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야학서 배운 노동운동 비정규직 철폐 실천으로
        2006년 08월 24일 12:31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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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아자동차 화성공장을 뒤흔들고 있는 비정규직 투쟁을 처음부터 지금까지 이끌고 있는 금속노조 기아차비정규직지회 김영성(38·사진) 지회장을 22일 화성공장에서 만났다.

       
     

    그의 집은 안산 반월이다. 현재 아내와 초등학교 2학년 아들이 살고 있다. 2005년 1월 19일 이곳에 천막을 치고 비정규직 투쟁을 전면적으로 벌이면서 회사로부터 고소고발됐고, 경찰에 수배가 됐다. 그 날부터 천막이 그의 ‘집’이 됐고, 벌써 600일이 지났다. 이 곳에서 겨울과 봄과 여름을 두 번씩 보냈고 가을을 준비하고 있다.

    "경찰서에 고소고발된 사건이 너무 많아서 얼마인지도 몰라요. 지회장이기 때문에 빠지지 않으니까 많겠죠?" 그는 올 7월 파업으로 또 고소됐다. 그와 함께 싸우고 있는 신성원 부지회장을 비롯해 상집간부 4명이 이미 ‘빵’에서 4개월 가량 살았으니, 적지 않은 감옥생활이 그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세 식구가 비정규직 철폐운동을 같이 하고 있어요."

    처서를 하루 앞둔 22일 그의 ‘집’은 사우나를 방불케 했다. 선풍기 바람도 별 소용이 없었다. 그런데 그는 익숙한 듯했다. 사실 천막은 감옥과 같다. 보고싶은 아내와 아들을 볼 수 없는 곳이다.

    올 초에는 어머니가 머리에 종양이 생겨 수술을 받았는데도 가보지 못했다. 그는 "명절에 부모님 한 번도 찾아뵙지 못해서 힘들지만 무엇보다 집사람하고 애기하고 세 식구 사는데 같이 못 있는 게 제일 힘들다."고 말했다.

    그래서 그는 하루에 한 두 번 이상씩 꼭 통화를 하고 한 달에 한두번은 아내가 아들을 데리고 천막으로 찾아와 ‘면회’를 한다. 그의 아내는 야학에서 만나 누구보다도 그를 잘 이해하고 있다. "집안에서 반대하는 게 제일 힘들잖아요. 진짜 큰 힘이 됩니다. 집사람이랑 아들이랑 비정규직 철폐운동을 같이 해 나가고 있다고 생각해요."

    월급 고스란히 저축하는 부자(?} 지회장

    천막생활에 불편한 게 한두가지가 아니겠지만 그는 손사래를 친다. "천막에서 오래 자다 보니까 피부병 같은 게 생겨서 좀 불편한 거 말고는 별로 없어요. 아, 공장밥이 질려서 휴일엔 라면을 끓여먹어요."

    그는 부자{?}다. 지난해 단협을 체결해서 상여금 포함해 월 평균 140만원 정도 받는데 ‘천막감옥살이’를 하니까 돈 쓸 일이 없어 고스란히 저축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올해 교섭 끝나고 출두하면 진짜(?) 빵에 갈 테니까 또 돈 쓸 일이 없다. 그가 빙그레 웃는다.

    지도부에 대한 조합원들의 깊은 신뢰

    22일 화성공장에서 만난 조합원들은 한결같이 그에 대해 깊은 신뢰감을 보여줬다. 우성의 이종훈 대의원은 "지도부가 지도력을 갖춰 어떤 어려움에도 굴하지 않고 자신감 있는 모습을 보여줘야 현장도 그런 모습에 감화되어 따르게 된다"며 "지도부를 굉장히 존경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번 임금투쟁을 마무리하고 자진출두할 생각이다. 지회장에 대해 신뢰가 큰데 ‘빵’에 가면 지회 활동에 문제가 생기지 않겠냐는 질문에 그는 단호하게 아니라고 말한다. "지난해 단체협약을 체결하고, 올해 대의원과 소위원들을 선출해 이들이 현장에서 투쟁지도부로 나서면서 활동가층이 두터워졌어요. 조합원도 많이 늘었고…. 걱정 없어요."

    야학으로 노동운동에 눈 떠

    용산공고를 나온 그는 제대하고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하다 서울 금호동의 한 야학을 찾았고, 그 곳에서 지금의 아내를 만났다. 노동법과 역사 같은 걸 공부하는 생활야학을 통해 노동조합에 관심을 갖게 됐고 서울 성수동에 금형공장에서 처음으로 일을 하기 시작했다.

    94년 쌍용기계라는 좀 큰 회사에 들어가 노동조합을 만들어 싸우다 해고됐고, 안산 반월공단으로 옮겨 밀링기계 만드는 회사에서 노조 교섭위원을 하기도 했다. 96년 결혼하고 좀 큰 공장으로 옮겨야겠다는 생각에 300여명 정도 되는 자동차 휠 만드는 회사에 들어가 모임을 만들고 준비를 하다 아이엠에프를 맞았다. 회사가 법정관리에 들어가면서 노동조합 준비는 사실상 어려워졌고 회사를 그만두게 됐다.

    아내의 출산과 직장생활로 육아를 맡게 되면서 그는 새벽에 우유배달하고 낮에 아이를 보는 생활을 2001년까지 계속했다. 그 해 이건창호라는 한국노총 사업장에 들어가 민주노조를 만들기 위한 활동을 했으나 선거에서 패배해 강제 인사발령을 당했고, 해고생활을 하다 2002년 11월 화성공장 신성물류에 입사해 지금까지 비정규직 투쟁을 해왔다.

    비정규직 투쟁이 역동적이고 격렬한 이유

    "대공장과 사내하청의 관계가 봤을 때 비정규직 투쟁은 전투적일 수밖에 없어요. 1990년 영화 <파업전야>가 우리 비정규직의 정서에 딱 맞는다니까요. 비정규직의 울분을 터뜨리는 것이고 따라서 폭발적이고 역동적이죠."

    "특히 기아차 같은 경우 비정규직이 조직력과 전투력이 있기 때문에 회사가 제일 두려워하는 건 비정규직지회라고 생각해요. 우린 회사와 선을 두고 소통하는 사람이 없어요. 문제가 생기면 우린 투쟁하거든요. 87년도에 지금의 정규직 노동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예요."

    우려되는 정규직 노동조합

    비정규직 투쟁이 격렬하게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설명하면서 그는 정규직노조에 대한 문제를 신랄하게 지적했다. "원하청연대회의 할 때 솔직히 사측과 교섭을 하는 것 같아요. 파업투쟁을 하는데 어떻게 하면 잘 할거냐를 얘기해야 하는데 어떻게 하면 우리의 파업 수위를 낮추려고 해요. 우리가 투쟁할 때 한번도 동의된 적이 없구요. 제일 힘든 자리가 원하청 연대회의 자리였어요."

    그의 비판은 계속됐다. "비정규직 지회를 통제할 수 있어야 원청 사측과 교섭력이 생긴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는 느낌이에요. 심지어 어떤 간부는 화성공장 비정규직을 비정규직이 아니고 업체의 정규직이라고 했어요. 회사와 똑같은 논리죠."

    그는 파업하면 조합원들 집으로 돌려보내고, 갈수록 보수화되면서 조합원들이 노동자로서의 의식을 잃어가고 있다고 우려했다. "약자로 도움을 요청하는 비정규직 투쟁이 아니라 정규직과 비정규직 노동자는 하나라는 생각으로 자본을 향해 힘있게 투쟁해야 하는데 가진 기득권, 가진 밥그릇을 지켜내기 위한 일부 지도부의 개량적이고 협조적인 게 분명히 존재합니다. 이를 극복하는 게 산별노조의 시급한 과제예요."

    1987년 노동자 대투쟁에 버금가는 비정규직 대투쟁을 위해

    그는 사내하청노조 대표자회의 의장을 맡고 있다. 23일 현대자동차 전주, 아산, 울산공장 비정규직 간부들과 기아차 화성 비정규직 간부들이 울산으로 집결해 결의대회를 진행했다. 오는 25일에는 4개 사업장에서 4시간 공동파업을 할 예정이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더욱 굳게 뭉쳐서 싸우고, 정규직 노동자들은 ‘노동자는 하나다’라는 생각으로 연대한다면 지금의 비정규직 철폐투쟁은 활화산처럼 타오를 것이다. 1987년 노동자 대투쟁에 버금가는 비정규직 대투쟁이 일어나야 한국 사회는 바뀔 수 있다. 기아차비정규직지회를 이끌고 있는 그는 지금 선봉에 서서 비정규직 투쟁의 횃불을 밝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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