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봄비처럼 고요하게
    너에게 가고 싶은 내 마음
    [풀소리 한시산책] 백광훈 '벗에게'
        2020년 01월 09일 01:30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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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굴

     – 박인희

    우리 모두
    잊혀진 얼굴들처럼 모르고 살아가는
    남이 되기 싫은 까닭이다

    기를 꽂고 산들 무얼하나
    꽃이 내가 아니듯
    내가 꽃이 될 수 없는 지금
    물빛 몸매를 감은
    한 마리 외로운 학으로 산들
    무얼하나

    사랑하기 이전부터
    기다림을 배워버린 습성으로 인해
    온 밤내 비가 내리고
    이젠 내 얼굴에도 강물이 흐른다
    가슴에 돌단을 쌓고
    손 흔들던 기억보다 간절한 것은
    보고 싶다는 단 한 마디

    먼지 나는 골목을 돌아서다가
    언뜻 만나서
    스쳐간 바람처럼 쉽게 헤어져버린
    얼굴이 아닌 다음에야
    신기루의 이야기도 아니고
    하늘을 돌아 떨어진
    별의 이야기도 아니고
    우리 모두
    잊혀진 얼굴들처럼 모르고 살아가는
    남이 되기 싫은 까닭이다

    전설적인 옛 노래 「세월이 가면」, 「목마와 숙녀」를 불렀던 가수 박인희는 시인이기도 합니다. 기다림이 습성이 되었지만 보고 싶은 마음 때문에 얼굴엔 강물이 흐릅니다. 스쳐지나가는 바람도 아니고, 신기루도 아니고, 하늘에 떨어지는 별똥별도 아니라면, 잊힌 얼굴들처럼 남이 되기 싫습니다. 그의 시 「얼굴」은 그리움이 절절하게 배어 있습니다. 그의 기복 없는 저음으로 낭송할 때 더욱 더 절절하게 와 닿는 시입니다.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歲寒圖)」. 『논어(論語)』 「자한(子罕)」편에 ‘날씨가 추워져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늦게 시듦을 안다.(歲寒然後 知松栢之後凋也)’는 구절에서 따온 화제(畫題)다.

    오늘 소개하려고 하는 한시(漢詩)는 옥봉(玉峯) 백광훈(白光勳)의 「벗에게(寄友)」와 「고죽(孤竹)을 그리며(懷崔嘉運)」입니다. 둘 다 벗을 그리는 시입니다.

    사랑과 우정은 사람으로서 기댈 수 있는 최고의 것입니다. 그러나 허상을 상대에 대입시켜 무조건 쫒는 팬덤이 아니라면 우정은 하루아침에 돈독해지지 않습니다. 마음을 맞대고 살을 맞대는 건 우정과 사랑의 징표이지만, 그러다 보면 어찌 마찰과 아픔이 없겠습니까. 마찰의 아픔을 이겨내면서 조금씩 조금씩 믿음의 두께가 두꺼워진다면 「세한도(歲寒圖)」의 소나무와 잣나무처럼 추위가 몰아쳤을 때 조금이라도 늦게 시들지 않을까요?

    이제 백광훈의 시 「벗에게(寄友)」를 보겠습니다.

    벗에게(1)

    강물이 동쪽으로 흘러가네
    동으로 가면서 쉬지를 않아
    끊임없는 그대 그리는 마음
    밤낮없이 바닷가에 가있네

    寄友(기우)(1)

    江水東流去(강수동류거)
    東流無歇時(동류무헐시)
    綿綿憶君思(면면억군사)
    日夜海西涯(일야해서애)

    우리나라에는 동쪽으로 흐르는 강들은 길이가 짧습니다. 그러나 중국은 땅도 넓고, 동쪽으로 흐르는 강물은 아주 깁니다. 중국처럼 길게 흐르는 강물을 상상해보면서 이 시를 보면 좋겠습니다. 강물이 동쪽으로 흘러갑니다. 쉬지도 않고 애석하게 떠나가기만 합니다. 마치 멀리 떠나간 그대처럼요. 그대를 그리는 마음 끊이지 않기에, 내 마음은 강이 바다와 만나는 해안에 가 밤낮 그대 오기를 기다립니다.

    백광훈의 문집 『옥봉집(玉峯集)』과 「벗에게(寄友)」 부분

    「벗에게(寄友)」는 연작시(連作詩)입니다. 두 번째 시를 볼까요.

    벗에게(2)

    그대 떠나 어디로 갔는가
    가는 곳마다 청산이려니
    해질녘 강남 하늘 바라보니
    그립구나 제비는 돌아오는데

    寄友(기우)(2)

    客行知近遠(객행지근원)
    處處有靑山(처처유청산)
    日晩江南望(일만강남망)
    相思燕子還(상사연자환)

    벗이 유람을 떠났나봅니다. 유람 떠난 곳은 곳곳이 명소겠지요. 언제 돌아올지 기약도 없습니다. 오늘도 해 저물도록 목을 늘이고 벗이 떠난 강남 쪽을 바라봅니다. 제비는 벌써 오는데, 그리운 벗은 돌아오지 않습니다.

    어때요. 풍경이 그려지지요. 교훈적이고 이성적인 조선시대 일반 시와는 사뭇 다릅니다. 백광훈(白光勳, 1537년(중종 32)~1582년(선조 15))은 이성적이고 서술적인 송시(宋詩)를 버리고 인간의 자연스럽고 절실한 감정을 담은 당시풍(唐詩風)의 시를 추구했습니다. 당시풍의 시를 잘 썼기에 최경창(崔慶昌)·이달(李達)과 함께 이른바 ‘삼당시인(三唐詩人)’으로 불리던 분입니다. 그의 시에 대하여 허균(許筠)은 “백광훈의 시는 고담(枯淡)하다. 당시(唐詩)의 노선(路線)을 잃지 않았으니 참으로 천년의 드문 가락이다.(白詩枯淡。不失李唐跬逕。誠亦千年希調也 –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라고 극찬하였습니다. 내친 김에 한 수 더 볼까요. 같은 삼당시인인 고죽(孤竹) 최경창(崔慶昌)을 그리워하며 쓴 「고죽(孤竹)을 그리며(懷崔嘉運)」입니다.

    사랑이란 서로 마주보는 것이 아니라 같은 곳을 바라보는 거라고 하지요. 우정도 그런 것 같습니다.

    고죽(孤竹)을 그리며

    뜰은 고요한데 물은 공연히 흐르고
    수풀 우거지고 벌레소리만 어지러워
    오늘 밤 떠 있는 저 밝은 달
    한양성 그대에게도 비추겠지

    懷崔嘉運(회최가운)

    庭靜水空去(정정수공거)
    草深䖝亂鳴(초심충란명)
    今宵有明月(금소유명월)
    應照洛陽城(응조락양성)

    가운(嘉運)은 고죽(孤竹) 최경창(崔慶昌, 1539년(중종 34)∼1583년(선조 16))의 자(字)입니다. 이 시를 보면 함께 당시(唐詩) 운동을 했던 만큼 최경창과는 각별한 사이인 듯합니다. 벗이 없으니 뜰은 고요하고, 흐르는 시냇물도 흥을 돋아주지 못합니다. 우거진 수풀과 어지러이 우는 벌레소리는 마치 벗이 없는 쓸쓸한 내 마음과 같습니다. 밝게 떠오른 달이 내 마음을 실어 벗에게 전해 줄까요. 벗도 저 달을 보면서 나를 그리워할까요.

    벗과의 우정을 생각하면 나는 늘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의 편지 「경보에게(與敬甫)」가 떠오릅니다. 비록 시(詩)는 아니지만, 마치 시처럼 읽혀지는 글이기도 합니다. 안대회 선생이 해설을 첨부해 멋지게 해석하였습니다.

    “공교롭고도 오묘하지요. 이다지도 인연이 딱 들어맞다니! 누가 그런 기회를 만들었을까요? 그대가 나보다 먼저 태어나지 않고, 내가 그대보다 늦게 태어나지 않아 한세상을 살게 되었지요. 또 그대가 얼굴에 칼자국 내는 흉노족이 아니요, 내가 이마에 문신하는 남만 사람이 아니라 한나라에 같이 태어났지요. 그대가 남쪽에 살지 않고 내가 북쪽에 살지 않아 한마을에 같이 살고, 그대가 무인이 아니고 내가 농사꾼이 아니라 함께 선비가 되었지요. 이야말로 크나큰 인연이요 크나큰 만남입니다. 그렇다고 하여 상대의 비위를 맞추는 말을 구차하게 해야 하거나, 억지로 상대의 행동을 똑같이 따라해야 한다면, 차라리 천 년 전 옛사람을 친구로 삼든가 일백 세대 뒤에 태어날 사람과 마음이 통하기를 기다리는 편이 나을 것입니다.”(巧哉妙哉。此緣因湊合。孰執其機。君不先吾。吾不後子。並生一世。子不剺面。我不雕題。並生一國。子不居南。我不居北。幷家一里。子不業武。我不學圃。同爲斯文。此大因緣。大期會也。雖然。言若苟同。事若苟合。無寧尙友於千古。不惑於百世)

    – 안대회 『선비답게 산다는 것』 중(中)

    마치 연애편지 같지요. 이런 우정이 그의 글솜씨만큼이나 부럽습니다. 온갖 수식을 다 빼버리고 순수한 의미만 담은 글로 돌아가고자 했던 문체반정(文體反正)의 정조시대에 이와 같은 수려하고 감상적인 글을 썼으니 정조의 미움을 사기에 충분했을 겁니다. 그래도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고, 많은 선비들은 그를 추종했습니다.

    이해인(왼쪽에서 두 번째) 수녀와 박인희(오른쪽 끝) 시인의 중학교 시절 사진(2016. 04. 30. 월드투데이)

    글머리에 소개한 박인희는 시인으로도 유명한 이해인 수녀와 절친이기도 합니다. 둘은 중학교 동창으로 문학을 함께 하면서 꿈을 나누기도 했던 사이입니다. 한 명은 수녀가 되고, 또 한 명은 이민을 갔지만, 일흔 살이 넘은 지금까지 우정을 이어오고 있다고 합니다. 그들의 우정을 기리고, 많은 이들의 우정을 응원하면서 이해인의 시 「친구야 너는 아니」로 이번 한시산책을 마무리 하려고 합니다. 아파도, 눈물이 나도 한 송이 꽃을 피워보세요.

    친구야 너는 아니

    – 이해인

    친구야 너는 아니?
    꽃이 필 때
    꽃이 질 때
    사실은
    참 아픈 거래

    나무가 꽃을 피우고
    열매를 달아줄 때도
    사실은 참 아픈 거래

    사람들끼리
    사랑을 하고
    이별을 하는 것도
    참 아픈 거래

    우리 눈에
    다 보이진 않지만
    우리 귀에
    다 들리진 않지만
    이 세상엔 아픈 것들이 참 많다고

    아름답기 위해서는 눈물이 필요하다고
    엄마가 혼잣말처럼 하시던 이야기가
    자꾸 생각나는 날

    친구야
    봄비처럼 고요하게
    아파도 웃으면서
    너에게 가고 싶은 내 마음
    너는 아니?
    향기 속에 숨긴 나의 눈물이
    한 송이 꽃이 되는 것
    너는 아니?

    『기쁨이 열리는 창』 (마음산책)

    필자소개
    최경순
    민주노총 전국민주버스노동조합과 전국운수산업노동조합에서 일했고, 한국고전번역원에서 공부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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