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울산, 변방의 읍성에서
    한국의 대표 산업도시로 변하다
    [근현대 동아시아 도시] 남한 최초로 공업특구 지정
        2020년 01월 10일 10:44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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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0년 말 현재 울산의 인구는 68만 2978명인데 이중 ‘땀이 배고 기름이 묻은 작업복을 입은’ 현대계열사 근로자가 7만 5370명이다. 직계가족 및 부양가족을 합치면 30여만 명이 現代家族이다. 여기에 각종 협력‧납품‧하청 등의 400여 업체를 포함하면 울산 인구의 절반 이상이 現代家族인 셈이다. 한편 울산에 있는 13개 현대계열사들은 1990년대 8조 890억 원의 생산실적을 기록했다. 이는 울산시의 1990년도 전체 공업생산액의 65.9%에 해당한다. 이상과 같은 단면들은 울산이 現代에 의해 現代化된 ‘現代市’임을 입증한다.(현대중공업주식회사, 《현대중공업사》, 1992, 1388쪽(유형근, <20세기 울산의 형성과 역사적 변천>, 《사회와 역사》 95에서 재인용))

    위의 인용문은 현대중공업에서 회사의 역사를 정리한 책에 실린 내용의 일부이다. 울산은 2019년 말 현재 전국에서 3번째로 수출을 많이 하고 있는 대표적인 산업도시이다. 그리고 위의 글에서 밝힌 것처럼 울산시에는 현대자동차, 현대중공업, 현대제철 등 굵직굵직한 현대계열사들이 포진해있다. 물론 울산에는 롯데, SK 등 현대 이외의 대기업들도 자리하고 있지만, 현대그룹에서 자부심을 갖고서‘현대시’라고 표현할 만큼 2020년 현재에도 울산시에 대한 현대의 영향력은 엄청나다.

    현대중공업 등이 자리한 울산 동구(출처 : 울산광역시,《울산을 한권에 담다》, 2017)

    다만, 울산시가 현대그룹에 의해서 ‘현대화’된 도시라고 칭하기에는 다소 부적절한 감이 있다. 왜냐하면 현대그룹의 계열사들이 자리 잡기 훨씬 이전부터 울산시는 정부의 경제개발계획에 따라 의도적으로 조성된 산업도시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더 나아가 정부가 울산을 남한 최초의 공업특구로 선정하게 된 데에는 공교롭게도 식민지시기 한반도를 아시아‧태평양 전쟁의 수행을 위한 대륙병참기지로 만들겠다는 일본제국주의의 계획과 연결된다. 그렇다면 산업도시 울산은 어떻게 형성되고 변해 왔을까?

    울산읍성, 울산의 옛 도심

    울산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구석기시대 후기부터로, 서기전 9세기 무렵에는 포항 남부에서부터 경주, 양산 등과 연결된 문화권을 형성했다. 또한 동해와 접하고 있어 고대부터 한반도 바깥의 세계와 접촉하는 통로이기도 했다. 이러한 지리적 조건 때문에 울산은 일찍부터 일본과 연결하는 국제적인 항구이자 군사적 요충지로서 각광받았다. 지금도 울산에는 신라의 수도인 경주를 방어하기 위한 관문성을 비롯하여, 조선시대 경상좌도 병영이 있던 병영성, 언양읍성 등 여러 성의 흔적이 남아 있다.

    ‘울산’이라는 이름은 조선 태종 때인 1413년에 생겼다. 그 이전에는 ‘울주’라고 했으며, 고려시대 울주의 중심지는 현재의 울산 중구 반구동과 학성동 일대였다. ‘학성’이란 명칭은 고려 성종이 내린 별호로, 지금도 법정동이자 공원, 학교 등의 명칭으로 남아 있다. 게다가 고려 말기와 조선 전기에 만들어진 성터가 이곳에 남아 있다.

    울산의 옛 도심이라고 할 수 있는 곳은 학성동에서 좀 더 서쪽으로 옮겨간 곳으로 현재의 중구 북정동과 교동, 옥교동, 성남동 일대이다. 이 지역에는 조선시대의 동헌과 향교 등이 자리했으며, 일제강점 후에는 울산군청 등 각종 행정관청들이 새롭게 들어서기도 했다.

    울산 읍치를 옮기게 된 계기는 1415년에 있었던 울산진 설치이다. 당시 울산진 병마사 겸 지울산 군사로 부임한 전시귀가 새로운 성을 쌓았고, 축성이 완료될 무렵 경상좌도 도절제사의 군영 즉 경상좌병영이 울산에 설치되었다. 이에 새로운 성을 병영성으로 쓰게 되었는데, 울산의 군민들은 수령과 이속들이 장군에게 매일 문안을 올려야 하고 찾아오는 손님을 접대하기 위해 할 일을 못한다는 이유로 옛 성에 머무르면서 옛 읍성과 새 병영성이 공존하였다. 그러다가 성종 7년인 1476년에 새로운 읍성을 쌓기 시작하여 약 17개월 만에 완공하였다. 이것이 오늘날 울산 옛 도심에 자리했던 것으로 알려진 울산읍성이다.

    1916년 울산왜성의 모습(출처 : 울산광역시,《울산을 한권에 담다》, 2017)

    그런데 조선 성종 때에 새로 지어진 울산읍성은 약 120년 만에 허물어지고 말았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을 침공했던 일본군들이 방어용 성을 쌓기 위해 읍성을 허물어버린 것이다. 성을 헐도록 명한 장수는 우리에게도 익히 잘 알려진 가토 기요마사(加籐淸正)로, 그는 임진왜란 당시 울산시 아래쪽에 위치한 서생포에 성을 쌓고 주둔했다가 철수했다. 이후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가토 기요마사는 다시 서생포로 돌아와 주둔하면서, 서생포에 세운 성을 방어할 목적으로 울산읍성의 돌을 재활용하여 오늘날 울산 학성공원 자리에 성을 쌓았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객사와 동헌 등 관아는 복원되었지만, 울산읍성은 끝내 다시 쌓지 못하고 그 흔적도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울산읍성 유구 발굴 모습(출처 : 경상일보)

    현재 울산시에서는 원도심의 경제를 활성화시키기 위한 의도에서 여러 가지 사업을 벌이고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옛 읍성의 흔적을 살려내는 것이다. 이미 1981년에 식민지시기 일제에 의해 군청으로 사용되면서 많이 훼손되었던 울산 동헌을 중건했으며, 최근에는 울산객사 터에 시립미술관을 지으면서 유구를 보존‧활용하려는 작업이 진행 중이다. 최근에는 울산 원도심에 공원을 조성하는 과정에서 읍성 유구가 발견되기도 하였다. 또한 울산시에서는 2010년 울산읍성길 복원사업을 시작하여 옛 울산읍성이 있던 자리를 고증하고 울산읍성 둘레길을 조성하였다. 현재 울산읍성 둘레길은 각 성문터, 우물터, 성벽 모양의 담장 등 여러 가지 시설물을 설치하여 옛 성곽의 흔적을 느낄 수 있도록 조성되어 있다.

    왼쪽 울산읍성 둘레길 지도 오른쪽은 새롭게 단장한 ‘울산읍성길’의 모습 (출처 : 서준석)

    울산 원도심의 변화

    울산읍성이 자리했던 원도심의 생활권은 비록 임진왜란으로 성이 허물어졌다고 하나, 성이 있던 자리를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1876년 개항이 이루어지고 뒤이어 일본의 식민지배 하에 철도가 놓이고, 항구가 개발되면서 울산 주민들의 생활영역도 점차 넓어지기 시작했다.

    일본인들의 울산 이주는 1890년대 말 일본 오카야마(岡山)현 주민들이 삼치 조업을 위해 방어진으로 이주해오면서 시작되었다. 이후 1909년부터 방어진을 중심으로 본격화되었다. 그 덕분에 방어진에는 1910년에 치안을 담당할 주재소를 비롯하여 학교와 우편사무소가 개설되었고, 1923년 울산 지역 최초 전등 설치, 1928년 항만과 방파제 준공 등 신도시가 건설되었다. 그 덕분에 1890년대 말 인구 160명에 불과했던 방어진은 20여 년 만에 인구가 5000여 명에 이를 정도로 급속히 성장했다. 그러나 1930년대 말 일제가 전쟁을 치르기 위하여 방어진을 군수공장지대로 바꾸면서 점차 쇠퇴하고 말았다.

    한편 울산읍성이 있던 원도심 지역은 1912년까지만 하더라도 논밭의 비율이 약 80%에 달했고, 원형에 가까운 기존 읍성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 당시 주요 상업 활동은 객사 앞에서 태화강변까지 남북으로 이어지는 도로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울산 원도심 지역의 변화가 눈에 띄기 시작한 것은 1915년부터였다. 이때 처음으로 울산 원도심의 내부와 외부를 연결하는 도로가 신설되는데, 기존보다 노폭이 넓은 직선형 도로였다. 이 도로는 새로 자리한 울산군청 앞에서 태화강변까지 남북을 잇는 도로(현재의 새즈믄해거리)로, 기존의 도로(현재의 문화의 거리 및 시계탑 사거리)의 서편에 나란하게 놓여 울산지역 관청가의 새로운 대로를 형성하였다. 이와 함께 1916년 2월부터 조선중앙철도주식회사에서 경주와 울산을 잇는 철도(경동선) 공사에 착수하여 1921년에는 궤도 간격이 좁은 협궤철도인 울산-불국사 구간이 개통된다. 이 당시의 울산역은 울산군청에서 태화강변으로 이어지는 도로의 끝 지점(현재의 성남119안전센터 주변)에 세워졌다. 이때 개통된 철도는 학산동과 학성동을 거쳐 불국사로 연결되었다.

    울산 원도심의 시계탑 사거리 (출처 : 서준석)

    일제강점기 울산 원도심의 변화에서 특기할만한 것은 울산 원도심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식민지시기의 개발은 경성에서 이루어진 것과 달리 도시계획 관련 법령의 적용을 받지 않았다는 점이다. 즉, 울산 지역은 계획적, 체계적인 개발이 아니라 매우 점진적이고, 개별적인 개발행위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특히 개발을 주도한 일본인들의 의도에 크게 좌우될 수밖에 없었다.

    울산 원도심의 변화는 1920~1940년대 사이에 집중되었다. 우선 1921년 경동선 개통을 시작으로, 1935년에는 국유광궤철도인 동해남부선이 개통되었다. 부산과 울산을 연결하는 동해남부선은 광궤철도이기 때문에 기존의 협궤철도인 성남동 울산역으로 운행을 할 수 없었다. 이에 기존 시가지로부터 좀 멀리 벗어난 학성동으로 역을 이전하였다. 이후 동해남부선은 1941년 완공된 중앙선과 연결됨으로써 부산에서부터 청량리까지 갈 수 있게 되었다. 학성동에 있던 울산역은 1992년 8월 철도이설사업이 준공되면서 현재의 위치로 옮겼고, 2010년에는 언양 방면으로 KTX울산역이 개통되면서 역 이름도 태화강역으로 바뀌었다.

    울산 원도심의 도로망 변화(1912~1935) (출처 : 정현준‧한삼건,〈울산 구도심의 도시변화 과정에 관한 연구-일제강점기 울산읍의 도시기반시설 건설을 중심으로〉,《대한건축학회논문집(계획계)》23권 8호, 2007, 414~415쪽 그림 재인용)

    특히 이 시기의 변화는 조선인들의 주된 생활권이었던 읍성 주변에서 벗어나 읍성의 동남쪽 방면에서 적극적으로 전개되었다. 1925년에는 울산 원도심의 동서를 가로지르는 구국도 7호선(현재의 중앙길)이 신설되었는데, 이로 인해 울산 동헌에서 태화강쪽으로 이어지는 일자형 도로망이 격자형 구조로 변화하게 되었다. 1930년에는 성남동, 옥교동, 학성동에 걸쳐 태화강 주변에 제방이 건설되었고, 제방부지의 소유권은 1930~1936년 사이에 일본인들이 경영하는 울산수리조합으로 넘어갔다. 또한 1940년에는 기존 시가지에서 울산역으로의 이동상 편의를 높이기 위하여 현재의 학성로가 건설되었다.

    한편 1928년에는 태화강 남단의 삼산평야에 간이 비행장이 건설된다. 이듬해에는 일본에서 울산을 거쳐 경성과 대련을 연결하는 노선이 운항을 시작했으며, 1931년에는 일본항공주식회사 울산영업소가 개설되어 울산-후코오카 간 정기항공노선을 비롯하여 오사카, 도쿄, 대구 등지로 비정기 노선이 열리기도 했다. 1937년 대구에 14만여 평 규모의 대규모 비행장이 건설되고, 1941년 일제가 전쟁을 일으키면서 울산 비행장은 군사훈련용 비행장으로 바뀌었다. 한국전쟁 때에도 미군의 비상용 활주로로 쓰였으며, 전후에는 국방부에서 유사시를 대비해 활주로의 일부를 보존했으나 울산의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모든 부지가 민간에 불하되어 시가지로 변모하였다.

    일제의 대륙병참기지화 정책과 원산 정유공장 이전

    1930년대 말에 접어들면서 울산은 다시금 새로운 전환기를 맞게 된다. 이 무렵 일제는 조선을 대륙침략을 위한 병참기지로 만들기 위해 군수산업을 중심으로 적극적인 공업화를 추진했는데, 울산 또한 일제의 정책을 수행하기 위한 주요 대상지였다.

    울산에서의 공업화를 주도적으로 추진한 것은 ‘조선의 매축왕’이라고 불렸던 일본 구마모토현 출신의 개발업자 이케다 스케타다(池田佐忠)였다. 직업군인인 이케다는 1912년부터 대구 헌병대에서 근무하다가 1916년 문경에서 제대한 뒤, 문경을 거점으로 사업가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이케다는 동양척식주식회사의 실력자인 카와카미 츠네오(川上常郞)과 형성한 돈독한 관계를 바탕으로 초기 농사, 개간, 식림 등의 농림관계 사업을 벌이며 자본을 만든 후, 1920년대 중반부터 바닷가나 강가를 매립하는 매축업으로 사업방향을 전환하였다. 특히 부산 남항 매축사업은 이케다가 조선을 대표하는 매축업자로 자리매김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사업을 계기로 이케다는 1930년대에 부산, 통영, 목포, 인천 등 전국 각지에서 대규모 매축사업을 벌였는데, 그중에 하나가 바로 울산만 매축사업이었다. 이케다가 계획한 울산만 매축사업은 단순한 매립이 아니었다. 그것은 일제의 대륙병참기지화 정책에 발맞추어 울산을 군수물자를 생산하는 신흥 공업도시로 건설하려는 것이었다.

    울산을 공업도시로 만들려는 계획은 이케다 스케타다가 1937년 공장부지 조성을 위해 조선총독부에 대현면 개펄 108만여 평에 대한 매립허가원을 제출하면서 시작되었다. 이 계획은 일부 수정 절차를 거쳐 1942년에 최종으로 사업인가가 내려졌다. 한편 이케다는 매립사업에 대한 허가절차가 진행 중이던 1939년 울산항과 일본 야마구치현의 유야항(油谷港)을 연결하여 제2관부연락선을 운영하려는 계획(유울연락기지계획)을 수립하고, 1940년에는 인구 50만의 공업도시계획을 수립하겠다는 울산도시계획 특허를 신청하였다. 특히 울산도시계획은 울산읍, 방어진읍, 하상면, 대현면 내의 1883만 3800평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

    1943년 울산도시계획평면도 (출처 : 울산광역시, 《울산을 한권에 담다》, 2017)

    이케다는 울산에 공업도시를 건설하기에 좋은 입지조건을 교통, 지형, 기후, 공업용수, 동력, 원료수급, 공업유형, 노동력 등 8가지 분야에 걸쳐 설명하였다. 그에 따르면 울산은 난류의 영향으로 날씨가 따뜻해서 항만이 얼거나 유빙이 흐를 위험이 없고, 수심도 깊고 바람이 적어 파도가 잔잔하기 때문에 항해에도 안전하고 사계절 내내 어떤 선박이라도 안전하게 입항할 수 있는 항구를 건설하기에 적합한 지역이었다. 또한 연안에서 공사용 자재가 산출되고 있어 임해 매립지 조성에 용이하고 적은 예산으로 공장용지를 획득할 수 있으며, 그 배후에 아직 개발되지 않은 광활한 평탄지 수천만 평이 있어 공업지, 상업지, 주택지 등을 합리적으로 개발할 수 있다고 분석하였다. 게다가 태화강을 이용해서 충분한 공업용수를 구할 수 있는 이점도 있었다.

    이케다는 이러한 분석을 바탕으로 울산에 적합한 공업 분야를 제시했는데, 자동차공장, 제철공장, 비행기제작소, 조선공업, 기계공업, 유지공업, 비료공장, 제염공업, 요업, 섬유공업, 수산물가공업, 가스공업, 항만창고업 등 약 15개 분야였다. 그리고 오늘날 울산에 입주한 기업체들의 업종을 살펴보면 위에 제시된 분야 중 상당수가 입주해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울산 개발은 1943년 5월 기공식이 거행되면서 본격화되었다. 울산 개발을 주도한 것은 이케다가 대표로 있는 조선축항주식회사를 비롯하여 동양척식주식회사, 조선석유주식회사 등이었다. 이 시기의 개발 사업은 1945년 일제의 패망으로 완료되지 못했지만, 이때 대현동 일대 약 120만 평의 해안 매립이 진행되었고, 또한 여천동, 고사동, 매암동 일대 100만여 평에 대한 부지매입이 이루어졌다. 1944년에는 주요공장 분산이라는 명목으로 원산에 있던 정유공장 일부를 울산으로 이전하는 사업이 추진되었는데, 이 사업 역시 제2차 세계대전이 종결되면서 70% 정도 진행된 단계에서 중단되었다. 그러나 이때 조성된 공장 부지와 정유공장 및 기반시설은 1960년대에 정부가 울산을 공업특구로 지정하고 국가산업단지를 건설하는 바탕이 되었다.

    박정희 정부의 국가산업단지 건설과 산업도시로의 변모

    1945년 8월 일제가 패망하면서 이케다 스케타다 등이 추진했던 울산 개발도 중단되었다. 그때까지 진행되었던 해안 매립이나 부지 매입 등을 통해 마련된 대지를 비롯하여 원산에서 옮겨온 정유공장 등도 모두 국유화되었다. 이후 울산 지역을 개발하려는 시도는 꾸준히 있어왔지만, 본격적으로 개발이 시작된 것은 1962년 제1차 경제개발계획을 위하여 정부가 울산을 특정공업지구로 지정하면서부터였다. 박정희 정권이 추진한 울산 공업화는 남한의 산업구조 개편과 경제발전이라는 경제적 차원에서 시작했지만, 단순히 생산 공장을 유치하는 수준을 넘어 새로운 전망을 담은 산업도시를 건설하고자 했다.

    1962년 1월 27일 정부는 각령 제403호를 통해 울산을 특정공업지구로 지정‧공포하였다. 이 조치는 박정희 정권이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발표한 지 불과 2주 만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이처럼 중대한 결정을 신속하게 내릴 수 있었던 배경에는 역시 식민지시기에 이미 확보되어 있던 대규모 토지와 상당한 정도로 이전작업이 이루어진 정유공장부지 등이 있었다. 또한 이케다가 수립했던 울산도시계획도 공업특구로 울산을 지정하는 데 많은 참고가 되었을 것이다.

    특히 1961년 5‧16군사쿠데타 이후 부정축재자로 지목된 재계 인사들이 1962년 1월 박정희와 가진 부산회동이 울산을 공업특구로 지정하게 되는데 큰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당시 재계 인사들은 자신들의 부정축재 혐의를 처리하기 위하여 공장을 건설하고 주식으로 정부에 헌납하겠다는 제안을 하면서 공장건설 후보지로 울산을 추천한 것으로 알려졌다.

    박정희 정권은 울산지역에 정유, 비료, 제철 등 기간산업을 한꺼번에 유치하는 한편, 50만 문화도시를 건설하겠다는 당시로서는 매우 과감한 계획을 발표하였다. 이어 1962년 3월에는 울산 공업지구의 조성을 추진할 기구로서 울산특별건설국을 설치한다. 울산특별건설국은 도시건설과 공장부지, 항만개발을 기획하고 추진했다. 그러나 사업계획 발표 이후 부동산 투기붐이 일고, 토지소유주들과 갈등을 겪는 등 사업추진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결국 사업의 효율적 시행을 위하여 울산시, 울산특별건설국, 경상남도로 사업 주체가 분화되었다. 그에 따라 공장부지 조성은 경상남도가, 항만과 가로망 조성은 울산특별건설국이, 공업단지 배후의 도시건설은 울산시가 맡는 것으로 업무도 조정되었다.

    한편 1962년 5월 14일 정부는 국토건설청 고시 제149호로 울산 도시계획을 발표한다. 도시계획구역은 울산시 전역과 대현면 상남동, 용암동, 농소면 송내동, 화봉동, 화산동, 화동동 일대의 약 5325만 평으로, 울산항 인근 해안에 계획면적의 15%에 해당하는 규모의 공업지역을 조성하고 신정동과 야음동 일대에 신시가지를 만들겠다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1962년의 계획은 정부의 포부와 달리 종합적인 도시계획이 아닌 공업위주의 계획으로 평가되었다. 주거지역은 주민들의 생활환경을 고려하지 않은 채, 공장 및 철도와 인접해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주택 공급에서도 문제가 있어 1969년 울산종합개발 재정비를 위한 관계관 회의에 참석한 박정희 대통령이 울산에 아파트를 많이 세우고 계획적으로 도시를 건설하라는 지시를 내리기도 하였다.

    울산에 형성된 산업단지의 모습 (출처 : 울산광역시, 《울산을 한권에 담다》, 2017)

    재원이 부족했던 박정희 정권은 미국, 서독, 일본 등으로부터 투자를 유치하여 울산공업단지 건설에 들어갔다. 1963년에는 식민지 시기 중단되었던 정유공장을 완공하였는데, 정유공장은 울산공업단지의 핵심시설로 연관 산업과 공장의 건설을 촉진시켰다. 또한 정유공장 건설 이후 도로, 철도, 항만 등 도시기반시설도 정비되었다. 이렇게 조성된 공업단지에는 화력발전소를 비롯하여, 비료, 화학공장들이 들어섰다.

    울산에 기업들이 본격적으로 울산에 진출하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 말부터였다. 앞서 살핀 것처럼 1963년 울산정유공장이 준공되었고, 뒤이어 울산석유화학공업단지 건설계획이 수립되어 1968년 울산에서 합동기공식을 가진 뒤 1970년 4월부터 본격적으로 공장건설이 이루어져 현재 SK그룹 계열의 석유화학기업들이 입주해있다.

    한편 1967년 현대자동차가 설립되고 그 이듬해 현대자동차 울산공장이 울산 북구에 건설된 것을 시작으로, 1988년과 1990년에 각각 제2공장과 제3공장을 설립되면서 울산은 단일공장으로서는 연간 100만 대를 생산할 수 있는 세계 최대 자동차공장을 갖추게 되었다. 또한 1972년에는 현대중공업 울산조선소가 건설되었고, 1974년에 동해조선, 1975년 현대미포조선이 설립되었다. 이로써 울산 공업단지는 가히 한국의 대표적 산업도시로 변모하게 되었다.

    울산 구도심과 신도심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울산 시가지는 울산 읍성이 있었던 중구로부터 시작하여 일제강점기를 거쳐 현재에 이르는 동안 꾸준히 확장되었다. 그중 1920~1940년대와 1960~1970년대의 두 시기는 울산의 도심부 형성과정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시기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1920~1940년대는 곧 식민지시기로, 일본인들의 주도하에 조선인들의 생활 권역이었던 읍성의 범위를 넘어서 현재의 울산 원도심을 형성하였다. 나아가 해안지역에 원산에 있던 정유공장을 옮겨올 준비가 이루어져 해방 이후 들어서게 될 국가공업단지의 바탕을 만든 시기이기도 하다.

    다음으로 1960~1970년대에는 박정희 정권에서 추진한 경제개발계획에 따라 울산시가 남한 최초로 공업특구로 지정되면서 본격적으로 공업도시로 변모해갔던 때이다. 당시 정부는 일제강점기 조성되다가 중단된 울산항 항만지역에 국가산업단지를 건설하고, 그 배후지인 울산 남구지역에 새로운 시가지를 건설해 나갔다. 울산의 원도심과 신도심은 주로 태화강을 경계로 양분되었으며, 산업단지와의 직접적 연계를 갖지 못한 원도심은 정체된 반면, 신도심은 매우 빠르게 발전해 갔다.

    2019년 연말에 잠시 울산을 찾아보았다. 약 10여 년 전 울산 동구에 살고 있는 친구와 만나 보았던 산업단지의 장대한 광경과 달리 이번에는 원도심의 풍경을 보기 위해 시내로 갔던 바, 그곳에서는 공장의 우렁찬 소음이 아닌 여느 도시에서 볼 수 있는 풍경들이 펼쳐져 있었다. 그러나 최근 세계 경제의 침체와 이른바 4차 산업의 등장 등으로 석유화학 중심 제조업의 전망은 밝지 않다. 왠지 모르게 울산시의 풍경에도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운 것만 같았다. 어느덧 산업도시 울산이 건설된 지도 반세기를 넘었다. 과연 울산은 어떤 비전으로 새로운 공간을 만들어 나갈지 두려움과 기대를 안고 돌아오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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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업에 뒤숭숭한‘현대시’울산…“죽은 도시 됐다.”〉《뉴스토마토》2018년 7월 22일.
    〈건물터 아래 422년간 잠들었던‘울산읍성’비밀의 문 열렸다〉《경상일보》2020년 1월 2일.

    필자소개
    서울역사편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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