지배전략을 선택하고 반개혁적 성향과 행동을 표출하기 때문이다. 불평등이 심하면, 울타리 안의 사람들은 나경원과 조국처럼 자신과 자식들의 자본과 권력을 유지할 수 있는 ‘유리창’을 강화하기 위하여 모든 힘과 정보, 인맥을 동원하여 제도와 법을 바꾸고 그러고도 안 되면 편법을 구사하며, 민중 또한 살아남기 위하여 치열하게 경쟁하고 탐욕을 증대하기 마련이다.

    현재 한국 상황에서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 체제에 반대하지 않으면, 대미종속체제와 기득권 동맹에 맞서지 않으면 진보라 할 수 없다. 이제부터라도 진보진영은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 체제 극복과 대미종속체제 해체, 기득권 동맹의 균열로 운동의 목표를 설정하고 반자본주의와 반신자유주의/반미/반 기득권으로 전선을 형성하고 그 틀 안에서 서로 차이를 인정하면서 계급모순, 민족모순, 환경모순, 젠더모순을 종합한 적녹보의 연대를 이룩해야 한다. 비정규직과 대량해고의 철폐, 조세개혁, 보편적 복지, 의료·주택·교육·교통의 공공화, 종업원 지주제, 몬드라곤식 기업 전환 등을 추진하는 운동을 전개하여 근본적으로 불평등을 완화해야 한다.

    아울러, 재벌의 점진적 해체와 중소기업 위주로 경제 재편, ILO 수준 관련 노동법 개정, 노동 3권의 100% 보장, 비정규직과 정리해고의 철폐를 바탕으로 한 노동개혁, 지검장과 판사의 직선제, 시민검찰제 등 시민이 주체가 되어 권력을 통제하는 사법개혁, 숙의민주제와 직접민주제를 구체화한 정치개혁, 대학서열과 입시를 철폐한 교육개혁, 권력과 자본으로부터 독립하면서도 상업성과 선정성을 극복한 언론개혁 등을 단행해야 한다.

    인류는 700만 년 동안 평등사회였다

    이럴 때 혹자는 너무 과격한 것이 아닌가 묻는다. 하지만, 인류 역사 700만 년 가운데 불평등한 사회는 4,000여 년에 지나지 않는다. 돈이 신이 되고 소외를 심화하고 자본이 노동자가 생산한 잉여가치를 착취하는 자본주의 체제는 400년에 불과하다. 맑스부터 최근의 유발 하라리에 이르기까지 수렵채취사회는 평등하였는데 농경사회부터 불평등과 계급이 시작된 것으로 본다. 하지만, 최근에 이를 깨는 고고학 발굴과 생물고고학(bio-archeology)과 인류학, 사회학의 융합적 연구가 이어지고 있다. 농경사회는 신석기가 아니라 후기 구석기 시대인 1만 2천 년 전에 시작되었으며, “에이미 보가드(Amy Bogaard) 등 국제연구팀이 유라시아 전역의 150곳에 이르는 고대 농경유적의 지니계수를 측정한 결과, 농경사회는 기원전 4,000년에 소가 끄는 쟁기농법이 보편화하기 전까지는 평등사회였다.”(Mattia Fochesato, Amy Bogaard and Samuel Bowles, <Comparing ancient inequalities: the challenges of comparability, bias and precision>, 2019)

    특히, 메소포타미아 문명이나 이집트 문명에 앞서서 기원 전 9,400년 경부터 농경을 하고 도시문명을 건설한 터키의 차탈회유크(Çatalhöyük)유적을 보면, 집과 곳간의 크기가 거의 같았고 소유물도 똑같았다. 공공장소, 행정건물, 엘리트의 주택이나 숙소에 관련한 증거를 찾을 수 없었다.(Ian Hodder, <More on history houses at Çatalhöyük: a response to Carleton et al>, 2016)

    발굴을 바탕으로 한 차탈회유크의 마을 상상도
    (www.archaeo3d.com/en/3-cesty-neolitizace/dlouha-predovychodni-cesta/dvojity-pahorek–atalh-y-k/)

    4회에서 상세히 말하겠지만, 인간의 본성은 이기와 이타, 선과 악의 혼합체다. 인간 또한 생명체의 하나로 ‘이기적 유전자를 가진 생존기계(survival machine)’이지만 사회적 협력을 하며 이타성(alterity)을 증진시켰으며, 이타성은 도덕적 의지만이 아니라 타인의 아픔에 대한 공감에서 비롯되는데 이것이 자신의 유전자를 더 많이 남기는 데 유리하기에 몸의 진화에도 영향을 미쳐서 두뇌 속에 거울신경세포 체제(mirror neuron system)를 형성하였다. 예수님의 사랑, 부처님의 자비, 공자의 인(仁)은 모두 공감을 바탕으로 한다.

    이처럼 타자의 고통에 공감하여 연대하는 것은 인간 본연의 본성을 구현하는 실천이자 예수님, 부처님, 공자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다. 평등한 공동체를 꿈꾸고 실천하는 것은 ‘빨갱이 짓거리’가 아니라 인류가 ‘4,000년의 외도’를 끝내고 700만 년 동안 해왔던 사회로 돌아가려는 것이다.

    왜 원효와 맑스인가

    자본주의의 모순을 분석하고 새로운 유토피아를 그리는 데 맑스만큼 과학적이면서도 깊이있고 체계적으로 분석한 이론은 없다. 구름에서 땅으로 내려온 철학인 맑시즘. 한계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21세기 오늘, 자본과 인간, 세계 사이의 관계, 불평등과 소외를 분석하는 데 이보다 유용한 이론은 없다. 소련이 해체되었지만, 화폐와 상품을 매개로 가치가 달라지고 노동과 인간관계가 변질되는 과정을 통찰하는 정치경제학으로서, 화폐와 상품이 인간의 모든 영역을 지배하면서 소외를 심화하고 자본이 노동을 착취하는 사회를 분석하는 사회과학으로서,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 체제의 모순을 분석하는 가치 체계로서, 모든 대립물의 투쟁과 상호 의존의 통일을 추구하는 변증법의 원리로서, 강자나 가진 자가 아니라 약자와 가지지 못한 자의 관점에서 세계를 해석하는 민중철학으로서, 노동이 해방되고 서로를 자유롭게 하는 개인의 연합이라는 새로운 비전을 제시한 유토피아로서 맑시즘은 아직 인류의 빛이다.

    프랑스 혁명은 부르주아가 선취해버렸고 볼셰비키 혁명의 불은 찬연히 타올랐다가 한 세기도 되기 전에 사위고 있다. 교조는 언제나 지성의 무덤이자 폭력이다. 낡은 체제와 권력에 대한 저항은 진보를 향한 꿈과 열정, 인간에 대한 사랑과 연대와 더불어 성찰을 동력으로 한다. 아무리 숭고하고 정당한 진리라 하더라도 인간을 넘어설 수는 없다. 자유 없는 정의와 평등이 개인을 억압한다면, 정의와 평등이 없는 자유는 개인의 악마성을 키운다. 자본의 해체 없이 국가가 공동선을 추구할 수 없고, 국가로부터 권력을 빼앗지 않고서 자본을 해체할 수도 없다. 무엇보다도 나와 세계의 변혁은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개인이 변해야 세계가 바뀌며 새하늘이 열려야 개인의 거듭남도 유지된다. 진보의 한계와 오류를 성찰하고서 그를 보완할 지혜를 붓다에게서, 이를 화쟁의 원리로 하나로 아우른 동쪽 변방의 철학자, 원효에게서 찾는다.

    맑스를 불자들이 불온한 빨갱이들의 수괴로 간주하고, 좌파들이 붓다를 비과학적 관념론자로 간주하면 대화는 불가능하다. 불자들이 마르크스를 사회를 연기론으로 바라보며 중생 구제를 실천한 보살로, 좌파들이 붓다를 나와 타자의 진정한 해방의 길을 연 혁명가로 본다면 대화의 길은 열린다. <예기(禮記)>를 패러디하여 말하면, “공통점은 우리를 친하게 하고 차이는 우리를 심오하게 한다.

    불교와 맑시즘은 너무나도 다르다. 붓다는 모든 것이 마음에 따라 일어나는 것이라며 유심론의 입장에서 세계를 해석하고 깨달음에 따라 새로 구성하고자 했고, 맑스는 이제 철학은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와야 한다며 유물론에 입각하여 세계를 바라보고 인간 주체의 실천에 의해 변화시키고자 했다. 붓다는 모든 것이 무상하여 연기에 따라 나고 머물고 변하고 사라지는[生住異滅] 것으로 보았으며, 맑스는 모든 존재가 모순을 갖고 있고 이 모순에 따라 운동하고 변화하는 것으로 보았다. 붓다는 모든 존재가 오온(五蘊)의 덩이로 공(空)한 것으로 보았으며, 맑스는 존재를 긍정하였다.

    그럼에도 붓다와 마르크스는 통하는 점도 많다. 신적 존재를 부정하고 이 세계를 쉼 없이 변화하는 것으로 무상(無常)의 관점에서 파악했으며, 기존 질서와 논리는 물론 기존의 텍스트에 대해 비판적이고 해체적인 입장을 취했다. 각자의 이기심과 탐욕을 버리고 이타적이고 대자적인 실천을 행할 것을 주장했다. 특히 이 세계와 인간 사회를 실체론이 아니라 관계의 사유로 바라보았다. 붓다는 인간은 물론 삼라만상이 서로 연기 관계임을 갈파했고, 마르크스는 자연과 인간, 인간과 사회, 인간과 다른 인간, 토대와 상부구조, 생산력과 생산관계가 상호작용하는 것으로 인식했다. 무엇보다도 붓다와 마르크스는 신분과 계급의 차별이 없이 만인이 평등한 이상 사회를 꿈꾸었다.

    다만, 붓다에게는 물질 그 자체가 아니라 그에 대한 인간의 탐욕이 인간해방의 장애물이었기에 삼독(三毒)을 지멸하는 수행과 정진을 통하여 이 이상에 도달하려 하였다. 마르크스에게는 노동을 소외시키는 자본주의적 생산관계가 장애물이었기에 계급투쟁을 통하여 이에 이르려 하였다. 붓다에게는 사성제(四聖諦)와 연기를 깨닫고 지극한 수행과 정진을 통하여 깨달음과 열반에 이르는 인간이 가장 이상적인 인간이었다. 맑스에게는 끊임없이 소외를 극복하고자 세계의 모순에 저항하여 타자를 자유롭게 하여 자신의 자유를 완성하면서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으로서 꼬뮨을 건설하는 자가 이상적인 인간이었다.

    맑시즘을 비롯한 서양 이론은 실체론과 이분법, 동일성에서 벗어나지 못했기에 연기론과 대대(待對)의 논리, 차이의 사유를 하는 원효를 통해 새로운 패러다임의 그릇에 담길 수 있다. 초역사적이고 관념론에 치우쳤으며 과학성과 합리성을 결여한 불교는 맑스를 통해 중생이 발을 디디고 있는 현실을 구체적으로 직시하면서 역사성과 사회성을 결합하고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분석틀과 방법론을 빌리면서 유심론에 유물론적인 인식을 끌어안을 수 있다.

    그리하여, 불교가 개인의 깨달음에 머물 때, 맑시즘은 그를 암자에서 사회로 끌어내리며 세계 자체를 전복하고 모두가 해방되는 방안을 제시할 것이다. 맑시즘이 자본과 노동의 대립과 모순에 대해 첨예하게 분석하면, 불교는 양자를 하나로 아우르는 길을 펼칠 것이다. 맑시즘이 현대사회와 자본주의 체제의 모순을 분석하는 과학이 되면, 불교는 그 너머를 사유하는 지평을 열 것이다. 맑시즘이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을 대안으로 제시한다면, 불교는 그 비전을 향하여 깨달음과 보살행의 사다리를 놓을 것이다. 사다리를 타고 올라 별이 될 것이며, 그 빛이 어두운 세상을 환하게 비추어 새로운 세상으로 개벽하는 순간, 깨달음이 곧 집착이라며 맑스도 죽이고 부처도 죽일 것이다.(계속)

    필자소개
    한양대 교수. 민교협 전 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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