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트맨…'공존의 실종 또는 재미의 상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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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년 08월 23일 06:15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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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카리스마란 무엇인가

    히어로는 우리를 가끔은 설레게도 하고, 또 그만큼의 오발탄도 있기에 종종 우리를 실망시키기도 한다. 오발탄과 직격탄을 한꺼번에 보기 위해선, 우리의 성장과 함께 자아를 자조의 공간으로 밀어 넣은, 온 국민의 캐릭터 바로 그 <우뢰매>의 에스퍼맨을 떠올리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실패한 영웅 ‘에스퍼맨’과 성공한 휴먼 ‘반칙왕’

       
     

    에스퍼맨은 변신 전에는 바보 같지만, 한 번 변신했다하면 레이저 슝슝! 하지만, 우린 에일리언과 프레데터를 대결시킬 수는 있어도, 에스퍼맨과 슈퍼맨 혹은 X맨을 대결시킬 수는 없다. 그것은 소나무 숲에서 와이어를 타고 다니는 것은 너나 나나 할 수 있는 것이지만, 빌딩을 다시 세우고 지구를 회전시키는 것은 너도 나도 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요는, 에스퍼맨이 적당한 카리스마가 아니라면, 그것은 진정한 카리스마에 의해서 상대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헐리우드 CG는 반론이 아니다. 바로 그것으로부터 이러한 상대화가 나오기 때문). 다른 카리스마에 의해서 상대화될 수 있음(바로 거기에 우리 우뢰매 세대의 자조적 공간이 파생될 텐데), 그것은 카리스마 실패의 증거인 것이다.

    우린 여기에 또 하나의 비교군을 덧붙여야 할 것이다: 그것은 <반칙왕> 같은 영화도 히어로물, 즉 카리스마물이 아니냐는 추가적인 반론에 대비한 것이다.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송강호는 김수로에게 승리한다면, 바로 패배를 인정하는 한에서만 승리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 승리이지, 결코 영웅 승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클라이맥스의 클로즈업을 더 올려 보라: 진정한 카리스마에게 두들겨 맞은 반칙왕의 찢어진 가면 뒤로 드러난 것은, 비록 두들겨 맞았지만, 일상적 반복에 찌들어있던 자신의 죽은 자아에 대한 실존적 공격만은 성공한, 그래서 그 피범벅이 절대로 헛되지 않은 인간적 훈장이 되는 ‘휴먼’의 얼굴이다.

    요컨대 에스퍼맨이 실패한 카리스마 스토리였다면, 반칙왕은 실패할 건덕지가 없는 휴먼 스토리였던 것이다. 영웅과 인간이 구분되는 것처럼, 영웅승리와 인간승리는 분명히 구분된다.

    카리스마, 신과 세계 사이에 난 ‘구멍’

    카리스마는 휴먼이 범접할 수 없는 어떤 영역 속에 거주하면서, 휴먼이라면 하지 못할 것들을 하는 사람들이다. 카리스마 철학자 막스 베버는, 이런 의미에서, 카리스마를 세계에 뚫린 ‘구멍’에 비유하기도 한다.

    일종의 블랙홀. 단, 탁월한 신과 범상한 세계를 연결하는 심연인 한에서의 검은 구멍. ‘초월적’이라는 오래된 철학 용어를 빌려야 할까. 그것은 인간적 감성과 인간적 지성의 경계를 넘어서는 있는 어떤 능력들이다. 예컨대 <람보2>에서 람보가 마지막 전투에 나가기 전 매는, 그녀의 죽은 여성동지가 남겨준 목걸이는, 이러한 인간적 힘(사랑)에서 초월적 힘(람보)으로의 이행을 우기는 것 같아 실소를 자아내게 한다.

    범상한 것들이 모여서 초월적인 것이 될 수 없다는 것, 그것은 어느 정도까지 하면 초월성을 성취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어느 정도까지 해서 그게 된다면, 그것은 더 이상 초월성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신이 모든 곳에 있을 수 없어서 만든 것은 어머니가 아니라 카리스마이다(아니면 어머니도 카리스마이거나).

    물론 신과 세계 사이에 난 구멍의 특권이, 모든 연결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카리스마도 인간처럼 행동하고 인간처럼 느끼며, 심지어는 인간적 결함도 가지고 있다. 인크레더블 아버지는 정부에서 해고당했고, 슈퍼맨은 질투하며, 이퀼리브리엄의 클레릭은 애정결핍에 고통받는다.

    카리스마에 부족한 것은 ‘인간적 능력’

    하지만, 이 순간에서도 잊지 말아야 할 구분: 분명히 인간적 보충물과 인간적 기원은 다른 것이다. 인크레더블이 해고당했다고 해서, 그의 천하장사 같은 힘조차 해고당할 수 없으며, 슈퍼맨이 질투한다고 해서 그의 비행술이 오이디푸스적 퇴행에 봉착하지는 않으며, 클레릭의 감성결핍은 그의 액션마저 결핍시키진 않는 것이다.

       
     
     

    그들은 여전히 그들의 능력을 인간적 기원에서 벗어난 어떤 초월적 영역에 남겨놓고 있으며, 그들이 모자란 것은 초월적 능력이 아니라 다만 인간적 능력이라는 것(만약 우리가 인간적 보충물이 필요하다고 해서, 초월성의 기원에 인간적 기원을 섞는다면, 정말이지 ‘찐따’같은 카리스마가 나오게 될 것이다). 요컨대 카리스마는 초월자이며, 초월성은, 인간적 보충으로 희석되지 않는 초인간적(때로는 비인간적이기도 한) 기원으로만 정초된다.

    고맙게도 영화 <인크레더블>에서 카리스마를 만드는 두 가지 전통적 방법을 잘 요약해주고 있다: 즉 카리스마는 선천적 초능력자(supernatural) 이거나, 후천적 기술자(technology)인 것이다.

    하지만 <인크레더블>의 제작자들이 마구 비웃었던 바로 그 ‘테크놀로지’가, <배트맨>에서 초월성을 구성하는 가장 당당한 요소로서 쓰이고 있음에, 어느 편을 들어야만 할 것 같은 소모적 의무감을 느낄 필요는 없다.

    <인크레더블>이 테크놀로지를 비웃으면서까지 초능력에 다른 옷을 입히는 것으로 보여주고자 한 그 ‘카리스마의 조건’은, <배트맨>은 테크놀로지 자체를 옷 벗기는 것으로 보여주고자 한 바이기 때문이다.

    2. 카리스마와 테크놀로지

    분명히 <배트맨>의 배트맨은 카리스마이다. 첫 장면은 도둑들이, 마치 신화를 이야기하듯 배트맨에 대해 떠드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러다가 그 실체가 나타났을 때, 그들은 귀신을 본 것처럼 기겁한다. 총을 맞아도 안 죽는다. 싸움은 잘하는 정도가 아니다. 등장과 퇴장은 언제나 음산하고 기묘하다.

    주윤발의 ‘총알’과 배트 케이브의 심연

    하지만, 우리는 정신분석학의 실수를 범하면 안 된다. 여기서 현존과 부재보다 중요한 것은, 현존과 부재를 가능하게 하는 물질적 조건인 것이다: 즉 총을 맞아도 안 죽게 하는 강화고무 갑옷, 싸움을 잘하게 하는 여러 무기들, 등장을 돕는 전천후 와이어와 퇴장을 돕는 포그볼로, 브루스 웨인은 둘러싸여 있는 것이다.

    물론 정신분석학이 ‘부재’라는 비존재의 술어로 책임을 전가하는 심정을 이해할 순 있다: 주윤발의 총알이 끝이 ‘없는’ 것처럼, 배트케이브의 심연은 끝이 ‘없으며’, 각종 총기류는 영점 조준기도 ‘없고’, 와이어 길이는 한계가 ‘없으며’, 배트모빌엔 백미러가 ‘없다’…

    이 ‘없다’들이 아니라면, 도대체 이들의 신비함은 어떻게 묘사할 것인가? 그의 테크놀러지는, 듣도 보도 못한 것, 최소한 ‘지금 여기 없는 것’으로서 가장 쉽게 묘사되는 것이다. 좀 더 긍정형으로 말해보자: 배트맨의 ‘탈 것’은 -물론 시리즈가 진행되면서 예의상 진화하기도 했지만- 진화를 모를 정도로 이미 숭고함에 가깝다.

    배트모빌의 첫 등장을 잡는 쇼트는 광각으로 왜곡되어 있으며(칸트라면, 곡률의 심한 변화가 시지각장의 허초점을 만들었다고 투덜댈 것이다), 배트윙의 최고조는 그것이 보름달 위에 겹쳐지는 배트맨 마크로 미장센 되어 있다(루카치라면, 상징이 표현할 총체적 이념이 별로 인간적이지 않다고 투덜댈 것이다).

       

    정말이지 칸트를 빌려야 할 수도 있다: 배트맨을 보고 울부짖는 도둑들의 그 눈동자는, 숭고한 대상 앞에서의 공포 같은 것이다. 숭고가 무한을 전제한다면, 여기서 무한이란, 수적인 무한이 아니라, 역학적인 무한, 즉 인식불가능함, 호명불가능함, 무엇보다도 흉내불가능함일 것이다.

    그래도… 그래도!! 배트맨도 인간인데, 그러한 초월적 영역의 끄트머리엔 인간적 교각이 있지 않을까… 유일하게 그 교각을 건너는 캐릭터는 비키 베일인데, 그녀가 배트모빌을 타고 배트 케이브로 들어가는 장면에서 그 교각의 모든 것이 명확해진다.

    안 그래도 러닝타임에 쫓기는 상황에서, 신기하게 쇼트를 많이 할당한 그 시퀀스는, 배트모빌이 비키 베일을 태우고 무작정 낙엽길을 달리는 시퀀스이다. 앙상한 나뭇가지들, 뒷 배경이 보이지 않는 희끄무레한 여명, 그 뿐이다.

    배트케이브의 문은 없는 듯 거기 있다(실제 영화에서도, 비키 베일이 벽인 줄 깜짝 놀랬다가, 다 통과한 뒤에서야 문인 줄 아는 것으로 처리되어 있다). 섹시하지만 공포스럽기도 하고, 보이기도 하지만 안보이기도 하고…..초월적 구멍이란 딱 그런 것이다.

    3. 테크놀로지의 자궁

    베버가 아니라도 누구라도 부딪혀야 하는 문제가 여기 있다: 그럼 그러한 구멍은 어떻게 열리는가? 쉽게 말해: 왜 나한테는 안 열리지?(가끔씩 자기한테 열렸다고 착각하는, 선험적 오류를 경험적 오류로 바꿔치기 해놓는 미치광이들은 TV에서 쉽게 볼 수 있다)

    <노동과 독점자본>에서 정열적인 저자 브레이버맨이, 기술결정론에 반대할 때, 그는 브루스 웨인이 돈이 많아서 배트맨이 되었다는 논리에 대해 반대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손은 노동의 산물”이라는 오래된 맑스의 명언을 염두에 두며, 그는 물리학으로부터 공장기술이 나왔다고 말할 수 없으며, 오히려 공장기술로부터 물리학이 나왔고, 공장기술은 ‘사회적 관계’에서 나왔다고 말한다(예컨대 자본가는 물리학자를 고용하지 그 역이 아니다).

    브루스 웨인이 돈이 있어 배트맨이 된 건 아니다

    그러나 그가 우리에게 던져주는 가장 재미있는 통찰은, 매뉴팩쳐와 기계제의 구분, 더 나아가 테일러리즘과 과학기술의 구분을 통해 도달하는 이념과 구체성의 구분에 있다: 즉 관리가 노동력 통제의 이념이라면, 테크놀로지는 그 이념의 구체적 실현수단 혹은 실현방식이라는 구분. 결론은, 사회적 관계는 이념 실현의 조건이자, 테크놀로지 도입의 조건인 것이다.

    영화 <배트맨>이 아니라고 우길 순 있어도, 브루스 웨인이 이 구분을 쫓지 않는다고 우길 순 없을 것 같다: 브루스 웨인의 이념은 -딱 그 배트맨 마크가 상징하는 바와 같이- 악처럼 검은 정의이다. 브루스 웨인의 테크놀로지는, 그의 자본이 외화된, 그리고 그가 사용가치를 얻는 그의 표창과 와이어, 배트모빌 등등이다.

    그렇다면, 검은 정의를 실현하는 조건으로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러한 테크놀로지를 구체화하는 조건으로서의, 사회적 관계는 무엇인가?

    그것은 분명하다 못해 진부한, 선-악의 대립, 배트맨-조커의 대립, ‘고담 시’ 자체이다. 우린 브루스 웨인이 자기 자신을 부르주아화(그는 생산수단을 소유한다)하는 동시에 프롤레타리아트화(생산수단을 이용해 범죄소탕이라는 잉여가치를 반납하는)하는 정치경제학적 이중인격자라고 말장난을 하기 전에, 단지 그가 기술 혹은 돈이 있어서 배트맨이 되기로 한 것은 아니라고 제대로 말해야 한다.

    물리학자가 자본가를 기다리듯, 물리학이 정치경제학을 기다리듯, 배트맨의 테크놀로지는 꼬마 브루스 웨인의 온갖 고난과 성장, 그리고 실존적 결단이라는 사회적 관계를 기다려야만 하는 것이다. 카리스마를 모시는 하나의 궁전이 마련되어야 한다고나 할까?

    브레이버맨의 집요한 예들을 다 검토하지 않아도, 실제로 냉전이 히어로의 자궁이었음을 반추해볼 때, 우리는 브루스 웨인이 단지 돈이 많아서 기술을 샀고, 그래서 배트맨이 되었다는 원인-결과를 뒤집는 헛소리는 피할 수 있는 것이다.

    4. 테크놀로지를 벗거나 입거나

    브루스 웨인의 회상 씬이야말로, 그 사회적 관계를 엿볼 수 있는 좋은 시퀀스인 것은 이 때문이다. 거기서 우린 발가벗겨진 사회적 관계‘항’을 목격할 수 있는데, 그것은 상처 받은 브루스이며, 아직도 상처 받는, 그리고 언제든지 상처받을 수 있는 브루스이다.

    정신분석학자들이 좋아할 만한, 복수의 드라마가 바로 여기서부터 나오는 것이지 결코 그 역이 아니다: 젊은 잭(이후에 화학약품에 절여져서 조커로 부활하는)을 숭고한 공포로 응시한 그 어린 브루스가, 그대로 돌려주겠다고 결심한 이후에 겪었을 성장통과, 그 성장통 이후에 그의 색깔만 달라진 행보(정말로 뒤에 그는 조커에게 이렇게 말한다: “난 너를 만들었고 넌 나를 만들었다”), 그것이 바로 그가 테크놀로지를 자신의 궁전에 도입한 사회적 조건이자 관계인 것이다(‘고담시’로 배트맨의 사회적 관계를 요약할 수 있는 이유).

    사회적 관계는 테크놀로지에 선행한다

       
     

    정말로 브레이버맨: 발가벗겨진 인간(어린 브루스) vs 절대 악은, 테크놀로지의 도입을 요청하고 또 그로 인해, 테크놀로지로 입혀진 인간(성인 브루스) vs 표백된 악으로 변화되어 갔고, 이 변화의 근원에는 인간과 기계의 연결방식의 근본적인 변화가 놓여 있다(예컨대 브루스가 자본가로서 타고 다니는 ‘쌔삥한’ 자동차는, 아무리 쌔삥해도 배트모빌이라는 인간-기계 연결을 따라잡을 수 없다).

    요는, 사회적 관계가 테크놀로지에 선행한다는 것, 그것은 우리(휴먼)가 옷(테크놀로지)을 벗거나 입으려면 탈의실(사회적 관계)이 선행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배트맨 1편은, 이러한 휴먼과 카리스마의 연결, 또 이에 상응하는 인간과 기계의 연결을 간과하지 않기에, 이러한 발가벗겨진 브루스와 옷 입은 브루스의 공존에 대해서도 다른 배트맨 시리즈보다도 더 호의적이다(여기서 우린 최근 나온 <Batman begins>라는 독보적인 작품을 제외하고 있다).

    배트맨 1편의 배트맨은, 확실이 ‘휴먼’의 육체에 테크놀로지가 ‘덧붙여진’ 혹은 ‘입혀진’ 경우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벗겨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부숴진 배트윙에서 피를 흘리면서 기어나오는 배트맨의 초췌한 모습, 그리고 나서 고담 성당의 꼭대기로 향할 때, 추락의 충격으로 술이 덜 깬 사람처럼 비틀거리는 모습, 정작 올라가고 나서도 조커의 부하들에게 얻어맞고 이리저리 뒹구는 모습…공교로운 감가상각에 폐가망신한 자본가이든, 혹은 자발적인 탈숙련화에 울면서 겨자 먹는 노동자이든, 그는 어쨌든 그 순간에서만큼은, 자본이 아니라 자본‘가’ 또는 반대로, 노동이 아니라 노동‘자’로 불릴 수 있을 만큼은, 충분히 ‘휴먼’인 것이다.

    휴먼의 육체에 테크놀로지를 입힌 배트맨

    이러한 ‘공존’이 가장 압축적인 장면은 바로 배트맨이 비키 베일을 구출하는 한 장면인데, 그는 비키 베일과 함께 그의 갈고리 총을 사용해서 다리 위로 솟아오르더니, 비키 베일에게 그 갈고리 총을 건네주고 자신은 맨 몸으로 떨어진다.

    문제는 그 룩! 룩룩룩. 갈고리 총을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에게 기꺼이 양도한, 그러므로 자신에게는 더 이상 중력을 거스를 능력이 박탈된 배트맨은, 정말이지, 인간적으로, 인간보다 더 인간적으로, 쓰레기통으로 떨어지더니 대굴대굴 뒹군다.

    열혈 팬의 분노는 정당할 수도 있다: 배트맨은 카리스마이며, 카리스마의 본질은 영롱한 초월성, 그러니깐, 일반적 능력을 뛰어넘는 영롱하고 영험한 초월성이거늘, 그것은 하늘과 땅 사이의 탯줄, 혹은 대중에 난 하늘로의 구멍인데…

    그 영험함이 착지하시는 곳이 고작해야, 뒷골목 음식물 쓰레기 더미라니! 하지만, 바로 그 이유로 그 열혈 팬의 분노는 부당할 수도 있다: 거기서 우리가 그의 인간적 보충물을 사랑이라고 우기지는 않을지언정, 그것이 바로 인간적 결핍이라고 솔직하게 고백할 수 있다면! 테크놀로지를 입는 것은 고작해야 휴먼이라는 것을 고백할 수 있다면!

    배트맨이 우리를 실망시키는 진짜 이유

    하지만 우리의 도식 때문에 실망스러운 건 장난이다. 진짜 실망은 오히려 우리의 도식을 따르지 않을 때 나오는데, 그것이 바로 팀 버튼의 손을 떠난 이후의 배트맨 3, 4편이다.

    조엘 슈마허의 -코믹스 이미지로 완전 투항한- 주술적인 이미지들로 포장해놓은 배트맨은, 바로 이러한 공존의 역설감을, 그리고 그로 인해 우리가 유추하고 반추하는 사회적 관계의 이미지를 덩달아 포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배트맨 3편(<Batman Forever>)에서, 배트맨은 100m 이상의 높이에서 아무런 와이어도 달지 않은 채 뛰어내려 배트모빌에 탑승한다. 더 이상 그는 절대로 쓰레기 더미에 뒹굴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옷 입음과 옷 벗음의 공존을 지탱해주는 어떠한 끈도 필요 없을 정도로 그는 벗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바로 이 때문인지, 배트맨 3편의 브루스는, -체이스 메리디언 박사의 사무실을 박차고 들어갈 때- 자기 키보다 큰 문을 맨 몸으로 부순다. 배트맨 4편(<Batman & Robin>)은 극단적인 사례를 과시한다: 미스터 프리즈의 로켓으로부터 공중 탈출할 때, 배트맨은 그의 사회학적 공존을 앗아간(혹은 대체한) 로빈과의 공존을 뽐내듯, 로켓의 파편을 타고 에어서핑을 하면서 하늘에서 땅으로 임하시고 계시다.

    여기서 자궁의 탯줄과도 같았던 와이어는, 필요 없는 정도가 아니라 필요 금지의 대상이다. 배트맨의 이후 시리즈들은, 옷 입은 브루스와 옷 벗은 브루스의 공존을, 단지 배트맨과 로빈 등의 공존으로 대체하면서, 무화시키고 생략해버렸다(바로 이 때문에, 그들은 우리가 이전에 언급했던 우뢰매의 실패한 카리스마를, 브루스 안에서가 아니라 바깥에서 정확히 재현해내고 있다. 그것은 실패 반복의 충분조건은 아닐지언정 필요조건인 것이다).

    영화 자체를 프롤레타리아트화 하다

    초능력자로서의 배트맨? 이미 공존하기에 더 이상 공존할 게 없는 브루스, 이미 옷 입고 있기에 더 이상 입거나 벗을 수 없는 브루스. 하지만 바로 그 때문에 그것은 이미 옷이 아니다. 완전히 테크놀로지는 브루스의 몸 안으로 내면화되었기 때문이다.

       
     

    단지 배트맨이 초능력자가 되었기 때문에, 브루스 웨인이 상처받은 자본가라는 애초의 설정을 너무 망각했기 때문에 실망하는 것은 아니다. 로켓의 파편을 타고 에어서핑을 하는 배트맨을 보면서, 나는 아무런 공존도, 그리고 그 공존이 필연적으로 증거하는 사회적 관계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에 실망한다

    (고담 성당의 꼭대기로의 배트맨과 조커의 복귀, 천상으로의 천사와 악마의 동시적 복귀는, 바로 이러한 공존을 전조로 하는 내러티브의 필연적 귀결점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러한 공존을 잃은 이후 시리즈는 그러한 귀결로 나가는 필연적 고리들을 ‘바깥’에서 찾아야 한다.

    예컨대 배트맨 4편에서 배트맨과 로빈의 공존을 뒤흔드는 질투는 포이즌 아이비라는 외부 캐릭터에 의해서 추동되며, 브루스와 알프레드의 공존을 뒤흔드는 죽음은 미스터 프리즈라는 외부 캐릭터에 의해 해결된다. 젠장: 이것은 훌륭한 시나리오일 수는 있어도, 훌륭한 히어로물은 아닌 것이다. 아니면 카리스마의 훌륭한 종합일 수는 있어도 카리스마의 훌륭한 분석은 아니거나)

    이렇게 요약할 수도 있겠다: 반칙왕이 실패할 건덕지가 없는 휴먼인 것처럼, 배트맨 3, 4편의 배트맨은 옷 입을 건덕지가 없는 영웅이다. 문제는 전자는 매우 재미있는 데 반해 후자는 그만큼 재미있지는 않다는 것이다. 그들은 내면적 공존을 포기하는 대가로, 고작해야 외면적 공존을 가져가면서, 브루스 웨인이 아니라 영화 자체를 프롤레타리아트화했다.

    5. 더 잘 벗기기 혹은 패션

    하지만 입혔다 벗겼다 하는 것이 만사 ‘땡’이 아닐 수도 있다. 카리스마의 탄생은 정말 사회적인 것이지 결코 개인적인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입혔다 벗겼다 할 때, ‘히어로 개인’이라는 당혹스러운 형용모순에 너무 쉽게 안주하는 것은 아닐까?

    ‘개인’이라는 자유주의의 마지막 우회로를 걷어내고, 사회 자체로 바로 갈 순 없을까? 그것은 단지 입고 벗는 것을 반복하는 게 아니라, 입을 때도 벗을 때도 이곳이 하나의 어떤 ‘탈의 공간’이라는 것을 잊지 않고 지시하는, 즉 그 공간과 신체의 디테일들을 묘사하고 추상하는 재치와 유머를 요구한다.

    루이스 멈포드는 예술과 기술, 상징과 도구를 비교하는 짧고 간결한 강의록에서, 테크놀로지에 대해, 사실성matter-of-factness에 대한 겸허한 존중이라는, 알 듯 모를 듯한, 그러나 분명히 정당한 정의를 내렸다.

    단, 테크놀로지가 인간에게 요구하는 겸허함이, 인간이 자기 자신조차 객관화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의 객관화하는 겸허함인 한에서 그러하다. 그 객관성의 장에는, 인칭person도 탈인칭deperson도 없고, 단지 비인칭imperson만이 술어의 자격이 있다.

    바로 여기가 완전히 벗지도 완전히 입지도 않은, 거꾸로, 벗고 동시에 입은 구멍들이 있는 곳이 아닐까. 여기가, 그것을 묘사하기 위해 단지 벗었는지 입었는지를 선언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한, 고로 어떻게 입고 벗었는지를 묘사해야만 하는 ‘사회’가 아닐까.

    왜냐하면, 입거나 벗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 입는 동시에 벗겨져 있는 것만이 바로 그 ‘사실성’이기 때문이다(예컨대 어떤 인간이 기술과 예술 없이 살아본 적이 있는가). 관계항으로부터, 인간에게 테크놀로지를 입혔다 벗겼다 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을 것이다.

    관계 자체로부터, 인간-기계에 벗고 입는 고유한 패션(이게 바로 depersonal과 구분되는 impersonal일 것)을 부여하고, 그 패션만으로 사회적 관계를 묘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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