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립-위기탈출 노동운동 새지평 열기
        2006년 08월 29일 09:02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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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의 한 제조업체 A사 노동조합. 연초가 되면 대의원대회를 열어 사업계획과 예산안을 통과시키고 임금단체협상 요구안을 만들어 사측과 교섭에 들어간다. 대의원과 조합원을 상대로 교육을 진행하고 교섭이 난항을 겪으면 파업찬반투표를 벌인다.

    상급단체에서 정한 총파업 또는 총력투쟁 일정에 적당히 맞춰서 파업을 벌이고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일정한 임금인상을 쟁취한 다음 파업을 접는다. 일상시기에는 조합원 체육대회랑 산행을 적절한 시기에 배치하고 총연맹 차원의 법·제도 개선 투쟁이 벌어지면 지침에 따라 조합원을 동원해 전세버스를 타고 서울로 올라간다.

    A노동조합의 활동공간은 기업의 울타리 안이 대부분이고 어쩌다가 일년에 한두번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이 될 뿐이다. ○○시에 위치해 있지만 ○○시와 관련한 노조의 활동은 존재하지 않는다.

    혁신도시다, 그린벨트 해제다 해서 집값이 오른다는 소식은 뒤풀이 자리에서나 나오는 얘기고 제조업체의 해외 이전으로 지역의 실업률이 높아졌다는 뉴스나, 버스요금이 오른다는 소식은 관심 밖이다. 근방의 어린이집과 학교에서 급식사고가 나도, 골프장이 들어선다고 해도 혀를 끌끌 찰 뿐이다.

    생각해보면 ○○시의 도시계획, 산업정책, 교통정책, 보육정책, 환경정책 등이 A사 노동자들의 삶에 미치는 영향이 크지만 이런 의제들은 A노조의 사업영역 밖에 있다.

    A노조 간부들에게 고민이 없는 건 아니다. A노조는 얼마 전 산별전환 투표가 가결돼 곧 산별노조로 조직전환을 해야 한다. 산별노조는 ‘지역’을 근간으로 해야 한다는데 생소하기만 한 지역에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 아직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다. 다음 지방선거에서 시의원 후보를 내기로 했는데 지역을 아는 사람이 없어 걱정이다.

    『지역사회와 노동운동의 개입전략』(한국노동사회연구소 펴냄)은 이처럼 지역과 유리된 채 노동운동을 해온 A노조 간부들이 읽어봐야 할 필독서다. 이 책은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재단의 후원으로 김현우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연구위원, 이상훈 민주노동당 정책연구원, 장원봉 민주노총 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이 함께 진행한 연구성과를 모은 것이다.

    지역과 괴리된 노동운동, 고립 자초

       
     

    기업별 노조체계 안에 있는 한국의 노동조합은 그동안 지역에 관심을 둬야 할 이유가 없었다. 회사의 울타리 안에서 기업의 순이익 배분에만 신경 쓰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아이엠에프 경제위기 이후에는 노조 구성원들의 보호에 더욱 몰두할 수밖에 없어 지역에 관심을 둘 여력도 없었다.

    결국 노조가 발 딛고 있는 ‘지역’은 노동자 또는 노동조합의 ‘외부’에 있거나 기껏해야 ‘부차’적인 영역에 머물렀고 이는 노조와 지역사회의 심각한 괴리를 가져왔다. 지역주민들에게 노조는 “자기 조직원의 당면한 이익만을 고집하는 이기주의 세력”으로 비춰질 뿐이다.

    여론악화에 위기감을 느낀 노조 간부들은 임금과 노동조건의 악화를 감수하고 해고만 회피하려는 ‘차악의 선택’(양보교섭)을 해야만 했고 양보교섭은 거꾸로 소속 노조원들의 노동조합에 대한 기대와 신뢰, 그리고 충성도를 약화해 ‘내 살길 내가 알아서 찾는’ 실리주의를 부추기고 있다.

    노조의 현장 장악력은 약화되고 사용자의 노무관리가 그 틈을 차지하고 있다. 기업별 노조의 위기가 이처럼 심화되면서 ‘지역’ 의제는 더욱 더 끼어들 여지가 없어졌다.

    하지만 산별노조는 노조의 주요 의제가 기업의 순이익 배분의 차원을 넘어설 수 있는 새로운 조건을 만들고 있다.

    산별전환이 기업별 체계를 유지한 채 이름만 ‘산별연맹’에서 ‘산별노조’로, 단위 노동조합의 명칭만 ‘지부’나 ‘지회’로 바꾸는 차원이 아니라면 산별노조 건설의 핵심은 지역적 의제를 반영할 수 있는 지역적 노동운동을 실천할 수 있는 조직구조를 건설하는 것이다.

    이 책은 ‘지역사회’의 개념과 노동자와 노동운동 조직이 지역사회를 중요하게 바라봐야 하는 이유를 짚어본다. 또 영국과 한국의 경험을 통해 지역사회와 노동운동이 결합해온 역사를 살펴보고 공공부문, 보건의료노조, 공무원노조, 민주노총 서울본부, 경기도노조 등의 지역사회 전략 사례를 소개한다.

    지역사회와 노동운동 전략에 대한 노동조합 일선 활동가들의 의식을 파악하기 위해 실시한 설문 조사 결과는 “필요성은 공감하지만 개입 경험은 거의 없는” 지금의 현실을 보여주고 있다.

    ‘노동시장 정책’과 ‘노동력 재생산 영역’에 대한 개입 제시

    이 책이 제시하는 지역사회 개입전략은 ‘지역 노동시장 정책에 대한 개입’과 ‘사회공공성을 중심으로 한 노동력 재생산 영역에 대한 개입’이다.

    지역 노동시장 정책과 관련, 산별노조는 ‘지역고용위원회’ 등의 협의틀을 통해 신규 일자리를 창출하고, 노조는 새롭게 창출된 일자리가 저임금이 되지 않게 할 수 있는 방안에 대해 특히 고려하는 방안을 고민할 수 있다.

    지역 내 여성과 장애인 등 취업이 취약한 계층에 대한 일자리 창출사업인 자활사업에 개입하거나 고용지원센터에서 이뤄지는 고용안정서비스에 대한 노동조합의 개입력을 높일 수도 있다.

    최근 이슈화되고 있는 원-하청 하도급 문제와 관련해서도 지역 차원에서 공공부문의 민간위탁 및 외부계약 업체에 대한 일종의 계약준수 프로그램을 실시하도록 압력을 넣을 수도 있다. 또한 지역 최저임금 조례 제정운동을 벌이거나 지역단위로 직업훈련 컨소시엄을 구성해 여기에 지역 내 노동조합이 참여하는 방식도 있다.

    노동운동의 지역사회 개입은 노동시장 영역뿐 아니라 노동력 재생산 영역으로도 확장시킬 수 있다. 이 책은 ‘사회공공성’을 중심으로 작업장 안에서 제기될 수 있는 의제를 확장시키는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예를 들어 작업장 환경을 개선하듯이 지역의 환경개선을 위해 지역사회의 파트너를 설정해 공동의 대응을 모색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보육시설 확충, 의료 공공성 확대 등이 노동조합의 의제가 될 수 있다.

    환경, 교육, 보육, 의료, 주거, 교통 등 지역사회 다양한 의제에 노동운동이 개입하는 과정에서 노조는 미조직 중소영세사업장 노동자를 조직화하는 것은 물론, 지역 내 중간계급의 지지를 확보해 낼 수도 있다.

    지은이들은 “이제는 단지 노동조합이 지역사회에 봉사한다는 관점을 뛰어넘어 지역사회 기획의 참여와 민주주의 심화·확대라는 관점에서 접근해야 할 시점”이라며 “아울러 ‘지역사회와 결합하는 노동운동’이라는 화두를 통해 조직되지 않은 미조직 노동자들과 함께 하는 노동운동의 모델을 정립해 갈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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